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Kys951/선사시대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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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인류가 나타난 것은 지질학상의 제4기(紀)의 처음, 지금으로부터 60만년쯤 전의 일이라 한다. 그후 기원전 1만년 무렵까지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가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초기나 중기에 만들어진 다만 때려서 자르기만 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석기에도 균정(均整)이 잡힌 형의 것이 있으나, 협의(狹義)의 예술적 감상에 걸맞는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구석기시대의 후기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3만년 전의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구석기시대가 끝날 때까지의 약 2만년간은 제4기에서 4번 반복된 빙기(氷期)의 최후 시기의 말기에 해당하고 유럽의 기후는 그 남반부에서조차 한랭(寒冷)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속하고 바위 뒤나 동굴을 거처로 하였으며, 수렵채습(狩獵採拾)에 의하여 식물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랑그도크 지방에서 에스파냐의 피레네 산맥 부근에 걸쳐서 발견된 수많은 동굴은 그들의 유적이다. 그들이 깊은 동굴 속의 벽이나 천장에 그린 선각화(線刻畵)나 회화는 수렵에만 전념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동물에 대한 놀랄 만큼 예리한 관찰을 보이고 있으나, 이러한 종류의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주술적(呪術的)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유사(類似)는 유사를 낳는다'라는 '공감(共感)의 주술'에 의해서 벽면에 그려진 동물의 그림이나 수렵의 장면은 풍요한 획물(獲物)을 가져오게 하는 힘을 갖는다고 믿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돌이나 상아(象牙) 따위에 새겨진 환조(幻彫)나 부조(浮彫)의 여인 나상(裸像)은 다산(多産)이나 자손 번영에 결부되는 주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빙기가 끝나서 유럽은 점차로 기후가 누그러져 사람들의 거주지도 넓은 지역에 미치고 생활양식도 변화하였다. 이 무렵부터 기원전 4000년경 신석기시대가 시잘될 때까지의 사이는 유물이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의 양쪽의 양상을 드러내기 때문에 중석기시대라 하지만 사람들은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획득경제(獲得經濟)로 살고 있었으므로 만기구석기시대라고도 이름 붙여져 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 기후도 현대와 비슷하게 되어 생식동물(生息動物)도 변화하고 사람들은 평지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동물을 사육해서 생산경제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다만 예술분야에서는 이 시대로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토기나 거대한 돌을 나란히 세운 거석문명(巨石文明)의 유물이 있으나, 회화나 조각은 현저히 양식화해서 구석기시대의 동물표현에서 볼 수 있는 발랄한 리얼리티는 자취를 감추었다. 미술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문명, 한마디로 말해서 오리엔트의 고대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동양적이다. 그리고 이 문명은 그리스나 로마의 문명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의 서양문명의 기초를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북아프리카는 구석기시대 초기, 오늘날 사막으로 되어 있는 사하라 지방에서조차 밀림에 싸여 있었을 만큼 고온 다습이었으나, 유럽의 제4빙기에 해당하는 그 중기후기에는 어느 정도 기온이 누그러짐에 따라 토지의 건조화(乾燥化)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빙기 종료 후는 한층 더 건조도가 심해져 대부분의 토지는 사막으로 되고 인간이나 동물은 오아시스로 모였다. 더욱이 장대(長大)한 오아시스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일강의 하구(河口)나 하곡에 모인 사람들은 서아시아에서 전해진 농업·목축을 배워 일찍부터 식물생산자가 되었다. 그들은 신석기문명의 단계에 있었으나 곧 구리를 이용하는 것을 익혀서 금석병용시대(金石倂用時代)로 들어갔고, 이 단계에서 기원전 3000년경 역사시대를 맞이했다. 다만 이집트에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또한 나일강 유역이나 부근 지역에 동물이나 수렵 장면을 취급한 암벽화(岩壁畵)가 남아 있으나 그 시대를 정확하게는 알기 어렵다. 서아시아에서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이 이스라엘 동북이라크, 서남 아메트리아 등에 있고 서남 아메트리아의 유적에서는 적기는 하지만 이 시대 후기의 선각화(線刻畵) 등도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 시대는 전 1만년경에 끝나며 신석기시대가 온다. 이 시대의 유적은 팔레스티나, 자그로스서록(書錄), 남아나틀리아, 그 밖에 많다. 서아시아가 밀의 원산지이고 또한 양, 산양, 소, 돼지 등의 식량인 풀이 풍요하게 나 있었으므로 세계의 다른 지방에 앞서서 이 지방에 농업목축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한곳에 정주하고 저장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한 생활로 들어가 문화적인 작업을 꽃피울 수 있었다. 여기에 참 문명의 탄생을 볼 수가 있다. 이 농업 목축은 마침내 이집트에도 받아들여졌고 또한 뒤늦게 유럽에도 전해졌다. 더구나 서아시아가 역사시대로 들어간 것은 기원전 3000년경 후기 금석병용시대 또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일이다. <李 永 桓>

목차

선사시대의 미술[편집]

미술의 기원[편집]

美術-起源 인간이 두 발로 일어서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유로워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인류의 미술활동은 그 싹이 텄다.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사람들은 갖가지 도구를 돌로 만들었는데 그 석기는 처음에는 조잡한 것이었으나 차츰 정교한 것이 되어 갔다. 이미 수십만년 전에 아슐기(期)의 망치에는 좌우가 균제(均齊)의 것이 있으나, 그와 같은 석편(石片)의 도구류 이외에 회화(繪畵)나 조각 같은 것으로서 구석기시대의 전기 및 중기 사람들이 남겨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미술작품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수만년 전, 구석기시대 후기인 오리냐크기(期)의 것이다.

프랑코 칸타브리아 미술[편집]

-美術 오리냐크기(기원전 3만년경부터 기원전 2만5천년경까지), 솔류트레기(기원전 2만5천년경부터 기원전 2만년경까지), 막달레니아기(기원전 2만년경부터 1만년경까지)에 걸쳐서 많은 회화와 선각화(線刻畵), 그리고 부조(浮彫)와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서남·프랑스와 북에스파냐의 칸타브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서쪽은 영국에서 동쪽은 바이칼 호반(湖畔)까지, 북쪽은 북독일에서 남쪽으로는 시칠리아섬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것을 제작한 사람들은 수렵채집민(狩獵採集民)이었다. 그들은 아직 농경이나 목축을 알지 못하여 야생동물을 잡고 나무열매를 따며 물고기나 조개를 잡아서 그들의 목숨을 이어갔지만 주식은 야수(野獸)의 살코기였다. 따라서 그들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동물화(動物畵)이다. 즉 구석기시대 미술의 주제는 그들이 특히 포획하고자 했던 동물에 집중되어 있어서 자연현상이나 산천초목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전혀 볼 수 없다. 따라서 이들 회화나 조각은 특정한 동물을 잡고 싶다는 구석기인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특색이 생긴다. 즉 묘사되는 동물은 살집이 좋은, 성숙한 동물뿐이라는 것, 새끼 밴 동물이나 발정(發情)한 동물이 가끔 나타난다는 것, 상처를 입은 동물의 묘사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벽화에 인간이 표현되는 일은 드물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반인간(半人間)·반동물의 가장(假裝) 인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부조와 조각에는 인간이 그 본연의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모두가 여성이고 더욱이 나체로 유방·복부·둔부가 현저하게 과장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석기시대 미술이 주술적(呪術的)인 목적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동굴벽화[편집]

洞窟壁畵 벽화는 모두가 동굴 깊숙한 곳에 그려져있고 입구 부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광물성의 안료(顔料)로 그려진 채화(彩畵)와 윤곽을 파 낸 선각화 두 종류가 있다. 가장 오래된 벽화는 오리냐크 초기의 손바닥의 음형(陰形)이나 양형(陽形)이다. 이 손모양과 병행하는 시기에, 점토질의 암반(岩盤)에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평행하고 교차하고 굴곡된 이른바 '마카로니'가 그려졌다. 중기에는 데생풍(風)의 동물이 많지만 동물의 다리는 두 개만이 나타나 있고 형식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서서히 묘선(描線)에 비수(肥瘦)가 생기고 또 다리도 네개로 표현하게 된다. 후기에는 드물게 2채화(二彩畵)가 나타나지만, 그러나 오리냐크 회화는 본질적으로 데생이다. 솔류트레기(期)에서는 회화적 유품이 없고, 막달레니아 초기에 소묘풍(素描風)의 회화에서 다시 출발한다. 점차 선의 억양이 생기고 중기에는 동물의 털이 선영(線影)으로 처리되거나 찰필화(擦筆畵)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평도(平塗)한 회화가 나타난다. 그리하여 후기에는 적색·갈색·황색·흑색 등 두 색 이상의 그림물감을 섞거나 분류해서 칠한다든지 하여 형상의 입체감과 현실감을 꾀하는 다채화(多彩畵)가 나오게 된다. 동물의 자태도 자연스럽게 되어 순간의 운동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지게 되었다. 막달레니아 최종기엔 적색의 반점이나 염주알 같은 도형적(圖形的)인 표현이 나타나서 구석기시대 미술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저명한 유적으로서 오리냐크기의 크냐크, 패슈 메를, 막달레니아기의 니오, 라스코, 알타미라, 폰 드 고옴 등이 있다.

암면 부조[편집]

岩面浮彫 직접·간접으로 일광이 비치는 암면에 새겨진 것으로 모두 부조이다. 오리냐크기에는 로셀의 몇 개의 나부(裸婦) 부조와 솔류트레기에는 르로크드 세르의 양감(量感)이 풍부한 많은 동물부조, 그리고 막달레니아의 앙글 슐 랑글랑과 라 마들렌 동굴의 우아한 나부 부조가 있다.

동산 미술[편집]

動産美術 손으로 운반할 수 있는 소미술(小美術)을 말하는데 독립된 돌이나 뼈 등으로 만들어진 환조조각(丸彫彫刻)이나 갖가지 공작품에 그린 회화·선각화 부조 따위가 있다. 이른바 '비너스 상(像)'이라고 불리는 환조의 여성 나상(裸像)은 유방·복부·둔부가 두드러져 있다. 이들은 인종적 특징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임신부를 재현한 것으로 출산의 주술(呪術)에 관계되는 일종의 부적(符籍)이다. 또한 주술 의례에 사용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특수한 구멍 뚫린 막대기(지휘봉)가 300개 이상이나 발견되고 있다. 더욱이 회화 연습을 위하여 스케치한 작은 돌멩이가 특정한 유적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데, 이것으로 당시에 어느 정도 조직적으로 스케치 연습이 행해졌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중석기시대의 미술[편집]

中石器時代-美術 지금부터 1만년쯤 전부터, 즉 막달레니아기 후기부터 중석기시대에 걸쳐 기후가 현저하게 온화해져서 북구(北歐)나 북러시아의 빙하가 녹기 시작하였다. 해빙(解氷)과 더불어 해면이 상승, 브리튼섬과 시칠리아섬은 대륙과 유리되어 섬이 되었다. 이와 같은 기후의 변화로 인하여 추운 기후를 좋아하는 순록이나 매머드는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야수의 살코기로 주식을 삼았기 때문에 동물의 이동은 당연히 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은 북상(北上)하는 동물의 집단을 따라 북유럽으로 이주하는 것과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서 새로이 무성해진 숲 속에 사는 작은 동물을 포획한다든지 패류(貝類)의 채집에 의하여 목숨을 이어 나가는 것이었다.

북극 미술[편집]

北極美術 북상하는 동물군(動物群)들을 따라서 북유럽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러시아에 남긴 것이 북극 미술이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구석기시대의 사람과 같았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도 프랑코 칸타브리아(Franco Cantabria) 미술의 전통을 농후하게 이어받고 있다. 즉 암벽화(岩壁畵)를 애호하였고, 특히 그 양식이 자연주의적이며 또 골각기(骨角器)가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북극 미술의 주제는 야생동물과 물고기인데 모두가 각화(刻畵)이다. 유적은 50개 소쯤 있는데 특히 노르웨이에 많다. 그 제작 연대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16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레반트 미술[편집]

-美術 동에스파냐의 레반트 지방에도 후빙기에 있어서 암면(岩面)에 많은 벽화가 그려졌다. 그것들은 북극 미술과 달리 채화(彩畵)이며, 동물뿐만 아니고 인물의 묘출이 보편적이다. 양식화된 인물상은 단독으로서가 아니고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냥꾼과 동물이 여러 형태로 접하는 수렵도·전투도, 여자들이 윤무하는 무용도와 벌의 꿀 채집 등이다. 제작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8000년경에서 기원전 3000년경까지이다. 연대적으로 보아 초기의 회화에서는 동물이 리얼하게 표현되지만 입체성은 별로 없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안쪽의 다리는 모습이 사라지고 실루엣풍의 표현으로 발전해 이윽고 원근표현은 전혀 없어져 버린다. 다음 단계에서는 인물상이 많이 나타나지만 모두가 현저하게 데포르메(변형)되고 양식화된다. 색채는 통례적으로 적색 또는 흑색의 단색이다.

신석기시대의 미술[편집]

新石器時代-美術 수천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인류의 문화는 정착하여, 농경 내지는 목축 생활과 마제(摩製)석기 및 토기 제작으로 특색지워지는 신석기시대로 접어든다. 그 무렵의 미술적 유품으로는 북부아프리카와 남부 아프리카에 널리 분포된 암벽화와 이집트·메소포타미아, 유럽 각지의 토기·우상(偶像)·인장(印章), 그리고 유럽의 거석(巨石) 기념물 등을 들 수 있다.

북부 아프리카의 암벽화[편집]

北部-岩壁畵 소위 대(大)사하라 지역의 각 지방 즉, 타시리 니제르·페잔·아하가르·아드랄 데 지포라스·아일·티베스티·에네디의 각 산계(山系)의 방대한 암면 채화와 각화(刻畵)가 분포되어 있다. 그것의 조사는 이제 시작한 데 불과하지만 수천년 전의 중석기시대부터 아랍의 침입을 받은 역사시대까지 오랫동안 그려져 내려온 듯하다. ⑴ 고졸시대(古拙時代) ― 코끼리·하마·물소·영양(羚羊) 등 야생의 동물을 단독으로 묘사하던 시대와 ⑵ 수렵민(狩獵民)의 시대 ― 둥근 머리를 가진 인물을 특색으로 하는 회화로 시대의 경과에 따라 더욱 양식화되었다. 원두인물(圓頭人物)의 신체에 흉터를 만들었다든지 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벽화는 흑인이 그렸다고 여겨진다. ⑶ 소(牛)의 시대 ― 대규모의 소의 목축이 이 지방에서 행하여진 시대의 것으로 주제는 소와 양의 방목(放牧), 수렵·전투·무용·사랑·가사(家事) 등 당시 일상생활의 갖가지 양상이다. 이 시기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작자는 현존하는 퓰베족(族)의 조상이지만 그들은 동아프리카에서 사하라 지역으로 왔고, 다시 이 지방이 건조하게 되자 현재의 나이저(Niger)강 유역에 이주하였다. ⑷ 말(馬)의 시대 ― 아시아에서 이집트로 말을 가지고 간 것은 기원전 1700년경이나 그로부터 조금 뒤진 사하라 지역에도 말이 유입되었다. 이 말의 그림이 전차(戰車)의 그림과 더불어 각지에 남겨져 있다. ⑸ 낙타의 시대 ― 사막의 여행은 말보다 낙타가 유용한 것으로 낙타의 그림은 널리 분포되어 있다. 낙타는 기원전 200년경에 아시아에서 들어온 것이어서 이들의 벽화는 그 이후에 속한다. ⑹ 아라보 베르베르 시대-아랍인의 사하라 침입은 11∼12세기이지만 낙타와 함께 아랍 문자가 암벽화에 나타나게 되어 역사시대로 접어든다.

부시맨의 암벽화[편집]

-岩壁畵 남부 아프리카의 북쪽은 탄자니아에서 잠비아(Zambia)와 로디지아(Rhodesia)를 거쳐 남쪽은 케이프타운까지, 서쪽은 남서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쪽은 인도양 연안까지 많은 암면 채화와 각화가 분포되어 있다. 그것은 현재 칼라하리 사막으로 물러가 고립된 부시맨족의 조상에 의하여 그려진 것으로 수렵·채집민의 미술이다. 주제는 각종 동물의 수렵·어로·무용·매장(埋葬)·기우(祈雨) 등이다. 양식의 변천에 대해서는 5∼6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가 있으나 가장 오래된 벽화는 기원전 4000년까지 소급할 수가 있고 최신의 것은 19세기에 속한다.

거석 문화[편집]

巨石文化 지중해의 여러 섬에서 대서양 연안 지역, 나아가서 유틀란트 반도·북독일·남스칸디나비아 등 넓은 지역에 거대한 돌로 구축된 건조물(建造物)이 많이 남겨져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거석기념물이라 칭하고 있으나 형상·구조·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종류가 있다. 가늘고 긴 자연석을 수직으로 세운 멘히르, 거기에다 남자나 여자의 모습을 부조한 멘히르인상(人像), 그리고 많은 멘히르를 직선상으로 가지런히 세운 알리뉘망, 원형으로 가지런히 놓인 크롬레크, 네개의 돌 위에 한장의 거대한 평석(平石)을 얹어 놓은 고인돌, 두 개의 멘히르 위에 옆으로 한개의 돌을 얹어 놓아 문형(門形)으로 된 트리리튼과 묘도(墓道)에 붙은 석실(石室) 등이다. 제작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기원전 2400년경이고 독일에서는 기원전 2000년 전반에 만들어졌다.

청동기·철기시대의 미술[편집]

靑銅期·鐵器時代-美術 유럽에서는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내지 기원전 2000년대 초두에 동기(銅器)·청동기시대로, 전 1000년대 초두에 철기시대로 접어들고, 미술적 유품으로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의 도형적(圖形的)·추상적인 암벽화와 게르만·켈트·스키타이·르리스탄 등의 갖가지 무기구(武器具), 생활용구와 조각, 사르데냐섬의 인상(人像) 조각과 석조 건축 등이 있다. 유럽에 있어서 철기 문명은 초기의 할슈타트기(期)와 후기의 라 텐기로 분리되며, 금속제의 작품은 정교하고 석제의 인상에는 완전한 생명이 넘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켈트 미술의 특질은 그후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 미술에도 이어져 조형적 기반을 이뤘다. 또 사르데냐섬에는 느라기라 불리는 독특한 석조 건축 가운데 반추상(半抽象)풍인 인상을 모셔 두어 지중해 세계에서는 매우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미술[편집]

고대 이집트의 미술[편집]

古代-美術 이집트 예술의 신(神) 프타는 본디 창조의 신이었다. 이 신이 창조한 질서는 모든 예술에 공통되어 건축도 회화(繪畵)도 조각도 그 근저(根底)에는 이 법칙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 조형예술은 우주 만물의 조화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작품은 아니다. 신전(神殿)은 '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 한 거기에는 엄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선다.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닭이다. 이집트의 미술활동의 역사는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한다.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다. 다음에 연표(年表)를 표시해 본다. 선(先)왕조시대(先史時代)-기원전 3000년 이전. 초기 왕조시대(기원전 3000∼기원전 2778)-제1∼2왕조. 티스 시대라고도 한다. 고(古)왕국시대(기원전 2778∼기원전 2263)-제3∼6왕조. 피라미드 시대라고도 한다. 제1중간기(中間期=기원전 2263∼기원전 2160)-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중(中)왕국시대(기원전 2160∼기원전 1785)-제11∼12왕조. 봉건시대. 제2중간기(기원전 1785∼기원전 1580)-혼란기로 통일왕조 없음. 신(新)왕국시대(기원전 1580∼기원전 1090)-제18왕조(기원전 1580∼기원전 1314), 제19왕조(기원전 1314∼기원전 1200), 제20왕조(기원전 1200∼기원전 1085) 말기(末期) 왕조시대(기원전 1085∼기원전 332)-제21∼30왕조 및 페르시아 시대부터 알렉산더 대왕 정복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년까지).

아마르나 미술[편집]

-美術 제18왕조 이크나톤 치하의 독특한 풍조와 미술인데 새로 도읍한 이크나톤의 현 지명인 아마르나(Amarna)를 따라 부르고 있다. 아톤신(神) 신앙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정신과 병행하여 예술계에도 종래의 고정화한 양식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조각과 회화에 개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집트 미술사상 매우 특이한 한 시기를 이룬 것이며, 이크나톤 자신에 의한 별종(別種)의 양식화라고도 생각된다.

건축[편집]

建築 이집트의 건축은 풍부한 석재(石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였으나 제2왕조 이후 왕릉(王陵=피라미드)과 신전(神殿)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고 요소에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왕궁과 주택은 왕조시대를 통하여 벽돌과 목재를 썼다. 석재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투르의 석회암, 시르시라의 사암(砂岩), 하트느바의 알라바스터 등이 특히 유명하고 목재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신전[편집]

神殿 선(先)왕조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의 신전은 간단한 오두막을 짓는 식인 듯하였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되고 후에 석재를 주재로 하고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도, 기본적으로 정면 입구의 탑문(塔門)과 중정(中庭), 전실(前室) 및 지성소(至聖所)로 되어 있고, 여기에 성지(聖地)와 나일강 수량계(水量計) 및 후기 왕조에는 특히 탄생전(誕生殿=만미시)이 부설되고 경내(境內)를 연와(煉瓦)벽으로 둘러쌌다. 탑문 앞에 왕조의 거상(巨像)과 오벨리스크가 각각 한 쌍씩 세워지고 벽면 전체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업적을 표시하는 채색부조(彩色浮彫)가 되어 있으며 앞칸은 다주실(多柱室)로 되어 있다. 장제전(葬祭殿)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新)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하트솁수트(제18왕조) 여왕의 장제전(데르 엘 바하리)은 테라스식(式)인데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암굴 신전은 절벽을 이용하여 파서 만든 것으로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라메스 2세)이 대표적이다.

석주와 기둥머리[편집]

石柱- 건축용 기둥에는 목재도 사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석재이다. 거의 모두가 식물을 모형으로 했는데 야자수형 기둥은 연 줄기 묶음의 기둥에 꽃의 봉오리나 활짝 핀 꽃의 기둥머리를 붙인 것이며 파피루스형 기둥도 그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면 이러한 복합형도 열 종류가 있다. 주두에 하트홀 여신 얼굴의 주두를 붙인 것도 있다. 화강암·석회암·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개만으로 된 돌 기둥이나 드럼형(型)의 돌을 쌓아올린 기둥도 있고 비문(碑文)을 파서 채색한 경우도 있다.

오벨리스크[편집]

obelisk 신전(神殿)의 탑문(塔門=퓌론) 앞에 좌우 일기(一基)마다 설치된, 약간 끝이 가는 4각형의 거대한 석주로, 끝은 4각추(四角錐)이며 기둥의 표면에는 히에로글리프비(碑)가 있다.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통상적으로 아스완의 화강암을 끓어 낸 것으로서 하트솁수트 여왕의 것은 높이가 30m, 300t 이상에 달한다. 지금까지 50기(基) 이상이 침입자의 기념품으로 해외에 가지고 나가게 되어 원위치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분묘[편집]

墳墓 영혼 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은 묘, 즉 영원한 집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원(圓) 또는 타원형의 수혈(竪穴)이었으나 제1왕조경부터 마스타바분(mastaba墳)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직 4각형 평면의 피라미드를 단두(斷頭)한 모양인데 기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지고,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사당(祠堂)은 지상에 설치하였다. 초기 왕조의 묘도 이 형식이다. 사당의 방 벽면은 각종의 광경이 부조로 덮여 있으며, 맨 안쪽에 영혼이 출입하는 위문(僞門)을 만들어 두었다. 제3왕조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묘(王墓)가 되어 제17왕조까지 답습되었다. 제18왕조로부터 왕묘는 인적이 드문 산중의 암굴분(岩窟墳)이 되고, 신전은 분리하여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귀족의 묘도 단애(斷崖)나 경사진 사면을 이용한 암굴분이 되어 입구 위쪽으로 피라미드를 구축한 예도 있다. 벽면은 회화 또는 부조로 덮여 있어 회화사(繪畵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묘의 경우에는 긴 종교문서 비문(碑文)을 새겨 두었다. 정중한 장례가 당시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다량에 이르러 이집트 미술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피라미드[편집]

pyramid 제3왕조부터 출현한 왕릉의 한 형식이다. 완성을 본 것은 제4왕조 쿠푸왕의, 높이 약 147m의 석축(石築)으로, 거대한 4각추형의 본체와 상·하 신전과 참도(參道) 등의 복합으로서 현실은 본체 내부나 또는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중(中)왕국시대에는 석재 대신으로 햇볕에 말린 벽돌도 사용되었으며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귀족의 분묘에도 규모가 작은 것을 받아들여 나파타·메로에서의 왕묘 형식으로 이어져 갔고 로마에도 이것을 모방한 묘가 있다.

스핑크스[편집]

sphinx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地平線上의 호루스)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주택[편집]

住宅 이집트에서는 신전이나 묘는 석재이기 때문에 유적으로서 많이 남아 있으나 주택의 예는 적다. 이것은 건축 재료가 소멸되기 쉬운 볕에 말린 벽돌이나 나무 또는 갈대 등이었고 택지도 현대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나 유적이나 묘의 벽화, 그리고 가옥의 모형(부장품) 등으로 대략은 알 수 있다. 즉 대저택은 연와(벽돌)로 담을 둘러싼 정원에 못을 파고 수목(야자수나 시카모아)를 심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방이 열개 이상인 것도 있으며 원주(圓柱)가 있는 파브리크의 방으로 나누어져서 시중들의 방·부엌·욕실·변조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가구는 침대·의자·작은 탁자·장궤(長櫃) 등이고 벽걸이와 일종의 양탄자 같은 것도 애호되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이에 작게 만들어져서 외부의 열을 차단하였다. 부지내에 성당(聖堂)을 세우고 담벼락에 연하여 가축의 우리나 사일로를 설치하였다. 일반의 가옥은 훨씬 간단하여 현대의 농가와 유사하고 이층집의 경우에는 아래층이 창고가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쪽에 시원한 바람을 쏘일 테라스를 붙이고 있다. 묘를 파는 인부 등은 방이 이어달린 긴 집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회화[편집]

繪畵 이집트 화가의 사명은 사물의 형태나 본성이나 특징을 묘사하는 일이어서 회화는 신이 정한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존하는 자료는 거의 모두가 묘의 벽화이고 그것은사자(使者)의 영원한 생명이 생활하기 위하여 묘실 내에 현세를 재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부조(浮彫)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집트 회화의 특징은 원근법의 결여와 물체 묘사에 있어서 측면도와 정면도의 혼용이다. 특히 인체에서 머리는 항상 측면이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이며 허리에서 아래 부분은 다시 측면이 되고, 얼굴의 정면도는 예외였다. 동물은 기본적으로 측면이다. 이 형식은 왕조문화의 발생과 동시에 결정되었다. 벽화는 진흙 연와의 벽이나 바위 벽에 정제(精製)한 점토 또는 석고질(石膏質)의 모르타르를 바른 위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집트 회화사(繪畵史)의 성쇠는 정치적 번영의 역사와 일치한다. 선왕조시대에는 암벽화(岩壁畵)나 토기 표면의 장식이 있고 그 말기인 히에라콘폴리스 벽화에는 권력자의 도상(圖像,icon) 표현에 있어서 이집트 양식의 기초를 볼 수 있다. 초기왕조시대의 분묘에는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가 있을 뿐 형상적인 회화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왕국시대에는 <메이둠의 오리>(제4왕조)가 나왔다. 유례(類例)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 진흙 연와벽이 파손되기 쉽고 작품의 대부분은 소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조의 밑그림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중왕국시대의 회화는 베니하산의 암굴분(岩窟墳)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데생은 진보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채색을 보였다. 신왕국시대, 특히 제18왕조는 황금기이다. 전반 토트메스 3세 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아르카이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후반에는 감수성이 풍부한 선과 정묘한 색채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크트와 멘나의 묘에 있는 벽화(모두 그르나에 있음)는 이집트 회화 전성기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아마르나 양식은 조각만큼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제19왕조에는 기교에 치우쳐 조방하게 되었고(데르 엘 마디나의 例), 제20왕조 이후에는 서서히 회화활동이 침체되어 겨우 파피루스 문서의 삽화 등에 그 전통을 남겼을 뿐이었다.

색채[편집]

色彩 안료(顔料)로서, 흑(黑)은 그을음, 청(靑)은 구리 계통의 유질(釉質)의 분말, 녹(綠)은 공작석(孔雀石)이나 녹색 글레이즈의 분말, 적(赤)은 자토, 황은 황토(黃土), 백은 석회 등이 사용되었다. 또 이집트인에게는 독특한 종교적 색채 상징관념이 있어서 각기의 색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백은 기쁨, 흑은 재생(再生), 적은 악마, 황은 신성, 녹은 활력을 의미하여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종교적인 공예품의 채색이 결정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는 화가가 관찰한 대로 자연스럽게 채색되었다.

부조[편집]

浮彫 수법에는 통상적으로 양각(陽刻)과 음각(陰刻)이 있다. 선(先)왕조시대에는 상아의 세공에도 보였지만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묘나 신전의 벽면에 그려졌다. 도상(圖像)의 표현법은 거의 회화와 같이 채색되었다. 제5왕조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중왕국시대에는 그것을 답습하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궁정 아틀리에의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조잡하게 이루어졌다. 신전에는 거대한 구도가 채용(採用)되어 그 외벽면(外壁面)에는 음각을 하였고 내면은 양각을 하였다. 사이스 시대에는 고왕국시대의 양식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운동이 있었다.

조각[편집]

彫刻 '생명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라 불려지는 이집트 조각사(彫刻師)의 사명은 명제(命題)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도록 충실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조각의 종류에는 신상(神像)·왕상·개인상·풍속상 및 동물상 등인데 묘에 안치된다든지 신전에 모셔 두었으며, 그 크기도 20m 이상의 거상(巨像)에서 몇 cm의 소상(小像)에 이르렀고, 돌·나무·금속·상아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왕조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상 등의 토제(土製)나 상아 조각이 있었으나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회암·화강암·편암(片岩) 등의 조각이 출현하여 이미 이집트 조각의 시조적(始祖的)인 모형이 형성되었다. 고왕국 시대는 조각 사상(史上)의 고전기로 되어 이집트 양식이 완성되었다. 제4왕조의 카프라왕의 섬록암상(閃綠岩像), 라호테프 부처상(夫妻像), 카이페르 목상(木像=村長像), 페피 1세 동상(銅像) 등이 대표작이다. 목상과 석회암상은 채색되어 있다. 형식은 입상(立像=直立 또는 왼발이 一步 전진한 자세)·의좌상(椅座像)·호좌서기상(胡座書記像) 등이 있고, 개인의 단신상(單身像) 외에 부부나 가족 군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상은 신전에 두었고 일반인의 인물상은 묘의 세르다브에 안치되는 이른바 '카 상(像)'이었다. 옥안(玉顔)을 붙인 예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실적 기법에서 출발하였고 일종의 이상화(理想化)에 성공한 멤피스파(派)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왕국시대에는 이것에 테베파의 사실주의가 가하여져서 특히 인물의 개성 표현이 특징이었고, 대표작은 제12왕조 제왕(諸王)의 초상(肖像)이다. 신왕국시대의 경향은 당초 제18왕조에 현저하게 이상화(理想化)되어 우아함이 가해졌으나 얼마간 유형적이었다. 그러나 신상과 석비(石碑)를 받드는 신형식이 출현하여 중왕국시대에 그 조형(祖型)을 보았던 안 바케(方形彫刻)가 더욱 형상화되었다. 제19왕조 이후는 왕상의 거대성이 증대되었으나(예를 들면 라메스 2세) 대체로 조잡·형식·추종에 빠져 버렸다. 이 사이의 이크나톤과 네페르티이트상을 절정으로 하는 아마르나 양식의 자연주의는 특이한 존재이다. 목조(木彫)에는 제 나라의 것과 남방의 흑단(黑檀),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후기왕조시대에는 제25왕조에서의 사실주의의 부활, 제26왕조(사이스 왕조)의 고왕조시대 양식을 지향하는 복고 운동이 있었고, 한편 청동조각에 의한 인물상(예를 들면 타그셰트 여왕상) 외에 특히 소형의 주동신상(鑄銅神像)이 성행하고 목조(木彫)나 석조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정한 인물의 표현이 아닌 풍속상은, 고왕국시대에는 석조(石造)의 노동자나 시종의 상이 있었지만 중왕국시대 이후에는 생활의 각 분야를 표현한 채색 목조의 군집상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많지 않다.

우샤브티[편집]

Ushabti 미라형(形)의 소상(小像)으로 가슴에 모은 양손에 괭이를 잡고 등에 바구니를 지고 동부(胴部)에 <사자(死者)의 서(書)> 제6장의 일부가 쓰여진 조각이다. 이집트의 종교에는 죽은 사람은 오시리스신(神)이 지배하는 저 세상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고 우샤브티는 그날그날의 노동을 사자를 대신해 하는 것으로 미라와 같이 부장(副葬)되었다. 파이안스·돌·나무·흙·구리 등으로 만들었고 정교하여 예술적인 것도 많다. 고대 이집트의 유품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인 것의 하나이다.

석제 용기[편집]

石製容器 실용·비실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용기로서 보급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시대의 현무암 제품이고 선왕조시대 말기에는 많이 제작되어 난형(卵形)의 항아리가 일반적이며 석재는 석회암·알라바스터·편암(片岩)·화강암·각력암(角礫岩)·반암(斑岩) 등이 사용되었다. 제1왕조경부터 기형(器形)도 다양화하여 경도(硬度)가 높은 섬록암(閃綠岩)·석영(石英)·흑요석(黑曜石)도 사용되었다. 사카라의 제세르왕의 피라미드에서는 3천개 이상의 석제 용기가 발견되었다. 항아리나 병의 성형(成形)에는 드릴을 사용한 듯하다.

토기[편집]

土器 이집트의 토기는 일반적으로 조잡한 제품이고 질이 좋은 것은 상(上)이집트에 한정되었다. 선왕조 시대에는 흑정토기(黑頂土器=블랙 톱)와 채문토기(彩紋土器=배와 동물의 무늬) 및 적·흑색 마연토기(磨硏土器) 등이 현저하였으며 녹로는 초기 왕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왕조시대에는 기술이 침체하고 문양은 단순 또는 소멸하여 실용기화됨으로써 파이안스에 그 주역을 넘겨 주게 되었다. 용기 외에 인물이나 동물에 흡사한 조형적인 것도 있다. 토기에 광택을 내는 방법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파이안스[편집]

faience 이집트 파이안스는 유럽과는 달리 석영(石英) 분립(粉粒)을 성형한 태(胎)에 시유(施釉)한 것인데, 색은 적·황·흑 등도 있으나 터키석이나 유리석(瑠璃石=라피스 라즈리)을 모방한 청과 녹이 일반적이었다. 선왕조시대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세르왕의 피라미드 내부 벽면 타일과 같이 제3왕조경부터 성하게 만들어졌다. 제품은 비즈·부적(符籍)·소조각(小彫刻)·상안(象眼)·용기·장식품 등 여러 종류로 감청(紺靑)의 것은 이집샨블루로서 현재에도 애호가가 많다.

글라스 공예[편집]

-工藝 이집트에서는 귀석(貴石)의 대용으로 글라스(glass) 공예가 발달했기 때문에 투명한 글라스는 인기가 없었고 모두 색(色)글라스로 청·적·황·녹색이 애호되었다. 원료는 모두 이집트에 많은 석영 및 천연의 소다로 이미 선왕조시대부터 만들어져 신왕조시대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제품은 소형인 것이 많고 파상선문(波狀線紋)이 붙는 샌드코아(砂核法)로서 만든 향수병이 특징적이어서 수출된 것도 있다. 후기에는 파테 두 바르 제품도 출현하게 되었다.

금속 공예[편집]

金屬工藝 주류는, 전통적인 동제품으로 고왕조시대부터 기술이 발달하였으나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원료를 국외에 의존하게 되었다. 청동은 중왕국시대 이후 제련되었다. 동제품으로는 무기·이기(利器)·용기, 건축 부분품이나 가구·장신구 외에 조각에도 제6왕조 페피 1세의 주상(鑄像=부분적)과 같은 대형과, 말기왕조시대에는 소형(특히 神像)이 잘 만들어졌고 납형기법(蠟型技法)도 고도로 발전하였다. 제동(製銅) 공작 과정은 가끔 묘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제철기술은 기원전 1000년경에 도입되었으나 보급되지 않았다.

귀금속 공예[편집]

貴金屬工藝 귀금속에는 금·은·엘렉트람이 있다. 금은 선왕조시대에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왕조시대에는 태양신의 육체로서 성스럽게 여기게 되어 23금 정도의 것도 정련(精鍊)되었다. 제단, 신이나 왕의 상, 의장품(儀裝品)·장식품·부적 등의 재료가 되었으며 중왕국시대의 공작 기술은 최고에 달하였다. 은은 당초 금보다 희소가치(稀少價値)가 높았으며 엘렉트람은 양자의 합금으로 다량으로 제련되어 오벨리스크 표피(表皮)에도 사용하였다. 금은 상(上)이집트와 누비아에서 채취하고 은은 해외에서 수입한 듯하다.

보석 세공[편집]

寶石細工 장석(長石)·벽옥(碧玉)·홍옥(紅玉)·마노(瑪瑙)·녹주석(綠柱石)·유리석(琉璃石)·수정·터키석·석류석 등을 사용하였을 뿐 진짜 보석은 없었다. 중왕국시대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신왕국시대 이후에 보급하였다. 귀금속과 같이 가공한 경우가 많고 옷깃 장식, 목걸이·팔찌·가락지, 장식대(裝飾帶), 가슴 장식, 부적 및 상안(象眼)의 조각(片) 등을 만들었다. 글라스나 파이안스의 대용품도 많다. 제1왕조 제르왕, 다하슐과 리쉬트 출토품(出土品=제12왕조), 투탕카멘왕의 것이 유명하다.

부적[편집]

符籍 마력을 가진다고 믿어진 소형의 조형물로 일상 패용(佩用)하거나, 미라를 감는 권포(卷布) 사이나 옷깃 장식에서 발견된다. 금·은·동·석제 등이 있었으나 파이안스제(製)가 일반적이다. 종류도 많고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으나 <사자(死者)의 서(書)> 등 종교 문서에 명기된 경우도 있다. 안크는 생명, 파피루스주(柱)는 활력, 스카라브는 생성(生成), 제드주(柱)는 안정, 티트는 인스 여신의 가호, 우자트(호루스의 눈)는 사악한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스카라브[편집]

scarab 스카라베우스 사크르는 곤충의 이름으로서 통상적으로 이 벌레를 본딴 소형의 조각을 가리킨다. 부적 또는 인장(印章)으로 사용되었고 아랫면은 평평하여 여기에 왕명·신명·공직명 또는 성문(聖文=hieroglyph)이 새겨져 있으며 왕의 기념적 사건(成婚式 따위)을 기록한 것도 있다. 또 스카라베(scarabee)는 '생성(生成=케펠)'을 상징하여 케프리신(Khepri神)이 되어 상승하는 태양을 의미하였으며 미라의 심장부에 놓여진 것도 있다. 파이안스·돌·동제품이 일반적이고 후세의 모조품도 많다.

목공예[편집]

木工藝 이집트에는 목재가 적었으나 목공 기술은 크게 발달하였다. 보통의 소형 제품은 토산의 시카모아와 아카시아를 사용하였고 대형·고귀한 것에는 레바논 삼나무를 사용하였다. 주로 가구를 만들었고 관(棺) 또는 조각도 만들었다. 가구는 고왕국시대에 있어서는 단순한 침대나 의자 정도였지만 신왕국시대부터 정교·화려하게 되어 보석상자와 함도 만들었다. 장식법은 채색 채문(彩紋), 보석류, 글라스·상아 등의 상감(象嵌)과 금도금 따위가 있다. 접합부는 촉엮음 또는 목침(木針)을 사용하였다.

상아 세공[편집]

象牙細工 이집트인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상아를 세공의 좋은 재료로 삼고 있었다. 원료는 누비아·푼트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지방에서 수입한 것인데 작은 함·팔찌·귀걸이·빗·비녀·거울·부채의 손잡이·화장품 용기와 부적 등 그 밖에 부조(浮彫)한 파넬, 가구나 기타 목공품의 상감용(象嵌用) 등 여러 갈래로 사용되었고, 작은 예이기는 하나 조각품도 있다(제4왕조 쿠푸왕 좌상). 부조로 판 상아는 가끔 적색과 흑색으로 착색한 것도 있다(투탕카멘왕 보물에 좋은 예가 있음).

직물[편집]

織物 왕조시대를 통하여 아마(亞麻)가 거의 유일한 원료로서 선왕조시대부터 짜여졌다. 일반적으로 평직기(平織機)가 있었고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수직기(垂織機)도 나오게 되었다. 옷감, 미라의 포대(包帶), 배의 범포(帆布), 침대 덮개를 만들었고 철직(綴織)의 기술도 발달하였다. 고급품은 흰색으로 얇고 정교한 마포이며 염색도 하여 인디고나 꼭두서니 같은 식물성 염료를 사용하였다. 목면(木綿)의 기록은 기원전 6세기에 있으나 코프트 시대에 보급되었으며 양모는 이집트인이 싫어하였다. 그리고 마포(麻布)는 수출한 것도 있었다.

투탕카멘왕 보물[편집]

-王寶物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카터(H.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副葬品)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기자[편집]

Giza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연안(西沿岸)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 쿠푸·카프라·멘카우라 제왕(諸王)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통일 아랍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편집]

Saqqara 카이로 남방 25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을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편집]

Abydos 카이로 남방 약 550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시대에는 오시리스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편집]

Thebes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本殿)이고 룩소르가 부전(副殿)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누비아 유적[편집]

-遺跡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을 누비아(Nubia)라고 한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城砦)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성(城)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水沒)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에 의해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편집]

-神殿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의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600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미술[편집]

수메르-아카드의 미술[편집]

-美術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강의 사이'라는 의미로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끼어 있는 비옥한 충적층대(沖積層帶)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류 문화가 발생한 땅으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더불어 기원전 5000년에는 원시농경생활이 상류 지역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그러나 S. N. 크레마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라고 한 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메소포타미아에는 조직적인 도시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조형활동에 있어서 그들(메소포타미아인이라는 종족은 없고 수메르인이 그 트레거(하역자)로서 등장한다)의 미의식(美意識)이 뚜렷한 형태로서 표현되게 된 것은 수메르인에서 비롯하였다. 수메르인이 남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하지만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윤지(濕潤地)에 막대한 노동력을 모아서(여기서 원시 농경 촌락의 소수 인원으로부터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는 도시로 발전하였고, 제사 집행자가 대중을 지배하고 간척이나 개간사업을 진척시켰다) 키시·우루크·우루와 같은 도시를 이룩하였다. 도시 형성이 그대로 왕조나 지배자의 거주지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원전 2900년경부터 제2의 지배민족인 셈족의 사르곤왕이 아카드(Akkad) 왕국을 세워(기원전 2350) 기원전 2100년경에 고(古)바빌론 왕조가 성립한 시기를 초기왕조시대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초기왕조는 수메르인과 셈인이 세운 아카드 왕조를 포함하여 그들의 미술활동을 개관하고자 한다.

수메르-아카드의 건축[편집]

-建築 건축의 유구는 키시·우르·우루크 등 수메르인이 만든 도시가 있으나, 예컨대 키시 궁전의 예와 같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의 벽이 있고 중정(中庭)의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이 둘러져 있는 플랜과, 원주가 특별한 형(型)의 햇볕에 말린 벽돌로 되어 있다는 것, 벽에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조개껍질을 사용한 상감(象嵌)장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전 건축은 보통 주택의 플랜을 확대하고 호화롭게 한 것인데 직사각형인 중전의 한구석에 있는 소실(小室)에서 예배소로 통하는 가늘고 긴 형식으로 신좌(神座)·공양대(供養臺)·관전용(灌奠用)의 수반(水盤) 등을 설비하고 있다. 지상의 유적과 더불어 초기왕조를 대표하는 것은 우르의 왕묘인데 호화롭고 현란한 금과 부장품, 많은 공예 유품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묘실은 석회암의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해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들었고 그 기술의 진보는 후세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또 연와의 형식은 직사각형인 평평한 것으로부터 한편은 평평하지만 한편은 불룩한 철형(凸型)의 연와로 변하여 수메르인이 애호한 형식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아카드 시대의 제왕(諸王)은 외적의 토벌과 반란 진압에 쫓기어 건축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수메르-아카드의 조각[편집]

-彫刻 조각 유품에 대하여 수메르인의 조소 유품(遺品)은 적다. 남메소포타미아에는 석재가 나오지 않아서 석조(石彫)는 제작되지 않고 멀리서 가지고 온 석재로 만든 신상(神像) 내지는 왕의 육신 대신으로 신전에 놓여진 예배자상(禮拜者像)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조형 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그 기술 습득과 연마할 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카파제·텔·아스말·아슈르 등지에서 발굴된 조상(彫像)은 양손을 명치 부분에다 댄 직립상(直立像)으로 상감(象嵌)을 한 이상하게 큰 눈, 곱슬곱슬하고 긴 구레나룻을 단 것이 특색이다. 오히려 아카드 시대의 나람 신의 전승비나 사르곤왕의 두부라 일컫는 청동제의 우수한 작품 <마니스투수왕 입상(立像)>, <구데아 좌상(坐像)> 등 조소에 대한 관조와 조형 기법의 각 단계마다 진보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특히 인체의 사진적(寫眞的) 관조가 일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수메르-아카드의 공예[편집]

-工藝 공예유품은 우르 왕묘에서 출토된 유품에 의하여 그 당시 얼마나 공예 감각과 기술이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종류는 금공품(金工品=메스 카람두그의 儀式用 투구와 슈브 아드 왕비의 머리장식과 영락, 귀 장식 등이 대표작품), 패각 세공(貝殼細工=예컨대 軍旗의 측면에 象嵌技法으로 貝殼, 라피스 라스리, 赤色石灰岩을 사용하여 인물의 朝貢行列이나 歡樂遊飮圖 등이 표현된 예나, 리라·하프의 흉부의 모자이크 등이 대표적인 예)을 중심으로 단금(鍛金)·조금 주금(彫金鑄金)·금립 금선 세공(金粒金線細工) 등 모든 기술을 구사하여 우수한 공예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이 공예 감각은 메소포타미아 미술 가운데 일관하여 흘러서 건축 세부·조소·회화의 각 분야에서 살려져서 독특한 미술 작품을 창조해 갔다. 물론 초기왕조의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고졸기(古拙期)라 하여도 무방하여, 그후 앗시리아 미술의 고전기를 좋든 나쁘든 간에 준비하고 있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미술[편집]

古代-美術 바빌로니아 왕조시대의 미술은 함무라비왕이 도읍한 바빌론이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리브왕에 의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활동을 알아볼 작품을 잃었다. 오히려 남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가파제의 유적과 또 도시국가인 마리의 유품에서 그 시대의 미술을 더듬어보는 편이 편리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건축[편집]

古代-建築 건축 유적으로서 유프라테스 하반(河畔)의 우르와 중부 유프라테스 하반에 있는 도시국가인 마리를 들 수 있다. 우르의 도시 유적은 신전을 신역(神域)에 모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해 있는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 건축으로서는 닌갈 여신을 모신 신전이 주목되며, 240㎡의 부지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싼 경내에는 예배용 제단과 외정(外庭), 제사를 지내는 내진(內陣)과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한 신전과 소예배전 및 제사자(祭司者)의 주택 등이 격벽(隔壁)으로 구획되어 있고, 더구나 배수구와 포장한 바닥을 설치하여 수메르 신전 건축의 전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일반 주택은 무계획하게 세워져 규모와 방수도 일정치 않다. 발굴에 의하여 이층집의 주택과 빵집·요리점·대장간 등이 발견되었다. 마리의 도시 유적은 1933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그 후 조직적인 발굴로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도시계획은 지상 지배자 권위가 강화되었던 경향을 반영하여 신전 건축보다 궁전의 규모가 컸다.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실(室)로 되어 그 계획은 크레타의 라비린토스의 영향을 받아 미로(迷路)를 구성하고 있다.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은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2만4천장의 점토판(粘土板)을 소장한 도서관, 프레스코의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신전 건축에는 이스타르 신전, 닌쿠르사그 신전, 다곤 신전과 지구라트의 기단(基壇) 등이 있었는데 거의 함무라비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일반 주택도 안뜰을 둘러싼 가늘고 긴 방의 형식으로 혼잡하게 구성되어 그 자연발생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조각[편집]

古代-彫刻 조소(彫塑) 유품은 우르 출토의 <닌갈 여신 의상(倚像)>과 테라코타제(製)의 이슈타르신, 외눈박이인 괴물을 죽이는 신상 등 부조(浮彫)한 유품에서 특색을 볼 수 있다. <닌갈 여신 의상>은 환조(丸彫)인데 인간의 자태를 훌륭하게 포착한 모델링을 찾을 수 있고 두발이나 머리핀, 섬세한 케이프의 표현,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을 가슴에 잡은 조형 등 수메르시대에 비긴다면 각별한 진보를 엿볼 수 있다. 마리의 유적에서도 신이나 왕 그리고 제사계급(製司階級) 사람들을 환조한 조각과 청동제 사자, 부조의 여신상 등 일품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 다곤 신전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자의 상반신은 눈을 돌의 상감으로 하였고 치졸하나 억센 조형 가운데에 이 동물의 특징을 잘 포착한 조형이 인상적이다. 또 <풍요(豊饒) 여신 입상>의 석회암제 환조의 상은 자연에 가까운 프로포션과 사실(寫實)에 입각하여 표현된 온화한 표정 등이 주안점이 되고 있으며, 양손에 가진 앨비얼러스형 항아리는 그 속에서 대좌(台座) 밑의 구멍을 통하여 실제로 물을 뿜어낸 구조라고 생각되어 기술 기교가 진보한 양상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기원전 2000년경 왕위에 오른 함무라비가 만든(본디는 시파르에 세워졌으나 12세기 엘람왕(Elam 王) 쉬트루크나훈테에 의해 약탈당하여 수사로 옮겨지고 수사에서 출토되었다) 함무라비 법전(法典) 정상부의 태양신 샤마슈와 함무라비의 부조상으로 수사에서 출토된 섬록암제(閃綠岩製)의 함무라비왕의 두부(?) 등 유품이 있다. 구데아 모자를 쓴 채 표현되어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 왕의 조형은 뛰어난 것이다. 특히 함무라비왕 두부라고 전해지는 작품은 위엄과 풍격이 넘쳐 셈족풍(風)의 구레나룻과 표정에 노쇠한 그늘을 보여 날카로운 개성 묘사가 매력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회화 및 공예[편집]

古代-繪畵-工藝 이시대의 회화는 마리 왕국의 프레스코 벽화로서 대표된다. 마리왕 짐리림이 지모신(地母神) 이슈타르로부터 왕권을 수수(授受)하는 그림과 희생봉정도(犧牲奉呈圖) 등 측면 관조(觀照)를 주로 한 조형의 특색을 보여 주며 서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로서 의의가 크다. 이 외에 옹기의 채화(彩畵) 동물도 흥미가 있다. 공예품으로서는 테라코타 신상, 예배자의 상, 거기에 향로·술잔·접시 등의 제기(祭器)와 실린더실(圓筒印章) 등이 발견되고 있다.

앗시리아의 미술[편집]

-美術 서아시아에서 강대한 군사력과 피정복 민족에 대한 참혹·무참한 압정(壓政)으로 광대한 영토에 군림하여 세계제국의 양상을 가진 앗시리아는 기원전 9세기의 전반부터 기원전 6세기 후반까지 350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 지리적 조건과 정복한 영토와 민족이 다채로워 이집트·아나톨리아·시리아·서방(西方)이란의 특색 있는 문화미술을 흡수하여 대성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바빌로니아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미술 유산을 남기고 있다.

앗시리아의 건축[편집]

-建築 건축으로서는 앗시리아제국 역대의 왕들이 만든 아슈르·님루드(카라크)·두르 샤르루킨·니네베 등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산재한 도성(都城)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그 모습을 찾아 더듬어본다. 앗시리아의 발상지 아슈르는 아누·아다드 양신의 합사형식(合祀形式)의 신전과, 왕궁이 도성의 북부에 정비되어 왕권의 확대와 전정(專政)에 의한 신장(伸張)과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는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도성의 성벽은 유례없이 높이 솟고 두꺼워 기원전 706년 구축된 두르 샤르루킨성의 경우 두께가 28m에 이르고 있다. 군사 방위태세의 강화는 피압박 민족의 참혹한 취급에서 오는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도시 계획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성문에서 성문으로 가는 가로는 마치 골목처럼 만곡(灣曲)과 교차의 형식을 취하여 조망(眺望)을 방해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에는 북메소포타미아산(産)의 석재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가옥은 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내부 장식의 요벽(腰壁)이나 입구에 앨러배스터제(製)나 동석제(凍石製)로 부조한 화장판이 끼워져 있었다. 도성내의 일반 주택은 웅대·화려한 궁전과 신전에 비하여 빈약하고 검소한 것으로 천막생활까지 했다는 것을 카라크의 테메노스 부근의 발굴로 알려졌다. 귀족의 저택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방이 사방에 만들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복잡하게 짠 것이 궁전 건물이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세운 카라크의 테메노스 궁전은 사무를 취급하는 장소, 옥좌를 포함한 의식 알현(謁見)의 방, 거실 등 세 형식의 건축으로 나뉘어 있다. 이에 대해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의 궁전은 양간(陽乾) 연와를 중심으로 석재와 소성연와로 구축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구축되어 저택의 건축 형식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홀과 계단의 결합 형식과 중정(中庭)의 배치 등에 특색을 볼 수 있는 한편, 소아시아와 시리아 방면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궁전 형식인 비트 히라니 양식을 채용하였으며 그 후 앗시리아 건축 양식의 기본이 되었다. 신전 건축은 궁전 건축에 부속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측면 출입 양식의 지붕과 전실(前室) 다음에 깊숙한 내진(內陣)을 설치하여 거기에 벽감(壁龕)이 만들어져 있다. 성탑 지구라트는 4단 내지 6단의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탑을 쌓아올린 고탑형식(高塔形式)이 되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다.

앗시리아의 조각[편집]

-彫刻 앗시리아 미술에서 정수(精髓)는 조소(彫塑)의 유품이라 하겠다. 단독적인 환조(丸彫)의 상은 적지만 건축 내부의 요벽(腰壁)에 부조한 장식을 가득 메운 것이라든지 외문(外門)이나 내정 입구에 놓여진 유익인면사자상(有翼人面獅子像)의 수호신 등 뛰어난 유품이 많다. 님루드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아슈르 나시르 팔 2세 상>은 얼마 안 되는 앗시리아 환조의 상으로는 완벽한 유품인데 두부도 작고 육체를 관조(觀照)한 점도 미숙하지만 앗시리아인에 있어서는 왕자의 이상미(理想美)를 위엄에 넘치고 당당한 자태로써 발휘하였으며, 당시 왕자의 의장 풍속이 모조(毛彫)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고 또 명문(銘文)을 흉부에 전각(鐫刻)하고 있는 등 역사적인 자료의 가치도 많은 작품이다. 이러한 환조의 상에 대하여 이 시대에 부조한 유품은 우수한 기술로 세련된 조형 감각과 관조가 투철한 사실적(寫實的) 능력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다. 입구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전통은 오래 되었고, 아나톨리아 고원이나 시리아에서 그러하였다. 건물에 딸린 문 입구의 수호신의 표현 형식은 히타이트에서 시리아를 거쳐 들어온 영향의 자취라 생각된다. 그러나 앗시리아 유익인면수신(有翼人面獸身)의 수호신상은 조형 감각과 표현 형식의 고도한 예술성으로 히타이트 미술을 훨씬 능가하여 현저한 간격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인면(人面)에 깊이 팬 눈과 코, 그리고 왕관과 장식풍인 말린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등, 날개가 날카로운 끌로서 파낸 명쾌하게 의장화(意匠化)한 조형과 어울려 감상의 요점이 되고 있다. 조형상에서 재미있는 것은 유제류(有蹄類)의 다리 가운데 앞다리 세개를 표현하려 정면이나 측면으로 보아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어져 앗시리아인의 특유한 합리적인 관조가 작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수호신은 두르 샤르루킨 궁정 입구에서도 발견됐으나 이것은 더욱 조형 표현의 기교와 관조가 진전, 세부까지의 의장화나 추상성이 고도화하여 우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조형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시대로 계승되어서 페르세폴리스 왕궁에서도 그 유품을 찾아볼 수 있다. 부조의 유품에는 표현 형식과 주제를 다룬 방식으로 전·후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님루드 북서(北西)에 위치한 왕궁에서 출토된 종교 의식도(儀式圖)나 제전도(祭典圖)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된 구도이며 인간에게 이익과 풍요를 가지고 오는 성수(聖樹)가 운하의 물과 칠엽(七葉)의 파메트식(式)인 대추야자수(棗椰子樹)를 중심으로 하여서 의장화되어, 거기에 화분(花粉)을 수정(受精)하는 조두유익신상(鳥頭有翼神像)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좌우에 왕과 시종을 그린 예도 있다. 그에 대하여 님루드의 서북 궁전의 옥좌(玉座) 사이의 남쪽 벽에 있는 전투도(戰鬪圖)와 동물 수렵도의 부조는 연속 설화(說話) 표현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자는 벽면 가득히 큰 성수와 인물 및 신상을 상호(相互) 배치하여 장식의 의도(意圖)와 종교의식의 중대함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 대하여 수렵도나 전투도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동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전개해 나간다. 더욱이 수목과 하천의 세밀한 묘사와 성벽이나 배경 무대의 극명(克明)한 표현도 볼 수 있다. 아슈르바니 아플리 2세 때는 이들 전투도와 수렵도는 구성상 화면이 단절되지 않고 두루마리식의 전개를 보여 주며, 특히 때는 다르지만 같은 화면으로 엮은 설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니네베의 아슈르바니 아플리 궁전 S실(室)의 <사자 사냥>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이들 부조 화면의 특색은 인간의 근육과 자태의 정확한 조형, 세부에 이르기까지의 공예 감각이 넘치는 세밀한 표현, 그리고 동물의 형태와 표정까지 극명하고 박력있게 표현한 묘사력 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앗시리아 부조 미술은 고대 서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정점(頂點)을 차지하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고전 조각의 전형(典型)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앗시리아의 회화[편집]

-繪畵 회화 유품은 벽면의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며,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건립한 시리아의 텔 발시프 궁전의 벽화의 단편과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 옥좌 사이의 벽화 등이 유명하다. 앗시리아 공예의 대표적인 것은 상아 세공인데 시리아-이집트 양식을 답습한 작품으로 앗시리아 공예품이라 생각되는 유익신상(有翼神像)과 수렵도, 그리고 님루드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귀부인의 마스크와 침대 장식의 성수 등 뛰어난 작품이 있다. 또 채유연와(彩釉煉瓦)나 채유도기 따위와 청동제품과 글라스 기구 등 당시에 있어서 세계제국적(世界帝國的)인 성격을 보여, 여러 지방에서의 헌납품과 작가와 공예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의 미술[편집]

新-美術 앗시리아제국(帝國)의 말기, 막료의 한 사람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에서 기병(起兵), 그후 독립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와 패권을 다투어(기원전 626) 탄생한 것이 신바빌로니아 왕조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중심으로 약 70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함무라비왕 시대의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후계자로서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부흥시켰고, 셈족 최후의 왕조로서 미술사적 의의도 크다.

신바빌로니아의 건축[편집]

新-建築 건축 유적은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볼시파는 수도의 중심부에 나부·나나·신 세 신전과 지구라트를 세웠고 길은 기준에 정한 방향으로 닦았으며 사방 1.5km의 주위에 호(濠)를 파는 도시계획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앗시리아 도시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바빌론일 것이다. 플랜은 거의 4각형인데 중앙에 유프라테스강이 남북으로 뚫려 흐르고 그 왼편 강가, 즉 도시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최고신(最高神)인 마르두크 신전과 바벨탑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를 포함한 신역(神域)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왕궁과 부속된 요새(要塞) 건축은 북단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다. 왕궁은 중정(中庭)에 연속하는 구성으로 전체적인 플랜은 장방형이었다. 이 성채(城砦)의 동북 구석진 곳에 아치 천장을 가진 다수의 협소한 방이 있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 이래의 유명한 옥상정원(屋上庭園)의 하부구조라 생각되고 있다. 지구라트는 한 변이 90m, 높이 90m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마르두크 신전은 각각 80m와 85m의 규모이며, 특히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예배소의 호화로움으로 미루어 당시의 신전이 얼마나 웅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은 왕궁 앞에서 남북으로 마르두크 신전까지의 개선도로(凱旋道路)와 여기에 90도로 교차하는, 성역에서 나온 마르두크 가로는 주요한 도로로서 규칙 바른 형식이었다.

신바빌로니아의 조각[편집]

新-彫刻 조각의 유품은 마르두크·아파르·잇디냐의 경계석(境界石), 바빌론 출토인 인간을 밟고 선 사자의 미완성 석조 외에 채유연와(彩釉煉瓦) 부조가 대부분이다. 앗시리아 미술의 부조로 실내의 요벽(腰壁)을 장식한 것처럼 바빌론에서는 대로의 양측과 문·성벽을 이용하여 채유연와로써 로제트 무늬의 띠와 사자·황소, 마르두크신의 성수(聖獸)인 드래건(恐龍) 등을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짙은 벽청색(碧靑色)의 벽면에 제법 사실적(寫實的)인 조형 감각으로 포착한 걸어가는 동물을, 황색 신체에 적색의 갈기, 백색의 육신에 황색의 갈기라는 식으로 배색한 사자와 드래건을 표현하고 있다. 이슈타르 문(門)만 하여도 575마리의 동물이 행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와로 동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서아시아의 전통적 공예 수법의 하나로 모자이크 기법의 응용이라 여겨지나 이후의 3채유(彩釉)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의 공예[편집]

新-工藝 공예의 유품으로서 바빌론에서 출토된 청동제의 용수(龍首)와 벽옥(碧玉)이나 마노(瑪瑙)와 옥수(玉髓)를 비롯한 보석, 많은 원통인장(圓筒印章), 타원형의 스탬프 인장 등이 있다. 원통인장에는 종교의식을 표현한 것, 왕의 알현 광경과 시종들의 모습, 전투 장면 등이 엷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유연한 균제가 취해진 자태로 인간의 모습이나 동물을 포착하여 앗시리아 시대의 것보다 상당히 진보된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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