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식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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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농의 가문에 출생

우리고장이 낳은 항일지사 가운데 백산 안희제는 그 행적이 매우 두드러진 분이지만 그 백산을 언제나 물심으로 도와가면서 끊임없는 항일투쟁에 전생애를 저당 잡힌 분이 또 한분 있으니 그 이름 남저 이우식이다. 그는 1891년 의령읍 동동에서 대대로 수천석을 수확하던 부농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니 백산 보다는 여섯살이 연하가 된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익혔으나 집안이 여유가 있고 보니 그는 서울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동향의 선배인 백산을 사귀게 되었고 따라서 백산의 투철한 민족주의 사상에 깊이 감화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뒷날 그도 또한 백산과 더불어, 항일구국의 대열에 헌신하게 되었던 것이니, 수천석의 재산과 더불어 자신의 일생마저 항일의 제단에 바치고 말았던 것이다.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기미년의 독립만세 사건이 일어 났을때 그는 30세의 장년으로 향리의 청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배후 조종하였으니 이후 그는 끊임없이 왜경의 감시와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해 5월, 그는 백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가산의 일부를 기울여 운영을 맡게 된다. 그런데 이 백산무역이란 다름이 아니고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우리 애국지사들의 독립자금을 염출하던 일종의 위장회사였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백산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자금을 수시로 송달하였던 것이니 회사의 운영은 날로 어려워지고 따라서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백산과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더욱 세심한 배려로 백산무역을 꾸려 나가는데 진력하는 한편 상해임정과의 비밀연락을 지속하여 나갔으니 광복 후 환국한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은 이들의 공로를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높이 찬양한바도 있었다.


▶시대일보(時代日報) 사장시절

백산무역이 차츰 일경의 감시대상에 노출되어 갈 즈음인 1922년, 그는 백산과 협의하여 당시 운영난에 허덕이던 시대일보를 인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신문의 사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백산과 그들의 항일투쟁은 좀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 진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그늘에 숨어서 독립자금을 보내던 일에서 벗어나 이제는 언론으로 일제의 충독 정책에 맞서 싸우는 처지로 변신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신문을 인수하고 우선 신문의 제호부터 중외일보로 갈아 버렸다. 그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지면에는 일본의 총독정치를 비판하는 신랄한 논조가 계속 실려 나왔던 것이니 그토록 악랄한 일제의 독수가 이들의 행동을 그냥 보아줄 리가 없다. 번번히 필화사건이 터지던 중외일보는 몇 차례의 정간(停刊)을 겪게 되었고 이 때문에 운영은 날로 어려워지게 되더니 몇 해가 지난 1926년, 마침내 이 신문사 마저 남의 손에 넘겨 주고 말았다. 그런데 이 중외일보는 뒤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인수하여 조선중앙일보로 제호를 고쳐서 발행하다가 일제의 말기에 이르러 그 마저도 폐간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 사건

남저 이우식이 남긴 업적 가운데 조선어학회 사건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의 하나이다. 그는 중외일보 사장 재임 당시인 1922년 조선어학회의 이사로 피선되었다. 그리하여 신문사를 경영하는 틈틈히 그는 한글 연구에 심혈을 쏟게 되었으니 우선 동향의 한글학자 이극노(李克魯)와 이희승(李熙昇), 이인(李仁)등과 함께 조선어사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에 소요되는 경비를 거의 전담하다 시피 심혈을 쏟았으나 일제의 집요한 박해에 부딪쳐 당시로서는끝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뒤 그는 조선어학회의 간부 몇 사람과 협력하여 혁명가 양성을 위해 양사관(養士舘)을 설립 운영하기에 이르니 이때는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1942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해 10월, 일제는 마침내 조선어학회에 검거의 독수를 뻗혀 왔으니, 이른바「조선어학회사건」이다. 일제는 처음 사소한 꼬투리로 우리의 국어학자 이윤재(李允宰), 장지연(張志淵), 이희승(李熙昇), 이병기(李秉岐)등 수십명을 일시에 검거하여 함경북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하였으니 그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남저 이우식은 이때 다른 학자들과 함께 검거되어 1년 동안 모진 악형과 고문을 당하고 급기야는 그들의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고 해방되던 그해 1945년 1월에 석방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몇 달 앞둔 채 일제의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향리에서 돌아왔다. 몸은 비록 일제의 사슬에서 풀렸다고는 하지만 마음은 항시 암울한 감옥속에 햇빛마저 가려진채 심신을 조이고 지낸지 몇 달, 1945년 8월15일, 마침내 목매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의 날이 찾아왔으니 이 기쁨 이 감격을 뉘라서 막을건가. 그는 단숨에 서울로 달려가 오랫동안 고생하던 동지들을 붙잡고 한바탕 감격의 만세를 마음껏 불렀던 것이다. 그 뒤 향리의 남은 가산을 정리한 그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솔거하여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6년 7월 75세를 일기로 나라와 겨레에 바친 일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