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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훈의 자전적 스케치

양승훈은 육이오 전쟁 직후, 낙동강의 커다란 지류인 영강이 마을 뒤를 휘감고 흐르며 강 건너 소백산맥의 일부인 오정산이 휴전선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경상북도 문경의 창리 윗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은 양명철 장로와 임의정 권사의 5남 2녀 중 여섯째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인은 세례가 뭔지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해서 인근 문경 시멘트 공장의 발파 소리에 놀라 경기(驚氣)를 하는 등 부모님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했지만 10여 년 간 왕복 10Km가 넘는 학교를 도보로, 자전거로 통학하면서 많이 건강해졌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이 그랬듯이 양승훈도 “지게 대학”을 갈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계속 대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성장하면서 주변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몇 분이 계셨지만 대학원을 다니던 1978년, 63세를 일기로 암으로 별세하신 아버지는 완전한 분은 아니었지만 양승훈의 신앙과 삶에 지울 수 없는 모델이었다. 그리고 1990년, 50세를 일기로 역시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큰 누님 양희숙 권사는 마음의 가장 깊은 것들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의 선배였다.

시골에서 붉은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황금빛 들녘을 가로질러 학교를 오갈 땐 온갖 황당무계 하고 철딱서니 없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지만, 대학을 가서부터는 생각이 좀 더 깊어지게 되었고, 특히 몇몇 분들은 양승훈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양승훈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는 우선 미국인 평신도 선교사 원이삼(Wesley Wentworth) 박사를 들 수 있다. 1980년, 한국창조과학회 창립을 위한 모임에서 처음 만난 원 선교사는 좋은 책과 사람들을 만나게 해줌으로 양승훈에게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적 지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양승훈이 근래에 들어 창조과학의 여러 문제점들을 깨닫게 된 데도 원 선교사의 공로가 컸다. 양승훈의 기독교적 지성의 자양분의 대부분은 원 선교사와 직, 간접적 교제를 통해 얻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또한 예수원 설립자이자 성공회 사제였던 대천덕(Reuben Archer Torrey) 신부도 양승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79년,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강연을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방문했던 대천덕 신부로부터 양승훈은 진정한 신앙,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아직도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대 신부는 양승훈에게 진정한 경건에 더하여 진정한 보수와 진보가 무엇인지, 신앙과 학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다.

양승훈은 어릴 때는 멋도 모르고 자동차 정비공이 되려는 마음을 먹기도 하고, 음악가가 되었으면 하는 황당한 꿈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경북대 사대 물리교육과에 진학하면서 그 후 24년 간 물리학도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경북대를 졸업한 후에는 KAIST에 진학하여 반도체 물성 연구로 이학석사(M.S.) 및 박사(Ph.D.) 학위를 받았고, KAIST 학생 시절에는 이탈리아 국제이론물리학센터(1982)에서 한 학기동안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약간이지만 유럽의 정취를 맛 볼 수도 있었다. 졸업 후에는 곧바로 모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대학에 근무하는 동안 한국과학재단 포스터닥으로 미국 시카고대학(1986)에서, 후에는 대학원 학생으로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과학사(M.A.)를, 위튼대학에서 신학(M.A.)을 공부할 수 있는 축복을 누렸다.

이 중 위튼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은 양승훈의 삶의 후반기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신학 공부는 양승훈이 원해서 했다기보다 시카고대학에서 연구하는 동안 출석하던 시카고 한인서부교회 최일식 목사(현 KIMNET 대표)의 권유 때문이었다. 양승훈이 두 번째 미국에 가서 위스콘신대학에서 과학사를 공부할 때 최 목사는 다짜고짜 “쓸데없는 공부”는 하지 말고 신학공부를 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튼대학에서 가장 금액이 많은 빌리그래함센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물론 양승훈은 처음에는 신학을 “성도의 교양” 정도로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런데 결국 이로 인해 양승훈은 경북대와 물리학을 떠나 캐나다로 와서 현재의 세계관 및 창조론 사역을 하게(혹은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의 미래는 하나님 밖에 모른다.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후에 양승훈은 주 전공이었던 반도체 물리학에 더하여 창조론,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와 과학 등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수년이 지난 후 그는 이 모든 것들을 공부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결국 1997년 10월 31일, 14년간 정들었던 경북대 교수직을 사임했다. 그 후 기독학자들의 모임인 DEW(기독학술교육동역회)의 파송을 받아 밴쿠버에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를 설립, 운영하면서 지금은 창조론과 세계관 분야의 강의와 글을 쓰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재 VIEW는 밴쿠버 인근 트리니티 웨스턴 대학(TWU)에 속한 캐나다연합신학대학원(ACTS)을 통해 기독교세계관 대학원 과정(기독교 세계관 문학석사 과정 및 디플로마 과정)을 개설하고 있으며, 2007년 가을부터는 기존의 프로그램에 더하여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주정부로부터 대학 인가를 받아 독자적인 세계관 디플로마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는 TWU 인근에 VIEW 국제센터를 만들어(그 안에 양승훈의 집도 있지만) 청소년 캠프나 교사 연수 같은 단기 세계관 훈련 및 창조론 탐사여행도 인도하고 있다.

그 동안 양승훈은 반도체 물리학, 기독교 세계관, 과학교육 등에 관한 어설픈 논문들과 책들을 여러 권 썼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수작(秀作)이라고 할 말한 것은 별로 없다. 구태여 몇 가지를 든다면 비정질 반도체의 구조와 전기적 특성의 관계를 밝힌 것과 비정질 반도체에 열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준안정 상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반도체 물리학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중등학교에서 물리 개념을 가르치는데 과학사적 학습이 효과적임을 밝힌 것은 나름대로 과학교육의 발전과 과학을 “인간화”(humanize) 하는데 작은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리학이나 과학교육과는 달리 창조론 연구는 심리적 부담을 수반하지만 양승훈이 지속적인 보람을 느끼는 분야이다. 창조론 연구와 관련하여 양승훈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면 2004년에 제안한 “다중격변모델”(Multiple Catastrophism)이다. 이 이론은 비록 200여 년 전, 프랑스 파리 과학원의 창조론자 퀴비에(G. Cuvier)가 처음 제창한 아이디어이기는 하지만 지난 수년 동안 양승훈이 최근 지질학적, 천문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여 다듬었다. 이것은 지구역사에는 여러 차례의 전 지구적 격변이 있었고, 그것의 마지막 격변이 노아의 홍수였다고 하는 이론이다.

양승훈이 다중격변모델을 제안하게 된 배경에는 근래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운석공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1994년, 20여개 이상으로 부서진 채 목성 표면에 부딪힌 슈메이커-레비 혜성으로 인해 학자들은 혜성 혹은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현재 전 지구적으로 180여 개의 운석공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28개는 한 대륙의 멸종을 가져올 수 있는 직경 30Km 이상 되는 운석공들이며, 그 중 5개는 중생대 말기나 고생대 페름기 말기에 일어난 전 지구적 멸종을 일으킬 수 있는 직경 100Km 이상 되는 운석공들이다. 물론 바다에 떨어진 운석공들까지 포함한다면 이보다 3배 가량 더 많은 숫자의 운석들이 지구와 충돌했으리라고 본다. 거대한 운석들이 음속의 100여 배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구와 충돌할 때 어떤 격변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여러 모의실험을 결과를 근거로 양승훈은 다중격변모델을 제안하게 되었다.

처음 이 모델을 구상하게 되었을 때 양승훈은 드디어 이 모델로 창조과학의 6천년/노아홍수설과 진화론자들의 동일과정설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창조론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특히 양승훈은 이 이론이 전문가들 앞에서 단칼에 나가떨어지는 창조과학을 구해낼 것으로 기대하면서 제안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창조과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고, 일전에는 결국 이 이론 때문에 30여 년 간 몸담았던 창조과학회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양승훈의 학문적 여정의 또 하나 중요한 영역은 에세이를 쓰는 것이다. 양승훈은 1980년 이후로는 기독교 세계관적 삶을 나누는 에세이들을 부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처음에는 따로 일기를 쓰지 않기 때문에 그때그때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을 앨범에 모아둔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에세이들은 주로 기독교적으로 산다는 것과 사고하는 것,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적으로 학문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하는 내용이다. 다행히 사람들이 꾸준히 읽어주는 통에 이 글들을 모아 몇 권의 책을 낼 수 있었고, 지금도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근래에 들어 양승훈은 어쩌면 다른 “심오하고 난해한” 학문적인 글보다 평이한 에세이가 보통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목 맨 송아지 같았던 10대가 엊그제 같은데, 공부 때문에 바빴던 20-30대, 일 한다고 분주했던 40대도 지나고 어느 새 양승훈도 쉰을 지났다. 이제는 새치라고 둘러댈 수 없을 만큼 많은 흰머리도 생기고, 여기 저기 몸 구석구석에서 노화의 조짐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나이를 이길 장사는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나이가 들어가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가까운 분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양승훈은 늘 “인생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나 누님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자신도 언제든지 대한민국 남자들의 평균 수명을 채우지 못한 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른 부름이 없다면 양승훈은 지금처럼 VIEW에서 세계관과 창조론에 관한 글을 쓰면서,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틈나는 대로 설교도 하며 남은 인생을 살 것이다. 근래에는 더 많은 일을 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보니 이젠 조금씩 철이 드는 모양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