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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하운 김남열/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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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


  무엇을 위하여 외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평등과 자유라는 이념 속에서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이다.

평등은 모든 백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과 자유는 구속받지 않고 인간 존엄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자본이 중심이 되어 순환되는 사회이다. 그 자본이 개인을 사회를 국가를 있게 만든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은 동력이다. 자본주의는 수직적인 또는 수평적인 구조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상하, 좌우 지배하며 운영되어진다. 그러한 속에서 태어난 빈익부 부익부의 쌍생아 즉, 가난한자와 부자의 관계의 형성은 평등과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인 인간의 존엄마저 방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본이 전제가 되어야 우리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그 색깔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명분하에서 그 존엄의 가치를 스스로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중들을 위한다는 대중의 권익을 위한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모두가 수긍하는 가치가 되는가. 아니면 자기의 이익을 위한 야만의 속성을 감춘 위선적 주장인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정의가 모순

 지금, 사회는 너무 시끄러워 졌다. 우우죽순으로 생긴 사회단체의 목소리, 정치적 정당들의 목소리, 기업마다의 노조들의 목소리, 또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이익이 생긴다고 보면 군중에 편승하여 집단을 형성해 외치는 목소리. 본질적으로 함께하는 대의를 위한 목소리는 어디에도 들을 수가 없다. 정치인 정치인대로, 학자는 학자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자기중심의 목소리가 최고이며 배려의 목소리는 줄어들고 있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가의 힘은 퇴색 될 때로 되어버렸고, 국가의 힘에 반기를 드는 것은 일반적인 형태가 되어 버렸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정의가 모순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의 이념적 실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은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이리의 발톱을 숨기고 백성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사회의 국가의 악이며 그 걸림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자신을 착취하고 기만하고 또한 자신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래서 그들에게 동조해 가는 어리석은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과는 파멸이기 때문이다.
무감의 백성
 국가의 위기 상태에서(IMF)도 우리 백성은 본질을 간파하지 못했다. 지금 국가의 중요한 기간인 은행, 기업 등 곳곳에 외국자본세력이 침투하여 운영되고 있음에 그것이 위험한 경영임에도 우리는 무감한 상태가 되어있다. 언제든지 국가위기 상태는 일어날 수가 있다. ‘공동의 대의’가 사라진 국가에서  ‘무감의 백성’이 되어버린 국가에서 미래의 비전을 바랄 수 있겠는가.  중국이 동북아 공정으로 우리를 그들의 속국이라며 하고 있는 이때, 북한과 남한이 평화의 공존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하여 그어진 삼팔선이 전쟁 중에 잠깐 쉬고 있는 휴전이라는 상태를 간과하고 있는 이때, 과연 민의를 위한다는 국가의 큰 목소리가, 각 소수정당과 단체들의 대중을 위한다는 목소리가 국가미래의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나라를 위하는 애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 ‘화토가 일본이 우리 백성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만들었던 문화’였다는 것, IMF의 새로운 해석, 동북아공정의 위기의식에 대한 인식 ...,등 진정한 대의는 아주 광대한 것이 아니다. 작은 것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리더자의 ‘큰소리’이다. 지금 곳곳에서 대의라고 주장하며 외치고 있는 사람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진정 ‘무엇을 위하여 외치고 있는가’
                    󰌳 글|하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