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당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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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견: 1년 전 (DangPT님) - 주제: 조선 왕조 실록 기록

현재 기재되어 있는 정보는 기존에 나와 있던 정보와 매우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의 출처는 없고 당연히 내려지는 결론으로 논리적 오류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존의 당씨성 시작에 대한 이론

--밀양 당씨 세보로 부터 나온 정보인듯-- ""당씨(唐氏)는 중국 진 양(晋陽 : 산서성 기영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본래 도당씨(陶唐氏 : 제요를 일컫음)의 후예(後裔)가 당(唐)나라 제후(諸侯)에 봉해져서 나라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고 한다.「밀양당씨세보(密陽唐氏世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당씨(唐氏)는 위(魏)나라 때 대부(大夫)였던 당 저(唐雎)의 후손으로,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 : 북송의 8대 임금, 제위기간 : 1101~1125)에서 승상(丞相)에 올랐던 당 각(唐 恪)의 7세손 당 성(唐 誠)이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출신으로 원(元)나라 말기에 동래(東來)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조선개국(朝鮮開國) 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로서 외 교문서(外交文書)를 전담관장(傳擔管掌)하였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녹권(錄券)과 상전(賞田) 15결(結)을 하사(下賜)받았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이르러 밀양(密陽)을 사적(賜 籍)받아 본적(本籍)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특히 당 성(唐 誠)은 학문에 정통(精通)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야사(野史)의 기 록에는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성석린(成石璘)을 위기에서 구해준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 기재되어 있는 이론

""시조(始祖) 당성(唐誠)은 고려 말 예부상서(禮部尙書-고려 말 예부(禮部)의 으뜸 벼슬로서 품계는 정3품, 현대의 외교부장관 겸 교육부장관) 박정수(朴廷秀)의 혼외자(婚外子)로서 재물(財物)을 상속(相續)받기 위해 혼외자(婚外子)라는 신분(身分)을 감추고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다죽리[茶竹里,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 마을의 발음과 유사한 ‘당(唐)’이라는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는 설과 ‘다죽리[茶竹里,본래 예전 지명은 다원리(茶阮里)]’ 마을의 재능있고 총명(聰明)한 평민(平民)이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손녀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출신(出身)을 감추기 위해 ‘당(唐)’이라는 성(姓)을 쓰기 시작했다는 설,........... 그러므로 시조(始祖) 당성(唐誠)의 조선시대 행적(行跡)과 고려 말 조선 초 격변기(激變期)의 정황(政況)을 볼 때 당성(唐誠)은 예부상서(禮部尙書) 박정수(朴廷秀)의 후손(後孫)으로 혼외자(婚外子)가 명확(明確)하고, ...""

위 내용의 출처가 미흡함에도 불과하고 주어진 여러 의견중 한 의견이 가장 합리적이다는 기술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선택되어져 수용되어지고 있다. 당시 상황이 신분을 속인다 해도 성을 구지 지명의 발음을 따라 존재하지도 않았던 "당"씨 성으로 바꾸어 아버지의 손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잘 안 맞는듯 하다. 더군다나 기술자가 각주로 달아놓은 "한국 민족 대백과 사전"에는 당씨성의 유래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으며 그 기존 정보에 대한 출처로 조선 왕조 실록과 밀양당씨세보가 표기되어 있다. 비록 마지막 임지와 관련있겠지만 당성의 묘는 개성지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당씨는 분단 이전에는 이북 지역에 더 많았다고 하며 결혼한 부인의 고향을 제외하면 경상도 지역과의 인연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70, 80년대 당씨성 사람들은 두부류가 있는 것으로 들었으며 그 두 부류는 이북 지역에서 해방후 분단 혼란기에 내려온 사람들과 수원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므로 밀양의 지역적 연고는 실질적으로 처가와 가깝고 임금에 의해 본으로 지정 되었다는 것 외에는 없어보인다. 실예로 원주 변씨의 경우도 그 본인 원주는 변씨가 원주출신 부인을 맞이한 후 공민왕에 의해 원주라는 본이 사적(賜 籍)된 적이 있다. "사적"은 고려말과 조선 초 외국에서 이주온 자들이 공을 세우고나서 임금으로부터 본을 하사받는 방법중의 하나로 보인다.

@@ 그 외 기록들 ◇ 모당천(毛唐泉): 죽동의 죽원재사 밑 밑에 있는 고정(古井)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병란을 피해 이곳까지 온 모씨와 당씨가 거주하며 그들의 식수를 위해 팠던 샘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당샘 혹은 모당천이라 한다. 지금도 샘가에 있는 돌에 모당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 살고 잇는 당씨들 중에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때 이 마을에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출처:http://blog.daum.net/auddks/2021

◇모당천(毛唐泉)의 모습. 중국 원나라 말기에 모 씨와 당 씨가 전쟁을 피해 이곳까지 와서 식수용으로 팠다는 오래 된 샘물이다. 출처: http://m.blog.daum.net/busanman/7371179?categoryId=86649

조선 왕조 실록 기록[편집]

""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3일 기묘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 치사(致仕)한 당성(唐誠)이 졸(卒)하였다.

당성은 강절(江浙)의 명주(明州) 사람이었는데, 원(元)나라 말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왔었다. 처음에 정동행성(征東行省)380) 의 연리(掾吏)가 되었으나, 행성(行省)이 혁파되자 중랑장(中郞將)으로 사평 순위부(司平巡衛府)의 평사(評事)가 되었다. 율령(律令)에 통하고 밝아서 일을 만날 적마다 용감히 말하였는데, 당시 국정을 맡은 자가 성석린(成石璘)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미워해서 죄를 무고하여 하옥(下獄)하고, 병마 도통사(兵馬都統使) 최영(崔瑩)을 부추겨서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니, 당성이 그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나, 최영이 듣지 않았었다. 당성이 굳이 다투었으나 어쩔 수가 없게 되자, 드디어 율문을 집어 땅에 던지면서 최영에게 이르기를,

"도통(都統)이 율문보다 먼저 났습니까? 아니면 율문이 도통보다 먼저 났습니까? 도통이 어찌하여 자기 한 사람의 견해로써 율문을 버리십니까?"

하니, 최영은 당성이 정직하다고 하여 노하지 않았고, 우리 태조도 또한 성석린을 구해 내려 하였으므로, 마침내 사형에서 감형할 수 있었다. 관직을 여러 번 옮겨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이르고, 이원필(李元弼)을 대신하여 사대 이문(事大吏文)을 맡았었다. 태조가 즉위하게 되자, 호조·예조·형조·공조의 4조 전서(典書)를 거쳤다. 일찍이 노비를 변정 도감(辨定都監)에 소송하였다가 이기지 못하니, 조회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이제 이 도감(都監)은 변정(辨定)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不定)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연좌되어 면관(免官)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검교 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로서 문서 응봉사(文書應奉司)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신사년에 임금이 이미 고명(誥命)을 받게 되니, 당성이 면알(面謁)하여 아뢰기를,

"지난번에는 국함(國銜)381) 을 ‘권서 국사(權署國事)’라고 칭하였으나, 이제는 다만 ‘국왕(國王)’이라고 칭하니, 이름이 바르고 말이 간단하여 매우 좋습니다."

하고, 인하여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소신(小臣)의 두함(頭銜)382) 에서도 또한 검교(檢校)383) 두 자를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로 고쳐 임명하였다. 다시 공안부 윤(恭安府尹)에 옮겼다가 기축년에 본관(本官) 그대로 치사(致仕)하였다. 임금이 녹봉을 온전하게 종신토록 주게 명하였다. 당성은 성질이 부지런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나이 70이 넘어도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다. 무릇 사대 문자(事大文字)가 있을 때는 반드시 친히 살피고 가다듬어 조금도 차오(差誤)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믿고 맡겼으며 본향(本鄕)을 밀양(密陽)으로 내려 주었다. 졸(卒)할 때 나이가 77세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중관(中官)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로 쌀·콩을 각각 40석과 종이 1백 50권을 내려 주고, 관곽(棺槨)을 주고 사제(賜祭)하였다. 중궁(中宮)도 또한 사제(賜祭)하였다. 성석린이 시(詩)로써 애곡(哀哭)하였다.

"학문이 이문(吏文)을 겸하여 양쪽이 정강(精强)하니, 동방에 유익함을 누가 견줄 수 있으리오? 도통(都統)과 율문(律文)의 선후 이야기, 이 생에 갚기 어렵고 죽어도 잊기 어렵네." DangPT (토론) 2023년 1월 10일 (화) 09:22 (KST)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