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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Rok1 jpn0/버퍼린 작전/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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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昌亮(2018)2-6.「嫌韓ヘイトスピーチの始原に包摂と排除の論理をめぐるポリティクスとパラドクス」

번역 전략.

2. 인조이 코리아에서의 한일 논쟁[편집]

당시 2채널에 의한 역사 탐색 활동은 특히 한 사이트와 연계하며 진행되어 갔다. ‘인조이 코리아’(약칭 엔코리)라는 사이트이다.

한국의 IT기업인 NHN(나중의 네이버)에 의해 2002년 6월, 한일 공동 월드컵의 개최를 계기로 양국의 인터넷 유저의 교류를 위한 장소로서 개설된 이 사이트는 이른바 번역 게시판의 하나였다. 일본측은 ‘인조이 코리아’, 한국측은 ‘인조이 재팬’이라는 사이트로서 제공되어, 양국 사용자가 자국측의 사이트에 자국어로 메시지를 입력하면, 그것이 기계 번역에 의해 상대국 측의 사이트에 상대국어로 표시되는 구조였다. 번역의 정확도가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스템의 '버릇'을 감안해 사용한다면, 다소 착오가 있더라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이러한 서비스는 달리 여러가지가 있었으며, 예컨대 한일 간에는 중앙일보의 번역 게시판, 중일 간에는 ‘상하이 퀸’ 등이 유명했다.

이 사이트의 사용자는 한국 측에서는 대형 포털 사이트 네이버를 통해 들어온 일반 인터넷 사용자,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등 10대 청소년이 많았지만, 일본 측에서는 2채널을 통해 들어온 사람, 즉 2챤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2채널에서는 2002년 8월 9일, 한글판(역주: 판은 디씨의 갤 같은 것)에 ‘NAVER JAPAN 번역 게시판’이라는 스레드가 개설된다. 이후 후속 스레드가 속속 올라오면서 2009년 6월 이 사이트가 폐쇄될 때까지 그 수는 수백 개에 이르렀다.

이 사이트에는 여러 개의 ‘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행판’ ‘생활판’ ‘미식판’ ‘스포츠판’ 등에서는 본래의 취지대로 양국 유저들의 정보교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애니판’ 등에서는 공동창작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역사판’ ‘전통판’ ‘시사판’ ‘뉴스판’ 등에서는 양국 간 다양한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판은 역사 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의 정예들이 격돌하는 ‘전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예컨대, 2002년 12월에 올라온 2채널의 스레드에 의하면, 당시 역사판의 주요 논점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한일병합은 국제법상 합법적인 것인가, 아니면 불법적인 것인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는가, 아니면 수탈했는가? 또는 한글을 보급한 것인가, 아니면 탄압한 것인가? 창씨개명, 종군위안부, 조선인의 일본 여행 등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일본의 전후 보상은 완료된 것인가,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일본의 전후 원조는 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가, 아니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모두 90년대 이후 《추한 한국인》(역주: 어글리 코리안?) 사건 등을 계기로 양국 간에 활발하게 논의되어온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백래시 보수층들의 문제 의식이 일본 차(茶) 게시판 등을 경유하여, 그리고 다시 2채널의 한글판과 뉴스속보판 등을 경유하여 거의 그대로 이 사이트로 흘러들어왔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역사수정주의라는 의제뿐만 아니라 혐한이라는 의제의 영향력도 여전히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에서 처음에는 한국측 사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일본측 사용자는 ‘양’으로 압도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들은 ‘질’로 맞불을 놓으려 했다. 일반 인터넷 사용자로 구성된 한국측 사용자들은 아주 일반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아주 일반적인 역사관을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에 반해 한글판에서 역사 담론 등을 통해 역사 탐구의 활동을 이어온 2채널을 중심으로 한 일본측 사용자들은 다양한 자료를 여기저기서 찾아내어 한국측에 들이대었다. 한국측 사용자가 역사 교과서나 역사 만화 등에서 2차, 3차 정보를 가져오는 반면, 일본측 사용자는 학술 논문 외에도 기록 자료나 외교 문서 등, 게다가 일본어뿐만 아니라 한문이나 영문 자료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1차 자료를 도서관이나 사료관 등에서 찾아내 왔다. 일본측에는 역사학 연구자로 보이는 사람도 섞여 있었고,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일반 인터넷 사용자로 구성되며, 심지어 10대가 많았고, 극히 일반적인 역사관을 선전하기만 한 한국측의 유저가 한글판에서 단련된 2챤러를 중심으로 심지어 연구자 등도 섞여 다양한 사료와 학설을 구사하여 전문적인 논의를 펼치려 하는 일본측 유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오히려 한국측 유저가 일본측 유저의 ‘지식 무장’에 압도되고 만다.

더욱이 일본측은 그러한 ‘전선’에서의 싸움을 지원하기 위한 ‘정보 무장’도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2002년 10월에는 ‘NAVER Watch’ 등 몇몇 정리 사이트가 개설되었다. 또한 2003년 3월에는 국립공문서관의 방대한 사료가 보존된 사이트 ‘아시아역사자료센터’가 소개된다. 이렇게 지식의 정리와 공유가 진행되는 한편으로, ‘자기중심 해적 캡틴 한국’(自己中海賊キャプテン=ハーングック), ‘코리아는 좋다! 겐차나요’(コリアはええで! ケンチャナヨ) 등 한국측을 우습게 ‘디스’하려는 플래시 애니메이션, 이른바 혐한 플래시 애니가 소개되어, ‘마쓰리’(祭り)가 흥을 돋워지게 된다.

또한, 아시아역사자료센터는 1994년 8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에 의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 코멘트,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받아 아시아 근린 제국(諸國)과의 ‘평화 우호 교류 계획’의 일환으로 2001년 11월에 개설된 것이었다. 애초에 인조이 코리아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해 개설된 장소가 이와 같은 형태로 활용되게 이른 경위는 아이러니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네이버 총독부와 버퍼린 작전[편집]

당초 일본측 유저는 ‘1’과 ‘a’ 등 공통의 핸들네임을 사용하여 한몸이 되어 한국측에 응전했으나, 곧 일부 유력한 논자가 고정 핸들네임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뒤, 2003년 5월에는 고정 ID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결과, 각각의 논자의 역량이 분명해져, 몇 명의 ‘논객’이 그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초기의 논객에는 kimura, polalis, j9 (나중의 zeong) 등이 있었다. 그 뒤 jpn1_rok0, hitkot, kimuranobuo, dreamtale, myeloblast, tsubuan, yonaki1111 등도 활발히 활약하게 된다. 특히 jpn1_rok0, zeong, polalis 세 명은 그 박해한 역사 지식과 예리한 토론력 덕에 ‘삼악인’(三悪人)이라고 불리며 한국측에서도 일본측에서도 한층 더 두려운 존재였다. 그 중에서도 jpn1_rok0은 리더격으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어느 블로거에 의하면, “머리는 영리하고, 성격은 성깔이 있”고, “전혀 빈틈을 보이지 않는 요코즈나 스모”에 흡사한 싸움 방식은 마치 “불패의 군신 같았다”고 한다.

일본측의 그러한 압도적 공세애 대항하여 한국측에도 곧 몇 명의 논객을 중심으로 반격이 개시되었다. 그 중 한 명인 dymaxion에 의해 2003년 9월 29일에는 역사판에 ‘[특집] 청산리 전투 배경 1’이라는 스레드가 개설되었다. 한국의 ‘건국신화’의 일부를 이루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조선 독립운동에서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고 여겨지는 1920년 10월의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일부 역사서에 따르면 그 때 일본군의 사상자는 천 명 혹은 3천 명이라고 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탄압 자세를 강화하게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 보존된 출병 사료에서도, 더욱이 야스쿠니 신사에 보관된 합사 기록에서도 일본군이 심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고, 그 때의 사망자는 10명 정도였다고 지목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측 유저의 반격이 개시된다. 그들은 우선 군사사학회의 학회지 《군사사학》(軍事史学)에 1979년 12월에 기고된 방위대학교 교수의 논문을 찾아왔다. 더욱이 관련된 몇 개의 사료를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차례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일본군이 경미한 손해밖에 입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한국측 유저는 조선독립군을 이끈 장군을 기념하는 사이트에서 당시의 사진을 가져와서 일본군의 심대한 피해를 다시금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측 유저는 그 사진을 고증하여 군비(軍備) 등의 점에서 볼때 당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갈파(喝破)한다. 더욱이 그들은 일본군을 이끌다가 전사하였다는 장교의 기록을 다양한 사료에서 찾아낸다. 육군성의 장교 명부를 보아도 그 장교가 이 시기에 전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 장교의 이후 행동이 기록된 사료가 다른 역사서에서 발견된다.

이리하여 한국측의 주장은 속속이 무너져갔다. 더욱이 일본측 유저는 조선측의 장군이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본측에 원조를 요청한 것으로 보이는 교섭 시의 사료를 역시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찾아내 한국측에 들이댄다. 이 ‘결정타’에 의해 한국측 유저는 결국 완전히 때려눕혀지고 만다. ‘청산리 논쟁’은 이렇게 일본측 유저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 후, 일본측 논객은 2004년 12월, 삼악인을 중심으로 ‘영파총독부’(네이버 총독부)라는 조직을 세웠다. 과거의 조선총독부를 네이버 사이트에 재현한 것이라는 의미이리라. 그들은 독자 사이트를 세워 그곳과 인조이 코리아를 연계하면서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펼친다. ‘작전 회의’ 등을 하여 정모가 개최딘 적도 있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 최초의 대사업은 ‘버퍼린 작전’이라고 명명된 일련의 행동이었다. 2005년 1월 13일, 중앙일보 일본어판에 ‘민비는 침실이 아니라 정원에서 살해’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10월, 반일운동의 선봉으로 지목된 조선의 황후인 민비가 살해된 사건과 관련하여, 일본측의 범행을 상세히 밝히는 사료가 서울대학교 교수인 역사학자 이태진(李泰鎭)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측 사이트에서 공개된 그 사료를 입수하자, 그들은 곧바로 검토에 들어간다. 그 결과, 몇 가지 의문점이 부상했다.

1월 15일부터 16일에 걸쳐 하코네에서 개최된 네이버 총독부의 신년회 ‘하코네 회의’의 자리에서 이 건이 논의되어 작전 계획이 짜여졌다. 그 전년인 2004년 7월 15일에 도쿄대학에서 진행된 강연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 역사 분쟁을 넘어서’에서 이태진이 일본과 중국은 함께 한국에 ‘동정심’(思いやり)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한 경위에 이어, 한국의 ‘위무사관’(慰撫史觀)은 절반은 ‘동정심’(思いやり)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통’(止痛)으로 되어 있다는 식으로 고조된 그들은 당시 방송된 진통제 CM의 문구를 따서 그것을 ‘버퍼린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그들은 관련 사료를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서 찾아냄과 동시에, 1월 19일에는 외교사료관(外交史料館)에 향하여, 문제된 사료의 복사를 신청했다. 25일에는 그것이 도착하여 그곳에서 원본 사료와 이태진 씨의 논의를 맞대면서 사엣한 검증 작업이 개시된다. 그 결과, 몇 가지 문제점이 분명해졌다. 이태진이 발견했다고 하는 사료는 이미 공개된 것이었다는 점과, 이태진의 논의에는 원본 사료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기록된 메모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원본 사료만으로는 확언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는 것 등이 지적되었다.

1월 31일에는 네이버 총독부의 메일링 리스트가 만들어져, 2월 2일에는 작전 계획이 구체화된다. 공개 질문장을 이태진에게 송부하거나, 특정 타이밍에 맞춰서 인조이 코리아에 일제히 스레드를 세워 ‘폭격’을 전개하는 것 등이 결정되었다. 8일에는 51항목에 미치는 질문이 리스트 업되어, 13일에는 그들이 14항목까지 추려졌다. 더욱이 그 사이 예일 대학에 재적 중인 미국측 협력자에 의해 질문장의 영역이 진행되어 간다.

그리고 2월 14일, 질문장이 메일로 이태진에게 송부됨과 동시에 서면으로 우송되었다. 동시에 인조이 코리아의 역사판에는 ‘질문장 송부의 건’(質問状送付ノ件)이라는 스레드가 시작으로, 관련 스레드가 속속이 세워져 간다. 그 맹렬한 투고의 기세는 2채널 한글판에서 ‘융단폭격’이라고 형용될 정도였다. 더욱이 19일에는 영문 질문장이 이태진에게 송부된다.

그러자 그날, 이태진으로부터 영문 메일 답변이 보내져왔다. 3월 반까지 회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받아 네이버 총독부의 열기는 한층 더 고조되어 간다. 2월 22일에는 ‘NAVER 총독부 공신 108호’(NAVER総督府公信108号)라는 플래시 애니가 공개되어, ‘마쓰리’가 더욱 성대해졌다. 3월 1일에는 인조이 코리아에서 ‘제2차 폭격’이, 더욱이 15일에는 ‘제3차 폭격’이 펼쳐졌다.

그리고 3월 18일, 이태진으로부터 답신 메일이 보내져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모든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해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때문에 네이버 총독부는 승리의 개가를 올리며 최후의 작전 행동을 향해 돌진해간다. 21일에는 최대 규모의 ‘제4차 폭격’이 성대하게 펼쳐졌다. 이리하여 버퍼린 작전은 대단원을 맞아 논쟁은 여기서도 또한 일본측 유저의 압승으로 끝났다.

4. 반지성주의 대 주지주의라는 구도[편집]

여기서 버퍼린 작전의 배경을 조금 더 깊게 파내보자. 이태진은 90년대 이후 한일 간에서 쟁의된 ‘한일합병 합법 불법 논쟁’, 즉 한일합병이 합법적이었는지 위법이었는지라는 논쟁을 한국측에서 주도하여 ‘한일합병 불성립론’을 전개해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2001년 1월부터 11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의 주도로 미국과 일본에서 진행된 ‘한국병합 재검토 국제회의’의 자리에서도 한국측은 급선봉으로서 불성립론을 강하게 주장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이태진이 도쿄대학에서 ‘공생을 위한 국제 출학 교류 센터’에 초대되어 2004년 6월부터 7월에 걸쳐 ‘근대 한일 관계사에 있어서 법과 폭력’이라는 연속 강의를 진행했다. 이 건은 일부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켜, 6월 15일자의 조선일보 일본어판에는 “도쿄대학에서 《일본침략사》 강의하는 이태진 교수”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기사에는 그 강의의 취지로서 ‘메이지 시대의 이롭ㄴ이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해 범한 폭력의 실태를 한국사의 관점에서 소개하는 것으로, 전 세기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를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태진의 말이 소개되었다. 그러자 2채널에서는 이 가사가 인용되어 관련 스레드가 속속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 뒤, 그 강의의 매듭 형태로 일반 대중을 겨냥하여 행해진 것이 7월 15일의 강연이었다. 네이버 총독부에서는 삼악인 중 zeong과 polalis가 그것을 청강하여, 그 모습을 인조이 코리아에 투고하였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듬해 이태진의 ‘발견’을 계기로 발동된 것이 버퍼린 작전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90년대 이후 《추한 한국인》을 둘러싼 사건 등을 계기로 양국 간에 벌어져온 일련의 논쟁을 계승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네이버 총독부의 입장은 정통적인 백래시 보수층의 그것과 같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책과 같이 일본형 역사수정주의적 접근은 모노가타리(物語)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를 이야기로서 다시 구성함으로써 그 내레이션을 재해석(語り直し)을 도모하려고 하는 구축주의적인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그것은 서브컬처 보수층에 고유한 모노가타리(物語)관에 기초하면서도 오히려 철저하게 실증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추구한 것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경우와 같은 편의주의적인 실증주의가 아니라, 2채널 방식의 출처 지상주의에 기반한 철저한 것이었다.

대체로 일본형 역사수정주의의 경우나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경우나 그 근저에는 도쿄재판사관(東京裁判史觀)이든 홀로코스트의 존재이든 필연적으로 부정하고 싶다는 강한 신념이 먼저 있었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구성주의든 실증주의든의 방법론이 선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반대로 실증주의라는 방법론 자체가 먼저 있었고, 오히려 그것을 살리기 위한 주제로 역사수정주의라는 의제가 선택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거기에서는 실증주의라는 방법론 자체가 신조(信條)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논의에서 전전(戰前) 체제의 복고주의적인 생각으로 통하는 신조 따위는 제시되지 않았다.

즉 그들 중에서는 역사수정주의라는 의제가 단순히 신봉된 것이 아니며, 하물며 혐한이라는 의제가 마구잡이로 신봉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한글을 능통하게 읽고 쓸 수 있는 자도 있었고, 한국인 친구를 둔 자도 있었다. 모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하고,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친한’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집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의 리더격이었던 jpn1_rok0은 ‘한국인이 싫은 것이 아니라, 바보가 싫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발언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들 신조의 중핵을 구성한 것은 실은 역사수정주의라는 의제도 아니거니와 하물며 혐한이라는 의제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나름의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한 강한 지향이었다고 보여진다. 뒤집어 말하자면 그것은 모종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이었다. 즉, 특정 主義主張이 일부의 지적 권위와 결부된 것에 의해 절대화되어, 그것에 반박하거나 반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그들의 경우, 그러한 主義主張에 해당하는 것은 리버럴 시민주의라는 이념이며, 지적 권위에 해당하는 것은 도쿄대학과 서울대학이라는 아카데미즘, 및 종군 위원부 문제 등과 관련된 아사히신문을 시작으로 하는 매스미디어였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결탁함으로써 형성되는 ‘절대적인 정의’의 지배 하에서 시비(是非)를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설득당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리라.

그 때문에 과오를 과오로 보아 규탄하고, 그러한 主義主張을 뒤집고 지적 권위를 깎아내리겠다는 야심에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주지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곳에서 발동된 것이 버퍼린 작전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역사수정주의와 혐한이라는 의제의 발현이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反 리버럴 시민 및 反 매스미디어라는 의제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백래시 보수층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브컬처 보수층의 사상을 짙게 계승한 것이었다. 그 근원에 있었던 것은 서브컬처 보수층에 내재된 강렬한 반권위주의 정신, 그것도 2채널 문화를 통해 형성되어온 굴절된 그것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반지성주의 대 주지주의라는 구도의 자리매김이 통념적인 이해와 반전된 것이었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으리라. 나중에는 우파적인 발언은 그 야만함과 몽매함 탓에 반지성주의 측으로 자리매겨닌 한편, 그에 대항하려고 하는 리버럴파의 발언이 주지주의 측에 자리매겨지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그들 속에는 오히려 리버럴파의 발언이 반지성주의 측에 자리매겨져, 그에 대항하려고 한 우파적인 발언이 주지주의 측에 자리매겨졌다. 이태진의 논의와 그에 연대하려고 하는 리버럴 측의 논의야말로 그들의 관점에서는 ‘실증성과 객관성을 경시 혹은 무시하여 자신이 원해는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태도’의 발현으로 포착된 것이다.

5. 전문지성과 집단지성의 구도[편집]

번역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