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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장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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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판개(張判盖) 명창은 1886년 11월 8일 전남 곡성군 겸면 현정리 81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제적등본에 기록되어 있다. 장판개는 부친 장석중(張石中)과 모친 이금화(李金華) 사이에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내 김옥란(金玉蘭)과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그의 부친 장석중(1863~1936)의 본적은 곡성군 겸면 현정리 81번지으로 1903년 1월 8일(고종 7년)에 순능 참봉 벼슬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부 장주한 역시 참봉벼슬을 받았고, 음율의 명인으로 불린 점으로 미뤄 대대로 창우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장판개 명창은 1904년 7월 고종앞에서 소리를 해 참봉 벼슬을 받았으며, 1908년 스승 송만갑 협률사에 가담해 전국을 돌며 공연에 참가해 제자 배설향과 큰 인기를 모았다. 당시 장판개 선생은 소리도 잘 했지만 발림이 매우 뛰어나 배우로써 소질을 인정받았다. 송만갑 협률사는 1910년 8월 충무시 통영에서 공연을 하던 중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그날로 해산됐다. 
 장판개는 서울에서 장안사와 연흥사 창극 공연에 참여했으며, 창극 <춘향전>가에서 이도령을 맡아 춘향역의 배설향과 열연했다. 그러나 일제가 1909년 기생조합을 조직하게 해 양성화하고 1918년 권번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판소리도 권번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판소리가 신극 등에 밀려 쇠퇴하자 명창들은 지방활동에 들어간다. 1918년 송만갑 협률사 지방 순회 공연을 하였으며, 1920년 배설향과 함께 전주 권번 소리선생으로 가게 되었다. 
 장판개의 모친 이금화가 1922년 곡성군 겸면 현정리에서 사망하였고, 1922년 장판개 집안이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227번지로 이사하게 된다. 1924년 장판개의 부인 김옥란이 금과면 내동리 일대 10여개 마을 당골판을 관리했으며, 장판개 선생은 순창 금과면에서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다 1937년 53살을 일기로 소리인생을 마감했다.  
 장판개 명창은 1935년 단가 ‘진국명산’과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녹음해 음반으로 남겼다. 이 소리는 젊은 나이에 아편으로 목이 망가진 장판개 명창이 죽음을 앞두고 전력을 다한 소리가 담겨져 있다. 장판개 명창의 동생 장도순(1892~1926)과 장도순의 딸 장월중선(1925~1998,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장월중선의 딸 정순임(무형문화재 제34호) 등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200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판소리명가 1호’로 지정받은 바 있다. 

< 참고문헌 : 세습무계의 통혼과 판소리 전승의 상관성, 목포대학교 대학원 정대하 학위논문(2005년)

            곡성군 겸면사무소 제적등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