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사 노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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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마피아(Sicilian Mafia), 또는 단순히 마피아(Mafia), 또는 조직원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코사 노스트라(La Cosa Nostra)는 일반적으로 마피아로 알려진 비밀 결사적인 범죄 집단으로 여겨지지만, 정확하게는 마피아와 코사 노스트라는 구별된다. 마피아라는 호칭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발생한 19세기말부터 시작된 미국 이민과 함께, 이탈리아 해외로 진출해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코사 노스트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이 강제 송환한 러키 루치아노에 붙여진 조직이다.

역사[편집]

마피아의 소굴을 묘사한 1900년경 시칠리아 지도. 마피아가 활동하는 도시는 빨간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피아는 풍부한 농업 생산성을 보인 서부에서 주로 활동했다.

마피아의 뿌리는 19세기 시칠리아 서부의 과수원이다. 이 시기의 감귤류는 특히나 돈벌이가 잘 되는 상품이었고, 수확량만 좋으면 시칠리아 레몬 과수원의 소유자는 짭짤한 이윤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몬 나무는 일시적인 물 부족에 취약했고, 이것은 시칠리아에서 너무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큰 이윤을 거둘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점과 과일 생산량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결합되자, 감귤류 보호비 갈취로 시칠리아 특유의 범죄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180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정부 관료들과 학자들은 마피아 혹은 코사 노스트라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수행했다. 하지만 마피아 단원 개인이 기소당하는 경우는 있어도 조직 자체를 체계적으로 수사해서 고발하는 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마피아는 계속해서 지방 정부 및 경찰과 함께 공모해서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미묘하고 고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수익을 걷어들였다.[1]

1925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 아래서 활동하던 팔레르모의 지사 체사레 모리에 의해 가장 성공적인 시칠리아 마피아 진압이 시작된다. 독재적 권력과 강압 작전을 병행해서 사용하는 전략을 썼다. 마피아가 통합된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던 모리는 반마피아 경찰 병력을 꾸려 1만여 명의 시칠리아 사람들을 체포했다. 그 중에는 수많은 마피아 조직원과 노상강도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더러는 무고한 시민도 들어있었다. 모리는 집단 재판을 통해 그들을 처리하는 한편, 언론에는 이런 사실을 숨겼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조직 범죄가 소탕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에 대략 500명 정도의 마피아 조직원이 미국으로 도망갔고, 이들이 결국 미국 마피아를 만든다. 1943년 연합군에 의한 시칠리아 침공을 계기로 마피아는 생각지도 않게 다시금 권력을 회복하게 된다. 파시스트 정권이 전복되자 권력 공백이 뒤따랐는데 지방은 그 현상이 심했다.[2]

제1차 마피아 전쟁[편집]

1957년에 뉴욕의 마피아 조 보난노는 유럽 마피아에 분쟁을 해결할 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하여 주요 마피아 조직원 규칙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고, 그 다음 해에 팔레르모에서 최초의 시칠리아 마피아 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이 위원회는 마피아 내부의 패밀리와 개인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마피아의 규칙을 깨뜨린 데 대한 처벌을 결정하고, 한편으로는 정부 요인, 변호사, 기자들에 대한 폭력행사를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런 인물들을 살해할 경우 시칠리아의 조직범죄 전체가 반갑지 않은 이목을 끌기 때문이었다. 만약 보스가 어떤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은 경우에는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거의 20년 동안 이 위원회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지역의 보스들이 독립적으로 조직을 운용하는 데 익숙한 탓에 위원회는 유명무실이었다. 위원회는 1961년 그레코와 라 바르베라 패밀리 사이에 일어나 68명의 목숨을 앗아간 소위 1차 마피아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 전쟁은 악명 높은 치아쿨리 대학살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이때는 살바토레 그레코를 죽이기 위해 설치된 자동차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려다 실패하는 바람에 일곱 명의 경찰과 군인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에 따른 코사 노스트라의 후유증은 대단히 커서 10주 만에 1천 200명의 마피아 조직원이 체포됐다. 정부는 반마피아 위원회를 창설하고 팔레르모의 전직 검사장인 체자레 테라노바의 지휘 아래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최종 보고서를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려는 정치적 의지는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시칠리아 마피아는 임시로 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직원들 수백 명이 기소를 피해 다른 나라로 달아나고 말았다.[3]

제2차 마피아 전쟁[편집]

1970년대 말부터 코를레오네라는 마을 출신의 마피아 조직원들이 코사 노스트라의 지배권에 도전하여 성공을 거둔다. 이것은 나중에 2차 마피아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다. 살바토레 리나가 이끄는 코를레오네시가 대체로 유명무실했던 시칠리아 마피아 위원회를 장악해서 그것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도구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들의 등장으로 대중적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 사건이 극적으로 증가하게 됐다.[4]

1979년에는 테라노바를 비롯해서 네 명의 기득권층 인물들이 살해당했다. 그 다음해에는 몰레알레 경찰서 서장, 시칠리아 주지자, 팔레르모의 검사장이 마피아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다. 1982년에는 반마피아 위원회의 현역위원인 피오 라토레가 살해당하면서 마피아 유형의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법안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해 말에 국민적 영웅이자, 반마피아 운동의 옹호자이며 팔레르모의 지사였던 카를로 알베르토 장군이 아내와 함께 살해당했다. 처음으로 이탈리아 대중과 정부는 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는 코자노스트라를 무너뜨릴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 정부는 마피아 조직원으로 밝혀진 범인의 재산을 압수할 수 있게 됐다. 이로써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마피아 조직의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일말의 성공을 거둔다.[4]

대재판[편집]

1983년 7월에는 팔레르모에서 자동차 폭탄이 폭발해서 재판장 로코 킨니치와 두 명의 경호원, 그리고 무고한 행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에 자극을 받은 안토니노 카폰네토 판사는 은퇴 계획을 취소하고 킨니치의 자리를 물려받아 반마피아 판사들로 팀을 꾸렸다. 그는 공세를 이어가며당국이 현재 현직 마피아 정보원 토마소 부세타와 함께 일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코자노스트라가 통합된 하나의 조직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해줄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카폰네토의 판사진은 부세티의 증언을 바탕으로 366건의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추가적으로 증인이 나설 때마다 더 많은 체포가 이루어졌다.[4]

마피아의 보복과 정부의 대응[편집]

코를네오네시가 주무르는 마피아는 더 폭력적이 되어갔다. 이탈리아는 당시 효과적인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코자노스트라는 토마소 부세타의 처남인 정보원 레오나르도 비탈레를 살해한다. 그리고 1985년 7월에는 마피아 도망자들의 추적을 담당하고 있었던 특별기동수사대 장교가, 그 다음 달에는 또다른 특별기동수사대 요원이 공포에 질린 아내의 눈앞에서 200발의 총알을 맞고 벌집이 된다.[5]

폭력의 규모가 가공할 수준으로 확대되자 학생들은 팔레르모에서 반마피아 시위를 벌이고, 영향력 있는 한 성직자가 최초로 마피아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반마피아 전선에 나선 팔레르모의 시장과 달리 중앙정부 무능력을 비난하고 나선 팔레르모의 봄 운동이 일어난다. 한편, 반마피아 재판진에서는 충분한 증거가 수집되자 1986년 2월 10일 대규모 공판을 통해 474명의 마피아 조직원과 그 협력자들을 기소한다. 그리고 1987년 12월 16일에는 그들 중 360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총 2,66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카폰네토의 판사진은 대규모 공판을 두 건 준비했고, 정보원 안토니오 칼레로네에게서 나온 새로운 정보 덕분에 또다른 대규모 공판을 개최할 태세를 갖추었다. 1988년 3월에는 160건의 체포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마피아는 팔레르모의 항소법원 판사 안토니오 세타와 그 아들을 살해한다.[6]

1987년 말에 카폰네토가 물러난 후에는 경험이 부족한 앤서니 멜리가 그 후임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그가 어설픈 결정을 너무 많이 내리는 바람에 프로젝트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만다. 반마피아 재판진의 파올로 보르셀리노조반니 팔코네가 나서서 그의 무능을 비판했지만 설상가상으로 반마피아 전선에 서 있던 팔레르모의 사장 레오루카 오를란도가 1990년에 시장직을 잃었다. 그리고 팔레르모의 항소법원을 주재하던 코르라도 카르네발레 판사가 세부조항을 근거로 대규모 공판의 재판결과 일부를 번복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자 암울함은 절정에 도달했다. 1991년에 조반니 팔코네는 사법부에서 형사업부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는 다양한 조직에 퍼져 있던 반마피아 경찰조직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하고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면서 마피아 조직원에 대한 전화도청이 허용되고, 돈세탁을 방지하고, 조직범죄가 침투한 지방의회를 해산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마피아는 다시 한 번 폭력으로 이런 위협에 맞섰다. 1991년 8월에 이들은 은드란게타를 사주해 파기원 검사장인 안토니오 스코펠리티를 청부살해한다. 그리고 3주 후에는 갈취 행위에 반대하던 운동을 벌이던 팔레르모의 사업가 리베로 그라시가 비슷한 살인사건의 희생가가 되고 만다.[7]

1992년 1월 31일에 이탈리아 대법원은 카르네발레 판사의 평결을 번복해서 이탈리아에서 반마피아 전선에 전례 없는 승리를 안겨준다. 하지만 이것은 코틀레오네오시의 맹렬한 보복을 불러 일으킨다. 1992년 5월 23일에 팔코네와 그의 아내는 자동차 폭탄 공격으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두 달 후에는 또다른 폭탄 공격으로 파올로 보르셀리노와 그의 수행원 다섯 명이 살해당한다. 이 지경에 이르자 중앙정부 역시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다. 정부는 시칠리아로 7천 명의 군병령을 파견해서 일상적인 경찰임무를 대신 수행하게 했고, 덕분에 여유가 생긴 지역 경찰병력은 리나와 그의 일당들을 추격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은 마피아 조직에 침투해 들어가 가짜 마약 거래와 돈세탁 등의 함정수사를 벌일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정보원의 신원 변경을 허용하는 중요한 새 법률이 제정되어 정보원 보호에 일조했다. 이 법은 아주 완벽한 타이밍에 통과됐다. 파기원의 평결 이후로 많은 마피아 조직원이 정보원이 됐다. 붙잡힌 마피아 조직에게 제공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추적한 끝에 1993년에 리나가 체포됐다. 거듭된 체포로 마피아의 지도자 자리는 레오루카 바가렐라에게 넘어갔지만, 그 역시 1995년에 체포되는 바람에, 그 자리는 다시 베르나르도 프로벤자노에게 넘어갔다.[8]

현대[편집]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반마피아 운동으로 인해 코사 노스트라는 사실상 무력화된다. 프로벤자노는 권력을 거의 휘두르지 못했고 중앙에 집중되었던 조직 권력도 분권화가 이루어졌다. 지역의 마피아 지도자들은 다시 시시껄렁한 보호비 갈취 사업으로 되돌아갔고, 이것은 이윤은 신통치 않았지만 덕분에 비교적 비밀리에 조직을 운영할 수 있었다. 2006년 4월 11일에는 광범위한 추적 끝에 프로벤자노가 마침내 체포됐다.[9]

참고 문헌[편집]

  • 샤나 호건; 외. (2017). 《Crime book》 [범죄의 책]. 번역 김성훈; 박유진; 이시은; 최윤희. 지식갤러리. ISBN 979-11-88096-11-4.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