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4세 폰 체링겐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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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4세
Berthold IV
프라이부르크 민스터(1793/5) 지하의 부조
프라이부르크 민스터(1793/5) 지하의 부조
체링겐 공작
재위 1186년-1218년 2월 18일
전임 베르톨트 1세 폰 체링겐 공작
후임 베르톨트 5세 폰 체링겐 공작
이름
베르톨트 폰 체링겐 (독일어: Berthold von Zähringen)
신상정보
출생일 1125년경
사망일 1186년 12월 8일
부친 콘라트 1세 폰 체링겐 공작
모친 룩셈부르크-나무르의 클레만티아
배우자 프리부르의 하일비크
볼로냐의 여공작 이다(아이다)
자녀 베르톨트 5세
종교 천주교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4세(1125년경 – 1186년 12월 8일)는 체링겐 공작이자 부르고뉴 총독이었다. 그는 체링겐 공작 콘라트 1세와 룩셈부르크—나무르의 클레멘티아의 아들이었다.[1] 그는 프리부르를 포함한 수많은 도시를 세웠다.

생애[편집]

베르톨트 4세는 1152년에 그의 아버지 콘라트 1세의 뒤를 이어 체링겐 공작으로 즉위했다. 베르톨트는 또한 부르고뉴의 시스쥐랑(Cisjuran, 프랑스) 영토를 함께 정복하고 1152년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를 도운 후 바르바로사와 합의하여 받은 “부르군디 공작”의 칭호를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정복은 실패했고, 1156년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이브레아 가문(Ivrea)의 마지막 부르고뉴 백작의 딸인 베아트리체와 결혼했다.[2] 이것은 베르톨트의 주장을 방해했고, 베르톨트는 부르고뉴 총독의 칭호를 받았고, 제네바, 로잔 및 시옹에 걸친 전 쥐라 지역(‘스위스’)에 대한 대군주가 되었다.

이웃한 슈바비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와의 경쟁으로 인해 그는 튀빙겐 불화(1164-1166)에서 벨프 4세의 편에서 싸웠다. 1173년에 그는 취리히의 대군주가 되었다.

검은 숲의 성 베드로 수도원의 묘지 항목에는 Berchtoldus 4. dux de Zaeringen, officium cum 5 candelis. Depositio Iohannis Tüfer abbatis : “베르톨트 IV, 체링겐 공작은 세례자 요한을 기리기 위해 5개의 양초를 기증했다.”라고 나와 있다.[3]

결혼과 이슈[편집]

베르톨트 4세는 프로부르크의 하일비크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 마지막 체링겐 공작 베르톨트 5세. 그가 죽은 후 키부르크 백작우라흐 백작은 체링겐의 소유물을 상속받았다.
  • 우라흐 백작 에기노 4세와 결혼한 아그네스 — 테넨바흐 수도원의 괴사에 따르면 그녀는 베르톨트 5세의 딸이었다.
  • 안나, 키부르크 백작 울리히 3세와 결혼

각주[편집]

  1. Lyon 2013, 249쪽.
  2. Gilbert of Mons 2005, 55쪽.
  3. Necrologium minus Monasterii S. Petri Nigrae Silvae, in: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 Necrologia Germania, vol. I, p. 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