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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GK2016/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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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 촌 개요[편집]

중국 조선족 촌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조선인들이 조선에서 동북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농촌 마을이다. 주로 중국의 동북3성 지역과 하북성, 내몽골 자치구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중국내 조선족 인구의 90%이상이 조선족 촌에 거주했다. 

중국 조선족 촌의 형성[편집]

조선족은 과경(过境) 민족으로서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예이다. 이들은 중국으로 이주한 후 곳곳에 마을을 형성하여 집단으로 거주해 왔다. 

조선족 촌의 역사[편집]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이후부터이며 청나라가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지역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1881년)한 이후부터 본격화됐다. 봉금령이 해제됨에 따라 조선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청나라는 연변일대에서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과 조선인 전문 개간지역을 설치함으로써 조선인의 이주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조선인의 이주가 활발해지고 마을이 형성됨에 따라 청나라는 1890년에 두만강북안에 ‘4보(堡) 39사(社)’를 설치해 조선인 이주민과 조선인마을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였다.연변지역의 경우, 1890년대에 두만강 이북에서 해란강 이남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상당한 정도의 조선인 마을이 형성됐다. 중국 이주 초기인 1880년대의 조선인은 주로 두만강변에 위치한 회령, 종성, 온성, 경성, 경원 등 소위 6진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과무산 등 주변지역 사람들이 강 건너 맞은편에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1890년대에 이르러서는 6진 이남 지역 즉, 명천, 길주, 단천 등지의 조선인들도 이주 대열에 합류했다. 마을의 규모는 두만강 상류의 산간지역의 경우는 20여 호 정도로, 중하류의 평야지역은 50여 호 정도로 이루어졌다.1900년대 들어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한반도에서 중국으로의 이주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 초기의 생계형 농업이주에서 점차 독립운동을 하거나 망명을하는 등 정치이민의 형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이주의 규모도 커지고 이주하는 사람들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이주민들은 개인 혹은 가계별 이주에서 친척, 친지 및 지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주 지역 역시 두만강과압록강 가까이에 정착하던 데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확대됐다. 특히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국을 세우고 조선인 이주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하면서 중국동북지역 전역에 상당수의 조선인이 거주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조선인 마을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현재 조선족마을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형성된 마을들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다. 조선족마을이 형성된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항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조선인이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해 자리 잡은 것이 기반이 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1]

중국 조선족 촌 분포[편집]

길림성 지역[편집]

흑룡강성 지역[편집]

요녕성 지역[편집]

내몽골 지역[편집]

내몽골 자치구 조선족 촌 리스트
현/구 향/진
후룬베이얼시 아영기 신발조선족향 신발촌 新发朝鲜族乡新发村
동광촌 新发朝鲜族乡东光村
고선촌 靠鲜村
모리다와기 莫力达瓦旗 한고얼진 汉古尔镇 조선촌 朝鲜村
박영향 博荣乡 경풍촌 庆丰村
흥인향 兴仁乡 박커도촌 博克图村
짜란툰시 고태자 판사처 선광촌 呼伦贝尔市扎兰屯市高台子办事处鲜光村
칭키스칸진 成吉思汗镇 홍광촌 红光村
흥안맹 울란호트시 울란하다진 삼합촌 兴安盟乌兰浩特市乌兰哈达镇三合村
고성촌 古城村
과우전기 科右前旗 파달잉귀향 巴达仍贵乡 금강촌 金刚村
철리목맹 哲里木盟 통료시 通辽市 대한향 大罕乡 선광촌 鲜光村
과좌후기 科左后旗 금보툰진 金宝屯镇 량가자촌 两家子村

하북성 지역[편집]

중국 조선족 촌 연대기[편집]

조선족 촌의 형성 (19세기 중후반 ~ 1945년)[편집]

토지개혁과 호조조 (1946~1950)[편집]

토지개혁: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의 소유로 하는 정책.

1945년 8.15광복후, 중국민주혁명의 기본문제는 농민문제로서 농민문제의 실질은 토지문제였다. 연변의 조선족농민들은 봉건 토지소유제에서 벗어나 자기의 땅이 있게 되였다. 이것은 조선족 농민들이 신세를 고치고 해방되는데 필요한 조건으로 되였으며 연변 조선족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의거로 되였다.

1946년부터 1948년 4월까지, 연변 각지의 조선족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통하여 기타 다른 민족과 함께 지역의 경작지 면적의 다소에 따라 “인구 표준에 근거” 하여 성별과 년령을 가리지 않고 부동한 면적의 땅을 분배 받았다. 가난한 조선족 농민들은 지주, 부농의 손에서 부동한 수량의 집과 성축, 농기구, 양식, 옷가지 등을 분여 받았다. 잇따라 1948년 6월 1일 동북 행정위원회에서 반포한 “토지집조반포명령”에 따라 땅을 분여 받은 조선족 농민들은 민주정부에서 내여준 “토지집조”를 발급받았다. 하여 조선족 농민들의 오랜 숙망이였던 토지소유권을 가지게 되였으며 “땅은 밭을 가는 자의 것”이라는 꿈을 실현하게 되였다. 이것은 역사가 조선족에게 부여한 대사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족들은 나라의 주인이 된 신분으로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각 항 사회 민주개혁에 참가하였으며 민주정권 건설에 가담했다. 그리고 분여 받은 땅을 보호하기 위하여 참군하였으며 전선을 지원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에 뛰여난 기여를 했다.

연변에서 농촌호조합작운동의 흥기는 농업합작화실현의 서막을 열어 놓았다. 1946년 7월부터 1948년 4월 사이에 토지개혁을 거친 연변 각지 농촌들에서는 자기의 신근한 힘으로 치부하도록 많은 농민들의 생산열성을 불러 일으켯다. 그러나 부림짐승, 농기구 등 생산수단의 결여되다보니 적지 않은 농민들이 자립적인 생산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지어는 땅을 팔아버리고 소작농으로 나서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때는 마침 해방전쟁시기여서 농민들이 용약 참군, 참전하는데다가 대량의 부림짐승으로 전선을 지원하다나니 후방의 인력과 축력이 매우 딸리였다. 

이에 당시 광범한 농민들은 호조합작의 길로 나갈것을 적극 요구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농민들의 개체경제와 호조합작 이 두가지 생산열성을 동원시키는데 주의를 돌리고 가난한 농민들을 조직하여 농업호조합작운동을 진행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947년에 연길현 영성촌의 김시룡, 연길시 신풍촌의 최죽송등이 년간호조조를 무었다. 이에 광범한 농민들은 당의 호소에 적극 호응하여 그들을  본보기로 삼고 자원호혜의 원칙하에 인차 여러가지 형식으로 호조조를 조직하였다.

그때 연변 각지 농촌들에서는 보편적으로 소겨리호조조, 계절성호조조, 년간호조조를 주요한 형식으로 하는 호조조를 조직했으며 따라서 농업생산을 재빨리 복구하고 발전시켰다. 생산수단이 결여된 모순을 해결하는데 취지를 둔 소겨리호조조는 부림짐승과 농기구를 집중시키고 인력의 품으로 부림짐승의 품을 바꾸는 호조조였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 일손을 도와주고 품앗이를 하는 계절성호조조는 소겨리호조조보다 인력, 축력, 농기구 등을 보다 쉽사리 조절할수 있어 그 우월성이 비교적 뚜렷하였다. 연길시 농촌들에서는 자원호혜의 기초에서 1947년에 흥안향 발전촌의 군인가족 리옥금의 품앗이조(서로 일손을 바꾸는 형식)경험을 널리 보급하여 몇호, 십여호의 가구들에서 서로 손 잡고 일손을 도와주며 품앗이를 하는 소형호조조를 보편적으로 조직하였다. 1950년에 이르러 전 연변적으로 이런 호조조가 3,262개나 조직되였다.

년간호조조는 계절성호조조로부터 넘어온 호조조로서 그 규모가 비교적 크고 농한기든 농번기든 인력과  축력을 집중하여 품앗이를 하며 집단적인 부업을 조직하고 그 로동능률도 비교적 높기 때문에 계절성호조조보다 우월성이 비교적 뚜렷하였다. 1950년에 이르러서는 전 연변의 호조조가 14,065개로 발전하였는데 그중 년간호조조가 10, 803개로서 총 호조조수의 76.8%를 차지하였다. 호조조에 참가한 가구는 농민 총 가구의 52,64%를 차지하고 호조조의 경작지는 총 경작지 면적의 47,99%를차지하였다. 호조조의 출현은 농업생산의 복구와 발전을 다그치고 농사를 알뜰하게 짓도록 담보한데서 알곡산량이 해마다 높아졌다. 

사회주의적개조는 자원적이로 호상 리익을 돌보며 호조조로부터 초급농업합작사, 고급농업합작사로 넘어가는 절차와 형식으로 농민들을 사유제에서 벗어나 집체화의 길로 나가도록 이끄는 것이였다.

현아래에 구를 위주로 농민들의 농업생산형태는 개인을 위주로하는 호도거리가 위주였고 그 외에 로동력이 부족하거나 자체로 농사하기 힘든 로약자들이 있는 가정들은 서로 호조조를 무어 서로 도와주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때 사람들의 생산열정은 전례없이 높았으며 생산량도 날로 높아 갔다. 연변에서 농업호조조는 전국에서 제일 일찍이 진행되였으며 전국에로 보급되여 나가다. 연변이 경험을 기초로 1950년, 당중앙에서는 <<자원량리, 호조합작, 생산발전, 증산전약>>의 방침을 제기하였다. 조선족농민들은 이 방침을 받아 들이고 처음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5-6세대씩, 많아서 10세대씩 조직되였는데 1951년에 흑룡강녕안현발해진 강서촌에서 강병조가 호호조를 건립하였다.

1949년 봄에 길림성장백현내 4,100세대이 농민들로 840여개 호조조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전현 농민세대수의 51.7%를 차지하였으며 량곡생산이 1,080,5만 킬로그람에 달하여 통화지구의 첫째로 되였다. 장백현 마구촌의 최병구가 조직한 호조조는 대부분이 빈곤한 농민들이였지만 온갖 곤난을 전승하고 풍작을 거두어 구와 현의 표창장려를 받았으며 현의 호조합작화운동을 밀고나가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강촌의 박창도가 조직한 장기호조조는 림시 호조조거나 계절성호조조보다 수확고를 높이여 구화 현의 표창을 받았다.

연변지역의 조선족농민들은 자원호리의 원칙하에 신속히 조직하여 일떠나 농업합작화의 길로 나갔다. 농촌의 농업합작화 운동이 부단히 심입되고 애국풍산운동, 증산절약운동이 심입 됨에 따라 연변농업생산은  재빨리 회복발전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농민들에게 과학적으로 농사지을것을 선전하였으며 농업기술을 보급하였다. 보편적으로 종자를 고르고 소독과 발아시험을 하게 하였으며 직파로부터 육묘를 제창하여 모내기를 하게 하였다. 합리한 밀식을 제창하였으며 논밭관리를  잘하는 새로운 영농법을 제창하여 농민들에게 새로운 영농법을 가르치였다.

연길시장백향신풍촌의 벼전문가 농민 최죽송은 1947년 호조조가 성립된 이래 농민들을 조직하여 벼증산과학실험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는 락후한 경작방법을 개변시키기 위하여 종자, 육묘, 밀식과 전간관리에 중시를 돌리여 한쌍에 1000근으로부터 1947년에는 2,520근,1948년에는 3,500근에 도달했다. 1950년에는 한육묘재배법에 성공하여 한쌍에 6,000근을 생산하였다.1952년에는 종합육묘재배법에 성공하여 7,857근을 생산하여 력사이래 벼생산량의 최고기록을 돌파하였다.

초급합작사 시기 (1953~1954)[편집]

고급합작사 시기 (1958)[편집]

인민공사와 문화대혁명 (1966~1978)[편집]

호도거리와 가정 도거리 책임제 ( 1980)[편집]

중한수교 (1992)[편집]

현대의 조선족 농촌 (2000년대 초반~현재)  [편집]

특색 촌[편집]

길림성 지역[편집]

흑룡강성 지역[편집]

녕안시 발해진 강서촌[편집]

요녕성 지역[편집]

기타 지역[편집]

생활문화[편집]

주거문화[편집]

농촌에 사는 연변 조선족들은 예외 없이 정지간을 가운데 둔 '함경도식' 주거를 짓고 산다. 이러한 현상은 연변의 조선족이 대부분 함경도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후예라는 사실로 부분적으로 설명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전라도 이주민들이나 경상도 이주민들이 많은 지역에서도 역시 '함경도식' 주거에서 살기는 마찬가지다. 이주초기 고향에서 짓던 방식으로 집을 짓기도 했는데 동북지역의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해 '함경도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연변에서 북쪽으로 멀어 지면 한족 주거 처럼 중앙에 벽으로 구획된 복도를 두고, 정지간을 둔 절충식 주거도 상당히 많다.

연변지역 조선족 주거 형태_실내

문화예술[편집]

문화예술 잡지[편집]

  • "연변문예": 1951년 6월부터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발행한 "연변문학" 잡지의 옛 명칭.

1974년~1984년까지 "연변문예"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연변문예 표지 이미지 1974~1984

문헌자료 [편집]

  1. 곽승지 (2013.02.28).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인간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