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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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랑(薛朗, Xue Lang, ? ~ 888년 3월 14일[1][2])은 중국 당나라 말기 희종 때 활약했던 군인으로, 진해군 절도사(鎭海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장쑤성 전장 시) 주보가 장병들에 의해 타도된 후, 887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진해군 번진(藩鎭)의 일부를 지배하였다. 설랑 자신도 887년 말에 전류에게 사로잡혀 888년 초에 처형되었다.

생애[편집]

진해군 번진의 점거[편집]

설랑의 출신 배경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어떠한 정사에서조차 그에 관한 열전(列傳)이 없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역사적인 기록은 887년 3월에 있었다. 당시 그는 진해군 절도사 주보 휘하에서 천하염철조용부사(天下鹽鐵租庸副使)로서의 주보의 임무에 있어서 세금징수하는 관리에 해당하는 탁지최감사(度支催勘使)로 있었다. 이 무렵, 주보는 향락에 빠져 정사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일꾼들을 동원하여 번진의 본거지인 윤주(潤州, 현 장쑤성 전장 시)에 나성(羅城)을 20여 에 걸쳐 쌓게 하는 한편, 그의 관저에다 동제(東第)라는 저택을 추가로 짓게 하였다. 사람들은 중노동에 격분하였다. 그는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서, 1천 명을 모집하여 자신의 새로운 친위 군단을 조직했는데, 이를 후루도(後樓都)라 하였다. 그들에게는 정규군들의 2배나 되는 급여를 주었는데, 이는 진해군 번진 내의 정규군들 사이에 크나큰 원성을 불러 일으켰다.[3]

한번은 주보가 그의 막료들과 함께 후루(後樓)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막료들이 그에게 진해군 번진 내의 정규군들의 분노와 관련해서 그들의 우려를 나타냈다. 주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놈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려 든다면 죽여 버리겠다!” 그의 막료 중 한 사람이었던 설랑은 이 사실을 자신의 친구이자 진해군 번진의 장수인 유호(劉浩)에게 알렸고, 그에게 수하 장병들에게 조금이라도 주의할 것을 명령하라고 경고하였는데, 유호는 “우리가 반란만 일으킨다면, 오직 죽음을 면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3]

그 날 밤, 주보가 술에 취해 한창 잠을 자고 있을 때, 유호는 그의 수하 장병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주보의 관저를 습격하여 이를 불태워 버렸다. 자다가 놀라서 깨어난 주보는 맨발로 걸어가서 부용문(芙蓉門)을 두드리며 후루도를 불러 반란군과 싸우게 하였으나, 곧 후루도도 반란군에 가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란에 대처할 별다른 수단을 강구할 수가 없었던 주보는 가족들을 데리고 도보로 청양문(靑陽門)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상주(常州, 현 장쑤성 창저우 시)로 달아나서 자사(刺史) 정종실(丁從實)에게 의지하였다. 유호는 주보의 막료들 대다수를 죽이고 관아를 점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3월 19일에 설랑을 관아로 맞아들여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이에 앞서 주보는 이전에 조용부사(租庸副使)를 겸임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 안에는 많은 금은보화들과 재물들이 비축되어 있었으나, 모두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다.[3]

패망[편집]

그러나 설랑에 의한 진해군 번진의 점거에 대해서는 아주 반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항주자사(杭州刺史, 현 저장성 항저우시) 전류는 설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의 부장인 동안도장(東安都將) 두릉(杜稜)・절강도장(浙江都將) 완결(阮結)・정강도장(靜江都將) 성급(成及) 등이 지휘하는 군대를 출동시켜 설랑을 공격하게 하였다. 887년 12월 18일, 완결은 진해군 번진의 본거지인 윤주(潤州)를 함락시키고 설랑을 사로잡아 항주로 압송하였다. 이듬해인 8881월 28일, 전류는 설랑을 참수하고 그의 심장을 도려내어 주보의 영전에 제물로 바쳤다. (이 때 주보는 수개월 전에 이미 죽고 없었다)[2]

출전 및 각주[편집]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