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묘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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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3년 전 (LightofFullMoon님) - 주제: 사료에 없는 내용이 너무 많음

출처도 없고, 편파적인 비판 항목[편집]

  • 첫째, 비판 항목에 출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 둘째, 긍정적인 평가는 신채호의 글 하나밖에 없으나, 부정적인 평가는 너무나도 분량이 많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하나뿐인 긍정적인 평가에는 출처 자료가 있지만, 숫적으로 압도적인 부정적인 평가엔 출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비판 항목은 신뢰성도 떨어지고(출처가 없으므로), 편파적이라고 생각됩니다. --LightofFullMoon (토론) 2011년 1월 12일 (수) 14:20 (KST)답변

내용 수정합니다-- 이 의견을 2011년 3월 31일 (목) 17:43‎에 작성한 사용자는 211.62.150.12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사료에 없는 내용이 너무 많음[편집]

어제 둘러보니 사서(공식 역사기록)에 나와 있지 않은, 독자연구라 의심되는 글들이 너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일부는 수정을 했지만, 미처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글이 1년 넘게 버젓이 위키백과에 올려져 있었다니, 실망이 드는군요. 위키백과의 큰 단점 중 하나라고 생각될 지경입니다.--LightofFullMoon (토론) 2011년 1월 13일 (목) 18:40 (KST)답변

의견[편집]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높이 평가한다. 묘청의 난이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묘청의 난은 개경 귀족 세력과 그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의견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진족 [女眞族] (두산백과, 두산백과) 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17년 금은 고려에 형제관계를 처음엔 요구하다가 나중에 강한 군사력을 갖자 고려 말기에는 신하의 예를 갖추라며 고려의 왕들에게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의 왕 이름 앞에 '충'자라는 말이 들어있으며, 매년 은과 엄청난 인삼을 바치라고 요구 하였습니다. 아마도 안창호 열사는 금이 군사적 우위를 놓고 일방적으로 고려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묘청의 난을 높이 평가한다 말할 것입니다.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119.200.70.200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