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Wony0705/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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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이런 적 있었다.[편집]

[들어가기에 앞서 전할 말][편집]

이 글은 00년대 학번이었던 익명의 국민대 대학원생 분께서 ‘에브리타임’ 어플리케이션에 작성한 ‘심심해서 쓰는 국민대 시리즈’를 정리한 것입니다. 본 글은 원작성자에게 허락을 받아 수정 후 업로드 하였습니다. 이 문서에 쓰인 내용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국민대 학생 이야기][편집]

1. 축제 때 복지관에서 커플이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지던 중 걸린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복지관 24시간 개방이 좌절되었다. 

2. 성곡도서관을 만들어달라고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본부관 모든 유리창을 박살낸 적이 있다.  

3. 2010년 축제 때 술을 마시다가 7호관 난간에서 추락해 죽은 학생이 있다. 이 사건 이후 2년간 주점 없이 축제를 진행했다고 한다. 

4. 7080년대 민주화투쟁 당시 지금 용두리 자리에서 큰 물체를 정문으로 굴려 교문을 부수고 도로로 진출하곤 했는데, 한번은 학교 수위실에서 그냥 문을 열어버려서 공을 굴리던 선배들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지금의 송백식당 자리로 굴러 넘어진 적이 있다. 


5. 예전 신입생 교외OT는 단과대별로 따로 갔다. 그런데 한번은 신입생이 새벽 3시에 건물을 빠져나와 슬로프를 전전하다 얼어죽기 직전에 발견된 적이 있다. 그런 사고가 몇 번 발생해서 어느 새인가 통합으로 가게 되었고, 언젠가 부턴 안 가게 되었다. 

6. 모 단과대 교외OT는 모 대기업이 운영하던 콘도로 갔는데, 하필이면 같은 날 대기업 고위임원이 윗층에 같이 투숙하는 바람에 술도 못 마시고 그냥 잔 적이 있다. (5번과 같은 날에 벌어진 일이다.) 

7. 10년 전 국민대는 입학할 때 문과에선 수학을 보지 않던 학교였다. 그래서 경영학과 신입생들이 첫 학기에 미친 듯이 고생했다고 한다. 

8. 미국 월가의 오큐파이 운동을 따라한다고 민주광장에 텐트를 쳤던 사람이 있었다. 

9. 학교 축제에서 미스코리아처럼 ‘국민여왕 대관식’을 열었었다. 

10. 70년대 국민대는 1년 전체 입학생이 500명 수준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번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지냈다. 

11. 국민대 1회 졸업식은 1950년 6월 24일에 열렸다. 1회 졸업생들은 졸업기념으로 밤새 술을 마시고, 일어나자마자 피난짐을 쌌다고 한다. 

12. 2012년 부실대학 사태 당시, 학교 운동권 10여명이 본부관 로비를 점거농성한 적이 있다. 학교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총동문회 정기총회가 본부관에서 있었고, 이를 지켜본 총동문회장님이 학생처장을 협상테이블로 끌고 나오신 적이 있다. 학교에선 이들에게 징계를 주려했는데 유야무야 됐다. 

13. 2015년, 과학관에서 외국인 유학생이 이성관계를 비관한 나머지 칼로 자해한 적 있다. 

14. 2011년 서울 대정전 당시, 콘서트홀 전망 엘리베이터에 학생들이 갇혀서 다른 학생들의 구경거리가 된 적이 있다. 

15. 2011년 서울 대정전 당시, 수업이 불가능해서 교수님이 수업을 도중에 끝냈으로 방화셔터가 내려와 갇히는 바람에 건물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어떤 용감한 학생은 그 셔터를 뜯고 나왔다. 

16. 입체미술과 학생들이 과제로 국민대입구역 간판을 제작한 적이 있다. 이는 예술관 대극장 입구에 설치되었는데, 입시를 치르러 온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이 이를 보고 대거 낚이는 바람에 철거당했다. 


17. 국민대는 대학가요제 우승자를 딱 한번 배출했다. 그 멤버 중 한명은 음반을 내서 프로가수로 데뷔도 했다.  

18. 성곡도서관은 한때 도서구입 신청을 하는 대로 족족 받아줬다. 그걸 누가 알고 무더기로 라이트노벨을 신청한 적 있다. 

19. 몇 년 전 축제 때 지하주차장에 싸이키조명을 설치해 클럽과 나이트를 만들려고 한 적이 있다. 학교의 반대와 법적 문제로 실행되진 못했다.

[국민대 동아리, 커뮤니티 관련 이야기][편집]

1. 한 때, 동아리에 지도교수가 도장을 찍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했다. 

2. 국민대엔 농구부가 있었다. 무려 농구 대잔치 창설 멤버였다. 국가대표도 배출해낸 적이 있다. 

3. 역시 유도부도 있었고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있었다. 

4. 동아리방에서 찰흙을 녹이려고 히터를 플라스틱막대로 비스듬히 세웠다가 동아리방을 다 태워먹은 사람이 있다. 다행히 그 동아리는 탄핵 안 되고 잘 살아있다. 조심하자. 

5. 공대 지하는 본래 동아리방이 있었다. 

6. 국민저널이 처음 생겼을 때 지인들에게 국민저널을 추천하며 들어가라고 꼬시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은 국민저널을 들어가지 않고 졸업해버렸고, 들어간 사람들만 엄청 고생했다. 

7. 국민인닷컴 이전에 다음카페에 국민인 커뮤니티가 존재했는데, 이름이 “국민학생들” 이었다. 

8. 국민저널 역대 편집장 중 한명은 학부생때 이미 기자로 채용된적이 있으며, 현재도 주요 일간지에 기명칼럼을 작성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편집장을 맏고있던 당시에 뭣도 모르고 국민저널을 비판하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사람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9. 동아리박람회는 보통 학식앞에서 진행했는데, 어떤 해에는 장소가 너무 좁아서 농구코트로 옮긴 적이 있다. 하지만 천막과 책상들이 다 날아가서 폭망한 이후에 다시 학식앞에서 진행하고 있다.  

10. 어떤 년도 동아리연합회는 200만원을 들여서 대형광고판을 장만해 3월 학내에 설치했다. 그런데 역시 심심하면 바람에 날아가버려서 이젠 설치하지 않는다. 

11. 복지관 동아리방은 원래 40여개 수준이었다. 2002년 동아리연합회장이 단식투쟁으로 나머지 20여개를 더 따냈다. 

12. 학교 곳곳에 설치된 쓰레기통은 학교가 설치한 게 아니다. 환경동아리가 설치한 것이다. 그 전엔 그냥 커다란 원형 통에 쑤셔 박는 구조였다. 

13. “국민대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이라는 다음 카페가 있었다. 거기서 많은 썸과 커플이 만들어졌다. 

14. 국대전 이전에 ‘민주광장’이란 계정이 있었다. ‘여러분들의 게시판’이란 그룹을 두고 공론장으로 쓰였는데, 실명위주로 활동이 많지는 않았다. 국대전이 생기자마자 순식간에 잊혀졌다. 

15. ‘법학관’이란 이름의 계정이 있었는데, 이 관리자가 일베스러운 말을 상습적으로 올리다가 당시 국민저널 편집장에게 글로 뚜드려 맞고 계정을 비활성화 시킨적 있다. 

16. 학내엔 꽤 최근까지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비밀모임이 있었다. 워낙 비밀조직이라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고, 그 내막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지금은 존재 자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민대 총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이야기][편집]

1. 2012년에 학생총회를 발의한 적이 있는데, 70명이 왔다. 

2. [국민대 내부 이야기]에서 언급한 교내 출입 시내버스가 없어졌을 때 총학이 욕먹으니까 부랴부랴 삼보일배를 했는데, 고작 학교 앞에서 본부관까지 하고 생색은 엄청 냈다. 

3. 군사독재정권시절엔 총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있었는데, 여기 학도호국단의 리더는 주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을 시켜줬다. 그런데, 한 선배는 총학생장을 하면서 취직이 됐다는 안도감에 공부 대신 데모를 열심히 하다가 잡혀 들어갔고, 약속된 일자리는 권한대행으로 들어온 후배에게 돌아갔다. 그렇게 얼떨결에 취직한 그분은 현재 해당 분야의 전설로 활약 중이다. 

4. 우리학교에 여성 총학생회장이 역사상 딱 한번 나온 적 있다. 그런데 난소종양에 걸리셔서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갔다. (한총련이셨다.) 

5. 2011년 가을 총학선거에서 여성듀오로 이뤄진 한팀이 경고3번 먹고 후보자리에서 짤렸는데 억울하다고 점심시간에 콘홀 앞에서 삭발식했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투표를 3번했는데도 다 무효처리 되어서 선거 자체가 무산되었다. 3번째 투표가 무효가 되며 전체 선거가 무효처리 되자 삭발한 총학생회 여성 후보팀은 나머지 3팀의 후보들의 화난 모습을 뒤로하고 만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개표장을 나갔다.  

6. 예전 총학 선거때 단과대 학생회장 출신 후보가 출마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학생들에서 해당 후보에게 회계 유용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후보측에서 회계보고서라고 자료를 내놓았는데 그것이 첨부된 짤. 그리고 그 후보는 선거에서 처참하게 패했다. 


7. 총학생회 선거 기간 중에 단과대 학생회장끼리 술을 마시다 의견충돌로 싸운 적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얻어터졌고 맞은 사람은 코뼈가 나갔고, 때린 사람은 회장직을 사퇴했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당시 총학생회는 “맞은 놈이 원래 나쁜 놈이다.”라는 말투로 성명서를 썼다가 엄청난 욕과 비난을 먹고 글을 내렸다.

또한 위 사건에서 얻어맞은 사람은 차후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는데, 상대방 후보 자격문제를 두고 법원에 고소하고 선거운동은 하나도 안하다가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8. 새터민이 국민대 총학생회 선거 ‘정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었으나, 떨어졌다. 새터민이라서 떨어진 건 아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9. 쌍용이 잘 나갈땐 학도호국단(군사정권 시절 총학생회와 비슷한 조직) 간부들은 졸업 후 쌍용에 취직되곤 했다.  

10. 학생회장을 하다가 소리소문 없이 잠수를 타는 바람에 부회장이 똥물 다 뒤집어쓰고 수습하느라 1년을 보낸 때가 있었다. 

11. 복지관 외부 전광판은 본래 총학생회가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총학이 유지수 총장과 재단을 광역저격하는 문구를 전광판에 띄워버렸고, 이후 운영권은 학교로 넘어갔다. 

12. 총학생회 선거에서 체대 학생들이 선본을 꾸려 나온적이 있었는데, 무려 포스터 사진으로 상의 누드 사진을 썼다. 그런데 꼴찌했다. (이 후보들의 등록금 공약이 “무력투쟁도 불사하겠습니다.” 였다고 한다.) 

13. 군미필이란 이유로 총학생회 선거 때 떨어진 후보가 있었다. 다음 해 재수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상대 유력후보들이 모두 미필(여성)이라 당선되었다. 

14.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재학생들이 돈을 모아 경향신문에 광고를 게재했다. 이를 주도한 멤버들이 2008년 가을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15. 2009년 축제는 114번에 언급된 사람들이 준비했다. 그래서 정치색을 강하게 띄었는데, “조중동 신문 밟기”, “미친 소 타기”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엄청난 욕을 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축제 2일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축제 자체가 취소되는 바람에 실현되지 않았다.  

16.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총학생회장은 Daum카페 “국민학생들”에서 100여명의 학우들과 채팅하며 의견수렴을 했고, 다음날 축제를 취소한 적 있다. 

17. 총학생회 선거 중에 운동권이 마음에 안들었던 모 단과대 회장이 자신의 직을 사퇴하고 후보를 저격한 일이 있었다. 역시 140번 사건과 동일한 국민저널 편집장에게 글로 뚜드려 맞았다. 추후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회칙 개정까지 이루어졌다.

[국민대 교직원, 교수님 이야기][편집]

1. 교직원 분들 중에 예전 학생운동 엄청 하다 너무 열심히 한 덕에(?) 교직원으로 픽업되신 분들 몇 분 계신다. 

2. 현재 2017년 총동문회장님이 2011년에 처음 취임하셨을 때, 학교에 생맥주와 참이슬, 과자안주를 무제한으로 뿌리신 적이 있다. 다만 저녁 7시에 뿌리시는 바람에 6시만 되면 집에 다 가버리는 착한 국민대생들은 하나도 얻어먹지 못했다. 

3. 언론정보학부 류 모 교수님은 학교 방송국이 시끄럽다고 북악방송국에 쳐들어가 코드를 뽑으신 적이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2012년 부실대학 사태 때 재단과 학교를 규탄하러 오신 동문들이 집회를 열자 시끄럽다고 항의하다가 몰매 맞을 뻔하신 적도 있다. 

4. 교양과목중에 “데모에 반드시 참석하고 감상문을 써오기”가 중간고사였던 과목이 있었다. 심지어 이 수업은 교재도 없었고, 수업시간에 계속 자도 시험 보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또한 반장을 하면 시험을 치지 않아도 A+를 받았다. 교수(강사)님은 데모를 너무 열심히 해서 개강직전에 구속되시는 바람에 폐강될 뻔한 적도 있다. 

5. 학교에서 약 30년을 재직한 교직원이 계셨는데, 본인의 생활에 자부심이 넘치셨는지 30년 동안 겪은 회고록을 자비로 출판하신 분이 계신다. 

6. 경영대 김 모 교수님은 교내 시내버스 진입을 강력히 반대하셨는데, 공식석상에서 밝힌 이유는 “매연이 연구실로 들어오기 때문” 이라고 밝히신 바 있다. 그런데 그 분은 대학원생이 있어도 자기 연구실에서 담배 피신다. 

7. 현재까지도 학내에 꽤 자기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H 전 총장은 자신이 불리할 때마다 학교의 비위사실을 투서로 써서 학내 이해집단에 발송하곤 한다. 너무 수법이 뻔해서 이제 다 누군지 아는데도 그런다. 

8. 국문과 모 교수님과 국제학부 모 교수님은 사제지간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와 학생의 관계로, 국제학부 모 교수님이 먼저 입교하셨고, 국문과 모 교수님은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나중에 입교하셨다. 

9. 등록금 심의위원회에는 학부모 대표위원이 있었다. 그런데 선임된 분께서 “등록금이 더 올라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시는 바람에 학생들이 그 직위 자체를 없애버렸다.

[국민대 내부 이야기][편집]

1. 국민대 교내에 시내버스가 들어온 적 있다. 용두리, 콘서트홀 앞에 정류장이 있었고 종점은 과학관, 기점은 길음역이었다. 

2. A4용지를 들고 가면 전산실에서 인쇄비용은 무료였다. 

3. 복지관 지하에 아름다운 재단이 운영하는 아름다운가게가 있었다. 

4. 학교에 있는 동상, 비석은 모두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만들어졌다. 

5. 경상홀은 원래 중화요리 식당이었다. 

6. 법학관은 원래 학생회관이었다. 

7. 예술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노천극장이었다. 

8. 복지관은 처음에 5층으로 지어졌다. 6층은 증축한 것이다. 

9. 북악관 전망 엘리베이터는 나중에 지어진 엘리베이터다. 

10. 공대의 맘스터치 자리에는 원래 와플집이 있었다.  

11. 7호관 건너편에 방치된 폐건물은 본래 스포츠센터였다. 

12. 성곡동산 자리에는 성곡 김성곤 선생 묘소가 있었다. 그러나 운동권의 잦은 데모로 인해 강원도 평창으로 쫒겨났고, 최근에 들어서 몰래 묘비만 이전해왔다. 

13. 과거 학생회관(현 법학관)의 식당은 1층에 있었다. 맛없기로 유명해서 맨날 학보사에서 깠다. 

14.과거 학생회관(현 법학관) 3층 테라스는 본래 총학생회가 현수막을 제작하던 곳이었다. 

15. 공대 별관 매점의 별명인 미네르바는 본래 현재 조형관 자리에 있던 매점 컨테이너를 이르던 말이었다. 

16. 북악관 1층 로비 대신 극장이 있었다.(현재 복지관 지하 공연장과 비슷한 용도) 

17. 현재 학군단 건물 자리는 본래 외국인 기숙사 자리였다. 

18. 와이파이란 것이 없었던 시절, KT NETSPOT이란 무선 인터넷 시스템이 교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걸로 노트북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학교 밖 NETSPOPT 구역에선 사용이 불가능했다. 

19. 민주광장엔 본래 나무가 없었다. 데모 못하게 하려고 심었다는데, 정작 나무심고 나서부턴 학생들이 데모를 안했다. 

20. 컴공은 무려 3개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과학관, 7호관, 공학관 5층. 

21. 60년대 70년대에는 국민산업학교, 국민여자초급대학이라는 콘서바토리 비슷한 교육기관이 국민대 내에 존재했다. 

22. 청향이 위치해있던 곳은 본래 열람실이었다. 로스쿨이 떨어지고 식당으로 바뀌었다. 

23. 기숙사 C동 자리엔 알박기를 하고 있던 집 한 채가 있었다. 이 집 때문에 현재 기숙사 구조가 기형적으로 건설된 것이다. 10억 줘도 안 나간다고 했는데, 돈을 더 줬는지 결국 나갔고 C동이 세워졌다. 

24. 기숙사 점호는 본래 밤 12시 이후에 이뤄졌다. 그래서 점호하는 날은 벌점맞을 각오 하지 않는 이상 외박이 불가능했다. 

25. 교내기숙사 AB동만 존재하던 시절, 총 입소인원은 고작 600명이었다. 심지어 그 중 반은 신입생이었다.  

26. 형설관은 원래 고시반 전용 건물이었다. 

27. 국민대는 5.16 군사쿠데타 이후 대학 정리 정책으로 폐교될뻔 한 적 있다. 야간부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28.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은 본래 국민대학 건물이다. 총동문회관이 경복궁 인근에 위치한 건 그 때문이다.  

29. 복지관 1층에 있는 동아리방들은 원래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옮겨갈 뻔 한 적 있다. 복지관 공간 개편 때문에 그러했는데, 동아리연합회 차원에서 회의도 끝내고 공간배정도 다 끝낸 상태였지만 공사 3일전에 북악관 엘리베이터 보수공사가 더 급하다고 해서 다 취소돼버렸다.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미용실 자리는 아우성 동아리방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30. 건축대는 지금 자리로 오기전에 북악관 4층에 있었다. 가끔 계단 뛰어내려가는 애들이 건축모형 부숴트려서 고통받기도 했다.  

31. 경영관 지하는 90년대까지만 해도 ROTC시설이 있어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32. 총학생회실 건너편에는 청소노동자 휴게실이 있다. 2015년 총학생회가 자신들의 공간을 포기하고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 총학생회가 너무나도 일을 못한다고 욕을 먹고 다녀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33. 복지관 317호 열람실은 본래 총학생회 대회의실이었다. 2014년 총학생회가 열람실을 뺏기는 와중에도 말레이시아 갔다가 걸리는 바람에 나노단위로 까이면서 어쩔 수 없이 열람실로 내놓게 되었다. 

34. 운동장 인조잔디는 학교 돈으로 설치한 게 아니다. 로또 기금으로 설치된 거다. 

35. 복지관 여학생휴게실은 총여학생회실 자리였다. 2000년대 중반 총여학생회가 사라지자 여학생휴게실로 바뀐 것이다. 

36. 복지관 지하엔 PC방이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도 있었다. 그런데 사양이 구려서 수강신청은 아무도 거기서 하지 않았다. 

37. 축제무대는 본래 북악관 앞 민주광장에 있었다. 2010년대에 들어 농구코트로 옮겨갔는데, 총학생회가 자진해서 옮겨갔지만 북악관 교수님들의 항의가 심해서 옮겼다는 것이 정설이다. 

38. 본부관 한켠에 달려있는 국민대 로고는 예전에 북악관에 달려있던 것이다. 

39. 복지관에는 몇 년 전까지 대현자님이 계셨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지금 7호관 옥상에서 벌을 키우신다고. 

40. 복지관 2층 복사실 인근 평생교육원 시설들은 본래 모두 열람실이었다. 

41. 복지관 열람실에도 좌석발급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설치 1년만에 126번 사건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었다. 

42. 80년대 캠퍼스 발전계획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시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7호관/예술관 자리에는 지금 체육관의 4배가 넘는 초대형 체육관

-공학관 별관은 현재 자리가 아닌, 테니스장 북쪽 일부자리에 신축

-북악관과 조형관 뒤에 건물 1개씩

-국제관, 경상관, 경영관은 계획에도 없었음 

43. 도서관 옆에 지어진 국제교육관은 본래 용도가 신 도서관이었다. 다 짓고 나서 용도변경이 되는 바람에 용도와 건물구조가 맞지 않아 벽과 천장을 다시 뜯어 공사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44. 복지관 지하 구석에는 대형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다. 왜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민대 주변 이야기][편집]

1. 지하세계에 서서갈비집이 있었다. 

2. 맛짱은 본래 쎄쎄양꼬치 자리에 있었다. 지금 맛짱자리는 공터였는데 장사가 잘되서 건물을 세웠다. 

3. 북악터널은 유료터널이었다. 

4. 1711번 버스 종점은 본래 평창동이라 국민대로 오지 않았다. 

5. 송백식당은 국민대가 정릉으로 옮겨왔던 1971년부터 계속 존재했다. 주인만 바뀌었을 뿐 송백이란 이름은 그대로. 

6. 현주네포차는 본래 30명도 들어가기 힘들던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7. 미스터전 자리는 본래 횟집이었다. 전집으로 업종 변경하고 몇 년 있다 다시 횟집하신다 했는데 여전히 감감무소식. 세꼬시가 맛있던 집이었다. 

8. 기숙사 앞 편의점은 본래 바이더웨이였다. 스태프 핫도그를 팔아서 인기가 좋았다. 

9. 노가리 사장은 LG트윈스 광팬이라 LG트윈스 선수 사인을 가지고 오면 술값을 깎아주곤 했다. 그런데 2013년 겨울, LG트윈스가 학교 뒷산으로 연탄나르기 봉사를 왔다는 소식이 국민대 갤러리를 통해 퍼졌고, 사인을 받기 위해 수십명의 학우가 학군단까지 뛰어갔는데 그 모습이 흡사 월드워Z 같았다(필자가 실제 목격함). 

10. 2007년 내부순환로 국민대램프가 지어지고 대학원 입학생수가 폭증했다. 그 전엔 내부순환로를 타고 국민대를 오려면 월곡에서 내려온 다음 일반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11. 소한마리 건물에는 본래 칼국수 집과 북카페가 있었다. 바지락을 많이 넣어줘서 좋았는데 고깃집으로 바뀌었다. 

12. 171번 종점은 예전엔 “2번 종점”으로 불렸다. 2번 버스의 종점이었기 때문인데, 2번인 이유는 70년 서울시내버스 개편당시 청와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려 시계방향 순서대로 버스노선을 정했는데 국민대 앞이 2번째라 2번이 되었다. 1번은 정릉 북한산 종점. 

13. 노가리는 한 때 단위면적당 소주 소비량이 서울시 2위였다.

[사회 속 국민대][편집]

1. 진중권이 시국토론회를 온 적이 있다. 200명이 들으러 왔었다. 

2. 이효리는 졸업을 위해 경영대 모 교수에게 제발 D만이라도 달락 요청했지만, F를 줘서 졸업을 못했었다. 참고로, 당시 이효리에게 F를 준 교수님은 이 일화를 굉장히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다니신다. 

3. 체육관은 90년대 인기드라마 마지막승부의 로케장소로 쓰인 적이 있다. 

4. 공전의 히트를 친 S본부의 모 드라마(PD가 동문)가 국민대를 배경으로 촬영하기로 하고 시나리오가 쓰여졌으나, 교수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5. 4.19뜀박질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수유리까지 진짜로 뛰어갔다. 

6. 4.19뜀박질은 본래 동북지역 운동권이 주최하던 행사라 다른 학교는 30~50명이 왔지만, 국민대만 유독 인원이 많았다. 수백에서 많게는 1000명 넘게. 그러다가 다른 학교는 아예 다 포기하면서 국민대만 4.19뜀박질을 하고 있다. 

7. 2011년, 동문이 대표를 맡고있던 모 게임사(꽤 유명함)가 정규직 20명을 채용하기 위해 학교로 왔으나, 취업설명회에 20명도 안오고 원서 낸사람은 한손에 꼽을만큼 적어서 동문이 꽤 실망한 채로 돌아간 적이 있다. 

8. 우리학교 축제에 아이유가 온 적이 있다. 유명해지기 전이란게 문제지만. 

9. 지금은 해산당한 통합진보당 김재연 전 국회의원이 법대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참석자 전원에게 피자를 쐈다. 

10. JTBC 손석희 사장이 국민대에 오지 못한 것은 언론정보학부 교수들의 반대 때문이라는 썰이 돈 적이 있다. 자세한 사실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11. ‘유이’가 주연이었던 KBS드라마 촬영을 국민대에서 했는데, ‘유이’를 보러온 남학생들 때문에 즉석에서 시나리오가 수정된 적 있다. 

12. 어느 날 멧돼지가 과학관으로 내려왔는데, 하필이면 그 날 주한 미국 대사가 국민대를 방문해 멧돼지를 쫒아낼 도구를 사용할 수 없어서 애 먹은 적이 있다.(주한 미국 대사가 뜨면 인근지역 모든 무기고가 봉쇄된다고 한다.) 결국 소방관분들께서 육탄돌격으로 쫒아냈다.  

13. 7호관에 있는 스튜디오는 종종 케이블 예는 또는 광고촬영에 사용되곤 한다. 한번은 하하와 정형돈이 와서 무한도전 찍는 줄 알고 온 학교가 마비될 뻔한 적이 있다. 알고보니 광고촬영이었다. 

14. 안철수와 문재인은 2012년 대선 당시 국민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안철수는 총장님이 부르셔서 왔고, 문재인은 법대 학생회장이 불러서 왔다. 

15. 나는 꼼수다로 이름을 날리다 지금은 망한 김용민씨는 나꼼수 녹음 당시 국민대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때문에 경영관 1층 대형강의실에서 강연한 적도 있다. 강의실에 사람이 못 들어가서 복도까지 들어찰 정도로 많이 왔다. 이때가 2011년이었는데, 그 다음해에 폭삭 망해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16. 응답하라 1988의 ‘성노을’역으로 유명한 배우 최성원은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다. 학교 다닐 때도 노안이었다고 한다. 연영과 교수님께서 직접 이야기해주셨다고 한다. 

17. 개교 60주년 기념식은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초호화라인업으로 치러졌다. 왜 그런게 가능했냐면 당시 총동문회장은 여당 원내대표였고, KBS 예능국장이 동문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 

18. MBC가 국민대를 배경으로 ‘레인보우 로망스’라는 청춘시트콤을 제작한 적 있다. 그런데 교수들이 시끄럽다고 쫒아내서 후반부는 부천대학에서 촬영했다. 

19. 2008년에 국민대는 정시 논술전형이 실시됐다. 학교 앞 교통이 마비됐고(택시를 잡기위해 걸어서 북악터널을 넘어간 수험생들이 부지기수다), 그 이루로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 

20.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국민대학 현판을 떼버리고 “인민대학”이란 현판을 달아놨었다. 

21. 쌍용그룹 김석원, 김석준 회장은 가끔씩 국민대에 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기부금을 출연하곤 했다. 그런데 출연한 이유는 본래 자기들이 나온 학교(서강대, 고려대)에 거액을 기부하려다 그걸 알게 된 학생과 동문들이 “자기가 주인인 학교엔 왜 돈을 안내고 엉뚱한 곳에 주냐”라고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22. 개교 50주년이던 지난 1995년에는 운동장에서 KBS 열린음악회가 열린 적 있다. 

23. 성곡 김성곤 선생은 본래 박정희 대통령의 심복이었으나, 한번 박정희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남산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한 적 있다. 트레이드마크인 콧털이 모두 뽑혔고 변을 지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10년도 되지 않아 사망하셨다.

[끝맺으며][편집]

2009년 WBC결승전을 체육관에서 중계해줬다. 2000~3000명이 보러왔는데, 9회말 이범호 동점타가 나오자 아수라장이 됐다.(그리고 이 글의 원작자는 당시 총장님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이 아수라장을 틈타 총장님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