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죽도왜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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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죽도왜성'''(金海竹島倭城)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부산광역시)|강서구]] [[가락동 (부산)|죽림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이 쌓은 성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1호로 지정되었으나, 일제지정문화재를 재평가해 등급을 조정하면서 1997년 1월 1일 사적 지정이 해제되었으며, 1999년 3월 9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 개요 ==
== 개요 ==

2019년 1월 21일 (월) 03:49 판

넘겨줄 대상:

개요

김해죽도왜성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의 과거 죽도(竹島)에 있는 성으로,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부산광역시 강서구 죽림동에 1593년 건립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김해 죽도 왜성이다. 현재 김해죽도왜성의 중심부 대부분은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일부 밭으로 개간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죽림동 일대는 낙동강 하구로 죽도(竹島)를 제외하고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넓은 황무지였다. 죽도는 김해 육지로부터 공격하는 조선군(朝鮮軍)을 막거나 공격하고, 선박을 정박시켜 후퇴에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장인 나베시마가 쌓은 것으로, 해발 35m의 낮은 구릉지 양쪽에 축조되었다. 제일 높은 곳에 소위 일본성의 양식인 본환(本丸)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석재는 부근에서 구하기가 어려워 먼 곳에서 육로 및 뱃길을 이용하여 운반한 것으로 보인다.

죽도왜성은 주변의 구포왜성, 양산왜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김해 북쪽지역에서 내려오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과 바다를 이용해 배로 다른 왜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현지 안내문

이 성은 강서구 가락동 가락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락성', 또는 '죽도성'이라고 한다. 죽도에는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1]

가락산은 동서로 길게 뻗은 독립된 야산이다. 그 동단은 낙동강의 서쪽지류에 닿아 있어 선박을 정박시킬 수 있으며, 죽도는 김해부의 안산이었다. 서북면은 논으로 둘러 쌓여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나베지마가 쌓은 전형적인 일본식 성이다.[1]

이 성은 구포에 있었던 의성과 수로로 약 1.3km로 가까웠다. 두 성은 임진왜란시 일본군이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방어의 요충이었다. 이울러 김해지방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본거리였으며, 이곳을 본성으로 하여 주촌면 농소리의 신답왜성과 생림면 마사리의 마사왜성이 지정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지형으로 보아서 김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요충일뿐만 아니라, 낙동강 지류를 이용하여 배로 구포나 물금의 왜성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곳이다.[1]

성은 해발 35m의 구릉지에 축조되어 있다. 높은 곳에 일본식 성의 중심인 본환을 두고, 차례로 이환, 삼환을 구축하였다. 돌은 부근에서 구할 수 없어 원거리에서 해로를 이용하여 운반하였던 것 같다. 지금 길이 약 100m 정도의 성벽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1]

각주

  1. 현지 안내문 인용

같이 보기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