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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편집]

  • 참고자료

(출처:http://100.naver.com/100.nhn?docid=123386) Seyoung1998 (토론)

6.25 전쟁[편집]

1950년6월25일새벽4시경 북한의불법남침에 전쟁의시작됐고 금방서울점령 하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함 이에대해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은 부산항에도착하기전에 우리나라는낙동강으로부터 약1.5km정도쯤 앞 다부동전선에서크게 싸운다 후퇴한국군은 빨리 학생을 모집해서 학도병을 많든다

낙동강전선에서 겨우 막고 9월15일 un의 인천상륙작전 이작전은 중요한 작전이였다 적 북한으로부터 보급로를 차단했다 우리나라국군은 빨리서울쪽으로 밀고올라가고 빠른시일에 서울을 점령함 38도선에오자 미군과우리나라군은 갈등을함 미군은더북진하면안됀다 국군은 북진하자 결국북진해서 압록강까지왔다 크리스마스 1950년12월25일 그곳에서미군은 칠면조를먹으며 크리스마스를지냈다 전쟁은 우리의승으로 끝날듯했다 중공군이참전을발표함 남한에전세가밀림1.4후퇘를함 1951년1월4일의후퇘 그중유명한후퇘는 흥남부두철수다 무기를전쟁에서버린다는것은 나죽겠소라고하는것이다 이에도불구하고 시민을태우고철수함 그리고 다음유명한것은 개마공원전투다 개마공원전투는 양쪽다 중요한곳이였다 그곳을차지하면 이길수있다고생각하였다 하지만계속밀고후퇴하고를반복하다1953년7월 어느평화로운마을에38선이생김 으로전쟁은지금까지쉬고있다  (참고),(참전한나라21개국)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5일 (목) 14:27 (KST)(서민원)

6.25때썼던총-UN군,대한민국-M1GARAND,M1CARBIN,M3그리스건,스프링필드,M1A1톰슨등등 - 중공,북한군-모신나강,PPSH43,41-강병준125.241.107.106 (토론) 2010년 7월 15일 (목) 14:30 (KST)

6.25 전쟁의 원인


구 소련이 한반도를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기 위한 행동을 취하자

그와 대립되는 체재를 가진 미국이 한반도를 구 소련에게 내주게 되면 일본은 물론 아시아와

본국에 큰 위협이 될거라는 전재하에 개입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체재로 인한

갈등이 2개의 강국을 통해 전쟁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었음.


6.25전쟁의 결과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11890510&qb=Ni4yNeyghOyfgQ==&enc=utf8&section=kin&rank=1&sort=0&spq=0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4시에 북한 탱크가 남한으로 침범을 하였다 1950년 9월 25일에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하였고 휴전은 1953년 7월에 하였다 틀:임우재

출처-내머리

4.19 혁명[편집]

4.19혁명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1960년 4월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정부ㆍ반부정 항쟁을 말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투표함을 바꿔치는 등의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하였다. 이에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일어나 집회에 참여하고, 대학의 교수들까지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장면 내각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약 10개월 후 박정희의 5ㆍ16 군사 정변이 일어나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는 바람에 4ㆍ19는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다. 아직도그기역이생생한사람도있다. 피해도심했다~~서민원~~

  •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고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4.11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 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60.4.18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출처 :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02&docId=104

5.18 민주화 운동[편집]

.18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전두환등의 신군부가 최규하 과도 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대통령 시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하면서 군부의 권력을 장악한 12·12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한 수만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이 후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준거가 된 이 사건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되었다.

1995년에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당시 신군부세력이였던 전두환, 노태우는 95년 구속되었으나 97년 사면되었고 98년 복권되었다.

출처 :http://terms.naver.com/item.nhn?dirId=704&docId=115

요약: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본문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시해됨으로써(79. 10. 26) 대통령 대행체제가 되고 한 동안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신군부세력(전두환, 노태우 등)이 제2군사 쿠데타를 일으켜(12·12 사태), 순식간에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권을 장악하였다. 또 다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였다.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헌정이 정지되고, 민주정치 지도자 투옥 등 군사독재가 재발하자 국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달하여, 국민의 저항은 전국적으로 지속 확산되어 갔다. 그 동안 불만이 쌓인 전국의 학생 연대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기회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역시 비상계엄군이 각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다. 이에 울분한 전남대학교 학생과 비상계엄군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이 속출하자, '계엄철폐' '휴교령철폐'를 외치며 중심 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다(80. 5. 18).

계엄군과 공수부대원들은 시위 학생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여 죽는 학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추격하던 군인들은 드디어 민간인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주민들은 피하는 학생들을 감추어주고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다가 민간인 부녀자도 사살당하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광주시 외곽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으나,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하여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지키고 있어서 피신과정에서 체포 또는 사살당하였다.

이에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합세하여 저항이 더욱 거세졌고, 일부 학생들은 도청(道廳)을 점거하고, 경찰서 등에서 총기를 탈취하여 저항하였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규군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고,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종용하여 무장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계속되었다.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까지 무차별 살상이 이어졌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의 현장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 시내를 탈출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 비극의 사실이 전해졌다. 처음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처럼 전해지면서, 북한 무장 간첩이 침투하여 저지른 만행이라고 소문나기도 했으나 드디어 3일째 되는 날부터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그 잔혹상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드디어 10일째 되는 5월 27일 대규모 진압군이 투입되어 도청을 탈환함으로써 수많은 시체가 쌓인 가운데 시위는 진압되었다.

진행과정 10일 간의 시민항쟁 주요 사건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다.

5월 17일(토) : 비상계엄 전국확대. 학생운동 지도부 검속. 광주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5월 18일(일) : 전남대생 50여 명 등교 저지. "계엄해제" "휴교령 철폐" 시위. 공수부대원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학생들 금남로로 이동 시작.

5월 19일(월) : 11여단 병력 증파.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파출소 방화. 공수부대 원들과 투석전 전개.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시위 진압 완화 건의.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학생 김영찬군이 계엄군 총에 부상.

5월 20일(화) : 고등학교 휴교조치. 가톨릭센터 앞 남녀 30여 명이 속옷채로 구타당함. 공수 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 차량시위. 시위대 버스에 경찰 4명 사망. 광주MBC건물 방화.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수) : 시외전화 두절. 시체 2구 싣고 금남로에 등장. 광주KBS건물 방화. 시위대 20사단 병력과 충돌. 공수부대원 전진 배치. 광주세무서 전소. 대형헬기 도 청 도착. 시위대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공수부대 사격 시작. 청년들 공수부대 집중사격으로 계속 쓰러짐. 헬기에서 도지사 시위해산 종용 방송. 시민들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시민들 탄약고에서 TNT 입수. 공수부대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에 조준사격. 외지에서 온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로 철수.

5월 22일(목)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출혈자를 위해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도청 옥상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수습대책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 수습안 전달.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결과 보고.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박충훈(朴忠勳) 신임국무총리 '광주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금)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시민 5만여 명 도청광장 집회.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작업 시작.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 시내전역에 살포.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토) : 공수부대원,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 사격.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일) : 김수환 (金壽煥) 추기경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원 전달.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 만장일치 채택.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공급, 청소문제 등 논의.

5월 26일(월) : 계엄군,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 귀가시킴. 시내전화 일체 두절.

5월 27일(화)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가두방송. 금남로에서 시가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 시민군에 무차별 사격. 계엄군, 도청과 시내전역 장악, 진압작전 종료.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시내전화 통화 재개.

사후 처리 5·18 광주 학생-시민운동에서의 희생은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그 희생은 6·25 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그 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 책임자 처리 등 사후처리에 대한 시민의 요구가 이어졌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5·18 진상 규명, 학살책임자 규명, 배후세력 규명 요구 -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미국 지목, 미문화원 방화 사건 - 6월항쟁 폭발(1987) - 6·29 민주화선언(1987)(군사독재 국민에 굴복) - 제6공화국 탄생(대통령 직선제) -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구성(1988). 광주청문회 실시. 광주민중항쟁을 '5·18 민주화운동'으로 규정. 책임자 처벌 요구 -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출처:http://100.naver.com/100.nhn?docid=245095)

6월 민주 항쟁[편집]

요약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주화시위.

본문

6월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이라고도 한다. 그 해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였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날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두환정권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6월항쟁은 전두환정권의 권위주의적 권력유지를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으로 저지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직선제 이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출처:http://100.naver.com/100.nhn?docid=35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