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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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인물)
『송강방언도(松江邦彦圖)』의 서계조복상(徐階朝服像)
『송강방언도(松江邦彦圖)』의 서계조복상(徐階朝服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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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엄숭(嚴嵩)
후임 이춘방(李春芳)

이름
본명 서계(徐階)
별명 자(字) 자승(子升)
호(號) 소호(少湖)
별호(別號) 존재(存齋)
시호 문정(文貞)
신상정보
출생일 홍치(弘治)16년(1503)
출생지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 선평현(宣平縣)
사망일 만력(萬曆)11년(1583)
사망지 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
경력 *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 황주동지(黃州同知)
  • 절강안찰첨사(浙江按察僉事)
  • 강서안찰부사독절민학정(江西按察副使督浙閩學政)
  •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 예부상서입직무일전(禮部尙書入直無逸殿)
  •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
  • 동각대학사장예부사(東閣大學士掌禮部事)
  • 무영전대학사겸이부상서(武英殿大學士兼吏部尙書)
저작 *『世經堂集』27권
  • 『少湖文集』7권
  • 『徐氏族譜』5권
  • 『明世宗實錄』
  • 『承天大志』

서계(徐階)(1503~1583)는 자(字)는 자승(子升), 호(號)는 소호(少湖) 또는 존재(存齋)이다. 명조(明朝) 남직례(南直隷) 송강부(松江府) 화정현(華亭縣)(현재 중국 상해시(上海市) 송강구(松江區))출신이다.[1][2] 명대 정치가이자 문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관직은 내각수보(內閣首輔), 이부상서(吏部尙書), 건극전대학사(建極殿大學士)를 지냈다.

서계는 어려서 공부를 잘했고, 소년시기에는 양명학(陽明學) 강우학파(江右學派) 문인인 섭표(聶豹)와 교류했다.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거인(擧人)이 되었다. 20세에는 전시(殿試)에서 탐화(探花) 즉 3등을 하여 양정화(楊廷和)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嘉靖) 연간 초기, 장총(張璁)이 조정에서 집권하였을 때, 서계는 장총의 의견에 반대하였다가 폄직되어 북경성(北京城)에서 쫓겨났다. 이로 인해 당시 가정제(嘉靖帝)는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錄用)'는 말을 써서 돌에 새겼다. 이후 서계는 지방에서 수십년간 독학(督學)직을 전전한 후, 하언(夏言)의 도움으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몇 년 간 국자감(國子監)에서 근무하며 양계성(楊繼盛) 등의 언관직에 있던 대신들을 알게 되었고, 이후 명조 중앙 조정 최고 행정 기관인 육부(六部)를 전전했다. 이후 예부(禮部), 이부(吏部), 한림원(翰林院) 등 중요 기구에서 주요 관직을 맡았는데, 한림원 시절 훗날 대신이 되는 장거정(張居正)과 고공(高拱) 등을 학생으로 만났다.

이후 서계는 그 유명한 청사(靑詞)로 무일전(無逸殿)에 입직(入直)하였고, 위기일발의 경술지변(庚戌之變)을 냉정히 처리하였다. 이때 서계는 예부상서(禮部尙書) 직책으로 북경성 방어를 담당, 적군과의 대적을 질질 끄는 방식으로 북경성 함락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이부(吏部), 예부(禮部), 태의원(太醫院)의 적폐를 청산하고 행정 효율을 제고했다. 가정31년(1552) 입각(入閣) 후, 서계는 엄숭(嚴嵩)의 조정 농단으로 수 년 동안 은인자중하였고, 후에 엄숭의 수보(首輔, 명조의 재상에 해당) 자리를 이어받았으며 엄숭의 정치를 모두 반대,[3] 이른바 “삼어(三語)” 정강으로 내각의 운용 실태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가정 말기, 서계는 가정제에게 승천부(承天府) 남순을 권유하는데 성공, 대량 토목 공사를 일으켰다. 가정제는 말년에 이르러 도교(道敎) 신선 사상에 심취하여 방사(方士)들이 황제에게 불로장생약으로 속여 올린 단약(丹藥)을 복용하였으나 도리어 가정제는 병이 깊어졌다. 가정제 임종 즈음에, 서계는 가정제에게 단약 복용 중단을 권하였고, 동시에 황제 곁의 방사들과 이들과 결탁한 태감(太監)들을 일체 처형하였다. 가정제 붕어 후, 서계는 『가정유조(嘉靖遺詔)』와 『융경등극조(隆慶登極詔)』를 작성하여 하달시키자, 조야의 대신들이 경하를 표시, 양정화가 작성한 『가정등극조(嘉靖登極詔)』와 함께 '정시정종제일정(正始正終第一政)'이라 지칭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사람 지대륜(支大綸)은 오히려 서계가 도교 성향이 짙은 청사(靑詞)를 써서 입직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임기 중에는 아첨을 일삼고 영함하면서 어떤 정치적 공적도 세운 것은 없었으며, 융경(隆慶) 연간에 가서야 개선된 바가 있게 되었다고 비판하였다.[4]

가정제 사후, 일찍이 융경제(隆慶帝)를 보좌한 공으로 서계는 이전 그대로 수보에 올랐다. 서계는 융경제와 외정(外廷) 간의 갈등을 여러 차례 조율하면서, 2년 동안 여러 차례 상주문을 작성하여 환관들의 권력 장악을 저지, 융경2년(1568)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서계는 17년동안 내각에 머물렀으며, 원보(元輔) 즉 수보 자리에만 7년을 있었다. 40여년 정치 생활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원신(元臣)”,[5] 혹은 “명상(名相)”이라 칭했다.[6] 서계는 지모가 풍부하고 아량과 재주 모두 뛰어나, 풍몽룡(馮夢龍) 등으로부터 존숭되었다.[7] 현대 학자들은 서계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일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조인다. 담평(譚平)은 서계와 그의 학생(學生) 장거정(張居正)을 대비시키면서, 장거정에 비해 서계가 더욱 침착하면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은 더 적었다고 평가하였다.[8]

서계는 임기 중에 장거정 등 후대에 대신이 될 학생들을 길렀다. 임기 중에는 조정 내 내각의 위상을 개혁하려 하였고, 이는 명대 후기 내각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그는 신진관원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방식대로 환관들을 교도하여 유근(劉瑾)과 같은 악덕 환관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막고, 이로써 환관들의 조정 내 위상과 역할을 바꾸고자 하였다. 또한 항왜명장(抗倭名將) 장경(張經)이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호종헌(胡宗憲)이 옥중에서 죽은 일 모두 서계가 하였으며, 심지어 고공과 장거정의 불화 역시 서계와 무관하지 않았다.[9][10] 사직 후, 가중 자제들의 악행에 연루되어, 서계는 여러차례 투옥될 뻔하였고, 친구에게 구원 서신을 작성하였으며, 고공 등은 이전의 사건으로 서계를 힐난하기도 하였다. 만력11년(1583) 서계는 화정(華亭) 본가에서 사망하였다. 태사(太師)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내려졌다.[11]

초기생애[편집]

홍치(弘治) 14년(1501), 서보(徐黼)가 절강(浙江) 선평현(宣平縣) 현승(縣丞)에 부임했다. 3년후인 홍치16년 9월 30일, 서보의 셋째 부인 고씨(顧氏)가 선평현에서 서계를 낳았다. 돌이 되었을 즈음 여종의 실수로 서계는 우물에 추락하였고 구출된 후. 3일동안 혼수상태에 있다가 간신히 깨어났다.[12][13] 정덕2년(1507), 5세가 된 서계는 부친이 선평지현 임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괄창령(括蒼嶺)을 지날 때 다시 사고가 발생, 서계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고 생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생모 고부인은 오래동안 통곡하였다 한다.[14] 다행히도 서계의 옷자락이 나무에 걸려 추락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15][16][17]

얼마 후, 서계는 한 고찰에서 공부하였다. 이 절은 본래 귀신이 많다고 소문났지만 서계가 공부할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 서보는 서계가 매우 특수하다고 생각하였고, 스승을 찾아 서계에게 소학(小學)을 전수하게 하였으며, 줄곧 사서(四書)를 배워, 단시간 내에 사서 전문을 암송할 수 있었다.[18] 정덕6년(1511) 서보가 영도현(寧都縣) 현승이 되면서 서계는 아버지를 따라 강서성(江西省)으로 이사하였다.[19] 하루는 서보가 다른 성에서 영도로 돌아오나 서계는 아버지를 마중 나갔는데, 이때 서보는 웃으면서 '아비가 멀리서 돌아오고 아들이 멀리 나와 맞이하니 부자의 은혜는 천성이다(父遠回子遠迎, 父子之恩天性也)'라고 하자, 서계는 '임금이 위에 계시고 신하가 아래에 있으니 군신의 의리는 인륜입니다(君居上臣居下, 君臣之義人倫哉)'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서보는 서계에게 속문(屬文)을 가르쳤다. 화정현으로 돌아온 후, 서계는 현성 서쪽 호수 북측의 소호(少湖)에서 공부하였다. 이에 스스로 '소호(少湖)'라고 호를 지었다.[20] 후에 서계는 『우관루기(雨觀樓記)』를 지어 비오는 가운데 호수를 볼 때의 자연과 공명하는 정감을 토로하였다.[21] 칠언율시(七言律詩) '제서호서경(題西湖小景)'은 초가를 짓고 평생을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서호 주변 풍경을 서술하였다.[22]

정덕12년(1517), 15세가 된 서계는 부현학(府縣學)에 들어가 생원(生員)이 되었다.[23] 이때 광서안찰첨사(廣西按察僉事) 반규(潘奎)를 좌사(座師)로 삼았지만, 어린 서계는 지나치게 반규와 접촉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24] 2년 후, 서계는 우수한 성적으로 응천부(應天府) 향시(鄉試)에 응하였지만 떨어졌다.[25] 1년 후, 섭표가 화정현 지현으로 부임하면서, 학생들과 학문을 논할 때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국기(國器)'라고 생각하였고, 서계에게 양명학(陽明學)의 심학(心學) 개념을 전수해 주면서, 섭표는 서계의 새로운 좌사가 되었다.[26][27][28][29][30][31]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서계는 가정원년(1522) 임오과(壬午科) 향시에 합격하였다.[32] 주고관(主考官) 동이(董圯)가 서계의 재능을 알아보고, 시험지에 1등이라고 기입하렸다가 마지막에 7등이 되었다. 동이가 사망한 후, 서계는 동이의 묘지명을 지어주었는데, 서계는 자신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동이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33]

가정연간 생애[편집]

출사[편집]

가정2년(1523), 서계는 경사(京師)에 가서 계미과(癸未科) 회시(會試)를 보았다. 당시 형부상서(刑部尙書) 임준(林俊)은 서계의 책론(策論)을 본 후 서계가 장원(狀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대학사(大學士)들은 모두 서계가 3등인 탐화(探花)여야 한다는데 동의하였다. 따라서 전시(殿試) 후에 서계는 탐화로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에 제수되었다.[34][35][36][37][38][39] 양신(楊愼)으로 인해 자리에 없었던 양정화(楊廷和)가 서계를 만나 후 차보(次輔) 비굉(費宏)에게 서계의 잠재력이 1,2등보다 뒤지지 않은데 어째서 서계가 장원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한다.

서계가 급제한 후 섭표는 직접 찾아가 서보(徐黼)에게 축하를 표하였고 서계에게 시 한 수를 지어줬다.[40]

寄少湖太史
空翼以夸千里捷
咻齊須諒數年迂
文宗左傳今成癖
德蓄前言始成儒
少壯莫叫嗟老大
格天勳業及時圖

서계의 급제 소식을 들은 후, 서계의 숙부는 만약 서계가 낙장한다 해도 여전히 편안하게 잘 수 있는지를 질문받았다. 이때 숙부는 조카가 이미 급제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답했다 한다. 그리고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편히 잠들었다고 한다. 후에 서계 부모고 증봉(贈封)되어 서계는 재삼 요청하여 특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허락을 황제로부터 받았고, 서계는 귀향하여 결혼하였다.[41] 모친 고부인(顧夫人)은 특별히 서계에게, 자신이 처음에 비녀를 팔아 밥을 사서 서계의 스승과 벗들을 대접한 일을 잊지 말며, 진사 급제하여 사치하게 되어 근검절약과 겸손의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가정3년(1524) 섭표가 복건순안어사(福建巡按御史)로 갈 당시, 고향 화정의 학생들이 작성한 『사기(祀記)』에서 서계는 자신은 당시 섭표의 문생(門生)이었으며 섭표가 준 영향이 매우 깊다고 말하였다.[42] 당시 서계는 몸이 왜소하였지만 피부는 희고 맑았으며 풍채를 주목받았다. 또한 책읽기를 좋아하고 마음에는 큰 뜻이 있었으며 왕수인(王守仁)의 문인을 따라 사방으로 유학(遊學)한 적도 있기에,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43]

얼마 후, 서계는 대례의(大禮議) 사건으로 폄적된 양신(楊愼), 안반(安磐), 왕원정(王元正)을 만났다. 서계는 세 사람을 위해 여비를 마련하면서 속으로는 공헌을 한번 해보자고 하였지만 부모가 살아계셨기에 상당히 망설여졌다. 계속 북상하던 서계는 청원(淸源)을 지날 때쯤 꿈에서 부친이 계속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갔으나, 팽성(彭城, 오늘날 서주徐州)에 이르러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길에서 크게 울며 화정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이후로 3년동안 서계는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가정6년(1527) 복직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서계는 환관(宦官)들을 가르치는 내서당(內書堂)에서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전에는 관원들이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면 대부분의 경우 환관들을 경시하였고 가능한 오래동안 길게 끌거나 수업이 늦어지거나 조퇴하기 일수였다. 질문이 있어도 대답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문장을 읽혀도 읽지 못하거나 몇 구만 지적하는 수준이어서, 문장을 이해하는지 여부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서계는 아침 일찍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내서당에 와서 가르치고, 오후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떠났다. 또한 서계는 매 환관 학생 한 명마다 엄하게 관리하였고, 전문을 암송하지 못하면 자신의 강의 책상 앞에 서서 읽게 하였으며, 재차 못 암송하면 문밖에 무릎을 꿇고서 계속 읽게 하였고, 그래도 암송 못하면 정원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 읽게 하여, 전부 암송해 읽어야 비로소 그치게 되었다. 이외에도 서계는 가르칠 당시에도 글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환관들에게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제도나 정치를 어기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당시 가정제가 새롭게 등극하면서 환관의 권세는 정덕(正德) 연간에 비해 많이 축소되었기에 많은 환관들이 불만을 가졌다. 이에 대해 서계는 '정덕 이래 환관들은 서로 교만해져서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황상께서 즉위하신 후론 다소 이를 억제하시자 소대 환관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공들은 경과 사를 강설할 때마다 태조와 태종의 제도로는 감국(監局)의 환관들이 4품에 불과하였고 정사에 간섭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선덕 연간 이후에 총애를 입어 망포(蟒袍)를 입고 옥대(玉帶)를 차서 간접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것이 정덕 연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일을 배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또한 유근(劉瑾)이나 장웅(張雄) 등은 점점 교만해 질수록 화를 입는 모습은 더욱 비참하였다. 결국 자신에게 무익할 뿐 어찌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 황상께서 공들을 대우하시는 것은 정덕 연간에 비하면 가벼운 듯하지만, 태조(太祖)와 태종(太宗) 시기에 비하면 더욱 두터워졌다. 또한 이것은 바로 공들을 보전하기 위한 까닭이니, 반대로 원한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환관들이 매우 감동했다 한다.[44] 3년의 가르침 이후, 환관들은 모두 서계가 잘 가르친다고 칭찬하였다. 심지어 서계가 폄적되어 북경성을 나갈 당시, 다시는 서계의 수업을 듣지 못하여 슬픔에 젖은 10여 명의 환관들이 좌문(左門)에서 기둥을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내서당 수업 외에도 서계는 한림원편수였기에, 훗날 친구이자 왕씨심학(王氏心學)의 문인인 나홍선(羅洪先)과 교제하였다. 서계와 나홍선은 후에 대례의(大禮議) 중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폄적당하였다.[45]

예의지쟁(禮議之爭)[편집]

가정9년(1530) 10월 15일, 가정제는 칙을 내려 장총(張璁)(혹은 장부경張孚敬)을 총재(總裁)로 하여 교사(郊祀)를 준비하는 『사의성전(祀儀成典)』을 편찬하도록 했다. 서계도 찬수관(纂修官)으로 징발되었다.[46][47] 장총은 이때 공자(孔子)의 문선왕(文宣王) 작위를 폐지하고 지성선사(至聖先師)로 할 것을 건의하였고, 동시에 공자의 신상도 목제 신위로 바꾸는 등 제사 규격을 낮출 것도 건의했다.[48][49][50] 이에 가정제는 예부(禮部)에서 한림원과 회동하여 논의하도록 하였다. 10월 28일, 서계는 상주문 '논공자사전(論孔子祀典)'을 올렸다. 상주문에서 서계는 공자는 버릴 필요가 없는 칭호 3개와 버릴 수 없는 칭호 5개를 제시하였고, 봉호(封號)와 문묘(文廟)는 모두 조제(祖制)에 따라 원상복구할 것을 요청하였다.[51] 11월 1일, 조회에서 장총은 서계를 질책하고 서계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비난하였다. 서계는 장총에게 의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배반한다는 말이 가능하냐고 반박하였다.[52] 서계의 이 행동은 천하 선비들의 칭찬을 얻었다.[53] 이때 어사(御史) 여관(黎貫) 등은 서계를 따랐으며, 조제를 회복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분노한 장총은 어사 왕굉(汪鋐) 등에게 서계를 탄핵하도록 하여, 서계가 주도자라는 사유로 중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가정제도 서계를 녕신(佞臣, 간신)으로 몰아붙이고 궁궐 기둥에다 '서계는 소인이니 영원토록 기용하지 않는다(徐階小人, 永不敍用)'라고 새겼다.[54][55][56] 그리고 문연(聞淵)과 당룡(唐龍) 등의 도움 하에, 제명된 서계는 연평부추관(延平府推官)이 되어 중앙 이외 지방을 떠돌았다.[57][58] 서계는 모친 고부인과 헤어질 때, 고부인은 서계를 꾸짖지 읺았고 서계에게는 아들이 직언하다 폄적된 것은 자신에게 영광이라고 말하며 서계를 위로했다. 서소(徐旒)도 서계에게 서신을 보내어 좋은 일이니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59]

가정10년(1531) 4월, 서계는 연평부(延平府)에 도착하여 '저군작(抵郡作)'이라는 시 한 수를 썼다.[60] 시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공헌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연평부추관 임기 중 서계는 정경운(鄭慶雲)과 황작(黃焯)을 만났다. 이들은 서계의 환난지교(患難之交)로서 서계는 이 두 사람과 웃으면서 지냈다고 회상하였다고 한다.[61] 묘지명에서 '정공은 강개하고 절도가 있고 황공은 여유롭고 절도가 있다(鄭公慷慨有節, 黃公攸然有度)'고 하는 등, 양자는 성격이 다르지만 좋은 친구였다.[62] 몇 년 후 서계는 두 사람이 말한 것과 생각한 것을 채용하려 했으나, 두 사람은 각각 가정17년(1538)과 가정26년(1547) 사망하였기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연평부추관 재임 당시, 서계는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였고 부고(府庫)를 조사하였으며 음사(淫祠)를 철폐하고 양호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현지 교수(敎授) 등석(鄧析)에게 소학의 기초를 가르치게 했다.[63][64] 후에 우계(尤溪)에서 비적들이 출현하였다. 당시 분순도(分巡道)는 비적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서계는 삼로(三老)의 자리를 현상으로 내걸고 소탕하기로 하였고, 얼마 후 두목을 포함하여 120명을 체포하였다. 이 일로 서계는 현지 백성의 일치된 지지를 받았다.[65][66] 또한 현지 풍속에 대한 감화로 서계는 연평으로 가족을 이주시키려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67][68] 3년 후인 가정13년(1534) 3월, 서계는 연평에서의 3년동안의 정적(政績)이 두드러지면서 호광(湖廣) 황주부동지(黃州府同知)에 부임하였다.[69]황주로 가는 날 연평 백성들은 길 양쪽에 줄을 지어 송별하였고, 연평부학(延平府學) 학생들은 건녕현(建寧縣)까지 따라가 서계를 송별하였가. 서계는 이들에게 문정선생(文靖先生) 공천윤(孔天胤)과 문질(文質) 선생을 배우고, 얻는 것이 작다 하여 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지방 독학 생활[편집]

서계는 황주부(黃州府)로 가는 도중 엄릉(嚴陵)을 지날 즈음, 절강안찰첨사독리학정(浙江按察僉事督理學政)으로 승진했다.[70][71][72][73][74] 서계는 고향 화정으로 돌아가 7일 간 머물던 중 두 번째 정부인 장씨(張氏)를 맞이했다. 후에 모친 고부인의 명을 받들고 절강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계는 가흥(嘉興)의 추시(秋試)를 주관하였다. 이때 호주(湖州)에서 온 한 수험생이 낙방하자 서계에게 원인을 물었고, 서계는 "글이 난삽한데 어떻게 합격할 수 있는가?"라고 답하였다. 고시생이 원망 섞인 말투로 말하였다. "과거란 참 어렵습니다. 저번엔 주고관(主考官, 즉 감독관)이 남삽한 문장을 좋아하길래 난삽한 글을 쓰면 되었는데, 이번 주고관께서는 평이한 문장을 좋아하실 줄 몰랐으니, 어떻게 할 수 있을런지요?" 서계는 꾸짖으며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난삽하면 제학(提學)이 평이한 걸 좋아하더라도 그대는 평이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만약 그대의 문장이 평이하면 제학이 난삽한 걸 좋아하더라도 그대는 난삽한 말투로 바꿔서는 안된다. 지금 그대는 주견이 없다. 타인의 기호를 맞춰주고자 누차 자신의 습관을 고쳤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태평성대에는 군자가 되고 난세에는 소인이 되려는가?" 이에 고시생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75] 또 한 명의 생원(生員)은 답안에 “顔苦孔之卓(안회가 스승 공자의 탁월함에 미치지 못하여 괴로워하다)”이라는 것을 적었다. 서계는 이 구절이 매우 기괴하다 생각하여 학생을 4등으로 주고 시험지에 “杜撰(근거가 없는 말)”이라고 평가하였다. 끝이 난 후, 생원이 와서 강평을 들으며 이 구절은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서계는 그자리에서 생원에게 사과하고 말하였다. "본 학도(學道)가 운좋게 젊어서 진사가 되었기에 학문을 제대로 배운적이 없었는데, 오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생원의 답안을 1등으로 고쳤다. 사람들은 서계의 아량을 칭찬하였다.[76][77] 절강에서 3년간 독학 생활을 하면서, 서계는 2차례 이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참삼봉후공입촉서(送大參三峰侯公入蜀序)'에서 서계는 절강 태주(台州)로 집을 옮겨 “여러 현사들과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고자 한다(與諸賢相追逐)”고 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78]

가정15년(1536) 10월, 서계는 강서안찰부사제독학정(江西按察副使提督學政)으로 옮겼다.[79][80][81] 강서에서 서계는 문체를 바로잡고 선비의 습관을 단정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한편, 왕수인(王守仁)의 심학(心學)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왕수인의 사당인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를 세웠다. 이는 서계에게 호평을 가져다 주어, 많은 사인들이 가서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였다.[82] 후에 서계의 가르침에서 나온 강서성 학생들은 대다수 조정 안팎에 관직에 진출하여 대성(臺省, 언관 등 감찰기관)에서 활약하며, 도처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서계는 본인은 엄숭(嚴嵩)이라는 이름을 매우 흠모하여 '기제엄학사영산당(寄題嚴學士鈐山堂)'이라는 시를 한 수 지어[83][84] 엄숭의 절개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한편, 하언(夏言)은 강서에 사는 친척이 행진(幸進, 요행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원하였으나, 서계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하언은 서계를 좋아하지 않았다.[85] 당시 세간에서 '사철어사(四鐵御史)'로 불리던 풍은(馮恩)은 적수(謫戍, 폄적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어 군호에 편입되어 변방 수어 임무를 맡는 처벌)로 광동(廣東) 뇌주(雷州)로 가는 길에, 강서 남창(南昌)을 지나게 되었다. 서계는 소식을 듣자마자 학생들을 이끌고 가서 풍은을 맞이했다.[86] 심지어 서계는 '증풍시어남강수뇌주(贈馮侍御南江戍雷州)'라는 글을 써주기도 했다.[87] 시는 풍은이 가정11년(1532) 장총과 방헌부(方獻夫) 등에게 반대한 후 하옥되어도 굴복하지 않는 충신과 정절을 칭찬하는 것이다.

북경으로의 귀환[편집]

가정18년(1539) 5월, 황태자(皇太子)가 입학하면서, 풍은이 하언에게 한 추천을 거쳐,[88] 하언과 서계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못하였음에도 하언은 서계를 북경으로 불러들여 사경국세마겸한림시강(司經局洗馬兼翰林侍講)으로 승진시키고 4품 복색을 허용하는데 동의하였다.[89][90][91] 서계가 북경으로 돌아가기 전, 고부인은 서계에게 황제가 장부경의 일 이후 서계를 기용하는 만큼, 성심성의로 일을 해야 하며, 자신을 그리워하여 공무를 그르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섭표와 이별할 당시 섭표는 서계에게 시를 써주었는데, 이를 통해 섭표는 선행이 지식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하다고 충고하였다.[92] 서계는 북경에 가서 추수익(鄒守益), 당순지(唐順之), 나홍선(羅洪先) 등 선배들과 심학을 논하였다.[93][94][95] 얼마 후, 가정19년(1540) 봄, 고부인은 북경에 유학하러 가는 서계의 동생 서척(徐陟)을 배웅하였으나, 여유가 생기면 서척이 급제한 후 형 서계와 함께 돌아와 자신의 70세 생일을 축하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당시 서계는 동료 22명과 함께 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설선(薛瑄), 좌서자(左庶子) 동승서(童承敍) 등의 문묘(文廟) 배향 문제를 건의한 이유로 문제에 처하였다. 가정제는 조제(祖制)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상주문에서 불경한 언어를 사용한 어사 여광순(呂光洵) 등에게 봉록 2개월치 삭감을 지시했다.[96] 반년 후, 고부인은 돌연 사망하였으며, 이에 서계는 가정20년(1541) '오월오일회태공인(五月五日懷太恭人)'이라는 시를 썼다.[97] 시에서 서계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읊었다.[98] 모친 사망으로 재차 정치 중심으로 들어간 서계는 상을 치르고자 귀향하였고, 모든 관직을 내려놓아야 했다.[99][100]

가정21년 12월(서력 1543년 초), 상기가 끝난 서계는 조정에 돌아가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에 승진임명되었다.[101][102][103][104] 재임 중 서계는 국자감의 발력(撥歷)을 정리했다. 원래 국자감에는 감생(監生)을 각 부(部)에 파견하여 일하게 하였으며 이부문선사(吏部文選司)가 열었으나, 서계가 부임한 후에는 각 감생의 구체적인 업무 일자는 매월 방문(榜文)으로 공개, 이전에 존재한 '투발(偷撥)' 등의 폐단을 두절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서계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권귀들을 거절하였다. 이에 감생들은 서계를 존중하였다. 이후 서계는 감생에게 지급되는 선은(膳銀, 일종의 학비)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전 좨주들은 선은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하여 간섭하지 않았으며, 선은을 지급하고 관리하는 전권을 가진 전부(典薄)들은 대부분 선은을 횡령하면서 핑계를 대고 감생들에게 변명하였다. 이에 서계는 인원수를 기록하게 하고 매일 당관(堂官) 1명을 선발하여 전부들 곁에서 감독하게 하여, 감생들에게 선은을 전부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 매월 파견하는 당관에게 전부(典薄)를 따라 찬미(饌米)를 내어주게 하고, 횡령하는 것을 방지하게 하였다. 후에 직언으로 이름 난 많은 언관(言官)들도 서계가 좨주였을 당시의 문생(門生)들이었다. 양계성(楊繼盛)의 경우, 서계로부터 '일명천재(一名奇才)'로 지칭되었으나 지도가 결여되었다.

육부를 전전하다[편집]

가정23년(1544) 11월, 서계는 정적이 두드러져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으로 승진하였다.[105] 1개월이 채 안 되어 다시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으로 전직하였다.[106][107][108] 당시 서계는 곧바로 담벼락에다가 자신은 21세에 급제하였고 43세에 천관(天官), 즉 이부상서를 보좌하게 된 것은 국가의 은혜 덕분이라고 적었다. 임기 중 서계는 조용히 보신하지 않았으며 관리의 청렴을 독려하였다. 또한 기존의 이부의 풍토를 바꾸어 자신을 낮추었으며, 부하관원에게 변방 수비나 지방관들의 행정을 물었다. 이로 인해 많은 관원들의 존경을 받았다.[109][110] 또한 당시 이부상서 웅협(熊浹)의 신임을 얻었다. 가정24년(1545) 3월, 서계와 웅협 및 도찰원좌도어사(都察院左都御史) 주용(周用) 등이 하급 관원의 고찰(考察, 인사고과)을 실시하였다. 선례에 따라 이들은 먼저 자진사퇴를 요청하였고, 이후 가정제는 지를 내려 성심성의껏 고찰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111] 후에 웅협이 직언으로 간언하는 바람에 파직되면서, 가정24년 12월, 서계는 이부우시랑애서 이부좌시랑으로 승진하였고, 형부(刑部)에 있던 한방기(韓邦奇)가 서계의 보좌가 되었다.[112] 후임 이부상서 당룡(唐龍), 비채(費寀), 주용(周用)은 이전처럼 서계를 중용하였다.[113] 그러나 이들은 연로하고 많이 아팠던 탓에 서계는 이들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이부 업무를 장관하였다. 이때 많은 이들로부터의 뇌물 증여 시도가 있었음에도 서계는 모두 거절하였다. 또한 후에 서계가 추천한 송경(宋景)이나 장악(張岳) 등은 모두 세상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 중임을 맡을 만한 대신이었다.[114]

가정25년(1546) 7월, 이부 선발에서의 문제로 인하여 이부상서 당룡은 연로하고 쇠약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고, 부하 서계 역시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봉록이 2급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115] 8월, 서계는 예제(禮制)에 따라 '제사직(帝社稷)'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에 제주를 보좌하였다.[a][116] 후에 서계는 대선(大選, 관리 선발)의 구체적인 방법을 확정하는 책임을 맡았다. 서계는 우선 이전에 사용하던 품계(品階) 및 자력(資歷)을 이용하는 복잡한 절차를 폐지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중하 삼등급으로 나눠, 상중하를 각자 인사 문서에 적어 두는 방식으로 함으로써 공력을 아끼게 뒤었다. 이로 인해 서계는 칭찬을 받았다. 가정26년(1547) 주용이 사망하면서 문연(聞淵)이 이부상서가 되었고, 6월, 서계와 함께 제사직 제사를 지냈다.[117] 후에 문연이 선배 신분을 이용하여 독단적으로 행동하면서 서계는 불쾌해 하였고, 상주를 올려 전직을 요청하였다.[118][119] 이에 서계는 이부에서 벗어나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를 겸임하였고, 장거정(張居正) 등이 있던 서길사(庶吉士)들을 가르쳤다.[120][121] 8월, 서계는 3품으로 임기 3년을 다 채운 것으로 인해, 아들 서번(徐璠)이 국자생(國子生)이 되었다.[122]

가정27년(1548) 2월, 서계는 한림원(翰林院)을 장관하였다.[123][124][125]8월, 서계, 구양덕(歐陽德), 문연 등은 역대 제왕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126] 가정28년(1549) 정월, 엄숭(嚴嵩)이 대신협보(大臣協輔)를 산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2월, 이부는 문연, 장치(張治), 한방기(韓邦奇), 구양덕, 이본(李本), 서계를 정추(廷推, 명대 고급 관원 인사 제도 중 하나로, 조정 대신이 추천하고 황제가 선발하는 제도)하였고, 가정제는 장치(張治)와 이본(李本)의 이름을 합치면 '치본(治本, 정치의 근본)'이 된다는 이유로 장치와 이본을 선발하여 입각(入閣, 내각에 들어감)시켰다.[127][128] 서계는 며칠 뒤 손승은(孫承恩)을 대신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129][130][131][132] 당시 서계와 동료들은 엄숭소사대학사상(嚴嵩少師大學士像)에 들어갈 찬사를 썼는데, 서계는 엄숭의 덕행이 비길 바가 없다고 칭찬하였다.[133]

예부 관장[편집]

3월, 장경태자(莊敬太子) 주재학(朱載壑)이 관례(冠禮)를 올리면서, 서계는 예부상서로서 칙계(敕戒)를 선독하였다.[134] 그러나 태자는 이틀 만에 사망하였다. 서계는 태자 시호를 '장경'으로 한다는 책(冊)을 받들고 예부에게 천하에 반포하도록 지시하였다.[135] 이에 따라 예부를 데리고 장례 의례 관련 초고를 작성하는 책임을 담당하였다. 서계는 두예(杜預)가 찬술한 『통전(通典)』을 가지고 가정제에게 설명하여, 태자는 사망하였지만 책봉한 지 오래 되었으며 감국(監國) 경험도 있기에 백관의 복상(服喪)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엄숭은 가정제가 내린 '백관의 복제는 없다(百官服制可無)'는 성지를 이유로 백관들에게 청의(青衣)를 입고 각대(角帶)를 두르게 하였다. 서계는 강렬히 반대하였다. 서계는 소의(素衣)를 입고 곡상(哭喪)하는 것은 이전에 사례를 기재한 적이 없으며, 가정제의 지시도 없었는데 누가 감히 마음대로 이러한 일을 저질렀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서계는 차라리 예법을 지켜 처벌되는 것이 낫지 처벌을 피하고자 예법을 파괴하지는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곡림(哭臨) 시에 한 환관이 가정제에게 보고하였고, 가정제는 전원 최복(衰服, 상복)으로 갈아입을 것을 지시하였다.[136][137]

곧이어 서계는 『대명회전(大明會典)』 편찬 사업의 부총재(副總裁)에 임명되었다. 가정8년(1529) 당시 한림원 편수였던 서계는 양일청(楊一淸)을 총재(總裁)로 한 『대명회전』 편찬 사업의 찬수관(纂修官)으로 임명된 적이 있었다.[138] 이때 서계는 양일청이 가정8년부터 가정23년(1544)까지 작성한 초고와 여러 사(司)들의 새로운 사례들을 가지고 네 차례 수정하였고, 가정29년(1550) 5월에 120권의 회전을 완성하였다. 서계는 완성된 것을 가지고 직접 가정제에게 갔다.[139]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가정중수대명회전(嘉靖重修大明會典)』은 결국 간행되지 못하였다. 만력(萬曆)15년(1587) 대학사 신시행(申時行)을 총재로 한 『만력중수회전(萬曆重修會典)』 228권을 간행하였다.[140] 왕세정(王世貞)은 서계가 중수한 대명회전에 대하여 '뜻과 체례를 창술하였고 강령을 권하였으니, 정연한 일대의 정서이다'라고 고평가하였다.[141]

무일전 입직[편집]

가정28년(1549) 6월, 서계는 청사(靑詞)를 잘 써서 가정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142] 가정제는 서계를 무일전(無逸殿)으로 불러 대학사 장치와 이본과 함께 서계에게도 비어복(飛魚服)을 하사했다.[143][144][145][146] 서계는 무일전에 입직한 후에 내전(內殿) 근무 태의(太醫) 선발 제도를 정돈하였다. 서계는 어의(御醫) 오몽룡(吳夢龍)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봉급만 타먹으면서 마음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며, 궁궐 내 의사 대부분이 은례(恩例)로 들어오고 예부의 3년 고선(考選)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주하였다. 또한 서계는 예부와 태의원(太醫院)의 선발 및 고찰 과정에 변동을 가하여 모든 의사는 3등급으로 나누고 최상등 인재만을 내전에 남기고 나머지는 보내어 공봉(供奉)하게 하고, 태의원으로 하여금 당관(堂官)을 파견하여 직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감독하고, 병으로 계속 이어나가지 못할 경우 보고하도록 하였다. 가정제는 동의하였소, 상주문에서 언급한 오몽룡 등은 모두 혁직(革職)되었다. 서계는 보다 심도있게 조사하여 시험을 본 적 없는 의사 후시태(侯時泰) 등 24명도 파직 처벌하였다.[147] 8월 하순, 습천왕(隰川王) 주준백(朱俊柏)이 130여명의 명봉혼록(名封婚祿)을 받은 적 없는 종실자녀들을 은닉하여, 서계가 상주문으로 참핵하여 산서순무(山西巡撫)와 산서순안어사(山西巡按御史)가 철저히 조사할 것을 보고하였다.[148] 9월 하순, 서계는 문연의 사직으로 비어버린 예부상서직을 이어받도록 회추(會推)되었으나, 가정제는 서계가 소심하고 신중하며 자신과 매우 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149] 외천(外遷)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하방모(夏邦謨)를 임명하였다.[150]

10월, 금릉(金陵)의 향시(鄕試)에서 서계 아들 서번이 대리응시를 요청한 사실이 적발되어, 남경육부(南京六部) 관원 만문채(萬文彩), 양순(楊順), 장감(張鑒)은 이를 이유로 서계를 탄핵하면서 서계의 면직을 요구하였다. 서계는 상주하여 스스로 파직을 요청하였지만 가정제는 서계가 북경에 와 있기 때문에 아들이 남경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서계를 그대로 두었다.[151] 다음해 4월, 예부는 오래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니 황제가 교제(郊祭)를 지낼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서계는 서교(西郊)에 파견되어 청의와 각대를 두르고 예를 행하였다.[152] 그러나 이때 서계는 섭표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서계는 하언(夏言)으로 인해 파직된 섭표가 '재주가 크니 기용할 만하다(才大可用)'고 문서를 작성하였고, 섭표는 다시 조정에 들어가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함으로 순천순무(順天巡撫)에 임명되었고, 이후 경술지변(庚戌之變) 발발 당시 섭표는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었으며, 경술지변에서 공적이 두드러져 서계에게 많은 도움을 안겨 주었다.[153][154] 경술지변 후에도 서계는 섭표를 추천하는 상주를 작성, 섭표를 통해 일하지 않는 내외 신하들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55][156]

경술의 변[편집]

가정29년(1550) 8월 초4일, 만수절(萬壽節)을 맞이하여 가정제가 신하들에게 포상하여, 엄숭은 상주국(上柱國)이 되었고 서계는 태자소보(太子少保)로 승진하였다.[157][158] 이어서 서계는 북경성의 군대가 오랫동안 조련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아는 적들이 경영(京營) 부대를 격파시킬 수 있으므로 위망 있는 장령들을 석방하여 근왕(勤王) 부대를 신속 집결시켜서 반격할 것을 건의하였다.[159] 8월 17일, '엄답(俺答)'으로 불렸던 알탄칸(Altan Khan)은 북경 인근 통주(通州)를 침공하여 노략한 상태에서, 서계는 잇달아 '어로조의(御虜條宜)'와 '청환대내병소견대신계의변사(請還大內並召見大臣計議邊事)', '답변사유(答邊事諭)'라는 상주문을 작성하였다. 가정제는 상주문들을 채택하였다.[160][161] 더욱이 3일 후인 8월 20일, 서계는 다시 '청순시구문(請巡視九門)' 상주문을 올려 대신들을 파견하여 순성(巡城)에 나서도록 하였디만 방어 무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고 군사들은 매우 산만하기 때문에 예부상서로서 직접 순성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다.[162] 이에 가정제는 지를 내려, 서계가 구문수장(九門守將)에게 적군이 북경성에 임박하짐 않았지만 성벽 방어에 주의해야 하며, 시간에 따라 성문을 개폐하고 업무에 소홀히 하지 말 것을 전유(傳諭)하게 하였다.[163] 그러나 다음날, 알탄칸은 북경성 아래까지 임박하여 명으로의 조공(朝貢)을 요구하였다. 이에 가정제는 엄숭, 서계, 이본이 서원(西苑)에서 대책을 상의하라고 조를 내렸다.[164] 엄숭은 가정제를 안정시키고자 알탄칸은 식량을 탈취하러 온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지만, 서계는 알탄칸이 살인방화를 일삼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이후 가정제는 다시 공서(貢書)에 관한 일을 물었고, 엄숭은 예부의 일이라고 책임을 회피하였다. 서계는 정세가 위급하나 성내 수비병은 반격 능력이 없으니 당장은 적을 격노하게 하지 말고 시간을 끌면서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한편, 공서에 한문으로 글자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시간 끌기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가정제는 서계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엄숭도 대세를 따라 가정제에게 조정에 임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165][166][167]

두번째 날, 서계는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상의하게 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국자사업(國子司業) 조정길(趙貞吉)은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심속(沈束)과 주상문(周尙文) 안건이라고 직접 말하였다. 논의를 감시한 환관은 가정제에게 보고하였고 가정제는 만족해 하였으며, 조정길과 금의위(錦衣衛)가 함께 가서 군사들을 격려할 것을 지시하였다.[168] 며칠 후, 서계는 예부 명의로 신하들과 정식 상주하여, 시간 끌기 계책을 관철할 것을 건의하였고, 가정제는 지를 내려 변방 군대가 빨리 와서 원조할 것을 지시하였다.[169] 서계는 후에 친구와의 서신에서, 당시 당국자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세운 대책은 없었기에 자신의 행위에 숨겨진 배후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이 없었다고 진술하였다.[170] 계책을 진헌할 때에는 당국자들에 대하여 비꼬는 부분이 있었는데,[171] 간접적으로 엄숭과 이전의 언론이 대립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엄숭은 서계를 미워하였다. 또한 이전에 하언이 지방으로 떠돌던 서계를 뽑아 올린 것과 가정제가 서계를 중시한 것으로 인하여, 엄숭은 서계를 압박하기로 결정하였다.[172][173][174] 경술의 변 당시 서계가 보여준 행동들은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칭찬받았다. 즉 북경성 수비책략은 대부분 서계로부터 힘입었으며,[175] 많은 부분에서 서계의 책략을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였다.[176] 경술의 변 종료 후, 서계는 경군(京軍)의 전투력 증강과 동시에 군비 지출 감축을 기도하였다. 서계는 불필요한 경조반군(京操班軍) 철회를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줄일 수 있었다.[177]

사상[편집]

정덕(正德) 15년(1520), 심학(心學) 계승자 섭표(聶豹)는 서계의 고향 화정현(華亭縣) 지현(知縣)에 부임하였다. 서계는 학식이 뛰어났기에 섭표는 서계에게 왕수인(王守仁)의 심학을 전수하였다. 좌사(座師) 섭표의 영향 하에 심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 및 "인애(仁愛)" 등 사상에 대하여, 서계는 이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이상에 대입시켰으며, 인민애물(仁民愛物)은 천리자연(天理自然)이며 만물은 '인애(仁愛)' 두 글자로 결부된다고 보았다.[178][179] 서계는 고인(古人)들의 문학(問學)의 목적은 덕성(德性) 추구였지만, 후인들의 학문은 학(學)과 덕(德)을 분리시켰기에 그 본의를 잃었다고 보았다.[180] 이로 인해 정치는 부덕해지게 되고, 도덕(道德), 훈업(勳業), 문장(文章)이 각각 세 길로 나뉘었다는 것이다.[181] 서계 인식 속에 위정자들은 인애라는 양지(良知)를 우선 자기 몸에 시행하고 다음엔 천하에 베풀며, 이렇게 해야 지행합일과 정학불이(政學不二)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182][183]후에 서계는 손승은(孫承恩)이 사직할 때에 서(序)를 지어 조정 대신 중에 교묘하고 화려한 말로 황제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얻게 되는 자들은 훗날 득세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계책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사실은 후환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되며 국가 대사도 일로 인해 망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서계는 여러 관점을 재출하였을 뿐 아니라 후에 다시 경사로 돌아가 관직에 올랐을 때 나홍선(羅洪先) 등 왕씨심학(王氏心學) 전승자들과 함께 유학하며 토의하였다. 또한 영제궁(靈濟宮)에서 강학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매번 수 천 명의 학도들이 영제궁에서 강학을 들을 때마다 수많은 조정 관원들의 위정 이념에 큰 영향을 끼쳤다.[184][185]

권력 장악 이후, “위복은 주상께 돌려드리고 정무는 여러 부서에 돌려주며 인사와 상벌은 공론에세 돌려주자(以威福還主上, 以政務還諸司, 以用舍刑賞還公論)”는 것이 서계의 행정 대강이었다. 중국의 명대사학자 남병문(南炳文)은 자신의 연구를 통하여, 이 세 구에서 서계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곳은 내각(內閣)이 본직으로 돌아가고 육부(六部)가 지녀야 할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내각의 하위조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86] 서계는 이전의 하언(夏言)이나 엄숭(嚴嵩) 등은 전제 정치를 펼쳐 이후로는 이러한 일을 이어서 할 수 없었고, 내각의 권력을 육부에 나눠줘야 하였다고 생각, 내각과 부원(部院)의 관계를 재정비하려 하였다. 강덕성(姜德成)은 서계가 이전의 이른바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의 이른바 '삼양(三楊)'의 내각 운영 방식을 추구하여 내각과 부원이 협력하면 전반 정치를 종합정리하는 내각의 직능을 발휘하고, 가정제가 조정에 끼치는 통제력을 간접적으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가 본다.[187] 담천성(譚天星)은 가정 연간은 내각과 부원의 관계의 전환점이었으며, 서계 역시 가정31년(1552) 내각에 들어가 '정책 결정 기관(決策層)'의 일원이 되었으며, 후에 '집행 기관(執行層)'인 예부(禮部)의 대소 사무를 겸직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각은 명분을 내세워 부원 사무를 개입하게 하였으며, 내각 구성원의 신분으로 사무를 처리하였으나 육부상서(六部尙書) 신분은 아니었다. 서계는 수보직에 오른 이후, 이런 배경 하에서 "以政務還諸司"라는 사상이 발생하였다.[188]

서계는 퇴위 후, 정치에는 더는 관심 갖지 않았다. 해서(海瑞)의 퇴전(退田) 일 안건이 폭발하기 전, 장전산(張全山)은 이전에 이미 서계를 예방하였는데, 장전산은 서계에게 '인(忍)' 자를 서계에게 주면서 해서의 정치에 대하여 인내할 것을 당부하였다. 서계는 도리어 장전산에게 '망(忘)' 자를 주어서 당시의 심리를 드러내었다.[189]

가족[편집]

  • 고조부 : 서덕성(徐德成), 송강부 화정현 소증(小蒸, 현재 상해시 청포구(靑浦區)) 출신[190] 홍무(洪武)18년(1385) 출생, 일생 농민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고 살생을 금하고 채식을 하였기에 고향에선 “서불자(徐佛子)”라고 칭함, 후에 왕씨(王氏)와 결혼하여 외아들 서현(徐賢)을 낳음[191]성화(成化)12년(1476), 서덕성과 왕씨는 각각 음2월과 4월에 사망함[192][193]
    • 증조부 : 서현(徐賢), 서덕성 아들. 영락(永樂) 연간 사람, 세 차례 대학사(大學士) 등에 추증됨, 처 심씨(沈氏)도 1품 고명부인(誥命夫人)에 추봉됨[193]
      • 장남 : 서인(徐仁), 후사 없음[193]
      • 차남 : 서의(徐義), 처 제씨(諸氏)
      • 삼남 : 서례(徐禮), 명락산거사(明樂善居士), 서계의 조부, 자 정의(廷儀), 다섯 차례 대학사 등에 추증되었음, 처 황씨(黃氏)는 처음 숙인(淑人)이었다가 후에 1품 고명부인에 추봉됨
        • 장남 : 서보(徐黼), 서계의 부친, 호 사복(思復), 관은 영도현승(寧都縣丞)에 이름, “철돈(鐵墩)”이라 칭해짐[193]
          • 장남 : 서륭(徐隆) : 서계의 큰형
          • 차남 : 서계(徐階)[193]
            • 장남 : 서번(徐璠), 서계의 장남, 자 노경(魯卿), 심부인(沈夫人) 소생, 관은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름
            • 차남 : 서곤(徐琨), 서계의 차남, 자 양경(揚卿), 장부인(張夫人) 소생, 관은 상보사소경(尙寶司少卿)에 이름
            • 삼남 : 서영(徐瑛), 서계의 삼남, 자 한경(翰卿), 장부인 소생, 육병(陸炳)의 딸과 결혼[194]
            • 장녀 : 서씨(徐氏), 서계의 딸, 광록소경(光祿少卿) 고종례(顧從禮)의 차남 고구석(顧九錫)과 결혼함[195]
          • 삼남 : 서진(徐陳), 서보의 삼남, 서계의 동생
          • 사남 : 서척(徐陟), 서보의 사남, 서계의 둘째 동생
        • 차남 : 서불(徐黻), 서례의 차남, 서계의 숙부
        • 삼남 : 서면(徐冕), 서례의 삼남, 서계의 둘째 숙부
        • 사남 : 서소(徐旒), 서례의 사남, 서계의 셋째 숙부, 응천부(應天府) 정덕경오향시(正德庚午鄕試)에 합격
      • 사남 : 서지(徐智), 서현의 사남, 후사 없음

인물평가[편집]

담천(談遷), 『국각(國榷)』, "화정(華亭, 서계)은 비록 권모술수를 사용했으나 무슨 해를 입었는가?"[196]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서계는 공손하고 근면한 것으로 주지를 결하였고 기량은 깊고 침하다. 비록 지능과 술수에 의존하지만 그 바름을 잃지 않으려 한다."[197]
"서계는 조정에 들어서면 재상의 기량이 있고 좋은 무리들을 보전한다. 가정•융경 연간 정치는 서계가 바로잡고 구원한 바가 많다. 간혹 어긋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큰 줄기는 잃지 않았다."[198]

이후(李詡), 『계암노인만필(戒庵老人漫筆)』 卷8, "서계는 대신의 신발을 신고 가죽옷과 비단옷을 입었으니, 가정•융경 연간에라도 어찌 양정화(楊廷和)보다 뒤질 수 있는가? 다만 권모술수를 약간 사용하고 민심을 듣고 따라 채택하니, 식자들은 유감이 없지 않았다."[199]

황종희(黃宗羲),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선생은 분의(分宜, 엄숭)를 제거하였으니 천하에 큰 공이 있지만 순전히 교활한 임기응변으로 업무에 임하였다. 경재(敬齋)는 말하였다. '일 처리에 지모와 계략을 쓰지 않고 오로지 천리만을 따르니 바로 유자의 기상이다.' 때문에 선생의 농지가 넓고 향론은 선생을 마구 비판하는 것은 물론, 조정에 들어서면 큰 대체를 보니 유자의 기상은 전혀 없으며 패술에 빠져도 스스로 모르는 자이다."[200]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하교원(何喬遠), 『명산장(名山藏)』卷79·徐階 : “徐階, 字子昇, 華亭人.”
  2. 황종희(黃宗羲), 『명유학안(明儒學案)』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 “徐階, 字子昇, 號存齋, 松江華亭人.”
  3. 江西社科院历史所:《严嵩与明代政治》
  4. 지대륜(支大綸), 『皇明永陵編年信史』 卷4, “玄文入直, 傴僂獻諛, 政績碌碌無奇, 至隆慶朝, 纔稍愜公論.”
  5. 심덕부(沈德符),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卷14, “爲時元臣幾軼永嘉而上之.”
  6. 梁希哲:《论徐阶》
  7. 풍몽룡(馮夢龍), 『智囊』 卷1, “不吝改過, 卽此便知名宰相器識. 聞萬曆初年有士, 作「怨慕章」, 一題中, 用'爲舜也父者, 爲舜也母者'句, 爲文宗抑置四等, 批'不通'字. 此士自陳, '文法出在「檀弓」', 文宗大怒曰, '偏你讀「檀弓」!' 更置五等. 人之度量相越, 何啻千里?”
  8. 谭平:《论明代著名政治家徐阶-兼与张居正比较》
  9. 초횡(焦竑), 『헌징록(獻徵錄)』 卷16 '大學士徐公階傳'에는 장경(張經)이 피살된 이유에 대해 왕세정(王世貞)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江南督臣張經, 素貴而汰, 然老將能持重, 守便宜, 不輕與賊鬪. 而惡之者謂(張)經家在閩, 故近賊, 不欲擊以市恩. 而(徐)階信之, 數齕於上. 其後(張)經破賊, 卒不免於死. 前後督臣楊宜•周珫斥, 撫臣彭黯•屠大山•李天寵逮, (徐)階有力焉."
  10. 모곤(茅坤)은 호종헌(胡宗憲)이 서계에 의해 모함당했다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及分宜去, 而華亭當國, 遂陰唆南北諫臺, 論列其事. 曾參, 孝子也, 參之母, 賢母也. 已而人告之以其子殺人者三, 不能不透杼而起. 先帝且憐放之而歸矣, 然華亭且以不殺公, 公或當復從丘壑起家, 異日欄虎而逸之, 禍不測也, 於是又摭述其事. 公逮繫者再, 遂死獄中."(茅坤, 『玉芝山房稿』卷7, 「與吳鳳麓績溪書」)
  11. 『萬曆野獲編』 卷15, "嘉靖二年癸未科探花, 徐階, 松江之華亭人, 仕至少師吏部尙書大學士, 及見萬曆癸未科, 會元李廷機, 去臚唱數日, 卒. 贈太師, 謚文貞."
  12.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중 서계(徐階), "生甫周歲, 墮眢井, 出三日而蘇"
  13.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生甫周歲, 女奴墮之眢井小吏之婦號而出之, 則絶矣, 後三日蘇."
  14.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五歲, 思復公以宣平績還道括蒼嶺, 公復自輿而墮其下, 沈深峭石戟拒無全理, 顧夫人慟哭."
  15.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중 서계(徐階), "五歲, 從父道括蒼, 墮高嶺, 衣掛于樹, 不死, 人咸異之."
  16.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五歲, 從父之任道, 墮括蒼嶺, 衣絓于樹, 得不死."
  17. 『명산장(名山藏)』 卷79·徐階 : "從其父黼亟宣平道括蒼嶺, 墮深壑中, 衣絓于樹, 皆不死."
  18.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思復公又嘗置公于古刹讀書, 刹多魅, 僧苦之, 公宿而魅不出. 思復公始心異公, 俾就外傅授小學, 以至四子甫閱歲悉成誦."
  19. 『가정감주부지(嘉靖贛州府志)』 질관(秩官), "徐黼, 朝威, 直隸華亭人, 正德六年任, 公勤愛民."
  20. 『운간지략(雲間志略)』 卷12, "盖公居華亭縣之城西, 隅有湖潴水, 嘗讀書其上, 故號少湖."
  21. 『소호문집(少湖文集)』 卷3 중 '우관루기(雨觀樓記)', "方其陰雨四凝, 甘雨將注耕者, 休漁者, 走舟行於其間者, 戴笠荷蓑以俟鳧. 鷖鷗鳴呼而往來, 紛然各出其狀, 而吾得靜而觀之, 及其雨也, 水流不波, 岸無飛塵, 縟草佳木, 若醉似臥, 若俯似聽, 芰荷菱茨, 若歡以合, 若怒以離, 旁有奇石, 若洗似靜, 田有蓄水, 若爭以馳, 鳥悲鳴, 若有所訴錦鱗躍出, 若有所慕四無人行, 而予也方啓南窓, 掩遺冊, 獨坐而觀之, 東有古剎, 西有山四五點, 隱隱與吾相對, 在天惟雨, 在地惟吾, 會而爲四, 以享此湖之勝, 而人莫或與焉, 則其爲樂, 豈不滋哉."
  22.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6·題西湖小景, "西湖一別幾經秋, 畵里分明見舊游, 花隔六橋天乍遠, 松圍三竺地偏幽, 官槎到處笙歌擁, 野寺連宵節蓋留, 何日主恩麄報塞, 結盧終老白蘋洲."
  23.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十五而補博士弟子."
  24.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5·「墓志銘1」, "始階爲諸生嘗獲侍公, 于是時, 階少而不樂近也."
  25.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以優等試應天, 不利歸."
  26. 『명사(明史)』 「열전(列傳)90」 중 섭표(聶豹), "禮部尙書徐階, 豹知華亭時所取士也."
  27.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大司馬聶貞襄公豹, 來爲令, 試公而奇之曰, 是子國器也. 因進公以聖賢之學, 而公益慨然自奮, 以一第不足名."
  28.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3, "階, 昔爲諸生, 今宮保. 大司馬雙江聶公, 以進士知華亭, 進階而謂之曰, 小子知學乎! 夫學, 致其良知而已矣."
  29. 『쌍강섭선생문집(雙江聶先生文集)』 卷5, "昔予令華亭, 少傅存齋, 方總角, 在諸生中, 予試而奇之."
  30. 『국각(國榷)』 卷61, "豹嘗守松江, 識徐階于微時."
  31. 『명유학안(明儒学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聶雙江初令華亭, 先生受業其門, 故得名王氏學."
  32. 『쌍강섭선생문집(雙江聶先生文集)』 卷5, "壬午, 以詩經, 等八, 中應天鄉試."
  33.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8·明故通議大夫吏部左侍郎兼翰林院學士中峰先生董公墓志銘, "階公, 門生也. 嘉靖壬午, 主考南畿, 階時以諸生試為同考所黜落, 公閱而改品題焉, 且將以為第一, 屬有沮者, 乃為第七, 凡階所以有今日, 皆公賜也.”
  34. 『대명현황제신종실록(大明顯皇帝神宗實錄)』 卷136, "階, 松江華亭人, 弱冠登嘉靖二年進士第三人, 授編修."
  35.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4, "庚午, 授第一甲進士姚淶, 爲翰林院修撰, 王敎•徐階, 爲編修."
  36.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嘉靖二年進士第三人, 授翰林院編修."
  37. 『쌍강섭선생문집(雙江聶先生文集)』 卷5, "癸未及第, 入爲翰林編修官."
  38. 『명유학안(明儒学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登嘉靖癸未進士第三人, 授翰林編修.”
  39. 『천부광기(天府廣記)』 卷10 「내각(內閣)•열보기가고(列輔起家考)」, "夏言, 行人. 顧鼎臣, 修撰. 嚴嵩, 庶吉士. 許贊, 大名府推官. 張璧, 庶吉士. 張治, 庶吉士. 李本, 庶吉士. 徐階, 編修."
  40. 『쌍강섭선생문집(雙江聶先生文集)』 卷12, 寄少湖太史, "空翼以夸千里捷, 咻齊須諒數年迂, 文宗左傳今成癖, 德蓄前言始成儒, 少壯莫叫嗟老大, 格天勳業及時圖"
  41.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49, "給翰林院編修徐階贈封父母勅命, 先是, 階遇恩例以給假, 回籍未請, 至是具陳乞許之."
  42. 『소호문집(少湖文集)』 卷3
  43.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階, 爲人短小白皙, 善容止, 性穎敏, 有權略, 而陰重不泄, 讀書爲古文辭, 從王守仁門人游, 有聲士大夫間."
  44. 『국조내각명신사략(國朝內閣名臣事略)』 卷7, "自正德來, 中貴人驕橫相踵, 謂爲當然. 上卽位, 稍裁抑之, 小大咸怨. 公每因講說經史, 爲言祖宗之制, 諸監局官止四品, 不預政事. 宣德以後, 始被寵澤, 衣蟒腰玉, 間持政權, 至正德, 而極非可爲訓. 且劉瑾·張雄輩, 驕橫愈甚, 得禍愈慘. 要之, 于身有害無利, 豈足羨慕? 皇上今日之待公等, 視正德時則薄視, 祖宗時則已優厚. 且正所以保全諸公, 不宜反以爲怨也. 聞者咸感悅."
  45.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8, '明故左春坊左暫善兼翰林院修撰贈奉議大夫光祿寺少卿諡文恭念庵羅公墓誌銘'
  46.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18, "編修張袞•徐階•程文德, 爲纂修官."
  47. 『계암노인만필(戒庵老人漫筆)』 卷8, "皇帝勅諭纂修等官, '朕惟祭祀國之大事, 矧今郊祀已遵, 復我皇祖初制其中事宜, 不可無記, 無以垂之將來, 今大工告竣, 祀期在邇, 玆克降勅特命, 知建造事總督工程官卿勳同, 知建造事督視規制官卿時, 監視巡察工程官卿鋐, 爲監修官. 知建造事總督工程官卿璁, 爲總裁官. 內閣輔臣大學士卿萼•卿鑾, 爲副總裁官. 首倡正議監視巡察工程官吏科都給事中夏言, 升翰林院侍讀學士, 仍兼吏科都給事中, 不妨照舊掌科事, 及中允廖道南, 編修張袞•徐階•程文德, 爲纂修官. 卿勳及卿璁等, 宜各殫忠, 益精思力究, 遵照朕諭. 卿璁凡例條目纂輯成書, 名曰祀儀成典, 務要明白正大, 以稱朕法祖敬天禮神至意, 於以爲萬世法程守而勿替者, 斯爲卿等竭忠致力之道. 凡勅中未載應行並朕前諭卿璁條目, 逐一開具奏請區處, 卿等其欽哉欽哉如勅, 奉行勅命. 嘉靖九年十月十五日之寶."
  48.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19, "癸巳, 初上因纂祀儀成典, 諭大學士張璁, '凡雲雨風雷之祀, 以及先聖先師祀典, 俱當以敍纂入.' 璁因奏言, '雲雷等祀及社稷配位, 俱蒙聖明更正. 但先聖先師祀典, 尙有當更正者. 叔梁紇, 乃孔子之父, 顏路•曾晢•孔鯉, 乃顔•曾•子思之父. 三子配享孔子於廟庭, 而叔梁紇及諸父從祀兩廡. 原聖賢之心, 豈安? 於是所當亟正臣, 請於大成殿後另立一堂, 祀叔梁紇, 而以顔•路•曾晢•孔鯉配之. 請行禮部改正纂入祀典.' 上以爲, '然, 因與聖人尊天與尊親同, 今籩豆十二牲, 用犢, 全用祀天儀, 亦非正禮. 其謚號•章服, 悉宜改正, 卿宜加體孔子之心, 爲朕詳之.' 璁遂奏言, '孔子祀典, 自唐宋以來溷亂, 至今未有能正之者. 今宜稱先聖先師, 而不稱王, 祀宇宜稱廟, 而不稱殿, 祀宜用木主, 其塑像宜毀撤, 籩豆用十樂, 用六佾, 叔梁紇, 宜別廟以祀, 以三氏配公侯伯之號宜削, 只稱先賢先儒, 其從祀申黨•公伯寮•秦冉•顔何•荀況•戴聖•劉向•賈逵•馬融•何休•王肅•杜預•吳澄, 宜罷, 祀林放•蘧援•盧植•鄭玄•服虔•範寗, 宜各祀於其鄕, 后蒼•王通•歐陽修•胡瑗•蔡元定, 宜增入."
  49.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用張孚敬議欲去孔子王號, 易像爲木, 主籩豆禮樂, 皆有所損抑."
  50.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張羅峯, 欲去孔子王號變像, 設爲木主."
  51.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19, "上命禮部會翰林諸臣議, 編修徐階陳不可."
  52.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下儒臣議, 階獨持不可, 孚敬召階, 盛氣詰之, 階抗辯不屈, 孚敬怒曰, '若叛我.' 階正色曰, '叛生於附, 階未嘗附公, 何得言叛?' 長揖出."
  53.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卷14, "張永嘉當國, 議易先聖孔子塑像爲木主. 時徐文貞爲編修, 抗言其非, 坐是外貶, 天下翕然稱賢."
  54. 『천부광기(天府廣記)』 卷9 「문묘(文廟)」, "時徐階疏辨改號易像爲非宜, 帝怒, 切責之, 旣而復疏曰, 聖謨洋洋, 非臣所能窺測. 上謂其諛佞, 謫延平府推官, 且立佞人碑."
  55. 『국사유의(國史唯疑)』 卷6, "徐華亭, 初以爭孔子祀典, 謫外, 斥爲佞, 鍥柱識之曰, 徐階小人, 永不敍用."
  56.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卷14, "徐文貞抗論孔廟事, 上恚甚. 旣逐之, 又下旨云, 徐階天下小人, 永不許擢用."
  57.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斥爲延平府推官, 連攝郡事."
  58.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黜爲延平推官."
  59. 『명산장(名山藏)』 卷79, 「臣林記•隆慶臣1」 중 서계(徐階), "大學士張孚敬, 緣上意, 請去孔子王號, 階疏其不可, 孚敬召階, 盛氣詰之階徐理前說, 引高皇帝詔書, 盡革嶽瀆, 號獨存孔子者. 孚敬曰, '此高皇帝少作胡可據也.' 階曰, '高皇帝定天下, 而後議禮制度寧少耶? 且聖人之文, 無老少不爾明公議四郊, 何據高皇帝少作也?' 孚敬即曰, '即君謂塑像古禮否?' 階曰, '像誠非古禮業肖而師之, 何忍毀也?' 孚敬曰, '程子有云, 一毫髮不似吾親, 不得名親.' 階曰, '然則有一毫髮而似吾親而毀之乎? 且明公能必尊奉列聖之御容, 盡似毫髮哉?' 不謝直揖出. 上謫階推官延平府, 鍥而識之曰, '階小人也, 永不敘其後.' 上忘之矣."
  60. 『소호문집(少湖文集)』 卷7 '抵郡作', "涓埃無補聖明朝, 玉署淸華歲月叨, 省罪久知南竄晚, 感恩遙戴北宸高, 狂心子夜渾忘寢, 病骨炎陬不任勞, 畵虎幾時成彷彿, 狎鷗從此謝風濤."
  61.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5, 「墓誌銘1」, "予昔司理延平, 與君共處, 三年有不善, 未嘗不予告, 苟弗能改, 未嘗不憂, 卽能改, 未嘗不飮, 予酒歡笑竟日也."
  62.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6, 「墓誌銘2」, "往予在延平, 所與游者兩人, 君及諫議劍溪鄭君是也. 鄭君, 爲人慷慨, 尙志節. 而君衝夷簡遠, 有攸然之度. 兩人者, 氣味不相類, 然皆與予好也."
  63. 『명회요(明會要)』 卷25, "嘉靖中, 徐階爲延平府推官, 攝郡事, 創鄕社學."
  64. 『동치복건통지(同治福建通志)』 卷134, "出爲延平推官, 人謂階自禁近外調, 優游養重耳. 階曰, 非王臣耶? 盤根錯節, 增益不淺, 卽至連攝郡事, 拮據案牘, 淸宿繫三百人, 更輸銀法, 毋落猾胥手毀淫祠創社學, 取鄕所敎授鄧析, 書燔之, 採宋儒格言, 諧叶韻語, 俾稍習誦, 俗翕然變."
  65. 『동치복건통지(同治福建通志)』 卷134, "時大盜窟尤溪, 四處剽郡邑, 分巡諸僉事欲屬階捕, 而難發言, 階奮, 任之乃設方略, 懸賞格以授三老, 旬日得酋首, 並餘黨百二十人."
  66. 『명사(明史)』 「열전(列傳)101」·徐階, "出繫囚三百毁淫祠, 創鄕社學, 捕劇盜百二十人."
  67. 『국사유의(國史唯疑)』 卷6, "今人處謫宦邑, 邑不樂觀, 徐文貞延平詩曰, '俗樸到延文牒少, 山深入饌蕨薇鮮, 精光風雨騰雙劍, 香火春秋禮四賢', 自注, '予往歲謫延平縣, 樂其土俗, 有移家之約, 嘗於道南祠下累石爲壇, 又與其鄕士大夫鄭給事某•黃參政某游, 最惟窺此老襟度, 超然包涵八荒氣象.'"
  68.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6, "'俗樸到延文牒少, 山深入饌蕨薇鮮, 精光風雨騰雙劍, 香火春秋禮四賢.' 自注, '予往歲謫延平縣, 樂其土俗, 有移家之約, 嘗於道南祠下累石爲壇, 又與其鄕士大夫鄭給事某•黃參政某游.'"
  69.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滿三載, 遷湖廣黃州府同知."
  70.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61, "陞湖廣黃州府同知徐階, 爲浙江按察司僉事提調學校."
  71.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抵嚴陵, 而提督浙江之命下, 其官僉事."
  72.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遷黃州府同知擢浙江按察僉事."
  73.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移浙江提學僉事."
  74. 『만력야획편(萬曆野獲編)』 卷14, "未幾, 超爲學使者."
  75. 『국조내각명신사략(國朝內閣名臣事略)』 卷7, "曾主嘉靖十三年秋試, 諸生於嘉興, 湖州有一生, 不爲徐階所錄, 而問故, 徐階曰, '汝文字奇怪, 焉得應試?' 生訴怨曰, '擧業太難. 每習得平易, 卽宗主好奇怪, 旋習奇怪, 卽宗主又已好平易. 某且奈何?' 徐階曰, '生可謂陋甚矣. 夫文果當奇怪, 提學雖好平易, 不可從也. 果當平易, 提學好奇怪, 亦不可從也. 今生一無所主, 而數易所習, 以從人好審如此, 治世則爲君子, 亂世則爲小人耶?' 生乃悚然而退."
  76. 『지낭(智囊)』 卷1, "徐存齋, 由翰林督學浙中, 時年未三十一, 士子文中用'顔苦孔之卓', 徐勒之, 批云'杜撰', 置四等. 此生將領責, 執卷請曰, '大宗師見敎誠當, 但'苦孔之卓', 出揚子『法言』, 實非生員杜撰也.' 徐起立曰, '本道僥倖太早, 未嘗學問, 今承敎多矣.' 改置一等. 一時翕然稱其雅量."
  77.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諸生文有'顔苦孔之卓'語, 先生加以橫筆, 生白, '此出揚子『法言』, 非杜撰也.' 先生卽離席, 向生揖曰, '僕少年登第, 未嘗學問, 謹謝敎矣.' 聞者服其虛懷."
  78.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1·'送大參三峰侯公入蜀序', "台州, 自昔多廉節之士, 階往年以視學再至其地, 見其俗, 特儉質. 自紹以東溫以西, 迥然異也. 因大悟曰, '台士, 因多廉節有自也哉!' 夫人生而有耳目鼻口四肢之欲, 一不知檢則放, 放而事欲, 其副則必屈身焉, 以求之. 故浮侈之俗成, 而廉節之志奪. 在孔子時, 則已病. 夫性之相近, 習之相遠矣, 逮及戰國丈夫之所爲耳, 心下乞人而不恥, 則其俗又已不及春秋. 況在後世, 其汲汲於欲復, 不啻妻妾之奉, 宮室之美, 窮乏之得我乎? 台俗特儉質, 而其士固廉節, 固亦俗有以成之也. 往階當觀三代之際, 其治理之務, 不先政刑, 而先風俗, 以爲古之, 時民僞未滋, 故能然耳. 乃若後世, 當不暇爲是, 及觀於台, 然後知俗不易, 則人材不可成, 天下不可治, 而易俗之當務, 在民僞, 卽滋之後爲尤急也. 於是三嘆息焉. 階, 故吳人, 吳爲俗於天下最浮侈, 所謂廉節之士, 固恒有之, 然不能數見也. 思徙家於台, 於諸賢相追逐間, 以語三峰侯公. 公, 台之名廉節者, 幸不吾拒也. 今公擢參蜀政, 取道過其鄕方, 遜志之故宅, 庶幾有隙地乎? 其爲我卜尺寸而廬焉, 公起家比部, 作伯於池, 飾戎於贑, 所至有惠政殊績, 方大用於時, 而階自顧菲薄, 又甚多病, 四方之志, 黯然盡矣. 所以樂暮年計子孫, 實於台是賴. 公之友一所高子石梁•王子素, 知階者也. 尙以是告之, 苟方氏無遺墟焉. 捨我上蔡祠之側, 則尤幸也已."
  79.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92, "陞浙江按察司僉事徐階, 爲江西按察司副使, 仍提調學士."
  80.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進江西按察副使, 俱視學政.”
  81.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晉副使視學江西.”
  82. 『광서강서통지(光緒江西通志)』 卷227, "歷官江西按察副使, 視學政, 以正文體•端士習爲先, 創王守仁及同仁祠, 用風後學士, 至今慕之."
    『만력신수남창부지(萬曆新修南昌府志)』, "自翰林出爲江浙, 文宗崇正, 學勵士風, 藻鑒精朗, 時稱得人. 又開同仁祠•陽明祠, 以示嚮往. 逮登相位, 置田宅, 群三學士, 肄業其中, 迄今士類, 猶仰慕之."
  83. 『소호문집(少湖文集)』卷7 '寄題嚴學士鈐山堂', "百年勝地誰爲主, 五畝新開學士宮, 曲徑影來靑嶂月, 短牆香度紫芹風. 泉聲細應弦歌入, 樹色輕令煙霧通, 海內出雲元有望, 西垣榰笏思無窮."
  84. 『어선사조시(御選四朝詩)』 「明詩」卷81·'寄題嚴學士鈐山堂', "百年勝地誰爲主, 五畝新開學士宮, 曲徑影來靑嶂月, 短牆香度紫芹風, 泉聲細應弦歌入, 樹色輕含煙霧通, 海內出雲元有望, 西垣搘笏思無窮."
  85.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公之初至江西也, 時相夏文愍公言, 群從子姓有欲幸進者, 公面擿之曰, '乃公居座主, 以爾曹屬我誨, 不以爾曹屬我進也.' 夏公聞之不悅."
  86. 『국사유의(國史唯疑)』 卷6, "徐文貞督江西學, 方試, 士聞馮南江至, 綴試, 遣諸生出郭, 迎馮至, 宿之試院, 撫按節就訪, 今此風可再見, 否耶?"
  87.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5·증풍시어남강수뇌주(贈馮侍御南江戍雷州), "南江君, 謂君已死今尙生, 翩然過我無余城, 驚呼尊酒復自訝, 人耶龜耶久始明, 問君何緣得到此? 天王赦作炎海行, 我聞向天拜稽首, 感激涕泗分縱橫, 憶昔君初系司寇, 我正得罪遷延平, 焚香夜半跽訴帝, 欲語避人低作聲, 忠臣自古不畏死, 死却於國非祥禎, 聖皇仁孝冠三五, 愼勿以此傷其名, 緣知上帝有主宰, 世界不爲人謀傾, 持觴勸君君合醉, 此是異世非可輕. 假令果死卽長已, 得生今復何所營? 嶺南自昔佳勝地, 秫田滿眼肥可耕."
  88. 『국사유의(國史唯疑)』 卷6, "其自江右督學改宮僚, 賴馮恩力. 馮時謫戍, 過南昌, 代都御史何某, 草疏達夏桂州, 因被內擢躋台輔."
  89.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皇太子出閣, 召拜司經局洗馬兼翰林院侍講."
  90. 『국사유의(國史唯疑)』 卷7, "嘉靖十八年, 選改宮僚, 夏言爲政, 初擬多人, 內惟崔銑•黃佐•羅洪先•唐順之起廢自家, 無間言, 言予溫仁和•李廷相•屠應勩•華察•史白悅•費寀•皇甫涍等, 各經參論, 於是易以徐階•任瀚•周銑•趙時春•王同祖應詔, 事始定."
  91.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召拜司經局洗馬兼侍講."
  92. 『쌍강섭선생문집(雙江聶先生文集)』 卷2 '贈宮輔少湖公赴京序'
  93.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6, '明故巡撫雲南右副都御史爲陽周公墓誌銘', "向予在經局日, 從東郭鄒子•荊川唐子•念庵羅子, 相與切磋於身心之學, 於時士大夫之賢者, 大率辱與予四人游, 若爲陽周公其一也."
  94. 『세경당집(世經堂集)』 卷16, '明故陝西參議春古潘君墓誌銘', "昔歲己亥, 予與東郭鄒子•荊川唐子•念庵羅子, 同被召爲宮僚, 獲遍交一時之名士, 而君與焉. 其冬, 君入關, 明年予以憂去, 三子亦相繼罷黜. 今予幸登朝, 而三子者猶未召. 君又已作土中人, 予安得無惻然於中也."
  95.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政稍簡, 得以其暇, 與故鄒文莊公守益•羅文恭公洪先•鄭端簡公曉•趙中丞時春•唐中丞順之輩, 想琢劘聖學益切."
  96.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35, "先是, 御史楊瞻•樊得仁奏, 故禮部侍郞薛瑄, 國朝大儒, 宜從祀文廟. 詔, 下儒臣議. 時尙書霍韜, 侍郞張邦奇, 詹事陸深, 少詹事孫承恩, 祭酒王敎, 學士張治, 詹事府丞胡世忠, 庶子楊維傑, 諭德龔用卿•屠應埈, 洗馬徐階•鄒守益, 中允李學詩•秦鳴夏•閔如霖, 贊善閻檏, 司直謝少南•呂懷, 編修兼校書王同祖•趙時春, 編修兼司諫唐順之•黃佐, 侍講胡經二十三人, 議宜祀庶子童承敍. 贊善浦應麒議宜緩. 贊善兼檢討郭希顔, 以瑄無著述功, 議不必祀. 給事中丁湛等, 請從衆議之多者. 霍韜又欲黜司馬光•陸九淵, 呂懷欲將道統正傳皆進之廟堂, 繫於四配下. 至是, 禮部集議以請. 上曰, '聖賢, 道學不明, 士趨流俗, 朕深有感. 薛瑄, 能自振起, 誠可嘉尙. 但公論久而後定, 宜候將來. 童承敍•浦應麒, 議是. 司馬光•陸九淵從享與四配等位次, 俱歷代秩祀. 又經我 太祖欽定, 俱照舊不許妄議.' 時御史呂光洵, 上從祀議. 上摘疏中有不敬語, 奪俸二月."
  97.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6, '五月五日懷太恭人', "端陽再歲留南浦, 佳節懷人望北堂, 卻病循時聊佩艾, 承歡何日定稱觴, 風波晝隔三江遠, 天地陰回五月涼, 對食更思衣厚薄, 客愁眞共發爭長."
  98.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5, '懷母', "端陽再歲留南浦, 佳節懷人望北堂, 卻病循時聊佩艾, 承歡何日定稱觴, 風波晝隔三江遠, 天地陰回五月涼, 對食更思衣厚薄, 客愁眞共發爭長."
  99.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丁母憂歸服除."
  100.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居憂除服."
  101.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69, "陞司經局洗馬兼翰林院侍講徐階, 爲國子監祭酒."
  102.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擢國子祭酒."
  103.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起國子祭酒."
  104. 『명산장(名山藏)』 卷79·徐階, "累遷至國子祭酒."
  105.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92, "國子監祭酒徐階, 爲禮部右侍郞."
  106.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95, "丙子, 禮部右侍郞徐階, 爲吏部右侍郞."
  107.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遷禮部右侍郞, 尋改吏部."
  108.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擢禮部侍郞, 改吏部."
  109.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故事, 吏部率鐍門, 所接見庶官不數語. 階折節下之, 見必深坐, 咨邊腹•要害•吏治•民瘼. 皆自喜得階意, 願為用」
  110. 『명회요(明會要)』 卷31, "徐階爲吏部侍郞. 故事, 吏部率鐍門, 所接見庶官不數語. 階折節下之, 見必深坐, 咨邊腹•要害•吏治•民瘼. 皆自喜得階意, 願爲用."
  111.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297, "甲子, 吏部尙書熊浹, 左侍郞王學夔, 右侍郞徐階, 都察院左都御史周用, 左副都御史周煦, 右僉都御史楊行中, 各以考察庶官, 先自陳乞罷, 不允, 俱令悉心考察."
  112.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06, "丁巳, 陞吏部右侍郞徐階, 爲本部左侍郞. 改刑部右侍郞韓邦奇, 爲吏部右侍郞."
  113.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尙書熊浹•唐龍•周用, 皆重階."
  114.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階數署部事, 所引用宋景•張岳•王道•歐陽德•範鏓, 皆長者."
  115.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13, "唐龍等, 令從實置對, '龍, 先以九德疏參, 上疏固陳老病求去.' 未報. 會給事中臧珊言, '龍, 誠賢大臣, 第衰病, 不任事, 宜令致仕.' 上疑其右龍, 責以奸佞, 奪俸一年. 隨下龍疏, '數其稱老忘國, 黜爲民.' 比, 吏部引罪. 疏入. 上曰, '屬官違法作奸, 爾等漫不覺舉, 狥私隱護, 法當逮治. 唐龍已有旨, 徐階•韓邦奇, 各降俸二級.'"
  116.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14, "己丑, 祭帝社稷, 命公朱希忠, 代侯崔元伯•衛錞, 大學士夏言•嚴嵩, 尙書周用•費寀, 侍郞孫承恩•張治•徐階•許成名•崔桐陪祭."
  117.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19, "帝社•帝稷, 命成國公朱希忠, 代侯崔元伯•陳鏸•衛錞, 輔臣夏言嚴嵩, 尙書聞淵•費寀, 侍郎孫承恩•張治•徐階•許成名•崔桐陪祀."
  118.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用卒, 聞淵代, 自處前輩, 取立斷, 階意不樂, 求出避之."
  119. 『명사(明史)』 「열전(列傳)90」 문연(聞淵), "侍郞徐階, 得帝眷, 前尙書率推讓之, 淵自以前輩事取獨斷."
  120.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22, "改進士亢思謙•江鏜•孫黎澄•張居正•胡傑•莫如士•謝登之•藍璧•張勉學•祭文•任士憑•任有齡•張思靜•陳一松•劉涇•毛起•孫世芳•馬一龍•林濂•李遇元•殷士詹•胡曉•趙鏜•馬三才•朱大韶•劉錫•李敏•孫裒, 俱爲庶吉士, 送翰林院讀書, 命吏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張治, 吏部左侍郞徐階, 敎之, 仍命偕兼學士."
  121.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命兼翰林院學士, 敎習庶吉士."
  122.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28, "吏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徐階, 三年秩滿, 應其子璠, 爲國子生."
  123.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33, "命吏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徐階, 掌翰林院事."
  124.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尋掌院事."
  125.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久之, 以學士掌翰林院事."
  126.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39, "祭歷代帝王廟, 遣英國公張溶行禮, 尙書聞淵•孫承恩, 侍郞徐階•歐陽德分獻."
  127.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45, "大學士嚴嵩, 嘗一上請簡廷臣協輔. 詔姑少待. 嵩獨相且年餘. 至是, 再以請上, 乃從之. 命吏部卽推五六人堪用者, 以名聞. 於是, 吏部以吏部尙書聞淵, 南京吏部尙書張治, 吏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掌院事徐階, 南京兵部尙書韓邦奇, 禮部左侍郞毆陽德, 國子監祭酒李本, 應詔. 上下嵩酌用. 嵩言, '古者論相之命, 自天子出. 今制每以付之廷推而簡用, 悉由宸斷群臣材品, 英逃聖鑒. 內所推六人年資履歷, 一覽具在. 伏望聖明裁決, 於中點用二三人, 非臣所敢議擬."
  128. 『명사고(明史稿)』 「열전(列傳)67」, "帝見本及南京尙書治名, 曰, '此'治本'也'. 遂擢. 本, 少詹事兼翰林學士, 與治同入閣, 參預機務."
  129.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45, "陞吏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掌院事徐階, 爲禮部尙書, 兼官如舊."
  130.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進禮部尙書."
  131. 『명사(明史)』 「표(表)13」 칠경연표(七卿年表)2, "徐階, 二月任."
  132.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久之, 以學士掌翰林院事, 進禮部尙書."
  133. 엄숭(嚴嵩), 『금산당집(鈐山堂集)』 卷40, "形臞而澤, 洵粹美之內涵. 氣淸而勁, 凜剛貞之天植. 正眸平視, 秉明照以無私, 竦立斂容, 履貴盛而思抑. 拳拳乎, 興治建功之心, 翼翼乎, 履繩蹈矩之實. 亮天之工, 庶績以之咸釐, 定國之是, 衆志由之不惑, 聞望重乎圭璋, 忠誠貫乎金石. 噫! 古有大臣, 儼然正色, 玆惟吾介翁之爲德歟!"
  134.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46, "乙酉, 皇太子行加冠禮, 命太傅兼太子太傅駙馬都尉京山侯崔元, 持節掌冠, 少師兼太子太師吏部尙書大學士嚴嵩, 贊冠, 禮部尙書徐階, 宣勅戒. 是日, 上不御殿. 罷, 傳制, '餘俱如禮.'"
  135.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46, "丙申, 冊謚皇太子曰, '莊敬', 命英國公張溶持節禮部尙書徐階捧冊行禮, 仍命禮部頒示天下."
  136.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莊敬太子冠, 公受命贊冠. 甫成禮, 而暴疾薨. 公當議喪禮, 以上及百官皆爲期之服, 百官仍詣門哭上. 不懌, 謂, '天子絶期不制服, 其百官可無詣門. 哭臨禮, 著詣停柩所.' 輔臣讀至'服可無', 而句之曰, '以靑衣角帶往, 可也.' 公曰, '不然, 絶期者天子也, 非百官也. 曰'可無詣門'而已, 非可無服也. 且未有哭臨而不衰服者, 定議以齊衰服臨.' 上使中涓詷而是之, 令宮中仍皆服衰."
  137. 『국조내각명신사략(國朝內閣名臣事略)』 卷16, "嘉靖二十八年, 莊敬太子痰疾作, 遽薨. 詔, 公具葬禮, 公以莊敬太子雖在殤年, 然冊立已逾一紀, 且嘗監國, 乃本儀禮, 參以『杜氏通典』, 請上及百官服期儀, 卽上, 中外皆言, 上素不愛太子, 又不善喪事, 所具儀太重. 上怒且不測, 旣而奉旨, '天子絶期, 況十五歲外, 方出殤, 朕服非禮. 止綴朝十日百官服制, 可無詣門. 哭臨之禮, 著詣停柩之所, 其餘依擬.' 讀者咸'可無'爲句, 謂聖意不欲百官咸服. 公曰, '上下咸服, 尤有絶期之說. 吾輩於太子臣也, 亦可絶耶?' 且上卽許於停柩之所哭臨, 而豈有哭臨而不具衰絰者? 時, 莊敬太子停柩南城之明德宮, 二十日, 公率官具衰絰入, 上遣諸中官來, 皆靑衣角帶. 於是, 閣老而下咸謂, 今日止當素衣冠行禮. 公曰, '素衣冠哭臨, 古無其文. 今又無明旨, 誰敢擅爲之? 吾寧守禮以待罪, 不敢避罪而壞禮也.' 竟以衰絰哭臨而出, 中官以聞, 上命宮中皆易服."
  138.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100, "「編修王敎•張星•徐階•楊維傑•歐陽衢•金璐•張袞•歐陽德, 爲纂修官."
  139. 『대명숙황제세종실록(大明肅皇帝世宗實錄)』 卷360, "重修大明會典成, 禮部尙書徐階等, 詣奉天殿進呈, 命司人監捧入."
  140. 『국조내각명신사략(國朝內閣名臣事略)』 卷7, "三月, 奉旨充會典副總裁. 先是, 嘉靖八年, 命續修會典, 不果成. 二十三年, 申命修輯, 亦未能成也. 至是, 公始取八年稿, 及二十三年諸司所上事例, 會萃編次之. 舊典多訛誤脫漏, 而新例又皆草率, 取具使人讀之, 莫知更革之所系, 始至郊廟諸大禮尤多. 上裁定損益傳扎密諭, 有有司所不及知者, 公窮晝夜之力, 取內閣及諸司薄冊文案, 批究討論, 得其本末. 凡八閱月, 四易稿, 而成爲卷百二十. 乃若核是非, 存故實, 憫世變, 寓深意, 與片詞隻字抑揚評論之間者, 則文獨爲苦心云."
  141.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創義例, 摯綱領, 井然一代程書."
  142. 장현청(張顯淸),『명대정치사(明代政治史)』, pp.343-344.
  143.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49, "召大學士張治•學士李本•禮部尙書徐階, 入直無逸殿."
  144.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召入直無逸殿廬, 撰靑詞."
  145. 『엄주산인속고(弇州山人續稿)』 卷136•徐文貞公行狀, "公遂爲莊敬冊謚副使, 已命題, 主上察公愼勤, 又有所應制, 文字獨多稱, 旨召入直無逸殿盧, 給供饌如例, 尋賜飛魚服."
  146. 『명산장(名山藏)』 卷79·서계(徐階), "禮部尙書, 召入直無逸殿廬."
  147.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50, "丁亥, 禮部尙書徐階, 參奏內殿供事醫士吳夢龍等, '不由本部考選, 夤緣收用, 輙又曠違職役, 私回原籍, 請究治. 因言, 聖濟殿供事人役, 本部先年題准三年一次考選送入, 自十八年以後考試之法不行, 而內殿供奉之醫, 間有乞恩傳補而入者. 夫乞補醫士, 猶恐不稱. 況供奉內殿, 可徒徇其陳乞, 而不論其術業乎? 請自今爲始, 本部年終通將槪院醫士•醫生, 嚴加考試, 分爲三等, 一等者, 留候聖濟殿, 缺人送入供事, 其餘, 悉遵舊制, 仍令太醫院堂上官, 協心鈐束, 官醫不許違曠職業. 其有逃回患病日久不能供役者, 每季呈報查處.' 得旨, '夢龍等, 悉革役爲民. 近年禮部違例, 濫收各項人役, 大壞政體. 卿卽將醫士並儒士通事•但係未經題請考試•假以訪保習學爲名•及有罪過冒收者, 通核具奏.' 已, 階査參太醫院未經考試醫士侯時泰等二十四人, 鑄印局未經考試儒士石同堅等二十六人, 四夷館曠役通事陳嘉謨等二人, 詔革役問罪有差."
  148.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51, "辛酉, 隰川王俊柏, 停勒各宗室子女未受名封婚祿者, 至一百三十餘人, 有年及三十外者, 諸宗室赴訴闕下. 詔革俊柏祿米三之一, 勒限令將各子女亟為奏報. 俊柏恬不奉, 詔稽留. 復年餘, 詔革祿三之二, 督令速報. 至是, 復二年矣, 始以子女名封婚配文冊繳部. 其前奉旨査核, 大半不行造入, 而中所錄多, 先年已經名封婚配者, 且與玉牒互異. 禮部尙書徐階, 參奏俊柏, '奸狡貪殘, 耽抑宗室, 婚封節奉明旨, 革祿責限乃復q, 淹逾年歲, 虛文搪塞. 宗室旣劫於積威, 撫按又勢難究詰. 若不嚴爲査究, 則其虐害何極? 請以該府所造玉牒, 開注其位應名•未名, 某位應封•未封, 某位應婚•未婚字樣, 明白印封, 轉發山西撫按嚴督査對, 並根究過期, 不與奏請所由奏報, 庶鉤擧不遺而寃抑畢達矣.' 報可."
  149. 『명산장(名山藏)』 卷79·서계(徐階), "上見其小心恭謹殊親近之."
  150.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52, "癸巳, 改戶部尙書夏邦謨, 爲吏部尙書. 初, 聞淵旣去, 會推禮部尙書徐階. 上曰, '階, 方事朕左右, 固非先朝弘文館之直者, 如何輙擬外遷? 令再推.' 乃用邦謨."
  151.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53, "禮部尙書兼翰林院學士徐階, 引罪乞罷, 不許. 是歲, 應天府鄕試, 階子墦, 倩人入場, 事覺, 南京給事中萬文彩, 及監試御史楊順•張鑒, 論階縱子犯法, 請罷階. 階因求去. 上以階日直左右, 其子犯法, 遠不得知, 詔令安心供職."
  152.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59, "禮部以天久不雨, 奏請, '遍禱神祇, 仍申飭百事, 滌己省愆, 修擧實政, 以仰贊聖, 誠上回天意.' 上曰, '君者代天工, 不能獨理設官分職, 以共之.' 又曰, '臣勞此義, 孰不知之? 言之皆非實心也. 今亦不必申以話言, 不必虛應故事. 惟仰告上天•廟社諸神, 以十五日奏告南北二郊, 前三日, 告東西二郊神祇壇, 前二日告二社稷, 前一日告太廟, 自初九日始, 停刑禁屠, 百官修省至十七日止, 乃分遣祭告大臣, 南郊公朱希忠, 北郊公張溶, 太廟駙馬都尉鄔景和, 太社稷侯蔣傳, 帝社稷駙馬都尉謝詔, 東郊伯陳鏸, 西郊伯王瑾, 神祇壇伯焦棟, 尙書徐階, 各靑衣角帶行禮."
  153. 『명사(明史)』 「열전(列傳)90」·섭표(聶豹), "二十九年秋, 都城被寇, 禮部尙書徐階, 豹知華亭時所取士也. 爲豹訟寃言, 其才可大用. 立召拜右僉都御史巡撫順天. 未赴, 擢兵部右侍郞, 尋轉左."
  154. 『국각(國榷)』 卷61·世宗嘉靖三十三年甲寅至三十五年丙辰, "二月甲午, 兵部尙書聶豹免. 豹推薦多不當, 上薄之, 諭嚴嵩等, '豹, 年衰不勝任.' 遂引疾閒住. 豹嘗守松江, 識徐階於微時. 故庚戌, 階力薦之, 不二年, 遂進本兵."
  155.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禮部尙書徐階言, '近者, 逆胡深入郊畿, 皇上赫然, 按諸不任事者, 罪內外臣工, 固已莫不震懾矣. 但人才不同, 譬諸器物, 小大長短有限, 若不擇而用之, 恐終無以稱任使也. 今世論人, 大率重修謹. 夫修謹之士, 平時無可稱. 然而循途守轍, 不足以倉猝應變, 徐言緩步, 不足以慷慨立功. 今當應變立功之秋, 苟付之若輩, 是匠氏以粗爲杗, 終於不稱而已. 伏睹原任都御史何棟•原任副使聶豹, 其才識膽略, 迥異時流. 而豹守平陽御虜, 而有成效, 獨以不能顧膽俯仰, 趦趄躡嚅, 爲世俗態. 是以仕不果達. 乞勅吏部, 急將二臣起用, 仍推此意, 廣收異能, 待以殊格, 庶緩急有濟.' 上納之, 命亟査豹取用."
  156. 『명산장(名山藏)』 卷79·서계(徐階), "階薦爲民前副使聶豹•前都御史何棟, 上納之, 始上悅."
  157.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丙寅, 以聖節覃恩, 加成國公朱希忠, 特進光祿大夫柱國. 輔臣嚴嵩, 上柱國. 尙書張治•徐階•顧可學, 俱太子少保. 少詹事李本, 陞吏部右侍郞兼東閣大學士. 致仕太常卿朱隆禧, 陞禮部右侍郞中書官. 談相, 陞工部右侍郞禮部尙書. 陶仲文, 仍封恭誠伯, 歲加祿米一百石. 高士•郭弘經•王永寧, 封眞人."
  158. 『명산장(名山藏)』 卷25, "八月, 萬壽節, 加成國公朱希忠, 特進光祿大夫柱國. 輔臣嚴嵩, 上柱國. 尙書張治•徐階•顧可學, 太子太保."
  159.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禮部尙書徐階奏, 京師之兵, 多不習戰, 統領勳貴, 又不知兵. 余(今)繫獄將官戴綸•李珍•麻隆•曹鎮•歐陽安, 素歷邊疆, 威著謀勇. 請如張達等例釋, 而用之授以兵馬, 必能出力以報不死之恩, 在外緣事有名將官, 遼東有劉大章•周益昌, 陝西有時陳, 雖去京稍遠, 亦當赦宥召之, 此則兵部拘泥常格而不敢言者. 關廂居民, 一聞虜警, 必奔走入城, 宜令兵部同錦衣衛•五城御史加意安挿, 內有驍徤可用者, 卽召募爲兵, 旣可以充實行伍, 亦弭亂之一端也. 又聞兵部欲發兵於城外箚營, 蓋爲得護廂之計. 但恐軍京見敵輙走, 反搖民心, 而關廂亦竟不能捍護, 宜急召總兵仇鸞, 兵入衛, 仍優其廩餼, 令兼督城外箚營, 諸軍大約以大同人馬爲京軍, 先鋒以京軍助大同人馬, 聲勢庶兩有所恃而不恐, 此又兵部思慮所未及者. 入, 上深嘉納之. 詔, 宥綸等罪, 各復原職, 給與兵馬行糧, 聽總兵仇鸞調遣. 餘俱如議."
  160. 『국조내각명신사략(國朝內閣名臣事略)』 卷7
  161. 『명산장(名山藏)』 卷79 서계(徐階), "庚戌, 虜薄都城下, 階傳言守城策於上. 上然."
  162.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 청순시구문(請巡視九門), "今京城各門, 雖經設有守門巡視大臣, 及各官兵. 但聞器械•盔甲, 多未完具, 守城軍夫, 漫無紀律. 且其他城守事宜, 多有當備而未備•當爲而未爲者. 巡視大臣, 雖荷皇上畀重權, 尙皆瞻望, 顧忌不及時修擧, 今賊勢猖獗, 恐誤國之大事. 臣受皇上厚恩, 非不知內直爲重. 但興念及此, 不勝憂憤. 伏乞皇上降旨命臣, 暫出同與陸炳, 帶領戶•兵•工部屬官三員, 遍行閱視, 有可徑行者, 與巡視守門大臣, 會議施行, 有當奏請者, 具奏定奪, 臣深惟主憂, 臣辱之義, 臨事不敢避難. 伏乞聖明照察, 允許臣不勝. 幸甚."
  163.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命禮部尙書徐階, 傳諭九門防守官, 以虜未至, 毋輒先閉關, 以自困. 但加意防檢, 啓閉以時, 勿玩勿怯."
  164. 『명사기사본말(明史紀事本末)』 卷54, "令人持書, 入朝求入貢, 言多悖嫚. 上召嚴嵩及禮部尙書徐階於西苑, 曰, '事勢至此, 奈何?'"
  165.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俺答, 縱所虜湖渠馬房內官楊增, 持番書入城, 求貢. 上以其書示大學士嚴嵩•李本, 禮部尚書徐階, 因召對於西苑, 上曰, '今事勢如此, 奈何?' 嵩對曰, '此搶食賊耳. 不足患.' 階曰, '今虜在城下, 殺人放火, 豈可言是搶食? 正湏議所以御之之策.' 上顧階曰, '卿言是.' 因問, '虜中求貢書, 安在?' 嵩出諸袖中, 上曰, '此事, 當何應之?' 嵩曰, '此禮部事.' 階曰, '事雖在臣, 然關係國體重大. 湏乞皇上主張.' 上作色曰, '正須大家商量, 何得專推與朕?' 階曰, '今虜駐兵近郊, 而我戰守之備, 一無所有. 此事宜權, 許以款虜. 第恐將來要求無厭耳.' 上曰, '苟利社稷, 皮幣珠玉, 非所愛.' 階曰, '止於皮幣珠玉, 則可矣. 萬一有不能從者, 則奈何?' 上悚然曰, '卿可謂遠慮, 然則當何如?' 階請以計款之, 言, '其書皆漢文, 朝廷疑而不信, 且無臨城脅貢之理. 可退出大邊外, 另遣使賫番文, 因大同守臣爲奏事, 乃可從. 如此往回之間, 四方援兵皆至, 我戰守有備矣.' 上首肯曰, '卿言是. 還出與百官議之.' 嵩因奏, '今中外臣民, 咸望皇上, 一出視朝, 撥亂反正.' 上微哂曰, '今亦未至於亂, 朕不難一出. 但嫌驟耳.' 階曰, '中外望此擧, 已久. 今一出, 如久旱得雨, 何嫌於驟?' 上乃許. 明日視朝, 於是命嵩等退."
  166.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帝以示嚴嵩及階, 召對便殿, 嵩曰, '飢賊耳, 不足患.' 階曰, '傅城而軍, 殺人若刈菅, 何謂飢賊?' 帝然之, 問, '求貢書, 安在?' 嵩出諸袖曰, '禮部事也.' 帝復問階, 階曰, '寇深矣, 不許恐激之怒, 許則彼厚要我. 請遣譯者紿緩之, 我得益爲備. 援兵集, 寇且走.' 帝稱善者. 再, 嵩•階因請帝出視朝. 寇尋飽去, 乃下階疏, 弗許貢."
  167. 『명산장(名山藏)』 卷79 서계(徐階) ,"階言, 虜附書求貢, 上召問階及相嵩, 嵩曰, '搶虜, 亡患也.' 階曰, '虜勢如此, 難言亡患. 須議所以御之.' 上曰, '是則何如?' 階曰, 今虜逼而我虛, 宜權許以疑之. 第恐難饜將來耳.' 上曰, '苟利社稷, 皮幣珠玉, 亦何愛焉?' 階曰, 事有甚珠玉皮幣者. 陛下所不能受, 則奈何?' 上悚然曰, '卿慮之遠.' 階曰, '臣請言, 所謂疑者, 今虜書皆漢文, 眞僞不可知, 請往諭之, 曰, 陛下謂, 汝等雖稱臣求貢, 所求書, 皆漢文, 無信使, 抑萬無城下要脅理, 果歸, 誠當斂退塞外, 遣使具表, 聽處分, 不者, 有剿討而已. 如此往還, 少日我四方援兵亦且至, 卽不退, 可拒之矣.' 上稱善者. 再因請視朝, 以鎭中外之心. 上首肯."
  168.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是日, 階集百官, 議闕下. 議未定, 國子司業趙貞吉抗聲曰, '今朝廷所急者, 出沈束於獄, 申理周尙文之功, 退虜易耳.' 時上遣中使, 密窺會議諸臣, 聞貞吉言, 心壯之, 宣入左順門, 令手便計以上. 貞吉因請急遣近侍有才猷辯博官一員, 同錦衣衛官, 詣諸將營中, 賞軍, 激勵士氣, 仍許關損軍之令, 令將士義勇軍民人等人, 自爲戰, 但得一首級, 卽賞銀百兩. 逗遛觀望不戰者, 誅無赦."
  169. 『대명세종숙황제실록(大明世宗肅皇帝實錄)』 卷361, "甲申, 禮部尙書徐階, 集廷臣, 上俺答求貢議, 略言, '虜酋, 悖逆天道, 犯我郊畿, 虔劉人民, 蹂踐上地. 揆之大義, 所當必誅. 今雖稱臣求貢, 信使不入, 表文不具. 且其文書, 皆漢字, 眞僞不可知. 臣等以爲, 求貢必不可許, 宜且遣通事, 賫勅諭虜酋, 如果悔罪求貢, 則當斂兵出境, 具表款塞, 聽朝廷處分. 如駐兵境內, 要求速賞, 則惟有勵將集兵, 以大兵致討, 必使匹馬不返, 以洩神人之怒.' 得旨."
  170.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2·與趙浚谷(第四), "而當路者, 無遠見, 每多異同, 未能盡如鄙意. 如此節是也, 奈何奈何?"
  171. 『가정이래내각수보전(嘉靖以來內閣首輔傳)』 卷5 서계전(徐階傳), "所陳不能無刺譏用事者."
  172.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文貞徐存齋先生階, "京師戒嚴, 召對, 頗枝柱分宜口. 上多用其言, 分宜恨之."
  173. 『가정이래내각수보전(嘉靖以來內閣首輔傳)』 卷5 서계전(徐階傳), "而當召對時, 又頗杜嵩口 ... 嵩以是恨且忌之."
  174.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旣仇夏言, 置之死, 而言嘗薦階, 嵩以是忌之."
  175. 『국조전고(國朝典故)』 卷37, "因大同之素强者而使助, 則弱皆强也. 此其經略所賴於徐階者, 不小也."
  176. 『양조헌장록(兩朝憲章錄)』 卷13, "俺答臨城, 動中機宜, 社稷賴以無事. 於時, 武臣如戴綸•麻隆等, 文臣如何棟•聶豹, 皆得顯其才勇, 可以立功使任 ... 況今寧夏•倭奴兩角, 可不法徐階乎!"
  177. 『세경당집(世經堂集)』 卷22·與趙浚谷(第四), "凡邊軍行糧賞賜."
  178. 『明儒学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 "存齋論學, 語親親仁民愛物, 是天理自然, 非聖人强為之差等, 只如人身, 雖無尺寸之膚不愛然却于頭目腹心重于手足皮毛爪齒漸漸輕遇有急却濡手足焦毛髪以衛腹心頭目. 故此是自然之理. 然又不可因此就說人原不愛手足毛髮, 故親親仁民愛物總言之, 又只是一個仁愛也."
  179. 『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 "有言學只力行不必談說性命道德者, 譬如登萬仞之山, 必見山頭所在, 乃有進步處, 非可瞑目求前也. 除性命道德行個甚麼? 人只是一個心, 心只是一個理. 但對父則曰孝, 對君則曰忠, 其用殊耳. 故學先治心, 苟能治心, 則所謂忠孝, 時措而宜矣. 人言'千蹊萬徑, 皆可以適國.' 然謂之蹊徑, 則非正路矣. 由之而行, 入之愈遠, 迷之愈深, 或至於榛芥荊棘之間, 而漸入窮山空谷之內, 去國遠矣, 況能有至乎? 故學須辨路徑, 路徑旣明, 縱行之不能至, 猶不失日日在康莊也. 大學潔矩, 只是一個仁心. 蓋仁則於人無不愛上下前後左右, 皆欲使不失所故能, 推己以及之, 所謂'惟仁人, 能愛人, 能惡人',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者也. 學者須豫養此心, 始得.”
  180. 《世经堂集》卷十一·学则序:“古之学出于一而后世之学析而为二是故古之道问学以尊德性而后世欲舍尊德性以别求所谓道问学之事古之德性则必问且学而后世欲舍道问学以别求所谓尊德性之功...朱子于程允夫之名齐易道问学以为尊德性...盖两夫子之学问出于一而精一博约之传绝而复继者实在于此至所谓子静所说专是尊德性事某平日所论却是道问学上多者则或朱子一时答问之语未可据以为终身之断而其谓道合志同是乃两夫子之深相契而相许者也顾昧者不此之察既谬以为二而其间号为有识之士亦仅以为如辅车之不可相无而究其本一”
  181. 《世经堂集》卷十三·陆文裕公集序:“虽出于圣人之手犹文之一端也而后世不察独以文字当之于是道德勋业文章判为三途至其甚也又举所谓文字者归之乎浮靡诡诞之作而其为文因亦流于俳优之末技家人之俚语则何所系于人文世道以庶几古作者之谓万一哉”
  182. 《世经堂集》卷十一·官箴集要序:“夫政与学非二物也顾三代以上政与学一而仁义礼学之泽达于天下三代以降政与学析而为二而仁义礼乐为虚谈此其何故也古之时士知以仁义礼乐修其身而已未始求夫政者而讲明之也然自其习于仁也则所以育万民者存焉自其习于义也则所以万民存焉自其习于礼乐也则所以节民和民者存焉本诸其身施诸天下惟天下亦自感发于所性之同与其践履之实而以顺化虽欲二之乌得而二之后世修身之义不明士指其训诂词章名之曰学一旦立于民上则见夫向之所习果不足以为治不得已俛出于刑名术数以要近功及行之即就亦遂不觉其非名之曰政而颛颛焉执以待用虽欲一之又乌得而一之故天下不患无善政患无实学”
  183. 《世经堂集》卷十四·严州三先生祠记:“君子相天下必本于学所谓学者何哉惟精惟一伊傅周召闻诸尧舜而以相乎殷周者是也慨自世教衰士有如管仲者出挟其小器以归利于诸侯诸侯之相适无知学者而仲得以行其志由是士大夫慕焉其世愈下其名愈闻权谋功利之习遂以深锢不复知有学而独一二不得位之君子相于探精一之旨于残编断简之间以淑其身以教诸人而论者因以理学归之盖其说公矣然其后也遂以是学为不得位者种私物而相天下者专以业称则又岂知学与业名虽殊而实则一使业本于学则业即学也使业不本于学则业亦费也而顾析而二之其无乃惑欤”
  184. 《世经堂集》卷十二·寿封佥事吉菴王先生暨配张太宜人序:“古今之变其可慨也夫古之学不难于言难于行今之学不独难于行亦难于言尽昔虞廷之论学仅仅十六字其君臣师友之间又若不专以学为务者而其时乃多圣人孔子孟子发挥仁义恒数百千言惓惓然聚其徒以从事于学而其时叛道败德者接踵然彼犹未亲受孔孟之教者也孔门从游者至三千人孟子传食诸侯从者亦数百人使此三千者十而一贤则道统之传当不独在颜会二子此数百人者百而一贤则其所称许当不止一乐正氏亦不止为二之中四之下然而不能然也孔子曰文莫吾犹也躬行君子则吾未之有得夫孔子岂无得于躬行者哉诚病夫学者行之不逮借巳言之耳观于春秋而战国可知也吾故曰古之学不难于言难于行秦汉以降士益汩于利所谓躬行者吾既以无望而百家诸氏纷纷不经之说吾亦不暇责之详至宋大儒辈出其于学宜足以绍虞廷孔孟之传矣而支离之辈犹不免焉近世君子表知行之一至发体用之一源直指人性之本善使求诸内可谓精且尽矣”
  185. 《明儒学案》卷二十七·文贞徐存斋先生阶:“人言千蹊万径皆可以适国然谓之蹊径则非正路矣由之而行入之愈远迷之愈深或至于榛芥荆棘之间而渐入穷山空谷之内去国远矣况能有至乎故学须辨路径路径既明纵行之不能至犹不失日日在康庄也大学洁矩只是一个仁心盖仁则于人无不爱上下前后左右皆欲使不失所故能推己以及之所谓惟仁人能爱人能恶人先王有不忍人之心斯有不忍人之政者也学者须豫养此心始得”
  186. 见,南炳文:《明清史蠡测》
  187. 见,姜德成:《徐阶与嘉隆政治》
  188. 见,谭天星《明代内阁政治》
  189. 《皇明世说新语》卷三:“徐文贞致政家居为怨家计告张全山年八十余往候之曰今日赠老先生一字文贞曰何字曰忍字文贞曰我亦赠公一字曰何字曰忘字
  190. “沈敖大:松江历史上第一高官——徐阶二三事_半部春秋_新浪博客”. 2021년 1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11월 22일에 확인함. 
  191. 吴仁安著 (2009). 《明清江南著姓望族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04쪽. ISBN 978-7-208-09029-3. 
  192. 《徐氏族譜》卷17 : “高祖素仁厚, 鄕人稱之曰徐佛子.”
  193. 吴仁安著 (2009). 《明清江南著姓望族史》. 上海: 上海人民出版社. 104쪽. ISBN 978-7-208-09029-3. 
  194. 姜德成《徐阶与嘉隆政治》:“嘉靖四十四年徐陆两家结亲徐阶三子徐瑛娶陆炳女。婚仅三年,陆女病逝,有一子名徐肇惠。隆庆间,高拱党羽攻讦徐家等陆氏姻亲乘陆炳败,其子尚幼,而侵夺其田产。万历初,得居正之力,徐家所被侵欺之诬得以清白。参阅张舜徽编:《张居正集》,第二册,卷27,《书牍》14,《论大政》,页1153:“陆氏之事,原当事者之意,实欲缘此中祸于师翁。其徒每倡言曰:陆氏家累钜万,死之日,数姻家欺其子之幼,遂分而有之。今惟刑并其子使之取偿于所亲,则可不加赋而国用足。其言如此,籍令当事者至今犹在,则祸诚不知所终矣。顷幸天启圣中,俯纳愚言,开汤纲以释淹禁,俾陆武惠之功得明,而师翁见陵之耻亦因以雪。此主上之明也,正宁有秋毫得效于左右乎?”。”
  195. 《世经堂续集》卷二·寿光禄少卿小川顾君六十序:“君寿六十,其子国子生九锡,予婿也。”
  196. 『국각(國榷)』 卷64, "華亭雖任術, 庸何傷."
  197.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徐階, "徐階以恭勤結主知, 器量深沈, 雖任智數, 要爲不失其正."
  198. 『명사(明史)』 「열전(列傳)101」, 서계(徐階), "階立朝有相度, 保全善類. 嘉•隆之政, 多所匡救. 間有委蛇, 亦不失大節."
  199. 『계암노인만필(戒庵老人漫筆)』 卷8, "階赤舄幾幾, 羔羊素絲, 嘉隆之際, 亦何下廷和哉. 惟其小用權術, 收采物情, 識者不無遺憾焉."
  200. 『명유학안(明儒學案)』 卷27, 文貞徐存齋先生階, "先生之去分宜, 誠有功於天下, 然純以機巧用事. 敬齋曰, '處事不用智計, 只循天理, 便是儒者氣象.' 故無論先生田連阡陌•鄕論雌黃, 卽其立朝, 大節觀之, 絶無儒者氣象, 陷於覇術而不自知者也."
내용주
  1. 제사직(帝社稷)이란 장총(張璁) 등이 가정제에게 건의하여 세운 사직신(社稷神)의 묘당이다.
전 임
엄숭(嚴嵩)
제44대 명나라 내각대학사 수보
1562년 음5월 ~ 1568년 음7월
후 임
이춘방(李春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