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윤문(張允文: 1139년~1211년 12월 31일(음력 11월 25일))은 고려의 문신이다. 본관은 목주다.[1] 우방재의 딸이 장윤문의 아버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장린(張麟)과 결혼했으므로 우학유가 외삼촌이다.

이력[편집]

  • 1139년(인종 17): 태어남.
  • 외할아버지의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함.[1]
  • 동도서기(東都書記)로 재직했는데 인사 고과에서 높은 평가(最)를 받아 식목녹사(拭目錄事)로 임명받음.[1]
  • 1186년(명종 16): 어떤 사람이 탐라(제주)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보고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짐. 하지만 조서를 내린 뒤였으므로 장윤문은 대부주부 행탐라현령(大府注薄 行耽羅縣令)으로 재직함.[2]
  • 제릉승 겸 도병마녹사(諸陵丞 兼 都兵馬錄事), 중서주서(中書注書), 권지합문지후(權知閣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史), 추부원외랑(秋部員外郞), 충청도점군사(忠淸道點軍使), 기거사인(起居舍人), 경상주도염안사(慶尙州道廉按使), 우사낭중(右司郞中), 소부소감(少府少監) 등 여러 관직을 지냄.[1]
  • 1198년(신종 1): 숙직관을 대상으로 하는 공억을 금지하자고 했으나 시행되지 않음.[3]
  • 1202년(신종 5): 음력 10월, 탐라(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안무사로 나감.[4] 음력 12월, 반란군들을 처형함.[5]
  • 1203년(신종 6): 시대부경 우간의대부 지제고(試大府卿 右諫議大夫 知制誥)로 임명받음.[6]
  • 희종이 즉위하자 국자감 대사성으로 임명받음.[1]
  • 1207년(희종 3): 음력 5월, 국자감시를 주관해 김남석(金南石), 권시위(權時偉) 등을 뽑음.[7] 나이가 많음을 까닭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남.[1]
  • 최당(崔讜: 1135년~1211년) 형제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함.[1]
  • 1211년(희종 7): 사망. 향년 일흔세 살.[1]

가족[편집]

  • 할아버지 : 검교첨사(檢校詹事) 장선민(張先敏)
    • 아버지 :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장린(張麟)
  • 외할아버지 : 우방재(于邦宰)
    • 어머니 : 목천 우씨(木川于氏)
      • 부인 : 시태부소경(試太府少卿) 여시무(余時茂)[8]의 둘째 딸
        • 자녀 : 1남 4녀

각주[편집]

  1. 〈장윤문 묘지명〉
  2. 《고려사》 권20, 〈세가〉20, 명종 16년(1186년) 7월 9일(갑신)
  3. 《고려사절요》 권14, 신종 1년(1198년) 12월
  4.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5년(1202년) 10월
  5.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5년(1202년) 12월 5일(을해)
  6. 《고려사》 권21, 〈세가〉21, 신종 6년(1203년) 12월 24일(무오)
  7. 《고려사》 권74, 〈선거지〉2, [과목]2, 국자감시의 정원, 희종 3년(1207년) 5월
  8. 참고로 여씨(余氏) 가운데 현존하는 본관은 의령 하나뿐이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말고도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