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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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살상의 사례 -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 (과거사위 조사결과보고서 95쪽~100쪽)

광주시 외곽봉쇄 지점에서 발생한 계엄군 총격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중 광주시 동구 지원동 광주-화순 간 15번 국도에서 발생했다. 5. 22.부터 이곳에 주둔한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 병력들은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7공수여단은 5. 22. 13:16경 너릿재 터널 입구에서 화순에서 광주로 오던 1/4톤 트럭에 발포해 1명을 연행하고 1명은 사살했다. 7공수여단의 보고는 6. 10. 09:00~11:00까지 전교사 교육상황실에서 열린 ‘광주사태진상조사단(단장 : 국보위 내무분과 위원장 준장 이광로)’과 전교사 주요 간부들과의 토의시간에도 언급됐다. 이 자리에서 진상조사단은 “주민들이 폭도 확산을 제지코자 화순터널을 차단하고 돌아오는데 계엄군이 사격을 가하고 3명을 납치했다는데 알고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전교사 작전참모 백남이 대령은 전혀 몰랐으며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답했다. 진상조사단은 서울로 올라가 작성한 「광주사태 진상보고」 중 작전통제 미흡 항목에서 “5. 22. 화순터널(너릿재 터널 : 인용자) 입구 봉쇄작전 부대가 차량 등으로 바리케이드 설치중인 민간인 등을 사살”로 보고했다. 우리 위원회에서는 당시 연행자와 사망자의 신원을 파악하려 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5. 23. 오전 광주시 지원동 1번 버스 종점부근에서 공수부대가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과 관련한 보고를 시간대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980. 5. 23. 10:50에 지원동 녹동 커브를 돌아 화순 쪽으로 향하던 데모대원 차량이 갑자기 정지. 12세 남학생 사망하고 부상자 3명 발생. △ 5. 23. 11:30 현재 계엄군은 광주-화순간 도로에서 폭도 버스 1대를 완전 파괴시킨 후 TNT, 총기 및 실탄(수미상)을 회수하고, 폭도 17명을 사살. △ 5. 23. 11:30에 지원동 1번 종점, 기점 화순쪽 계엄군이 시내쪽 학생들 무장 대치하고 있다. △ 11:30에 버스 1대 박살, 17명 사살 △ 5. 23. 12:00 - 7공수, 폭도 탑승 차량 1대 사격정차 조치. 총기 및 상당수 TNT 회수. 폭도 17명 사살. 특전대 외곽선 및 예상 도주로 봉쇄 차단중.

광주시 동구 지원동 동사무소에서 동구청에 올렸던 보고에 따르면, “지원동에서 농부 1명이 피습 부상당”했으며, 5. 23. 11:53에는 지원동 농민 김인성이 논에서 일하다 총탄으로 부상당했고 지원동의 원지교를 중심으로 학생과 계엄군이 치열하게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됐다.

사건발생 시각에 대해 공수부대 출신들은 5. 23. 오전으로 기억했다. 당시 발포했던 11공수여단 62대대 5지역대 ○지대장 도○○ 중위는 사건 발생 시각이 5. 23. 10:30경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당시 지원동에 있던 채석장 사장집에서 아침밥을 먹은 뒤 화약고의 경계를 서던 중 미니버스가 화약고 쪽으로 들어오며 사격하기에 부하들이 대응사격했다고 진술했다. 11여단 62대대 5지역대 김○○ 중사는 지원동 미니버스 발포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녹동마을 주민 한 사람에게 11여단 62대대 부대원들이 발포했으며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부상자를 후송했던 11여단 62대대 4지역대 김○○ 하사도 미니버스 발포사건의 발생시점이 5. 23. 한낮이었다고 했다. 11여단 정보참모 곽○○ 소령도 5. 23. 아침 여단 상황실로 총을 쏘면서 버스가 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진술했다. 당시 지원동 동사무소에서 광주시 동구청에 상황을 보고했던 박○은 5. 23. 11:00~12:00 사이에 지원동 동사무소로부터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미니버스가 지나갔는데, 도로 쪽에 있었던 사람들이 미니버스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지나갔으며 곧이어 정지신호 뒤 발포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씨와 사건 직후 사건현장으로 갔던 자원봉사자 김○○씨는 사건 발생 시각을 오후로 주장했다.

이날 오후에도 지원동의 상황은 계속 보고됐다. 보안사에는 5. 23. 13:50에 광주시 소태동에서 폭도 차량 5대가 지원동에서 방향을 돌려 시내로 진입했다고 보고됐으며, 14:00에는 지원동에서 계엄군과 폭도간의 교전이 있었으며 결과는 미상으로 보고됐다. 이 보고는 505보안부대를 거쳐 보안사령부에 올려진 것이었다. 당시 현장 부근에 있었던 박○의 진술에 따르면, 이날 오후 시민군들이 지원동 미니버스 발포사건을 보복하려고 무장하고 와서 총격전을 벌였다고 했다.

전교사의 「작전상황일지」에는 “5. 23. 15:30 광주 소태 폭도 50명(버스 1대) 군부대 기습 기도. 군부대(11공수) 반격소탕. 생포 3명(부상 2명). 사살 17. 칼빈 11정, 실탄 12발, M1 1정, 무전기 1대, 버스 1대”로 보고됐다. 이 자료는 검찰수사 때까지 지원동 발포사건을 설명하는 유력한 자료였다. 이 자료와 홍금숙씨의 진술 때문에 지원동 발포사건이 두 건으로 파악됐다. 이어 전교사에 작성한 「작전일지」에 따르면 ‘5. 23. 16:30 남초등학교 계엄군 진출소식을 듣고 시위대가 칼빈 등으로 무장한 채 지원동 부근 남국민학교 방향으로 진출했으며 계엄군 총소리로 추정된 M-16 총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고됐다. 계엄군과 시민들과의 대치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5. 24. 16:00경 수습위원들이 대치중인 시위대를 설득 귀가시켰다. 이렇듯 지원동 일대에서 계속 총격전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발생하자 민간인들의 출입을 학생들이 호송하고 지원동 동민들 사이에 군인들이 사격해 불안하다는 여론까지 생겨났다. 지원동 주민들은 계엄군이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미니버스 발포 직후 계엄군들이 현장을 확인하러 미니버스에 올라갔고, 지역대 및 대대 간부들이 현장으로 갔다. 현장 지휘관인 지대장 도○○ 중위는 버스에 올라가서 버스 상태를 확인했으며 곧이어 철수했다고 진술했으나, 지대원 박○○ 중사는 ‘교전했다고 병력을 빼지는 않는다’며 이 사실을 부인했다. 이후 홍금숙 외 2명의 부상자들은 주남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됐다. 당시 현장으로 출동했던 간호봉사원은 사상자들을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이를 거부했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5지역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의 이송을 담당했으나 중간에 주남마을 경계를 서고 있었던 4지역대 병사들로 교체됐다. 주남마을 뒷산에 위치한 11공수여단 상황실에서 부상자들의 상태를 본 11공수여단 작전보좌관 김○○ 소령이 데려온 것을 책망하자 상황실 주변에 있었던 4지역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처리했다고 한다. 당시 부상자들을 처리했던 병사는 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 ○지대 정○○ 중사 등 3명이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리어카를 몰고 간 한○○ 일병에 의하면 누군가가 안락사를 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고,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고 했다. 당시 현장 부근에 있었던 11공수여단 간부들 중 누구도 이들의 행위를 제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 중사가 부상자들을 사살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별다른 제재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주남마을 뒷산 헬기장 부근에 암매장된 시신은 6. 2. 주남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광주시청에서 수습해 망월동 시립묘지에 안장했고, 2002. 망월묘지 이장과정에서 유전자 감식을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버스 안 사망자들의 시신 수습과 관련해 몇 가지 자료가 있다. 5. 25. 11:00에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일지에 따르면, 가운을 입은 청년 2명과 기사 1명 동장 1명 등이 군부대로 접근해 대화를 시도했고, 녹동마을 앞 화약고 앞에 있었던 12구의 시신을 발견했으며 14:00에 시체 12구를 인계받았던 것으로 보고됐다. 광주시 동구청에서 작성한 5. 28.자로 보고에는 이상철이 지원동 화약고 밑의 시체 처리를 요구했으며 같은 날 당시 광주시 동구 지원동 동사무소 총무계장 박○이 녹동 입구 좌측 300M 지점에 있던 사체 7구의 처리를 요구했다. 광주지검 자료에는 5. 28. 현재 지원동 가매장분 사체가 11구임이며 검시할 예정이라고 보고됐다. 위에서 보듯이 지원동에서 발굴된 사체는 5. 25. 12구, 5. 28. 11구 등이었으며, 이 사체가 모두 지원동 미니버스 발포사건과 관련됐는지 여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사망자 관련 자료로는 사망진단서와 광주지검의 검시조서, 그리고 전남대 검안의 문형배의 검안차트와 505보안부대에 사망자 분류작업한 뒤 작성한 「검시결과보고서」 등이 있다. 또 1982. 보안사에서 만든 󰡔제5공화국전사󰡕 제4편 부록에도 검시조서가 있다. 사체검안 및 검안위원회에 참여했던 문형배씨는 1980. 6. 초순경 보안사에서 분류작업을 할 때 사체에 대한 개인별 기초 자료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당시 505보안부대 보안과장 전정웅 중령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며 대공과 소관이라며 우리 위원회 거듭된 면담 요구를 거부했다. 기무사 자료 중에는 ‘5․18’ 관련자(57명)들을 감시했던 보안사에서 작성한 인물 관련 자료들 중 홍금숙씨 항목이다.

10:00경 시민들이 “더 가면 군인이 있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기사에게 주의를 주었으나 괜찮다며 가다가 갑자기 산(지원동 지나 화순가는 길)에서 차를 향해 위협사격을 하자 기사가 산을 향해 발포하자 산에서 차를 향해 일제 사격. 차안에 있던 남성 1명이 “수도 적고 위험하니 총을 쏘지 말고 엎드리자”고 했으나 기사가 계속 응사해 산에서도 연속해 사격. 한참 사격이 있은 후 군인들이 와서 남성 2명을 끌어내린 후 차 바닥에 있는 본명을 “나오라”고 해 검거.

제11공수 보안반 보고내용 : 상기 버스에는 남성 15명 여성 3명 중 3명 생포(남 2, 여 1) 외 전원 사살됐으며 남성 2명은 중상으로 통합병원에 후송됐으며 홍금숙은 11공수 정보참모 곽○○로부터 보안반에 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