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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베 소에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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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베 소에이코(미조베 소에이코, 케이오 3년 12월 4일(음력)(1867년 12월 4일)-쇼와 7년(1932년) 8월 13일)은, 호놀룰루에 있는 일본 부인원의 창립 단체이다. 이 단체는 학대를 피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 신부들의 피난처였다..

초기 생활

게이오 3년(1867년) 12월 4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가에 태어났다. 메이지 21년 (1888년)에 무네 이소지로와 결혼했지만, 반년 후에 병사했다. 이소지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와이 출신의 올라멜 힌클리 귄릭 부부와 만나 종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래서 재혼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는 고베여자신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그 학교를 메이지 26년(1893년) 4월 졸업했다. [1]

하와이

1894년(메이지 27년) 일본 당국에 귀국 명령을 받고 하와이 사절단에게 일본 선교사를 초청하여 일본인 사회에 봉사할 것을 일본 정부는 제안했다. 1895년(메이지 28년)에 사절단의 초청을 받아 1895년(메이지 28년) 5월 20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섬들을 순업한 뒤 그는 그해 일본 여성의 집을 설립했다. 가정폭력이나 매춘으로부터 도망친 일본 여성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영업 계획으로 삼았다. 그 때 당시, 매춘은 설탕 농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매춘을 강요당했다. 대피소에 사는 여성들이 조리하고, 청소하면서, 그들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대피소에 온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 및 놀이터도 있었다. 대피소에서는 그들의 직업훈련이나 직업을 얻기 위한 수업도 하고 있었다. 대피소를 나온 뒤 그와 그 곳의 직원들은 집에 있는 여성들에게 건강한지 확인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 쉼터는 10년의 운영 기간 동안 700명이 넘는 여성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곳은 학대받은 사진 신부의 지원을 일본의 하와이 영토 이민센터가 이어받으면서 시설은 폐쇄됐다.

1905년 그는 누아 누회중 교회에서 자금을 지원받은 '유기되거나 방치된 어린이를 위한 집'을 세웠다. 그 집은 35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래서 그의 딸 에스터를 이 쉼터에서 입양했다 [1]

그 후, 1931년에 은퇴하고 1932년 8월 13일에 퀸스 병원에서 향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참고 문헌

  1. 《Notable women of Hawaii》. Peterson, Barbara Bennett, 1942-.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4. ISBN 0-8248-0820-7. OCLC 1103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