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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루이스와의 재대결[편집]

막스 슈멜링과의 1차전에서 패한 뒤, 조 루이스1937년 챔피언에 오른 후에도 "슈멜링을 꺾을 때까지는 나를 챔피언이라 부르지 말라"며 복수전을 별려 왔다.[1] 재대결은 1938년 6월 22일 미국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으며[1], 곧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의 대결은 미국과 독일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방 언론매체는 두 사람의 경기를 ‘흑인 대 백인’, ‘자유 대 파시즘’, ‘선(善) 대 악(惡)’의 대결로 묘사했다.[1] 그 당시 조 루이스는 미국에서 자유와 기회의 상징으로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막스 슈멜링은 히틀러가 독일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창조한 독일의 국민적 영웅이었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경기 며칠 전 루이스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함께 식사하며 “당신의 두 팔에 미국(운명)이 달려 있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도 슈멜링에게 “미국 검둥이를 때려 눕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라”고 특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이러한 관심과는 달리, 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루이스의 펀치를 여러 차례 맞은 슈멜링이 1회 2분 4초 만에 KO패 한 것이다.[1] 미국 언론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사악한 나치’에 대한 ‘자유의 승리’라고 보도했다.[1] 경기 이후 막스 슈멜링은 조 루이스와 친분을 유지했는데, 실제로 1995년 90회 생일을 맞은 슈멜링은 “아쉬운 게 있느냐”는 질문에 “내 친구 루이스가 먼저(1981년 사망) 세상을 떠난 것이 가장 아쉽다”고 대답했다.[1]

은퇴 이후[편집]

막스 슈멜링은 1948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2] 그 이후, 1950년대에는 그동안 번 돈으로 독일에서는 최초로 코카콜라 컴퍼니의 사장이 되었고, 사업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1981년 조 루이스가 사망하자, 장례식을 치러주기도 했다.

1987년 그의 아내 안니 온드라(Anny Ondra)가 사망했다. 같은 해 독일 스포츠 담당 기자 등의 투표에 의해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독일의 운동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2]

1991년 본인의 이름을 따서 막스 슈멜링 재단을 설립했다.[2]

1992년에는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2월 2일 9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2]

2010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3]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