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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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6년 전 (Jtm71님) - 주제: 본문으로부터 이동

규원사화 관련 ...[편집]

규원사화에는 분명 기자의 동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술은 공정해야 하므로 같이 적었습니다. jtm71 2006년 12월 31일 (일) 14:26 (KST)답변

기자의 동래를 귀원사화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북애자는 그 당시 선비들이 기자가 중국에서 와서 교화했다는 것을 한심하게 보면서 자신은 믿지 않는 것 처럼 태시기에 서술하고 있습니다. 만설에는 그저 기씨라고 기술하여 기씨가 상나라에서 왔는가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북애자는 기자를 조선의 후(侯)로 보고 있는것 같습니다.

만설은 꼼꼼히 읽어 보셨는지요 ... 확인을 위해 원문을 제시해 드립니다.

胥餘避周則慕化歸依 安棲一枝 綿延千年

그리고, 한자원문의 책을 번역한 내용은 그대로 옮길 뿐, 추측은 금물입니다. jtm71 2007년 1월 1일 (화) 23:06 (KST)답변

서여가 기자라고 북애자가 말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규원사화를 전반적으로 볼때 북애자는 기자가 상나라에서 와서 조선의 교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믿는 양반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상황에서 북애자가 만설에 서여가 상나라에서부터 왔다는 말을 한것은 기자와 서여를 동일인물로 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북애자는 서여가 조선에 귀화하여 나라의 한쪽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서여가 단군조선을 이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즉, 서여는 적통이 아니고 그가 세운 나라를 일종의 제후국정도로 보는 것이지요. 제 말이 Original research경향이 있으므로 규원사화의 내용을 그대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북애자는 분명 기자의 동래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태시기에서 말하고 있고 만설에서는 서여가 동래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Breathejustice 2007년 1월 3일 (목) 18:40 (KST)답변

서여가 기자인 것은 조선 중기에는 선비로서의 상식입니다. '회의적인 시각'이야말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북애자는,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것을 믿었다면 단군이 있었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jtm71 2007년 1월 3일 (목) 18:57 (KST)답변

본문의 제목은 "규원사화"에서 본 후조선입니다. 규원사화의 시각대로 써야죠. 북애자는 분명 기자의 교화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서여가 기자인것이 상식일수는 있어도 북애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수있습니다. 북애자는 왜 사대사상에 빠져 중국의 사서는 모두 믿으면서 우리의 도가사서들은 믿지 않느냐고 물은것입니다.

중국의 사서를 믿으면서 우리사서를 믿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는 것이 중국의 사서는 허구임을 주장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는 중국의 사서를 믿는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문장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중국의 사서는 '높이고 깎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록 그 자체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곁들여 적은 한나라, 당나라의 행적은 중국의 입장에서 서술되었을망정 거짓은 아닌 것입니다. 만설에도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백제를 멸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단군기 끝부분에는, '그 후로는 제후들이 서로 무력으로 다투었다'고 했고, 만설의 후반부에는 '단군이 천 수백 년의 융성한 운이 다하면서 이미 여러 나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규원사화의 내용으로는 단군조선의 치세가 1200년이었으므로, 그 이후로 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특정 나라가 단군을 계승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jtm71 2007년 1월 4일 (목) 10:51 (KST)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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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원사화 ===
규원사화에는 1200년 간의 단군조선 이후의 일은 편년의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개인적인 논평이나 심정을 기록한 '만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서여가 주나라를 피하여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의 한쪽 땅을 할애 받아 1천 년 간을 편안히 지냈으며, 열국시대에는 기씨(箕氏)가 동호의 침략을 받아 평양이 몰락되고 귀족과 백성 28만이 사로잡혔다고 한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사학계에서는 실제의 역사로서 참조되지 않는다.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내용으로 판단됩니다. jtm71 2007년 12월 13일 (목) 18:55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