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Nuel92/압둘 라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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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 라티프 이븐 무함마드 타라가이 울루그 벡
재위 1449년 ~ 1450년 5월 9일
전임 울루그 베그
후임 압둘라 이븐 이브라힘
신상정보
출생일 1420년
사망일 1450년 5월 9일
왕조 티무르 왕조
부친 울루그 베그
모친 록키아 하툰 아로라트
자녀 무함마드 주키
종교 이슬람교

술탄 압둘 라티프 미르자 이븐 무함마드 타라가이 울루그 베그, 일명 압둘 라티프(1420년 ~ 1450년 5월 9일)는 티무르의 증손자이다. 그는 울루그 베그와 록키아 하툰 아로라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1] 1449년, 아버지 울루그 베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그는 울루그 베그를 죽이고 티무르 왕조, 사마르칸드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 이듬 해에 압둘 라티프 본인도 암살당하였다. 이로서 샤 루흐의 정통은 단절되었다.[2]

생애[편집]

압둘 라티프는 어린 시절 티무르 왕조의 전통에 따라서 부모가 아닌 헤라트에 있는 샤루흐의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1442년, 사촌형제이자 경쟁자, 알라 알다울라는 압둘 라티프가 아버지가 있는 사마르칸드의 궁정으로 돌아가게 압박했지만, 그의 할머니 가우하르샤드가 그를 다시 헤라트로 데려왔다. 기록에 따르면 압둘 라티프 역시 그의 아버지 울루그 베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그는 헤라트의 궁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에 비해 몽골 전통에 덜 익숙했으리라 추측된다. 미르 알리 시르 나바이는 시 〈파르하드 오 시린〉에서 그를 호스로에 비유했다.[1]

1446년, 샤 루흐는 반란을 일으킨 페르시아 이라크를 다스리던 손자 술탄 무함마드 이븐 바이손구르를 공격했다.[3] 이것이 샤 루흐가 이란 서부에 행한 최후의 원정이었다. 압둘 라티프는 이것에 동행했다. 그리고 샤 루흐가 라이에서 죽자(1447년), 가우하르샤드는 압둘 라티프에게 호라산으로 퇴각하는 군대를 지휘해 주기를 부탁했다. 이 지명은 단지 헤라트로의 귀환을 안전하게 진행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티무르 왕조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압둘 라티프는 그의 아버지, 울루그 베그를 샤 루흐의 정당한 후계자로 보고 즉각 사신을 보냈다.[1] 이때, 가우하르샤드 역시 자신이 총애하던 손자이면서 샤 루흐가 없는 헤라트를 대신 지배하고 있던 알라 알다울라에게 사신을 보냈다.[3] 압둘 라티프의 또 다른 사촌, 아불 카짐 바부르 역시 이때 군대를 떠나 마잔다란으로 가 아미르 헨두카의 지지를 얻어 스스로 술탄이 되었다.[4]

압둘 라티프는 가우하르샤드와 그녀의 친척들을 구금한 뒤 울루그 베그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울루그 베그는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사마르칸드를 떠났고, 이때문에 압둘 라티프와 합류할 수 없었다. 알라 알다울라는 가우하르샤드의 구금 소식을 듣고 출정해 니샤푸르 인근에서 압둘 라티프를 격파했다. 이후 가우하르샤드는 자유로워졌고, 압둘 라티프는 구금되었다.[1] 그러나 알라 알다울라는 곧 울루그 베그와 평화협정을 맺었고,[3] 압둘 라티프는 풀려났다.[1]

울루그 베그는 압둘 라티프를 발흐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그 자신은 사마르칸드로 돌아갔다. 이때 알라 알다울라는 아불 카짐 바부르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티무르 왕조의 지배권에 도전할 수 있었다. 1447년1448년 사이의 겨울에 그는 압둘 라티프를 두차례에 걸쳐 공격했다. 울루그 베그의 도움으로 압둘 라티프는 알라 알다울라를 타르납에서 격파하고 헤라트와 호라산 북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1] 이 이후 알라 알다울라는 결코 이전과 같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3]

이후 압둘 라티프는 바부르를 격파하기 위해 베스탐으로 갔지만, 패배하고 니샤푸르로 도망쳤다. 울루그 베그는 압둘 라티프에게 마쉬하드에서 일어나는 음모를 조기에 진압할 것을 명령하고 그 자신은 헤라트에서 일어난 투르크만 미르자 야르 알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트란스옥시아나로 귀환했다. 그러나 압둘 라티프는 마쉬하드를 탈환할수도, 야르 알리를 진압하지도 못했다. 압둘 라티프는 그의 아버지가 헤라트를 떠나고 2주 뒤에 헤라트를 떠났다. 이후 아부 사이드의 헤라트 탈환기까지, 아무다리야 강 이남 지역은 사마르칸드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압둘 라티프는 발흐에 있는 그 자신의 영지에 머무를 것을 명령받았다. 사료들은 1449년 봄에 압둘 라티프가 일으킨 반란을 설명하기 위해 울루그 베그가 그를 무시하고 모욕한 사례들을 나열한다. 울루그 베그가 호라산을 재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집중하자, 압둘 라티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울루그 베그를 공격했다. 아무다리야 강에서 두 군대는 마주했다. 울루그 베그는 탈영병이 많이 발생하고 사마르칸드에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결국 사마르칸드 근교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여졌고, 패배한 울루그 베그는 사마르칸드 혹은 샤루키야의 성채로 도주했다. 그리고 압둘 라티프가 사마르칸드에 입성하자 항복했다. 1449년 10월 25일, 압둘 라티프는 아버지와 형제 압둘 아지즈를 죽였다.

6개월 여 계속된 압둘 라티프의 사마르칸드 통치는, 아부 사이드와 경쟁 관계 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1450년 5월 8일, 압둘 라티프는 도시의 유력자들과 부족 수령들의 음모에 희생되었다.[1] 아미르들은 압둘 라티프의 사후 압둘라를 후계자로 세웠다.[5] 이후 도시의 압둘 라티프의의 두 아들 아흐마드와 무함마드 주키는 혼란을 틈타 도시를 탈출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흐마드는 발흐에서 1457년에 전사했고, 무함마드 주키는 1462년 경 엑티아르 알딘의 성채에 구금된 뒤에 죽었다.[1] 이로써 샤 루흐 정통은 끊어졌다.[2]

각주[편집]

  1. C. P. Haase, “ʿABD-AL-LAṬĪF MĪRZĀ,”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dition, December 15, 1982, available at this.
  2. 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p.171.
  3. J. Woods, “ʿALĀʾ-AL-DAWLA, ROKN-AL-DĪN MĪRZĀ,”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dition, December 15, 1984, available at this.
  4. M. E. Subtelny, “BĀBOR,”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dition, December 15, 1988, available at this.
  5. C. P. Haase, “ʿABDALLĀH B. EBRĀHĪM,” Encyclopaedia Iranica, Online Edition, December 15, 1982, available at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