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Lee35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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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혁 변호사


〔나의 인생 이력서(人生 履歷書)〕

註① (李 相 赫) My Life History - LEE SANG HYUK (영문명)

リ ソウ カク (일어발음)
니 생 혁 (서울사투리)


〈가〉 (성명) 이 상 혁 (李 相 赫) - 1935년 서울 북촌출생

자(字) 子瞻 (자첨) 호(号) 爾山(이산) 想泉(상천) ※ 일정시에 창씨개명거부로 불이익을 받았음註②③

(본관) 경주(慶州)이씨시조 알평(謁平) 원대손 거명(居明)후

39세손 (상서공(尙書公)파)

(본적) 서울 종로구 원서동(苑西洞)(원꼴 빨래터 근처)

(사무실)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 인근)

〈변호사실, 법의인간 화를 위한 모임, 사충서원, 상고당 쁘띠 901호 서화방〉

- (T) 02-525-1001 (F) 02-737-3111

(우편 연락처) - K.P.O Box 625- SEOUL KOREA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 625)

(E. MAIL) - lee35sh@naver.com



〈나〉 (가훈 ․ 처세훈) ㉠ 떳떳하게, 꿋꿋하게, 똑똑하게

㉡ 주인욕지(住忍辱地)라도 유화선순(柔和善順)하라

(법화경 : 안락행품 14-1)

(춘원의「사랑」중 주인공 안빈이 순곡에게 한말)

㉢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인촌 김성수)


(腹中書 복중서) 야스오까 마사아쓰(安岡正篤)의 인간학 : 양명학 관련서적 60권

(존경하는 인물) 이순신(임진란때 삼도수군 사령관)

김성수(중앙학교교장, 동아일보사장, 대한민국부통령),

박용희(경성전수학교 교유, 동아일보, 초대전무, 중앙학교 교장, 한민당 재무)

김홍섭(대법원판사, 사형수의 대부), 김수환(천주교 추기경)


(잊지못할 은사) 김창현(중앙고 한문교사, 창문여고 교장)

인영환(서울법대 체육담당 교수, 부친의 약수터 친구)

민복기(전대법원장 : 수습지도 변호사)



(저서 기타) 부동산임대차의 현대적 법리 (1987), 사형백과(번역) ; 칼부르너․레더 지음



(생략 항목) 「우리집안의 가계도 (초)」, 「나의 가족과 나의 절친한 친구들」

「건강 진단 데이터」, 「각종 보험」

「예금통장 번호와 신용카드」, 「나의 주소 변천」,

「나의 병력」,「나의 취미(여행; 세계일주 3회의 내용후술 예정」,

「자격증 - 회원증」, 「혈액형」



〈다〉〔학 력〕

1940 서울 안국동 소재 안동유치원 수학 (외가집에서 천자문 수학)註④⑤

1947 서울 재동초등학교 졸업 註⑥⑦

1953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 (6.25 전란으로 공주고등학교, 대전종합고등학교에서 수학)

1958.4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졸업(행정학과)註⑧

1958.12 제10회 고등고시 사법과 및 행정과 1부 합격

1961.12 변호사 실무고시 합격

1987. 3 법학박사 {한양대학교 - (논문) - 부동산임대차의 현대적법리}

1987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교정교화 유공) (1992 모범 교화인 대상)

2005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2008 자랑스러운 중앙인 (중앙교우회)



〈라〉〔경 력 〕

1958.4 조선전업주식회사 입사 (인사과, 당인리발전소 서무)

(1958.4부터 4개월간 퇴근후 5시간 법대도서관에서 고시시험 과목의 요점 정리 와 답안작성 요령을 집중 연구 하다)

1959.5 내무부지방국 수습행정관{지도과(병사업무), 재정과(세정업무) 근무}

(성적이 비교적 좋아서 내무부 근무로 발령 받았지만, 부친이 야당계인사인점 때문에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3.15선거시에는 지방으로 파견근무 시키는 등 견제가 심하였다)

1960.4 4.19혁명직후 지방국 행정과 기획계장(사무관)직을 맡다.

(① 지방행정구역과 그조직, 시도군의 정원 책정 기타 법제업무 담당으로 그 권한이

광범위해서 벅찬 업무였지만 사무실에서 거의 철야 연구하는 것으로 버텼다.

- 이때 감사계장이었던 김수학은 뒷날 국세청장등 관직을 맡았을 때 자기도 직무

수행을 열심히 하였는데 이변호사의 기획계장 업무수행과정을 보고 평생 이를 따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

② 내무부 재직 선배들로부터 「지방행정제도 연구위원회」를 설립하여 지방자치제를 연구하여 정착시키는 것이 숙원사업이라는 말을 듣고 우선 예산확보가 필요함을 직시

하고 당시 재무부 예산국 4과의 김학열과장을 예방하여 지방제도의 낙후성과 그

제도의 연구필요성을 요약설명을 했던바 약관의 사무관의 열의에 감동하여 상당액

의 예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장관을 비롯한 상사의 칭찬을 받고 동 연구위원회

를 발족하면서 간사로서 그 조직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나는 당시 미네소타대학에서 행정학을 연구하고 귀국한 이해원선배와

함께 「지방행정구역의 적정화」에 관한 연구 논문을 작성 발표한바가 있다.」





- 5.16 직전 지방행정의 일선 업무 내용에 생소함을 통감하고 장관을 비롯한 상사

에게 건의하여 경기도 산하의 군수로 나가게 하여 달라는 청원을 하여 (주변사람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렸지만) 발령일보 직전에 5.16으로 무산된바 있다.


1961.5.16 새벽 내무부 숙직반장 (5.16 새벽 쿠데타군 진입을 막기 위한 대응을 하느라 미쳐 내무부에서 탈출 못하고 내무부 청사에 4시30분부터 7시까지 숨어 있다가 청사열쇄 를 진입군에게 인계함)

1961. 가을 병역미필자로 무조건 사무관직 해임 당함.

(서해부 탈장으로 병종등급으로 병역면제 대상인데도 행정부 공무원을 일괄 해임

하는 조치가 각령으로 내려짐)

1960-1961 겨울 수습변호사 등록 (지도변호사 민복기)

1961. 겨울 변호사 실무고시 합격

1962.1.12 변호사 등록 개업 (1445호)

서울 제1변호사회에 변호사 개업등록, 임한경 변호사 사무실(중구 다동 대한빌딩)

1962.3 전주지방법원 판사

1963.3 - 1964.4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법무사 (육군대위)

(현직 판사로 1년간 소집 되어 6.3사태시 계엄하 민생 형사사범 재판 사무담당

특이사건 ; 6.25당시 한강인도교 조기폭파혐의로 처형된 최창식 공병감의 재심

사건 심리 담당하여 최대령의 부인 옥정애 여사 증인 심문하고 판결직전 소집

해제되어 후임 오중위가 무죄 판결한 바 있음)

1964.5 춘천지법 원주지원 판사

1965.5.-67.3 제주지방법원 판사 (65.5.12 한라산 등반)

1967.3 변호사 개업 사무실 소재지 변천 연혁

(을지로 입구 합동통신별관 - 민복기변호사와 공동사무실 개소)

(1972 - 신문로 덕수제과옆 신세범 변호사와 공동사무소)

(1974 - 광화문 국제극장뒤 심령빌딩 3층)

(1976 - 경기고녀 입구 신문로1가 92에 - 2층 단독빌딩 - 3층 중앙교우회 시내 사무실)

(1982 - 다동 합동빌딩 5층 빌딩),(1984 - 필운동 사직파크아파트 101호)

(1991 - 서초동 우성쁘띠오피스텔 901호)

(2004 - 공덕동 고려합동(공증인겸) - 제일빌딩)

(2011- 현재 - 서초동 1600-9 /9층)



〔마〕〔봉사 ①〕〔일과의 ⅔를 봉사로 일관한 40년〕- 〈1972-2014 아직도 진행중〉

①〔법대재학시절 이재훈 철학교수와 신태환경제학 교수는 사람이 사는 방식에 관하여상당히 신선한 가르침을 주셨다. 고시합격을 해서 입신 출세를 하더라도 공공봉사로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이 인간다운삶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은 항상 나의 마음의 한구석에 자리 잡혀있었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면서 위의 두 분 스승님의 가르침의 실천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의 봉사활동으로 변호사직과 관련 이 있는 교정시설에서의 재소자에 대한 교화사업과 모교(중앙고와 서울법대)의 동창회 활동을 통하여 모교지원사업과 장학 사업을 전개하는 것 또한 모교에 보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②〔교정시설재소자에 대한 교화사업(- 시민운동 겸행), 모교 서울법대 동창회와 중앙고교우회의 기틀을 놓는작업,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과 동아일보사의 임원, 고문변호사업무 수행 등으로 평일에는 본업인 변호사로서 법정 출입외에는 영일이 없었고 주말에 변론준비를 하느라 1960년대초 제주에서 익힌 골프도 접어야 했다.〕
1972 봄 모교중앙고의 재단인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이 우석대학교 와 국학대학 및 우석 병원을 인수하는 법인 합병 업무의 실무 담당 지원함 (이후 학교법인의 고문변호사와 감사로 활동한 내용 후술 함)
1972 여름; 서울구치소 재소자 교화자원봉사자로 활동 시작함. 註⑨

(이후 현재까지의 활동 내용 별도 후술함)


〔음지에 있는 자를 교화하고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교정시설에서의 교화활동을 선택〕


1973 변호사 업무의 본격 활동 (국제극장 뒤 삼영빌딩)

※면기난부(免飢難富)의 정신으로 운영. (변호사법 1조의 사회정의

실현과 인권옹호가 변호사의 사명임을 실천궁행함)-〔변호사가 돈을 너무 탐내 면 법비(法匪)다〕

교화협의회장 임무수행중 형사 사건 수임은 가급적 맡지 않고, 국세심판소

비상임 심판관 재임중 (1980-1998)과 국세청 고문 재임중에도 세무관련사건

수임하지 않음. 민사사건만을 수임함 - 배나무 밭에서 갓 끈 고쳐 매지 않는

정신으로 ..... 기독교에선 10.1조 하지만 --- 나는 3.1조를 하였다.



1974. 6 중앙교우회 간사장 을 맡고

 ① 계우회보의속간 내실화와
 ② 재단법인 계원장학회 설립 주도함. (이사)

〈(동아일보의 김상만회장, 윤재중학교법인 상임이사 및 한철우 중앙 교장의 권고로)〉

③ 계동골목의 오물투성이 하천 복개와 도로확장 사업완수,

④ 뱍대통령의 후원금 5억원 수령과 그 수익성 확보에 진력하고 한때 후원금

이 타에 전용될 위기에 처했을때 이를 적극 보전하여 2011년에 64억 전액 으로 기숙사를 건축하게 되었음.

1974 서울법대 동창회 - 사무처장

(태완선회장의 강권에 못이겨 수락 취임) -〈법대재학시의 장학수혜를 갚는 심정으로..〉

1974 서울구치소 독지방문위원 위촉됨 -

〔① 국민훈장동백장(교화유공- 1987)〕모범교화인 대상(2002),

〔② 교화자원봉사자였다가 독지방문회 위원장 됨〕

〔③ 독지방문위원제도가 1982. 교화위원제가 되어 1995년까지 교화협의회 회장을 맡고, 서울지방교화연합회를 새로 조직하여, 2000년까지 동 연합회장 역임하고 2014년 현재까지 교화위원으로 활동한 내용은 별도 상세히 기술 할 것을 다음 기회로 기약함〕

〔④ 1998년부터 현재까지 소년원 등 13개 교정시설에 과학잡지(월간)를 매월 100권씩 기부(년 1200권 ×15년의 18,000권)을 〕

〔⑤ 1983년 대한민국 최초로 서울구치소에 법전 50권을 기증하여 각 사방에 비치 재소자가 볼수 있도록하였다. - 70년대부터 여러차례 시도한 끝에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⑥ 선풍기, 신탁겸용 책상의 각 감방내 제작설치 등〕 〔⑦ 재소자에 대한 징벌 제도의 개선 (특히 사형수등 장기수에 대한 징벌방 개선 강구〕


1974-(현) 사단법인 사충서원 (四忠書院)이사, 이사장

① 1940년대초 할아버지와 함께 한강변 보문동으로 제향을 간 것이 첫 인연이 고 1960년대말 변호사개업 초창기에 파괴된 서원을 재건하는데 앞장섰던

아버님의 강권으로 하남시 상산곡리에 서원을 재건하는 건축비를 상당액 기부하여 현재의 사충서원 제각과 원사를 세웠고 이병도, 정구충, 김창현 선생의 요청으로 이사직무를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 20년간 이사장직 을 맡고 있다.

② 사충서원에는 영조를 왕위로 나아가게 하다가 죽임을 당한 정승 네분을 모신 서원인데 내가 뒷날 정계진출의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고 또 사형폐지 운동을 하게 된 계기도 되었다.


1975. 봄 〔서울법대동창회 사무처장, 상임부회장, 회장, 고문(1974-2014)

〔모교 서울법대와 전액 장학금을 주선해 주신 인영환 교수에 대한 보은을 몸으로

떼는 심정으로.〕을 맡아 만 40년간 법대와 동창회 발전의 기틀을 놓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75 여름; 동아일보와 학교법인고려중앙학원 법률고문 (1975-1998)

※ ① 인촌선생 창업의 교육, 언론기관의 내실화에 백의종군의 정신으로 기여

하고, 인촌집안의 장자승계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데 기여했음 (일민 내외분과 화정 내외의 간곡한 부탁에 터 잡아)

② - 재단법인 중앙학교의 설립자 박용희가 1929년에 기부한 철원 소재 임야

100만평을 6.25 사변직후 소유권 신고를 하지 않아 국가 소유로 망실된 것을 과거 내무부근무시절 부하였던 강원도 관내군수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여 3심의

재판을 통하여 소유권 회복을 하여 준바 있다. 당시 재정이 어려운 학교 법인 이기에 수고비 한 푼 받을 엄두도 못 내었음 (현재 시가 1500억원대로 고려중앙 학원소유 수익용 기본 재산 중 가장 큰 것이며 언젠가 중앙고등학교가 현학교

법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할 때는 중앙고등학교만의 고유한 기본 재산에 편입되 어야 할 것이다.)

③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감사 재직시절인 2011년에 학교법인이 법인의 현금 자산의 85%인 500여억원을 원본 보존이 안되는 금융파생 상품에 투자하여 200 여억원의 손실을 초래한것을 당시 사이버대총장의 제보로 그 책임 소재를

규명한바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에 대한 책임 추궁 보상 등 사후조치가 수행되 지 않고 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고 그 과정에서 재단임원과 교우회 간부일부들 의 애매한 태도에는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 이 문제에 관하여는 인촌선생의 공선사후의 정신에 터잡아 뒷날 상세한

증거를 적시한 보고서를 준비중에 있음을 기약한다.


1976. 봄; 새문안교회 건너편 신문로 1가 96에 2층 건물을 매입하여 2층에 변호사 사무실, 3층에 중앙교우회 시내 사무실을 개설하고간사장직 맡음 (중앙교우회 간사직은 1980년에 후배에게 물려주고 부회장 취임)


1975. 가을 ; 서울법대가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옮긴뒤 관악캠퍼스에서의 법대가 받고 있는 비참한 환경을 목도하고 모교법대의활로 방안을 모색하였다.



- 서울법대 학생들이 동숭동 캠퍼스에 있을때 제3공화국의 군정과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데모를 주도한데 대한 징벌적 의미로 서울법대는

관악캠퍼스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학생정원도 절반인 150명으 로 감원되고 제대로 된 교사를 배정받지 못하였다.

(서울대 본부 뒤의 10동 건물 안쪽에 쳐박히다시피 있었는데 그도 모자라 10동 교사 현관쪽에는 사범대 체육과 학생이 문지기를 하다시피 하는 등 법대의 상황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1976-1979 법대동창회 회장단은 물론 법대 교수 들은 내심 많은 고민

을 하면서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고, 황산덕 전문교부장관을 법조

회관 건립추진위원장으로 위촉하고 활로 개척을 암중모색하였다.

1978 대한변호사협회 감사 (대변인) (1980)

1979.8 재무부 국세심판소 심판관(비상근) (고시동기황하주 소장의 권고 ---)

1980.1 낙산장학회 이사

1980.1 국세청 고문겸 세정자문위원

- 당시 국세청장 김수학은 내가 내무부 지방국 사무관 재직시 행정과 감사계장으로 스카우트 될 때 상사에게 추천한바 있고 공무원은 능력과 더불어 청렴성이 첫째 라는 나의 지론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었다하며 공직을 전전할 때마다 (토개공, 새마을중앙회, 박대통령기념사업회) 나를 고문 또는 이사로 지명한 바 있다.

국세청 고문을 맡았을 때 소득세, 법인세법 기본통칙을 신찬수회계사와 함께 제정한바 있다.

1980. 10.26 사태뒤의 서울의 봄이 오고 다소 숨통이 트이는가 하던 중

법대 출신 최초로 김택수(6회) 선배가 동창회장에 취임하고서 비로소 법대강의동 과 법학도서관의 건립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81.8 한국경제신문 고문 (대전피난민 학교 재학시 만난 친구인 이규행의 권고 ---)

1982. 법제처 정책자문위원 (고시동기 김종건의 권고)

1982. 김택수 회장이 국산법학도서관 건축자금을 전액 기부하여 그 건립 대지를 현재의 법대 강의동 15동 옆 언덕에 건축하다. (국산법학도서관 1983.12.3 준공 개관) (이상혁은 위 국산법학도서관 신축공사를 직접 현장 감시하다.) (한국형 정의의 여신을 화강암으로 석조 조각 제작(홍익대 전뢰진 교수작) 하여 국산도서관 전면 옥개석으로 현가하다.)

1983.2 동아일보 이사 (1998)

1983.3 한국토지개발공사 고문

1983.4 학교법인 한성학원이사 (1997) (설립자 김의형과 나의 조모 평산신씨와 의 기연 ...)

1985.10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 위원(1989)

1986. 보사부 중앙의료감시위원회 위원 (1988)

〈당시 이해원보사부장관은 내무부시절에 부지런하게 업무처리하는 이사무관의

모습이 연상되어 위촉하였다는데 그런 조치는 서울시장재직시로 이어졌다)

1986. 새마을중앙회 이사

1989. 「법의 인간화를 위한 모임」 대표회장 (현)

1989.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회장 (2010) (2007.12 사실상의 사형폐지달성) 명예회장

1992. 서울특별시청, 종로구청, 강동구청 법률고문 (2003)

1993. 한국유니세프 법률분과위원장 (1996) (낙태찬성에 반대하고 사임)

1994. 「(사)그린훼미리운동연합회」이사 (1998)

1994 「재단법인 한국범죄방지재단」이사 (2007)

1995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감사 (2012)

1995.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1997) (김선협회장의 런닝메이트로 ---)

1996. 산업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 (1999) (대학동기 김완순교수의 추천에 의거)

1999. 「포스코개발」상임고문 (2001)

2003 서울법대동창회장 (2004)



〔바〕〔봉사 ②〕서울법대에 대한 나의 끊임없는 봉사


〈서울법대 동창회 간부 (사무처장, 상임부회장, 회장, 고문 재직

-1974-2014 40년) 시절에 내가 흔들림 없는 추진력으로 이룬 몇

가지 사업에 대하여 일지 형식으로 간략한 내용을 나열키로 한다.〉

〈법대동창회 사무처장, 상임부회장 30년간 (1974-2004) 업무수행에

있어 2년임기의 역대 회장 (태완선, 김택수, 이종성,김성수, 금진호,

이석희, 배명인, 이대순) 8인에 대하여 일관되게 법대동창회가 해야될

사업에 대한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였고 이를 적극 찬동하여 사업

수행을 이룩할 수 있게 하여준 역대 8분의 동창회장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념을 표합니다.〉


〔법대도서관 강의동, 연구동, 100주년기념관의 건립 추진(독려)〕


(一) 1983.12. 국산법학도서관의 건축

- 1982.10. 8 기공, - 1983.12. 3 준공 (이현재 총장)

공사비 5억 (김택수 동창회장 3억, 최숙희미망인 2억 부담)

(정초석의 수난) (청동제 조명등 현가 쌍룡 향나무조각기둥(등룡주) 설치)

(법대100년사 38,39쪽,614쪽, 662쪽) 註⑩



(二) 1983. 법학 강의동 (15동) 1983년도 국가예산에 건축비 반영

- (동창회와 법대학장이 협력하여 법대출신 국회의원을 설득하여 예산 확보)

- 1983.9월 완공 법대 입주〈환경 대학원이 1개층 사용 (느닷없는 새치기 입주)〉註⑪


(三) 1990. 법학연구동(17동)(1차)1990.2. 기공, 1992.11.6 준공 (1-4층) - 개관식(1993.3.20)註⑫

- 서울법대동창회가 주동이 되어 법대출신 국회예결위원회 계수 소위에서 예산 확보 -

- 예산 집행과정에서 본부가 일방적으로 일부 예산을「자하연」옆 식당 건축비로 전용함.

(법대100년사665쪽)


(2차) 2003.2. 기공 2003.10. 증축 완공(5-6층)

(증축비용은 이대순동창회장과 이상혁 상임부회장, 안경환

학장의 노력으로 당시 전윤철 경제기획원장관이 적극

예산에 반영하고 계상된 예산의 상용처가 법대연구동

증축비임을 명시 하므로써 예산 전액으로 증축하였음)


(3차) 동창 들의 집기비품 마련 찬조자 명단동판현가

(1993.3.20) 법대 100년사 623, 665쪽

- 그 뒤 김모학장이 동판을 철거하고 가제식 명단 철판 을 설치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四) 1996.12.18. 

① 근대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의 건축

94. 4. 22. - 건축기금 기부증서 전달식 (김종운총장실, 대우그룹 10억+10억, 동아건설 5억) (법대100년사 40쪽)

94. 9. 9 - 기공식 (건축비 SBS 윤세영 5억)(대우그룹김우중회장의 기부를 이끌 어내는데 이석희회장(법대9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014. 1월 에 지병으로 별세하셔서 조문을 갔다 자녀들이 이회장 못지않게 장성 한 것을 보고 선대 이동녕 임정의정원의장을 끔찍이 모신 모습이 나의 뇌를 스쳐 지나갔다.)

96. 12. 18 - 준공 : 개관 (동창기념홀의 확보)

〔당초 서울법대 100주년 기념관이었는데 대학교본부(김동○ 기획처장 중심)의 반대 로 근대법학교육100주년 기념관으로 개명〕


② 근대법학 교육 100주년 기념관 개관 (법대100년사 39,40쪽)

㉠ 행사 : 1996.12.18 개관식 행사 (현장)

규모 : 주산(宙山)홀 개관 (계단식 대강당) 중, 소 강의실, 동창기념홀 註⑬


(五) 「정의의 종」 제작 현가 〈한국 고유 양식의 종 제작 방침〉

96. 2 종의 설계 시작 〈이상혁, 곽동해 주도〉 96. 7.15 정의의 종 제작을 홍종사와 계약

--- (금진호 회장, 백충현 학장시) 96. 8.20 정의의 종 용탕 주입

96. 6.29 정의의 종 제작에 관한 연구 보고서 (양산공장에서 주입제례 - 제주 이상혁)

〈서울대 정밀기계연구소 (이영배, 이장무교수)〉 96.12.18 100주년 기념관 앞에 현가 --- 이석희, 송상현 학장시)

정의의 종 제작, 도안, 현가 등은 거의 이상혁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 독일에 장기 출장중인 최종고 교수와 곽동해 교수로부터 몇 가지 자문을 받았다. 〈정의의 종의 제작 경위, 디자인 설명, 법대 100년사 642-648쪽 참조〉


〔六〕서울법대 100년사의 발간 (1984-2004)

  〔1975년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법대가 그 정원이나 시설면에서 엄청난 위축과 차별대우  를 받는 것을 보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고민하였다.

마음 놓고 허심탄회하게 의논할 선배도 별로 없었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친구인 태완선회장과 의논을 하였으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서울의 봄 직후에야 김택수회장과 법대의 위상제고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논의가 중단된데다 후임회장으로 적합한 분이 나서지 않았다. 83.7-84.5까지간 회장직을 임시로 맡은 태완선 명예회장과 필자는 법대의 위상제고방안을 학교의 전통인 역사성에서 찾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그 결과 84.5.24 동창회총회에서 100년사 발간을 결의하게되었다.〕


(ㄱ) 84.5.24 법대정기총회에서 100년사 발간 결의

84.7.1기 발간준비위원회 구성 (위원장 전봉덕 변호사) 86.6.7 2차 준비위원회 (4인 소위원회에서

(태완선 명예회장, 이종성회장, 배재식학장) 추후 발간 작업키로 위임되었음)

박병호 법대교수

이상혁 동창회 부회장겸 사무처장

김진무 상임위원

최종고 법대교수

김정훈 동창회 사무국장 (사무 취급)



(ㄴ) 100년사 자료집 발간

① 1집 - 광복전 50년 - 87. 2.15 발행

② 2집 - 광복후 50년 - 89. 5. 10 발행

〈김진무(법대18회)와 김정훈(사무국장)과의 협동으로 발간〉

〔자료집과 100년사 발간에는 수많은 동문과 그 가족(유가족)이 수많은 자료를

동창회에 기증하였고 이 때문에 100년사가 출판되었다. 위 기증 받은

자료 중 일부가 현재 국산도서관내에 있는 역사 자료실에 전시되어

있다. - 전시품에 동창회가 동창과 그 가족에게서 기증 받은 취지의 문구를 써 넣어 줬으면 한다〕



(ㄷ) 〈서울법대 100년사의 발간일지〉

① 2001. 4.11 서울법대100년사 편찬위원장에 현승종 전총리 선임

(제2차 100년사 편찬위원회 출범)


② 2001. 6. 4 서울법대 박병호, 최종고 교수의 100년사 원고 초안을 제출 받고

서울법대의 법통 문제, 100년사 서술방법상의 문제 등으로 원고

제출이 지연됨. 〈기년체〉냐 〈기사체〉냐의 대립 난항 등 --

(김진무 실무위원 2003.1.4 졸)


③ 2003. 4. 2 편찬위원회에서 당시 이상혁 상임부회장이 1895년개교 때부터 100년간에 일어난 기본적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술하면서 중간 중간에 중요한 사실 을 삽입하는 체제로 100년사를 기술하는 것이 역사 기술의 정도이고 이런 원칙에 의거 100년사를 서울법대100년사 자료집 1, 2권에 실려 있는 년표 를 풀어쓴다면 많은 시간과 예산이 필요치 않고 2004년 정기총회까지 출판 할 수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편찬위원회는 이상혁 상임부회장(당시에2003. 5. 정기총회에서 동창회장으로 내정 되어 있었음)에게 전권을 위임하 되 편찬위원회의 심의를 받기로 결의하다. - 이상혁 부회장은 상임 편찬위원으로 김희진(법대 12회,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을 추천 위촉하고 2003. 4.부터 만 1년간 전후 20차의 회동토의를 거쳐 초안을 만들다.

- 편찬실무위 (이상혁, 김희진, 차형근, 김정훈)에서 예산, 일정 등 수립함.


④ 2004. 4. 20 - 5. 25

김희진 상임편찬위원으로부터 수교 받은 원고를 일람 검토한바 신문기사조

서술방식이어서 역사기술로는 적절치 못함을 발견하고 이상혁 회장은 사무실 업무를 동료 변호사에게 일임하고 자택에 칩거 40일간 하루 18시간의 강행군으로 서술방식의 보완에서 윤문, 초고, 재교, 삼교, 사진의 스캔, 캡숀 작업을 진행하다. 이 기간에 동원된 인원은 동창회장의 자녀 포함 10여명에 이름

- 서술방식의 보완, 윤문, 초고, 재교, 삼교는 경기대 국문과 이준희 교수 (회장의 장남)와 그 제자 7인,

- 디자인과 장정은 한성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김미지자 교수(회장의 며느리)

- 사진의 스캔과 캡션등은 이석희 포토닷컴 대표 (회장의 차남) 의 필사적인 지원으로 5/25에 대부분의 작업이 완수되었음.

⑤ 2004. 6. 15  서울법대 100년사 출판 (동창회 정기총회)



(ㄹ) 〈법통 계승 관련〉


서울법대의 남상이 법관양성소임은 100년사 자료집 편찬 과정에서

밝혀진터이지만 실제적인 활용 증거의 확보는 다음 (※),(※※)에서

의 자료로 법대인의 의식 속에 녹아 있음이 뚜렷해졌다.


※ 법관양성소로부터 경성법학 전문학교로의 계승의 직접적인 근거와 각 학교 졸업생의실상은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우회, 동창회 회원 명부 세권의 발견으로 밝혀졌다. 〔1927(소화2년, 법전5회), 1934 (소화 9년, 법전9회) 1937 (소회12년, 법전15회)〕 (법전15회 조창희변호사가 1999.1. 2.에 동창회에 1934, 1937년분을 기증) (1927년 발행 명부는 최종호(법전 5회)가 기증하였음. 위 경성법전동창회 명부에는 동창회 규칙에서 그 회원에 법관양성소, 법학교, 경성전수학교,졸업생을 법전 동창으로 한다고 위 여러 학교의 졸업생의 성명, 주소, 직업 등을 명시하 고 있다. 위 여러 학교의 동창신상 자료는 현재 없지만 당시의 동창회장은 법전 교장이 맡고 있었음에 비추어 동창들의 개인 신상에 대한 정보는 교장의 공적확인이 된 문서라할 것이다.


※※ 서울법대, 경성제대법문학부(법과), 경성법학전문학교(전수학교, 법학교,법관양성소) 동창회원종합명부(제1호) (1957.5.31 현재)는 10대 동창회장이었던 이석범(법전10) 이 동창회 비본으로보관하고 있던 것인데 1991.5.16 그 유족으로부터 당시 사무처장 이상혁이 기증받아 복사본을 동창간부 등 유관기관에 배포하였다.



〔사〕맺음말

나의 인생이력서를 쓰고 있는 2014.1.15 현재 나의 법대에 대한 봉사는 80세에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아마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인생이력의 한 항목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법대 100주년 기념관 내에 동창회가 확보하고 있는 동창기념홀에 「법대 사랑채(SNU LAW OB 120 M. Hall)」를 꾸미는 일이다. 1995년에 건축하고 홀내부공간에 전시실과 회의실을 꾸미는 작업이 2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는 것이 안타까워 이제 신약(身弱)이지만 심강 (心强)의 자세로 이일을 완성하려고 한다. 법대 120년의 역사와 동창, 교수, 재학생이 머리를 맞대고 정의의 학문인 법을 토론하고 고민 하는 장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120년 역사의 표상인 LED광판에 담은 역사의 흐름과 온라인 오프라인 시스템에 세틀의 북타워를 세우고, 전시실겸 회의실(법대인의 사랑채)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로 여기고 있다.

다행히 금진호 회장과 신영무 현 동창회장, 오윤덕 장학회이사장, 정상조 현 법대학장 겸 전문대학원장의 전폭적인 지원에다 기념홀 내부공간 조성비로 거액을 기부해준 SBS 윤세영 회장과 전임 동창회장 (배명인, 이대순, 이상혁, 정해창, 이재후, 김경한)의 지원 및 앞으로 전폭적인 후원을 약속해 주신 임광수 서울대총동창회장님께 깊은 감사의 념을 표하는 바 이다.

아울러 법대 100년사 편집 발간에 참여해 주셨던 박병호, 최종고, 정긍식 교수님과 김희진(법대12회), 우익원(법대12회), 차형근(법대36회)동문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자〕 〈참고 자료 ⅰ〉

① 서울법대 100년사 (발췌)

㉠ - 사진 (교사, 국산법학도서관, 백주년 기념관, 정의의 종,

옛 고사 장학회의 옛 간부)

㉡ - 편찬 일지 - 위원 명단

㉢ - 편찬 후기(1) 김희진, (2) 이상혁

㉣ - 법대 100주년기념의 정의의 종의 도안 설명서

㉤ - 서울대학교 원년은 1895년 (이상혁, 서울대총동창회 발행,

「정통과 정체성」 27쪽 소수)

㉥ - 경성법학 전문학교 회원명부 〔①1927(소화2년 발행 - 법전 5회

② 1934 (소화 9년, 법전 9회), ③ 1937(소화12년, 법전 15회)〕

㉦ 1957.5.31 발행「서울法大, 성대법과 법전 동창회원 종합명부」

(회장 김흥수 발행) 〔이상혁 사무처장이 1991.5.16 이석범(법전10)의 유족으로부터 기부 받아서 복사본 배포〕

㉧ 국산법학도서관 개관 10주년에 생각나는 일 (이상혁)

서울법대동창수상록 ② 628쪽, 서울법대 - 동창회편 (1994/1.20)

㉨ 고 김희진군의 편편상 (이상혁 씀)

- 「꿈과 긍지속의 50년(법대 12회 입학 50주년 문집)

(279-282쪽)



〔차〕 〈참고자료 ⅱ〉

〔중앙고 관련〕

① 중앙을 위해 ! 그 35년의 세월 〈이상혁 (중앙44회 생애)〉- 205쪽

〈중앙 100주년/ 계동 일번지 이야기 - 중앙교우회 2009.5.31간행 -〉

② 인물로 본 중앙 100년/ 이상혁 - 136쪽

- 중앙교우회 2009.6.10 간행


〔교정교화 관련〕

① 평생을 인권과 사형폐지를 위해 몸 바쳐온 법조인

이상혁 변호사 (문화일보 유희연 취재) 〈서울변호사회 발행〉

- 시민과 변호사 2003. 10월호 -

② 재소자 교화에 바친 변호사 이상혁의 삶 -

〈시사법률 2006년도 7월호 19-23쪽) 글 김숙현 기자

③ 민간교도소 신설의 의미(이상혁) (교화소식 2호 - 98.11.20) -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

삶과 사회봉사 (김희진) - (법대12회)

손두팔을 아시나요 (차형근) - (법대 36회)


④ 교화와 재범 방지 (이상혁)

산다는 것은 남을 돕는 다는 것 (박용선) - (법대 12회) 교화소식 3호 - 99.3.16) (서울구치소 교화협의회)




註① ~ ⑬


註① 〔후기〕 인생이력서(Life History)의 원형은 1900년대초 일본에 출간 유행하였 던 「자기 역사의 책」(自分史の本)이다. 이 책에 뒤쪽에는 유언장 내용도 첨부 하도록 되어있다. 법대 12회 동기생들이 「인생 담론집」(人生談論集)이라는 

표제의 법대입학60주년기념(傘壽기념)문집을 출간하면서 원고제출을 독촉하기에 「나의인생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이 그 문집출판과 걸맞다고 여겨 그 개략서를 급히 작성 제출하느라 다소 불비하고 서툰 점이 있는 점은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 니다. (2014.3.10. 80회 생일날에 수정 보완함)



註② (이름) -조부 만송공은 진갑되던해(1935)에 첫손자 이상혁을 보자 5대 독자격인 손자의 이름과 호의 작명을 동관대궐앞 운이동 거주의 역술가 문관산(文冠山)과 의논하셨다한다. 문관산은 시경(詩經)의 〈절남산(節南山)〉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절피남산 유석엄엄 혁혁사윤 민구이첨) - 가파르게 치솟은 저기 남산엔 울퉁불퉁 바위들 쌓여있네, 권세도당당한 태사윤공을 백성들이 모두 다 우러러 보네 - 라는 구절에서 이름의 혁(赫), 자(字)로 자첨(子瞻), 호(号)로 이산(爾山)을 지어주셨다. 나의 생년월일시를 풀어 사주를 풀어 주셨는데 지나고 보니 그 내용데로 살아 왔고 남은여생도 예견한데로 흘러갈 것으로 예견된다.


註③ - 나의 어릴적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부모님에 관한내용을 참고로 덧붙인다. - 조부 만송(晩松) 이종열 공은 과거 시험준비차 1890년대 하반기에 서울 북촌에 정착하였는데 과거 시험 준비중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와 일어를 익혀 1900년초에 법부의 위원을 역임하셨다.

1925년에는 경향 각처의 유지들과 함께 「이충무공 사우중수 및 충무공전서 중간 추진회」를 발기하셨고 일제의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자부손들의 친일파 일족과의 교유를 금하는등 지조를 급히지 않으셨는데 해방 한달전에 별세 하셨다. 해방된 뒤 만송 할아버지의 환갑기념 12폭 병풍속에서 1750년대에 조선왕조 도화서 화원에 의하여 제작된 수군의관함의전도인 「삼도주사도분군도」를 발견하여 그의 아들인 이일우 공이 1970년 에 문공부에 등록하고 세간에 공개한 바 있다.


註④- 조모는 사회성을 키우고자 이웃에 계신 명망가의 집에 세배를 빠짐 없이 가도록 하고 평시 교류를 주선하셨다. 세배 등 교류를 한 이웃에는,신상궁 (원서동 창덕궁관사 거주 - 영친왕을 모셨던 미모의 상궁으로 침선, 요리가 능한 분이였음) 서광세 (외종조부 이광종과 함께 기호학회설립을 주도하셨고 사립 교육기관 낙연의숙 을 설립 경영했고, 천일은행의 개성지점장을 지낸 지사로 일찍이 파주 군수를 지내셔서 「서파주댁」이라 통칭했고 자녀손 사위 등이 제제 다사한 복인이셨다.) 고희동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고 아들 고홍찬이 스타사이다의 사장이었는데 손자 중청, 중벽은 나의 친한 초등학교 친구였다. 어렸을때 세배갔다가 세뱃돈 대신에 떼를 써서 춘곡 할아버님이 그린 「탁족자화상」을 받았는데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유삭령댁 (바로 옆집에 거주하던 기계유씨로 한말 선각자인 유길준의 지친으로 삭녕군수를 역임하셨고, 그 아드님은 1946년경 경성부의 상하수도관련 책임자였는데 손자 은목은 나의 절친한 친구였고, 조선전업노조위원장을 한 조창화교수는 은목이의 매부다.) 이관용 (계동 할아버지는 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의 양자로 딸 밖 에 없어서 나의 부친이 수양 아들격으로 모셨기 때문에 손자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심씨 할머니에 게서 궁중법도를 배우고 운현궁 대공비, 소공비에게도 가끔 가서 뵐 수 있었다.)


그밖에 고하 송진우 (정수아버지) 홍성학 (계산한의원) 유응호(서울문리대 교수, 뒤에 김일성대학 교수 역임), 윤재중 (중앙학교 서무과장겸 교사), 윤택중 (뒤에 문교부 장관으로 해방직전 계동에서 자영업경영), 이기종(한국은행국장으로 아들 동수는 재동학교 한반 동문수학)


註⑤- 유치원은 서울 안국동 해위댁 앞 안동교회 부설 유치원을 석달 남짓 다녔는데 그때 유치원 선생님은 평생 동기간처럼 지내고 그 뒤 재동초등학교 대전 피난민 고등학교, 서울법대를 모두 함께 다닌 김희진(金禧鎭)군의 어머니 윤정섭(尹貞燮)선생님이셨다. 윤선생님은 구한말과 왜정때의 반명 높은 파평윤씨 집안분으로 한글학자 주시경선생의 제자셨던 일농 윤복영 어른의 따님이다.

대전 피난고등학교 한반에서 수업받은 윤형섭 (尹亨燮 - 교육부장관역임) 학형은 바로 김희진군의 외숙이기도 하다. 김희진군은 초등학교시절 작문(글쓰기)에 뛰어 났는데 이는 그의 부친이 1930년대의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여긴다. 문재가 있어 언론인으로 시종하다가 2004년에 작고했고 (서울법대100년사의 초고 작성) 그 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성환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註⑥- 1941 봄 : 서울 재동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1~6학년 3반 한반에 김희진 (병으로 1년 휴학하여 1년 후배가 되었음 - 2004 사망)이한춘 (우크라이나 대사), 조준희 (농협 전무), 이규일(의료기회사 경영), 박홍석(시티은행 근무), 최태원(무역업), 정성화 (치과의사) 등 7인은 지금도 반창회를 네 계절에 걸쳐 개최하여 반가운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註-⑦ 1945년 -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곧바로 어머니의 지도로 다른 동급생보다 일찍 한글을 깨쳤다. 초등학교 담임 지득환선생이 내 옆자리에 퉁퉁하고 퉁명스런 전라도 아이를 앉혀주면서 한글을 깨치도록 옆에서 도와주라고 하셔서 열심히 한글을 지도하였는데 두어 달 뒤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뒤에 들으니 할아버지는 계동에 사시는데 전라도 어딘가로 아버지 따라 이사 갔다는 소문 이었다. 옆자리에 앉았어도 퉁명스러워 신원을 정확히 몰랐는데 뒷날 들으니 동아일보사장 과 중앙학교 교장을 지내신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손자이고 당시 고창에서 농장을 하고 계셨던 김상만 선생의 큰아들 김병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기이한 것이 뒷날 1974년에 김병관군이 그린벨트 훼손사건으로 고난을 겪을 때 변론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의 지우를 받아 동아일보 고문 (1975-1998), 동아일보 이사 (1983-1998),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감사(1995-2012)를 역임하였고 우석학원과 우석병원을 인수하는 실무 자문역(1972)을 수행 하게 되었다.

뒷날 고려대학교 구내에 모셔져 있었던 인촌선생님의 묘소가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로 만부득이 천묘를 해야할 형편일때 김상만 동아일보회장 으로부터 천묘할 묘터를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시공부할무렵 어려운 한문으로 엮은 지리서 「인자수지」를 읽은 일이 있었음) 지관 한운봉과 함께 천묘할 후보지물색에 나선일이 있었는데 그때 현 세종시 일월산을 기점으로 평택, 오산, 수원, 화성을 거쳐 남양주시에 걸친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내가 우리집 선대 묘터로 잡으려 했던 남양주시 금남리 묘터를 제공하는 기연으로 까지 발전 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인촌 선생을 비롯한 일민 김상만 회장 과 화정 김병관 내외의 묘소가 안장 되어 있다.



註⑧ ㉠ (입학등록금 없어 포기하려다 월5%의 고리채 얻어 입학금 납부) 

㉡ (우리집안의 재정적 기초는 충남 공주 경기 양주지역의 농지에서 나오는 도조였는데, 동학란, 농지개혁, 6.25 피난 등으로 생활의 기반을 잃었고 부친이 이시영 건국부통령 수석비서관인 것이 야당인사로 연좌되어 자유당시절 취업이 불가능하게된 것이 생활기반 상실의 주된 원인이었다.)


註⑨- 서울구치소 교화위원(1972 자원봉사자로 시작하여 독지방문위원 (1974) 교화위원(1982)으로 현재까지 42년간 봉사하고 있다. 교정교화 - 총집교화와 개별교화를 한공로로 1987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서울구치소 교화 협의회장으로 20년간 봉사하면서

㉠ ․ 식탁겸 책상의 감방설치

㉡ ․ 감방에서의 신문, 라디오, TV, 선풍기, 육법전서의 비치

㉢ ․ 년말년시 추석절에 사랑의 떡 (쌀 10가마분) 과일을 재소자에게 제공

그때 떡살을 보태주신 삼양사 김상홍 회장님, 김택수회장 미망인,

그리고 s.b.s 윤세영회장의 부인 변여사, 종앙고와 법대 선배인 홍병표

형에게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1990년 법의 인간화를 위한 모임을 조직 발족하였다.

㉠ - (법령의 한글화) ㉡ - (법률문화의 개몽화)

1989년 사형폐지운동을 온건한 비폭력적, 비정치적인 시민운동으로 하기 위하여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를 창립 결성하였다. (1989.5.30)

㉠ - 국제적 공조 〈일본 포럼 90, 미국의 소라즈 (피해자 가족단체)〉

㉡ - 사형제 위헌소송의제기 수행 (3차) - 사형폐지특별법의 발의

㉢ - 사실상의 사형 폐지가 달성된데 대하여 큰 보람을 갖고 있다.(2007.12.30)



註⑩ -㉠ 국산법학도서관 건축중 건축기금 기부자 김택수 회장의 사망 (공정 70%정도 진척) - 나머지 건축 자금 미망인 최숙희 부담.

-㉡ 국산법학도서관이 서암관속으로 들어가는 대수선 과정에서 로비에 설치한 향나무 등룡주(登龍柱)가 폐기된 안타까움.

-㉢ 도서관 정초석인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설치를 정보기관이 방해(83) 하였으나 2002년도에 83년도에 만든 미망인 글씨의 정초석을 부착하였다.

그 밖에 건축된 지 한참 된 97 당시 학장은 지붕 물받이가 떨어졌다고 국산의 막네아들에게 그 보수비용을 내라하여 고친바 있는데 하자보수를 지울 성격일까



註⑪ 15동 강의동 건축 기금을 국가예산에 계상하였고 동창회가 집행과정에 있을 때 당시 이모 문교부장관이 자기가 총장으로 나갈 대학으로 그 자금을 갖어 가려는 것을 동창로들과의 협동으로 저지함. (당시 감사원장 이한기, 80-82)


註⑫ 17동 법학연구동 건축자금도 국가 예산에 반영하여 서울대 용으로 지정했는데도 대학본부 가 자하연옆 식당 건축비로 일부 전용하므로써 당초 계획보다 2층 낮게 4층 건축을하였음 (90-92)

2003년에 당시 전윤철 동문과 동창회 그리고 안경환 학장의 노력으로 5-6층을 증축하고 (이때는 용도를 구체적으로 명기했음) 찬조자 명단이 쓰인 동판을 로비에 부착했는데 김모 학장에 의하여 뜯겨진 기막힌 사연이 연출 되고 있다.


註⑬ 이석희 회장의 정성어린 노력 그리고 대학본부와의 명칭 관련 실랑이를 현명하게 타협한 이상혁의 노력으로 100주년기념관을 건립 (외6촌 형이었던 김종운 총장님과 김채윤 사회학과 교수의 지원, 지도에 감사한 마음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