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19668/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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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20년[편집]

초등학교 시절[편집]

태권도하는 사람들의 모습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전반적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ADHD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수업 시간 교실 안을 계속 돌아다닌 것이다. 내가 그 시절 왜 그렇게 돌아다니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려서 그랬던 걸로 생각하고 있다. 담임 선생님께서 어머니께도 이 이야기를 하셔서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걱정을 많아 하시기는 하였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면서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태권도, 피아노, 바둑 등 다양한 것들을 배웠었다. 그중 태권도는 가장 오랫동안 다녀었었는데 거기서 나의 기초체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태권도장에서 태권도만이 아니라 다같이 피구와 같은 운동도 하고 영화를 보는 등의 여러 다양한 활동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태권도장만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하여 피아노 학원도 다니게 되었다. 피아노 치는 법을 거기서 배우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첫 번째로 학원 땡땡이를 친 것이 피아노 학원이었다. 물론 그날 저녁에 어머니에게 매우 혼났다. 그 이후로는 학원을 무단으로 빠진 적이 없다.

중학교 시절[편집]

보성 녹차밭

중학교 때는 수업을 정말 열심히 들었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모범생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한번은 1학년 수학 시험이 엄청 어렵게 나와서 평균이 50점대였지만 하나 틀렸거나 다 맞아서 1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중학교 때는 형이 간 현대청운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어쩌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수학 학원, 영어 학원 등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녔었다. 그래서 학원에서의 추억도 학교에 못지 않게 남아있는 것 같다. 공부뿐만 아니라 축구를 정말 열심히 했었다. 축구를 정말 좋아해서 점심시간마다 밥을 빨리 먹고 친구들과 축구하고 또 체육 수업의 자유 시간마다 축구를 하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고등학생이었던 형을 제외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자주 다녔다. 아빠가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서울로 가서 구경하기도 하고 전라도에 있는 보성 녹차밭, 순천만 공원 등을 구경하는 등 평생 기억에 남을 좋은 추억을 쌓았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까지 여행도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현대청운고등학교에 지원을 하였다. 나의 쌍둥이 여동생도 함께 지원을 해서 같이 자소서를 작성하였고 1차 시험을 합격하였고 2차 시험인 면접도 함께 준비했었다. 나는 결국 최종 합격을 하였지만 아쉽게도 내 쌍둥이 여동생을 불합격을 하여 다른 고등학교로 가게 되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들

고등학교 시절[편집]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현대청운고등학교로 기숙사 고등학교였다. 이때까지 집에서만 살았던 내게는 큰 변화였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과 같은 기숙사, 같은 방을 쓰는 것이었다. 확실히 기숙사 생활을 달랐다. 항상 같이 생활하다보니 정말 끈끈한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부모님의 직접적인 통제 없이 생활을 하여 자유로움에 눈을 뜨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가지 않았던 피씨방, 노래방, 당구장 등을 가면서 친구들과 더욱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1학년 때는 첫 여자친구를 사귀면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었다. 그렇게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노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선배들의 수능이 차례차례 끝나가고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점점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학년 때는 막연하게 경찰대를 가고 싶다고 생각을 하였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로 목표를 바꾸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사관학교에 대비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사를 공부해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에서 중급을 따고 체력 단련을 하는 등 열심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1차 시험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나서 나와 같이 육군사관학교 1차 시험에 합격한 친구 두 명과 함께 2차 시험을 대비한 체력 단련을 시작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 자습 시간에 우리는 함께 모여 운동장을 뛰고 시간을 측정하며 운동하였다. 그 당시에는 힘들기는 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또 추억이었던 것 같다. 열심히 준비하다보니 어느새 2차 시험이 다가왔고 우리 모두 당당하게 육군사관학교에 우선선발되었다.

입시가 끝나고 나서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대학교 입학 전 민간인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 그러다 나는 기초군사훈련을 위해 서울로 오게 되면서 나의 고등학교 생활이 끝이 나고 육군사관학교의 생도로서의 생활이 시작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생활을 돌이켜보면 내가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친구들과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한층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육군사관학교 교훈, 교가[편집]

교훈[편집]

육군사관학교 교훈: 지, 인, 용

지: 긴박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확고한 가치관을 토대로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과 판단력을 발휘하는 지적, 인식적 역량이다.

인: 참된 인성과 엄격한 자기절제를 바탕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구성원과 원활하게 소통함으로써 조직의 단결력과 전투력을 고양시키는 인격적, 사회적 품성이다.

용: 투철한 사명감과 명예심 강인한 의지와 체력을 바탕으로 생명의 위험과 불의의 유혹을 극복하고 군인다운 가치와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적, 신체적 역량이다.

교가[편집]

교가는 육사가 4년제 사관학교로 재 개교하기 직전인 1951년 여름 현상공모를 통해 선정되었다.

수많은 응모작 중에서 6.25전쟁 중 종군작가단에서 활약하던 공중인 시인이 가사를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작곡가인 김순애 교수가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

작곡한 작품이 당선되어 교가로 채택되었다.[1]

(1절)

동해수 구비 감아 금수 내 조국 유구 푸른 그 슬기 빛발을 돋혀

풍진노도 헤쳐 나갈 배움의 전당 무쇠같이 뭉치어진 육사 불꽃은

모진 역사 역력히 은보래 치리

(2절)

아사달 기리 누려 여기 반만년 변함없는 그 기상 하늘을 내쳐

천추만리 바람결에 이야기 하리 백사 고쳐 쓰러져도 육사혼이야

가고 오지 않으리 오질 않으리

(후렴)

아아 영용 영용 이제도 앞에도 한결 같아라

온누리 소리 모아 부르네 그 이름 그 이름 우리 육사

교가 듣기, 악보 및 해설: [1]

  1. “육군사관학교”. 2019년 11월 6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