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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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봉 조혁환 장군께서는 일생을 국방을 위해 헌신하시며 가문을 위해 효행을 다하셨다. 그 공과 덕을 기리기 위해 국가는 장군님에게 충무무공훈장 2회, 화랑무공훈장 2회, 보국훈장 천수장, 무공포장, 대통령 표창 효행 포장 명륜장(성균관), 군사령관급이상 표창 15회 수여했다.

육군 제3사단장을 지내셨고 1969년 8월 준장으로 예편하셨다. 3사단은 당시 18개 사단 가운데 전군 지휘검열 등 다방면에서 최우수 부대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 국방장관 표창 등을 수상 했고, 사단이 위치했던 철원 주민들은 주민생활 향상에 크게 기여한 그를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송덕비는 철원군 서면 와수 3리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철원군 서면 자등리 187 백골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장군님의 통솔 방침은 인화단결과 책임, 전투력 배양이요 지휘 요결은 [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가르치는 것]이었고 이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는데 모범을 보여 많은 부하 장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셨다. 50년 세월이 지나 장군님이 소천하시게 된 날까지 당시의 3사단 참모들이 중심이 된 친목모임이 계속되어 왔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조 장군님은 군 생활 초기인 1950년 7월 춘천지구 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고 왼쪽 팔의 신경이 마비되셨다. 북한군의 총알이 왼쪽 어깨를 관통해 폐의 맨 윗부분이 손상되고 굳어졌다. 다리 부상으로 절뚝거리게 된 군인 가운데 장성이 세 명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사단장은 되지 못했다. 팔을 정상적으로 쓰지 못할 정도의 부상을 가지시고도 사단장을 역임한 장성은 조혁환 장군님이 유일하다.

1925년 8월 22일생으로 최근 미수(米壽88세)연 자리에서 후진과 자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오랜 시간 직접 집필하신 "회고록 - 단 한 번의 생을 사는 동안"의 출판 기념회도 겸하여 발표하셨다.

장군의 본관은 명문 창녕 조씨. 부친 조병극 공과 모친 박대심 여사 슬하에서 성장하여 곽정심 여사와 혼인하셨다. 곽정심 여사는 순진한 효행과 내조로 가문을 일궈가서 성균관장으로부터 부부가 함께 효행상 명륜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여사는 아깝게도 1992년 7월 15일 65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삼 년이 지난 후 조 장군께서는 김양례 여사와 만나 행복한 여생을 사시다가 2014년 7월 4일 오후 5시에 만 90세를 앞두고 서울중앙보훈병원에서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