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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에 대한 분석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평등함 속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라와 나라 간에도 불평등이 존재하고, 계급과 계급 안에도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은 우리의 생각만큼 평등하지 않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불평등보다 무서운 것은 온갖 무시와 차별이 존재하는 인종간의 불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사회는 백인과 흑인간의 차별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지는 사회였으나 케네디가 1964년 인종차별 철폐법을 만들어 흑인들의 인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백인들은 흑인에 대한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그들에 대한 폭력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미시시피 버닝(Mississippi Burning)」은 남부의 평등권운동가 백인청년 두 명과 흑인청년 한 명이 살해된 실제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그 당시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태도, 흑인들이 받았던 인종차별, 당시의 미국사회를 읽어낼 수 있었다. 

줄거리

 차를 몰고 가던 평등권 운동가 3명은 경찰에게 총을 맞아 죽는다. FBI에서 온 엘른워드와 남부의 보안관 출신 앤더슨는 이 사건에 대해 함께 수사를 시작한다. 두 수사관은 제섭 카운티 흑인들에게 그 사건에 대해 물어보지만 다들 이야기하기를 거부한다. 그러 던 중 평등권 운동가 3명이 탔던 차를 늪에서 발견하게 되고 시체를 찾기 위해서 FBI에 해병예비군들을 파견 받는다. 사건이 커지자 KKK단은 그 흑인 집에 불을 내고 흑인 주민들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앤더슨은 미용실과 동네를 다니며 백인들과 보안관 등을 만나면서 펠 대리 일당의 짓이라는 심증을 갖고 펠 대리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알리바이가 정확해 더 이상 증거를 찾지 못한다. 흑인들은 모여 수사국 사람들과 이야기만 나누어도 KKK일당이 찾아와 구타를 하고 죽인다고 이야기 한다. 앤더슨은 펠 대리가 있는 보안관 사무실에 가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던 중 흑인에 대한 무시 발언을 듣고 참을 수 없어 보안관을 폭행하자 FBI에 대한 비난 여론이 쏟아진다. 워드도 앤더슨의 수사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자제를 요청한다. 수사관은 잠복 중에 흑인 아이가 납치 된 것을 목격하고 사건과 연류된 사람들은 재판을 받지만 모두 무죄로 풀려난다. 
 그 후 앤더슨은 펠 대리 부인에게 가서 사실을 고백하도록 유도한 후 로버츠 농장에 평등권운동가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체를 발견한 후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워드는 앤더슨의 수사 방식을 택한다. 레스터에게 다른 사람이 레스터를 살인자로 지목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클린튼을 KKK일당이 죽이려는 듯이 연극을 하면서 자백을 유도한다. 사건은 결국 실체가 드러나고 마을 보안관을 포함한 7명의 범인이 체포되어 형을 받고 시장은 스스로 목을 맨다. 마지막 장면에 부서진 묘비에는 '1964년을 잊혀지지 않으리'라고 쓰여 있다.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두 가지 관점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4년에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관점이 둘로 나뉘어져 있다. 흑인을 백인과 똑같은 한 인종으로서 평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이다. 이 영화에서는 FBI요원들이 전자 미시시피주의 사람들이 후자이다. 영화의 처음에 평등권운동가들이 살해 될 때 “어쨌든 깜둥이 하나는 쐈어” 라는 경찰의 말을 통해 앞으로 나올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얼마나 극심할지 예측할 수 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흑인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흑인들의 평등을 운운한다면 죽어도 마땅하다며 그들에게 총을 쐈다. 그들의 사상 속에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뿌리 깊게 스며들어있었다.
영화에서 본 미시시피 주민들의 흑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했다. 흑인과 친구하기를 원하나 남편의 눈치를 보며 만나지 못하는 부인,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행위를 하는 KKK단, 이를 묵살해버리는 시장이나 보안관, 경찰들, 흑인에 대한 학대가 그들이 더럽기 때문에 차별을 당연하다 이야기하는 백인주민들, 죽은 평등권운동가 중에 백인이 없었다면 FBI에서 왔겠냐고 반문하는 미용실 직원, 아주 작게나마 흑인을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평등권운동가들을 죽인,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있다. 미시시피의 법은 곧 백인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으며, 미시시피는 흑인을 ‘깜둥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진 사회였다.


흑인들이 받았던 인종차별

 영화 속에서 본 미시시피의 식당은 화장실은 물론이거니와 먹는 자리까지 흑인과 백인으로 나눠져 있다. 백인인 워든이 식당에서 흑인자리로 이동하자 밥을 먹던 백인들은 워든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백인이 흑인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하는 것이 그저 그 백인은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은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은 더러운 짐승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들은 흑인을 피하고 경멸한다.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었지만 그들의 투표소는 태워 흑인들의 투표권을 명목상 투표권으로 만들었다. 투표소를 바라보는 흑인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촉촉하다. 투표권이란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미시시피흑인들은 민주주의의 기본권마저 빼앗긴 채 살고 있었다. 
 미시시피의 시장에게서도 평등권운동가들의 죽음에 대한 애처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장은 “그 평등권운동가 학생들이 오기 전 자기들 마을은 평온했고, 흑인들도 불평이 없었다.”고 말한다. 시장 자신이 인종차별적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이 불평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불평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시장조차도 인종차별적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미시시피 주민들의 인종차별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분리된 미국사회

 미시시피 작은 마을에 평등권운동가 3명이 실종됐다고 FBI수사요원이 파견되는 것을 볼 때 워싱턴에서 이 사건을 단순한 실종사건으로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의 뿌리를 근절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은 주마다 다른 법을 가지고 있고, 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의 법을 따르게 된다. 우리나라였다면 아주 작은 섬까지도 같은 법이 적용되겠지만, 미국사회는 각각의 주마다 자신들만의 사회가 존재하기에 저마다의 법을 따를 것이다. 미국사회는 인종차별을 반대하지만 미시시피주는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이 곧 진리라고만 생각하며 인종차별을 한다. “우리 마을을 건드리지 마라. 여기는 백인 문화와 흑인 문화가 공존하는 남부의 미시시피주이다”라는 말을 통해 외부간섭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온한 자신의 마을에 외부의 사람들이 간섭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경찰은 “아무도 여기 못 바꿔. 내가 죽거나 깜둥이 여럿이 죽거나. 내가 살인했었나? 그건 고양이 목을 비트는 정도로 여기선 날 유죄로 생각 안할 걸”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생각만을 고집하며 자신들의 법이 있는 한 외부의 생각은 조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를 지은 백인들이 재판과정에서 승소를 하자 시장은 “우리 앵글로 색슨 크리스천이 모여 FBI를 이겨냈다. 강제로 우리 사회를 그들 사회로 만들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FBI와 미시시피는 한나라 한민족이 아니라 꼭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말로 들린다. 이렇듯 미국 사회는 통합된 사회가 아닌 개개의 사회가 미국이라는 나라 안에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양상은 FBI에서 온 워든과 남부의 보안관 출신 앤더슨을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워든은 자신의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지만 남부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앤더슨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미궁 속에 빠질 뻔한 사건을 쉽게 해결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주마다 가지는 법과 가치관들이 다를 수는 있지만, 통합되어야만 하는 가치관들이 존재하기에 미국정부에서도 각 주마다 오랜 시간동안 갖고 있던 사고와 생각을 천천히 바꿔나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평등사회지만 미시시피주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들의 혈통을 지켜야 한다며 흑인에 대한 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을 모두 공산당이라고 몰아갔고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사회에서는 이러한 미시시피주 흑인들의 평등화를 위해 3명의 평등권운동가의 실종사건에 강력히 개입했다.
미국은 주마다 다른 법과 다른 가치관이 존재한다. 흑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워싱턴D. C와 달리 미시시피주는 흑인을 학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고 있었다. 1964년 흑인인권운동이 없었다면 현재 흑인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더 심했을지는 모르지만 다문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은연중에 만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모든 인종들은 동등한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평등권운동가들의 실종사건을 소재로 삼았던 것 같다.
끝으로 과거에도 현재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되며 하루빨리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그 인식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미시시피주의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사고는 천천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