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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Dakoyaki0831/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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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육군

일본육군은 러일전쟁에서 백거대(白襷隊)라고 하는 결사단을 임시로 편성한적이있다. 이것은 죽음을 임무로하는것이 아니라, 그저 죽을 각오를 하여 임무를 완수한다라는 것이였다. 제2차세계대전말기에 조직적인 특공대가 등장하기 시작하기 전부터 자발적인 자폭공격이 현장에서 행해진적이있다 1944년 4월14일 안다만제도로 향하는 육군수송선을 호위하던 비행기가 미국 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3기를 발견.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어뢰에 돌진하여 전사하고 어뢰파괴에 성공했다. 1944년 8월20일 미육군항공군인 B-29폭격기에 의한 야하타(八幡)공습에서는 요격하러 나온 비행기가 폭격기에 몸통박치기를 하여 공중폭발 추락시켯다. 또 파편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폭격기도 함께 추락하여 B-29 2기를 격추하였다

1943년에는 현장에서 특공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하는 자가 나타낫고, 1943년3월초순에는 라바울의 비행부대에서는 방탄장비를 갖춘B-17폭격기는 탄알만으로 격추할수없기 때문에 몸통박치기 공격이 필요, 몸통박치기 공격을 해야한다고 현지의 상급부대 사령부에 알렸지만, 거부당했다. 같은년 11월 9일 버마(=미얀마)에서 중폭격기부대의 중대장이 기체에 500kg폭탄을 장비해서 조직적으로 몸통박치기공격을 계획해야한다 라고 일기에 기록한적도 있다.

1944년 5월 하순 비행 제5전대에서는 단독적으로 비아크섬에 폭탄을 장착한 4기의 비행기를 보내 적함선에 자폭공격을 가했다. 또 현지에서는 비행기가 폭탄을 투하 하기전에 공격을 받아 추락하게 될시 비행기가 몸통박치기 공격을 할수있도록 개량하였다.

육군중앙에서는 1944년 초부터 조직적인 항공특공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주로 선박에 대한 몸통박치기에 대한것으로 봄에는 재료,연구에도 착수했다. 1944년 3월 28일 육군항공본부에는 특공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내각총리대신을 경질하였다.그 후 특공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마리아나해전에서 패배한 6월 25일 원사회의가 열였다. 거기서는 「육군,해군 둘다 특수한 병기를 고안해내서 그것을 사용해서 전쟁을 해야한다. 전황이 이렇게 된 이상 항공기,군함,잠수함모두 특수한 것을 고안하고 신속하게 사용할것을 요한다」라고 발언이 있었다.이 발언에 대해서 도조 히데키는 이미 고안중이다 라고 대답을하였다.

1944년 9월 28일 육군본부의 각료회의에서 「이제 항공 특공 이외에는 이길 방법이없다, 항공본부는 서둘러 특공대를 편성해 특공을 단행할것」라는 결론이 나왓고 후에 필리핀에서 특공이 행해졋다.

1944년말 오키나와전에서도 많은 항공기가 특공에 이용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전 부대가 특공화되었다

일본해군

러일전쟁때부터 죽을 각오로 싸운다라는 사상은 있었지만 당시 최고지휘관은 공격후 생환할 방법을 강구해서 계획, 명령한것이고 자폭공격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시작점에서 갑표적(甲標的)부대가 특별공격대로 지명받았다. 갑표적은 일본에서 개발한 소형 잠수함으로 적에게 다가가 어뢰를 발사하는것을 목적으로한다. 이 작전에서는 갑표적은 어뢰발사후 다시 귀환하는것을 목표로했지만 사실상 갑표적은 자력으로 귀환하는것은 거의 불가능이였고, 실제로 작전수행후 돌아온 갑표적은 하나도없었다.

수중 특공

1943년말 갑표적 탑승원이 인간어뢰를 구상하여 혈서를 냈지만 12월28일 군부총장은 이것을 거부하였으나,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2월26일 처음으로 특공병기로써 인간어뢰의 시작이 결정됫다. 처음에는 탑승원이 도중에 탈출하는것을 조건으로 했지만 해군은 여기서부터 특공으로 움직임이 시작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