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영국사 영산회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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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보물 제1397호는 크기가 3m에 가까운 대작으로 18세기의 서막을 여는 대표적인 불화로 손꼽힌다.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영국사[편집]

충북 영동 천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사는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창건된 영국사는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 원각국사에 의해 크게 중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다 하여 사찰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하였다.

영국사 앞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는 이러한 오랜 역사와 함께 한 웅장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1000살가량 되고 31m가 넘은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는 오랜 연륜으로 지혜와 너그러움이 가득한 노인처럼 사찰을 찾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편안함을 안겨주고 있다.

영산회상도의 도난[편집]

1991년 11월 여러 불화가 모셔져 있던 영국사 불전에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를 도난당했다가, 2003년에 영산회상도만 다시 사찰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한국의 불교문화재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갖은 수난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도굴과 약탈, 불법적인 국외 반출로, 6.25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것 하나 안전하지 못하였다. 전쟁이후 사찰에 소장된 불교문화재의 높은 가치가 차츰 널리 알려지면서, 도난 뒤에 매매가 손쉬운 비지정문화재들이 표적이 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도난을 방지하는 것이 문화재 관리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특히 도난에 의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것은 불교회화였다. 불화는 불상과 함께 예배의 대상으로 늘 개방되어 있는 법당에 걸려 있었고, 비교적 가볍고 들고 나가기가 편해서, 그리고 크기가 상당한 불화라도 장황된 부분과 틀을 남겨 놓고 그림 부분만 오려서 접거나 말면 부피를 줄여 쉽게 반출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도난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외국의 유명 미술품 경매장에서 한국 불화가 높은 가격에 매매된 사례들도 불화 절도를 부채질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문화재 도난의 심각성이 드러나고 도난 문화재의 회수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되찾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1999년에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에서 처음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를 통해 사찰에서 도난당한 문화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 도난 방지를 위한 문화재 관련 법안들이 점진적으로 개정되었고, 사찰 문화재에 대한 조사사업들도 진행되었다.

도난 후 재판 통해 소유권 인정[편집]

22년 10월 29일 조계종을 방문하여 영산회상도를 살펴본 이원석

2003년 영국사 영산회상도가 다시 사찰의 품으로 되돌아오는데도 불교문화재 도난백서가 큰 몫을 했다. 이 불화는 2002년 한 고미술상에서 발견되었으나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다. 고미술상도 도난 된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고(선의취득) 주장하여 재판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고미술상의 승용차에서 이 불화의 도난 내용이 실린 불교문화재 도난백서가 발견되면서 장물인줄 몰랐다는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져 영국사로 되찾아올 수 있었다. 도난 당시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되찾은 후 보물로 지정되고 안전하게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2022년 검찰총장에 임명된 이원석 (법조인)이 2003년 재판 당시 서울지검 공판부 검사로써 소송을 수행하며 환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1]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편집]

영국사 영산회상도는 제목 그대로 <법화경>에 등장하는 영산, 즉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여래가 여러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법화경> '서품(序品)'에는 제석천과 자재천, 범천과 권속들, 보살들, 용왕과 용녀, 팔부중과 수백 천의 권속들, 아사세 태자와 수백 천의 권속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영산회상도를 그린 작가들은 각각 자기의 특성을 살려 이들 인물을 취사선택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화면 정 중앙에 석가여래를 크게 그려 본존임을 강조하였고, 그 주위를 에워싸듯 보살상과 제자들, 그리고 여러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석가여래는 커다란 키형 광배를 등지고 높은 3단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깨달은 붓다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2] 이 불화는 가운데 본존을 중심으로 양쪽에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였다. 제일 하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그 양옆으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1존씩 그렸다. 그 윗단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항상 석가여래 좌우에 등장하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배치하였고, 양옆으로 사천왕을 안치하였다. 그 위의 단에는 보살상을 2존씩 양쪽에 배치하였고, 제일 윗부분에는 좌우에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제외한 8대존자와 용왕과 용녀, 금강역사 등을 그렸다.

중앙에 본존을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 집중시키고, 나머지 인물들은 위로 갈수록 작게 그려 평면의 화면에 원근감을 나타냈다. 전체적인 구도는 깔끔하다. 석가여래의 법화경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여러 인물들은 석가여래처럼 정면향을 하기도 하고, 좌우로 측면향을 적절한 곳에 배치하여 화면이 경직되어 보이는 것을 피했다. 인물들 위의 최상단에는 부드러운 중간 색조의 황색 색구름을 둔 뒤, 배경을 검은색으로 칠해 깊이 있는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색깔은 홍색이 가장 많이 쓰였는데, 선명하고 밝은 홍색이어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을 준다. 보살과 사천왕의 광배에는 녹색이 쓰였고, 대좌와 석가여래가 입은 옷, 사천왕의 갑옷 등에 금으로 문양을 새겨 화려함을 더 했다. 또한 사천왕의 옷과 협시보살의 옷에 옅은 갈색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구불구불 선으로만 문양을 대신한 기법은 독특하다. 이러한 구불구불한 선들은 본존의 가슴에 물결치는 모양, 가섭존자의 목 주변을 나이테처럼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인물 묘사를 보면 석가여래의 얼굴은 갸름한 편이고 눈, 코, 입이 가운데 몰리게 그렸으며, 눈은 짧고 코는 긴 편이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다. 늙은 수행자의 모습인 가섭존자의 얼굴은 실제의 노스님을 보는 듯하고, 반대로 젊은 아난존자는 생기 있어 보인다. 사천왕의 이국적인 얼굴은 4존마다 각각 특색 있게 개성을 부여하였다. 본존의 손 표현 등에서 부분적으로 다소 경직된 면이 있기는 하나, 단순한 듯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를 보여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다.

연대 명확-불화양식 파악에 귀중한 자료[편집]

불화 하단 중앙 부분에 먹으로 쓰여 있는 화기 중에 ‘강희사십팔년사월일(康熙肆拾捌年四月日) 신화성영산일부봉안우(新畵成靈山一部奉安于) 화사(畵師) 인문(印文) 민기(敏機) 세정(洗淨)’이라는 내용을 보아, 강희 48년(숙종 35년)인 1709년에 인문을 비롯한 민기, 세정스님 등이 참여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사 인문스님은 조선 후기의 불화승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베 바탕에 그린 이 불화는, 18세기로 들어선 직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린 불화로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불화양식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조성연대(造成年代)와 제작자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대작에 속하는 작품성이 뛰어난 불화로 평가받는다.[3]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단독] 이원석 총장, 박물관 수장고 찾은 이유는?...20년 만에 만난 '영산회상도'. 2022년 10월 31일. 2022년 11월 8일에 확인함. 
  2. “문화유산채널”. 2022년 11월 8일에 확인함. 
  3. “[사찰성보문화재 50選] 영국사 영산회상도”. 2022년 6월 13일. 2022년 11월 8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