몽유도원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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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 몽유도원도와 대자암 ==

*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킨 친형 [[수양대군]]의 권력에 의해, 안평대군 용(瑢)은 정쟁의 패배자가 되어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어 며칠 후인 10월 18일 유배지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宜春君)은 [[진도]](珍島)로 유배된 후 사사되었고, 의춘군의 아내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이조판서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지금은 개인 사유지로 변한 무계정사지 자리에 무계동(武溪洞)글씨의 각자(刻字)바위가 남아 있는데 안평대군의 서체가 확실해 보인다. 계유정난은 세조가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단종]]을 보좌한 [[황보인]]. [[김종서 (1383년)|김종서]] 등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세력을 살해할 때, 실록에는 그 명분을 이용(李瑢)이 붕당을 조성하여 모반(謀反)의 음모를 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조시대 모반은 십악(十惡)의 죄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인인데 그 집에다 후대인이 각자(刻字)를 새길리 만무하고 이 터는 당시 이현로가 방룡소흥(旁龍所興)의 땅이라 하였으며, 왕실과 관련된 태실(胎室)·궁지(宮址)·능묘(陵墓)·행궁터(行宮址)등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땅이나, 왕실과 관련된 집은 일반 백성들 시이에서 몹시 꺼려하여 아무도 소유하지 않았다.

안평대군의 별서였던 무계정사도 즉시 철거되면서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많은 장서를 경기도 고양현의 대자암(大慈庵)으로 황급히 옮기게 되는데, 계유정난 당일 용(瑢)은 양이버지인 [[성녕대군]](誠寧大君)집에 숨어있다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선경(愼先庚)이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성녕대군 집<ref>대자암을 일컫는다. 13세에 요절하여 35년이 지났다</ref>에서 용(瑢)을 붙잡아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강화]](江華)로 압송(押送)하기 직전 그의 종 영기(永奇)를 변장시켜, 김종서에게 비밀히 찾아가 내가 잡혀가는 사실을 알리라 이르는데, 이미 [[황보인]] [[김종서 (1383년)|김종서]]등 용과의 친분이 두터운 대신들을 간당이라 하여 죽인 사실을 용은 모르고 있었고, 이용이 사사된 후 종(從) 영기등 가솔들이 무계정사등에 있던 대부분의 유품을 대자암으로 옮기게 되었다.

[[파일:대자사(大慈祠).png|섬네일|대자암(大慈菴)은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져 그 자리는 알 수 없고, 다만 성녕대군 묘역 아래 대자사(大慈祠)란 사당이 세워져있다.]]

* 대자암
대자암은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 이종이 13세에 요절하여 아버지 [[태종]]에 의해 무덤옆에 1418년 4월 4일 지은 재암(齋菴)인데, 이 암자를 대자암(大慈菴)이라 이름하고, 노비 20구(口)와 전지 50결(結)을 붙이고,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게 하였다.

{{인용문|대자암 규모
"선종(禪宗)에 예속된 것으로는 절이 18개소, 전지(田地)가 4천 2백 50결입니다.
서울 흥천사는 원속전(元屬田)은 1백 60결인데, 이번에 90결을 더 주고, 항거승(恒居僧)은 1백 20명입니다.
진관사(津寬寺)는 원속전이 60결인데, 이번에 90결과 수륙위전 1백결을 더 주고, 거승은 70명이며,
고양(高陽) 대자암(大慈菴)은 원속전이 1백 52결 96복(卜)인데, 이번에 97결 4복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입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0604005_002</ref>}}

그 후 세종의 명으로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양자로 정하였고, [[문종]]즉위년(1450)에 좌참찬 [[정분]](鄭苯). 병조판서 [[민신]]등이 32년 전에 지은 것을 고쳐지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기신재(忌晨齋)를 의례대로 대자암(大慈菴)에서 행하라." 하였으며, 종실에 반부(攀附)하여 무릇 큰 불사(佛事)는 모두 여기에서 행하니, 시사(施捨)하는 곡식과 비단을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대자암은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현재 고양시 덕양구 성령길 22-38, 대자동)에 대자사(大慈祠)라는사당이 성녕대군 묘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절터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흔적없이 사라졌다.

['''향토문화유적 -제2호-''' 성령대군의 이름은 종(褈) 이니 조선국 제3대 태종왕의 네째 아드님으로 영령. 효령. 충령(세종대왕) 대군의 친동생이시며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다...(중략)...산리동(酸梨洞)이란 지명을 대자동(大慈洞)이라 명명하시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대자암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성령대군 묘역및 신도비 >일부]

=== 몽유도원도 반출 ===
현재 몽유도원도는 상하 두개의 두루마리로 표구되어, 일본의 덴리대학 부속도서관(天理大学 附属図書館)에 소장되어 있는데, 1592년 4월 13일 왜구가 부산으로 들어와 5월 1일 서울에 입성한 후, 남별궁<ref>현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ref>에 주둔한 총대장 평수가(平秀家)<ref>平秀家,타이라히라오Taira Hirao,たいら ひらお=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 Ukita hideie ,うきた ひでいえ는 동일인이다</ref>가 이 절에 보관하던 안평대군의 유품 중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장서(藏書)와 금불(金佛)까지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했다는 추측이 있다. 그러나 안평대군 사후 몽유도원도가 어디에 소장되었으며, 이후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 각주 ==
== 각주 ==

2024년 3월 15일 (금) 13:58 판

무계정사

꿈속 도원과 비슷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을 찾아내어, 지리와 복서(卜筮)에 뛰어났던 이현로(李賢老)로 하여금 터를 보게하니, 그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용이 일어날 땅(旁龍所興)’ 이라 하여 별당을 지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가 세종 29년(1447) 8월 30일인데, 태조 5년(1396)에 세운 도성의 정문 숭례문(崇禮門)이 비좁고 남루하여, 왕은 좌참찬 정분(鄭笨)에게 명 하여 숭례문을 대대적으로 개축(改築)하게 되는데, 분(笨)은 신작이라 기록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완공하였고, 용(瑢)[1]은 친분이 두터웠던 분(笨)에게 장인(工匠)과 재목및 기와를 요청하니, 분은 선공 부정 이명민을 시켜 숭례문을 완공한 후 남은 자재로 도성 밖 부암동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워주어, 만여권의 책을 갖추고 또 마포 용산강(龍山江)위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여러 선비들과 시화를 즐겼다. 특히 안평대군과 또래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등은 성균관에서 수학한 절친한 사이이기에 같이 어울려 시회(詩會)를 즐겼으며, 특히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3년 후(1450)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서 21명의 문사들과 치지정(致知亭)에서 몽유도원도를 감상 하면서, 제서(題書)와 발문 그리고 시(詩) 한수를 지어 붙이는데, 자리를 같이한 문사들의 찬문을 이어받았다.

무계정사를 지은지 3년이 지난 단종 1년(1453) 9월 5일 수양대군이 한명회를 시켜 선공 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에게 목수를 청하나 이를 거부하게 되니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가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을 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2]을 위하여 별실(別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는데,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와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한명회가 당시 공조판서보다 실권이 막강한 이명민을 떠보는 내용이고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한달 전 일이다.

[동국여지비고 제2편]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각주

  1. 안평대군
  2. 김종서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