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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편집]

본명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리(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이다. 생애는 1809년 3월 20일에 태어나 1852년 2월 21일에 숨을 거뒀다. 

고골의 그로테스크 성향[편집]

그로테스크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유머스러움과 공포스러움의 중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그로테스크의 전형적 인물 고골 고골의 성향은 그로테스크적이다. 고골의 이름에서도 이러한 그로테스크적인 모습을 보인다. Гоголь이라는 러시아어에서 맨 끝에 붙는 먀흐끼즈낙이라는 ь 단어 때문에 한국어로 고골이라고 발음하기에도 고골리라고 발음하기에도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로테스크 문학의 정점에 이른 작가는 에드가 알란 포우이다. 포우는 정신병자이다. 그의 작품 『검은 고양이』, 『어셔가의 몰락』을 보면 확연히 그러한 성향을 알 수 있다. 고골 또한 그로테스크 문학의 주자라고 할 수 있다. 고골의 작품은 표면적인 내용만 보면 유머러스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하면 미궁에 빠진다. 2)작품 『감찰관』에서 나타나는 그로테스크 감찰관의 내용은 요약해보자면 이렇다. 어느 시골에 부패한 지주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감찰관이 시찰을 나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감찰관』의 주인공이 이 마을에 등장하게 된다. 주인공은 여행자인데, 여관에서 머물고 있으나 돈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심지어 밥을 사먹을 돈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식당에서 주인공은 배가 고파서 주위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주인공의 눈빛은 굶주린 날카로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눈빛을 본 주위 사람들은 주인공을 감찰관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눈치가 빨라서, 그런 오해를 이용한다. 그러고 도망치는데, 그가 도망치기 전 친구에게 이 마을의 해프닝에 관한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우체국장의 검열에서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벙찐 상태로 작품이 끝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연극으로 시연할 때 고골은 이 마지막 장면의 마을사람들의 상태를 1분 30초 동안 정지된 모습으로 보여길 원했다고 한다. 이 부분이 그로테스크 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유머러스한 내용이지만 실상 1분 30초 동안 이런 타락한 사람들의 벙찐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이켜 보라는 것이 고골의 의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고골의 신비적 성향[편집]

  • 신비적 성향의 원인

모든 인간은 부모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고골의 신비적 성향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역시 부모일 것이다. 고골의 아버지는 바실리이다. 바실리는 우크라이나 카작인의 피가 섞인 귀족이다. 그러나 높은 귀족은 아니었다. 바실리는 연극적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연극의 대본을 쓰고 직접 배우와 연출까지 하곤 했다. 이 아버지의 성향은 고골이 문학인을 걷게 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마리아이다. 마리아는 고위 귀족 가문이었다. 그녀는 광적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충분히 고골을 문학인으로 만들고, 또한 광신앙적인 어머니는 고골의 신비적 성향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신비적 성향의 결과

고골의 신비적 성향은 독특한 작품을 만드는 원천이다. 특히, 고골의 유명작인 『페테르부르크이야기』는 여타 다른 소설들과 독특한 환상적인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죽은 혼』이라는 작품도 그의 신비적 성향의 대표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신비성은 고골에게 정신적 고뇌를 안겨줬고, 그는 정신적 고뇌를 이겨내지 못하고 『죽은 혼』2부 원고를 소각해버리고, 우울증에 빠져 단식하다 생을 마감한다. 비록 그의 신비적 성향은 그의 파멸을 야기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신비적 성향으로 인해 세계 문학에서 유래할 수 없는 환상적인 작품이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생애[편집]

니콜라이 고골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벨리끼 소로친쯔이라는 지방에서 태어난다. 고골의 아버지인 바실리는 우크라이나 카작의 혼혈인 귀족이었다. 고골의 아버지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지위가 높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바실리는 희곡 대본을 작성하고 본인이 배우들과 연출을 같이하기도 하는 예술적 기질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광신도였다. 이러한 부모의 배경은 고골의 예술적 재능을 자극하고 발전시킬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고골은 키예프에 네진 시의 김나지움에서 진보적 교육을 받았다.(1821~1828) 학교를 졸업하고 고골은 페테르부르크로 상경했다. 처음 고골은 알로프라는 가명을 가지고 시인으로 데뷔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했으며, 그가 발행한 모든 시집을 다시 사들여 소각하였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 러시아를 떠나 독일에 이르렀을 무렵, 마음이 바뀌어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는 1831년까지 하급관리, 연극배우 등 여러 일을 한다. 풍문으로는 고골은 배우로 일할 때 여장을 많이 했다곤 한다. 1831년 그는 푸쉬킨을 알게 된다. 푸쉬킨은 고골의 문학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우크라이나에 관련된 민화를 모은 《지간까 부근 농가에서의 밤》(1부 1831, 2부 1832) 또한 푸쉬킨의 격려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 작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기세를 몰아 고골은 1834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학부 조교수직까지 맡게 된다. 그러나 교직생활은 본인의 천직이 아님을 깨닫고 1835년 학교를 나와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 후 《미르고로드》, 《아라베스끄》 등 여러 작품들을 출간하며, 작품의 완숙기에 이르르게 된다. 그는 단순히 춥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1848년 러시아로 귀국하기 전까지 이탈리아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이어 나갔다. 여러 고골의 유명한 작품들이 있었지만, 그의 일생이 황혼으로 가고 있음을 알리는 작품은 《죽은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종교적, 신비적 성향을 크게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정신적 고뇌에 빠지게 만들었고, 정신적 고뇌는 절망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고골은 《죽은혼》 2부를 쓰다가 절망에 빠져 원고를 소각해버리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단식을 하다가 1852년 2월 21일에 모스크바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시신은 다닐로프스키 수도원이 거둬갔다가, 고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노보제비치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주요작품[편집]

  • 《간스 꾸헬가르쩬》(1829)
  • 《지간까 부근 농가에서의 밤》(1부 1831, 2부 1832)
  • 《미르고로드》(1835)
  • 《아라베스끄》(1835)
  • 《코》(1836)
  • 《마차》(1836)
  • 《검찰관》(1836)
  • 《죽은혼》 (1부 1842, 2부 일부 1855)
  • 《외투》, 《결혼》, 《도박사》 (『작품집』에 묶어서 출간 1842)
  • 《‘검찰관’의 이해를 위한 열쇠》(1846)
  • 《친구와의 편지교환선》(1847)
  • 《작가의 고백》(1847)
  • 《종교 전례에 관한 고찰》(1852)
  • 《전작 전집》(총 14권, 1937~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