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
주저(周佇, 미상~1024년 7월 2일(음력 5월 24일[1]))는 송나라 출신의 고려의 문신이다.
생애[편집]
1005년(목종 8년)에 장사 배를 따라서 왔는데, 채충순이 왕에게 건의해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임명되었다.[2][3] 그 후 몇 개월도 안 되어 습유(拾遺) 벼슬을 받았고 마침내 제고(制誥)를 받았다.[3]
1011년(현종 2년), 현종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갔을 때 하공진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뿔뿔이 도망쳤지만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 채충순(蔡忠順), 김응인(金應仁) 등과 함께 왕의 곁에 있었다.[4] 이 공으로 그는 몇 단계를 뛰어 넘어 예부시랑(禮部侍郎), 중추원(中樞院) 직학사(直學士)가 되었다.[5][3] 또한 과거 시험에 호명(糊名)[6] 방식을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7]
1014년(현종 5년)에 비서감(秘書監)이 되었으며, 지공거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했다.[9]
1015년(현종 6년)에는 「본국 입송 진봉 기거 표」를 지었다.[10]
1018년(현종 9년)에는 우상시(右常侍)가 되었다.[11]
1021년(현종 12년) 6월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가 되었으며,[12], 같은 달에 숭문보국공신(崇文輔國功臣)·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상주국(上柱國)·해남현(海南縣) 개국남(開國男)으로 봉해졌고, 식읍 3백 호를 받았다.[13][3] 8월에는 「현화사비」의 비문을 썼다.[14]
1022년(현종 13년)에는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15]
1024년(현종 15년) 5월 24일(양 7월 2일)에 사망했다.[1]
평가[편집]
성품이 겸손하고 품행이 공손했으며, 글재주가 뛰어나 외교 문서를 많이 작성했기 때문에 높은 대우를 받았다.[3]
작품[편집]
「본국 입송 진봉 기거 표」는 『동인지문 사륙』과 『동문선』에 실려 있고, 「진봉표」는 『동문선』에 실려 있으며, 「현화사비」의 비문을 썼다.
전기 자료[편집]
- 『고려사』 권94, 「열전」7, 주저
참고 자료[편집]
- 『고려사』
- 『고려사절요』
각주[편집]
- ↑ 가 나 『고려사』 권5, 「세가」5, 현종 15년(1024) 5월 24일(경술)
- ↑ 『고려사』 권3, 「세가」3, 목종 8년(1005)
- ↑ 가 나 다 라 마 『고려사』 권94, 「열전」7, 주저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 1월 3일(정축)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 1월 29일(계묘)
- ↑ 과거 시험지에 답을 쓴 사람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을 말한다.
- ↑ 『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현종 2년(1011)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4년(1013) 9월 27일(병진)
- ↑ 『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현종 5년(1014) 4월
- ↑ 이 표문은 『동인지문 사륙』 권2와 『동문선』 권44에 실려 있다.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9년(1018) 6월 8일(기해)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1021) 6월 23일(정묘)
- ↑ 『고려사절요』 권3, 현종 12년(1021) 6월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2년(1021) 8월 16일(기미)
- ↑ 『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13년(1022) 10월 25일(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