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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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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Грибое́дов
본명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
로마자 표기Aleksandr Sergeyevich Griboyedov
출생1795년 1월 15일
모스크바
사망1829년 2월 11일
테헤란
성별남성
국적러시아 제국
학력모스크바 대학교
경력외교관
직업외교관, 시인, 작곡가, 극작가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Грибое́дов, 1795년 1월 15일 ~ 1829년 2월 11일)는 러시아의 외교관, 시인, 작곡가, 극작가이다.

모스크바 태생. 가계는 유서 깊은 귀족으로 부친은 근위사관이었다. 신동(神童)으로 불리었으며 1807년(12세)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했다. 1810년 언어학·법학 양 과를 졸업,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완전히 마스터했고 뒤이어 수학과에서 수업하는 한편, 음악가로서도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 1812년, 지원병으로 조국전쟁(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했고, 1816년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다.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프랑스 극의 번안 <젊은이 부부>(1810), <대학생>(1817)을 썼으나 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학식과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아, 당대 으뜸가는 교양인으로서 꼽혔다. 이 무렵 후에 테카브리스트가 되는 르일레예프나 큐헤리베케르 및 푸슈킨 등과 알게 되어, 농노제에 바탕을 둔 전제국가 체제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1818년(23세), 결투의 입회인이 된 것이 화근이 되어 페르시아 공사관의 서기로 좌천되었고, 그 후 코카서스의 각지를 전전했다. 이 동안에 그리보예도프는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시형식의 희곡 <지혜의 슬픔>집필에 착수, 1824년에 완성시켰다. 1825년 12월, 전제 타도를 부르짖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들의 일당으로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재차 외교관생활에 복귀, 827년부터는 페르시아 공사로서 러시아의 중근동 외교에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1829년(34) 테헤란에서 토인(土人)의 폭동으로 참살당했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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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츠 1번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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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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