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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프로젝트 빅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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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연극적인 것에 대하여

[1]「프로젝트 빅 라이프」는 ‘작은’ 목소리에 관한 희곡이다. 이렇게 말하면 제목에 들어간 단어 “빅(big)”과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겠고, 어떻게 작고 또 적은 목소리로 “빅”n>을 말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작품은 ‘빅 보이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소수의 발언으로 여겨져 마침내 소외되어버리는 말들이 어떻게 ‘삶’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작은 삶들이 어떻게 ‘빅 라이프>’를 구성하고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프로젝트 빅 라이프」는 아주 ‘작은’, 그리고 그 ‘작은’ 것으로 구성되는 아주 ‘큰’ 것의 틈새에 놓인 연극적인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수자’적인 형식 이 희곡을 ‘일반적 서사’의 독법으로 읽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총 열 명의 인물(?)이 큰 줄기의 이야기 안에 배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1부터 10까지의 인물이 동일한 시공간 안에서 일련의 사건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1과 2, 2와 3 혹은 2와 5의 배역이 매 장에서 단 둘이 대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1장에서는 ‘플뢰게’(인간)와 ‘잔나비’(유인원)가, 2장에서는 ‘잔나비’와 ‘윈스턴’(벌새)이, 5장에서는 ‘플뢰게’와 ‘고르곤’(야광충)이 등장하여 독백과 대화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희곡이 진행된다. 이들은 다른 장에서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예컨대 1장과 2장에서 등장하는 ‘잔나비’를 완전히 같은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중심 서사가 없는 이 희곡에서 1장과 2장은 어떠한 인과율을 가지지 않으며 이 때문에 인물들은 매 장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행되는 서사는 분명 일반적이지는 않다. 무대 상연은 논외로 하고 ‘읽는’ 것으로서 희곡을 보더라도 그렇다. 적지 않은 등장인물을 각각 둘(혹은 셋)로 쌍을 지어 매 장마다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서사를 한데 묶어낸 것은 희곡의 ‘독자’에게도 낯설 것이라 예상한다.

그런데 「프로젝트 빅 라이프」의 이러한 서사구조가 독자와 청중을 단지 낯설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만은 아니다. 다소 실험적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형식은 이 희곡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독자나 청중에게 익숙한 연극 서사를 ‘보편적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스토리’가 있다는 점이다. 일정한 사건을 둘러싸고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과 끝을 맺는 것이 ‘보편적’ 서사라면 이 희곡은 ‘보편적 서사(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희곡은 9장과 10장에 이르러서야 1~8장의 이야기가 한 데 어우러진다. 8장까지는 두세 명의 인물만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마저도 스토리의 인과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면 「프로젝트 빅 라이프」는 ‘보편 서사’의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에서 그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이 희곡은 ‘작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며 ‘작은 것’은 이 희곡 전체를 꿰뚫고 있다. 그렇다면 큰 줄기의 ‘중심’ 스토리를 배제하고 개별적인 관계 안에서의 (독백을 포함한) 발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형식은 ‘작은 목소리’를 과감하게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형식적 장치로 볼 수 있다. 큰 줄기의 사건이 있는 서사에서는 ‘중심 서사’와 ‘주변 서사’가 분리된다. 그에 따라 중심 서사에 놓이는 배역과 주변 서사에 놓이는 배역 또한 분리되는데 그 중요도에 따라 주연과 조연 및 단역 배우로 나뉜다. 이렇게 일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했을 때는 서사와 배우의 경중을 따지게 되며 큰 틀에서 보았을 때 주목되는 것은 단연 ‘중심 서사 (및 중심 배역)’이다. 조연과 단역의 말이 주연 못지않은 의미를 가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역할은 대체로 ‘주연’과 ‘중심’을 위한 말들에 가깝다. 즉 사건 중심의 서사는 ‘중심-거대-주연’과 ‘주변-소수-조연’으로 이분되고 이러한 큰 틀 안에서 후자는 상대적으로 경시된다.

「프로젝트 빅 라이프」는 이러한 이분법을 적용하기가 어렵다. 우선 이 희곡에는 큰 사건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매 장에 인물이 둘(많게는 셋)이 등장하여 각자 독백을 하거나 대화를 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둘의 발화로 이루어져 있는 각 장에서 ‘사건’이 있기는 하나 그것이 어떤 배역이나 그 배역의 발화하고 있는 이야기의 경중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이렇다보니 각 장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모두가 주연’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모두가 조연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무게를 가지는 서사에서 자신이 발화할 수 있는 장이 아닌 곳에서 다른 모든 존재는 ‘조연’으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즉 이 희곡은 모두가 주연이자 조연인 ‘작은 서사’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러한 ‘작은 서사’인 한 모두의 발언은 주연이자 조연으로써 경중의 구분 없이 중요하다.

이처럼 「프로젝트 빅 라이프」의 서사는 기존의 ‘보편 거대 서사’의 틀에서 보면 ‘소수의 작은 읊조림’이라고 해도 좋을 ‘작은 서사’를 취하고 있으며 온통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없어서는 안 될 중심 서사’가 없는 희곡의 큰 스토리에서 각 장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사소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서사로 하여금 「프로젝트 빅 라이프」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작은’ 서사가 그 자체로 주체적이라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또한 일반적 희곡의 형식 범주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러한 서사구조 또한 ‘소수’에 해당한다. 이 희곡은 내적인 형식은 물론 메타적 층위에서도 ‘소수’지향적 또는 ‘소수자’적인 지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2. 작은 개체가 발화하는 ‘보편/세계’의 역설에 관하여 ‘소수자’적인 형식 구조 안에서 배역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기에 앞서 ‘배역’을 먼저 살펴보자. 희곡 배역은 각각 로봇, 슈퍼컴퓨터, 인간, 유인원, 도롱뇽, 벌새, n>넓적다리 불가사리, 야광충, 문어, 박각시나방으로 제시된다. 그들이 어떤 종(種)의 모습으로 발화할지라도 이는 인간 세계 혹은 인간 사회를 우화적으로 빗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1, 사람2, 사람3으로 설정할 수도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종(種)적 특성을 달리 하여 배역을 설정한 것은 ‘소외’의 낯선 감각을 필요로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 세계’를 말하는 서사에서 인간이 아닌 다른 종류의 생물이 그 사회를 말하는 것은 이상한 낯섦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인간이 다른 어떠한 종보다도 우위에 있는 진화된 종이라는 인간의 오랜 진화론적 믿음에 근거하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열 개의 배역 중 ‘인간’이 딱 한 명 등장하는 것도 설명이 된다. 이 희곡에서 특정한 ‘종’의 우위는 없다. 모든 종의 개별적 발화는 동등한 무게를 가지면서 작고 소외된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을 뿐이다. 단 한명의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인간은 다른 종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진화론에 대한 반박이 아니며 이 말에 인간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더욱 없다. 다른 종과 함께 놓여있을 때 인간은 그저 ‘인간’이라는 종을 대표할 뿐이다. 다른 종에 비해 하등 더 중요할 것 없는 인간은 이러한 지점에서 일종의 소수성을 가지는 것이다. 즉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종의 발화는 ‘소외’의 발화이다.

이들은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그들은 자신들이 놓인 세계에 대해서 말한다. 1장에서 ‘플뢰게’와 ‘잔나비’는 “눈길 한 번 발길 한 번” 닿을 수 없는 곳에 자신들이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혼자”이다. 무대에서 그들은 서로 말고는 대화할 대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는 엄밀히 말해 ‘대화’라고 보기 어렵다. 차라리 ‘잔나비’의 대사처럼 “이곳에 혼자 남은 사람은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를 제멋대로 상상”하는 것에 가깝다. 장이 거듭되면서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을 임의로 A, B라고 칭할 때, 이들이 취하는 발화의 방법은 독백, 대화의 두 가지이다.

그나마 ‘대화’도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말’을 하거나 말을 변용하여 흉내내는 것에 가깝다. 이때 이들 ‘각자의 말’이 곧 소통 불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서로의 말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했듯 각 장은 다른 장과의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각 장이 독립적이므로 인물들이 제시하는 세계의 모습은 단 하나가 아니라 매 장마다 다르게 제시될 수 있다. 1장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세계를 그렸다면 2장에서는 ‘잔나비’가 육식과 “전쟁”을 언급하며 파괴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 식이다. 그런데 매 장이 하나의 개별적이고 단독적 세계이며 ‘독립적’인 세계의 단면들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장과 아무런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적’ 세계의 제시란, 1장부터 10장까지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가 단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31#|. 여러 장에서 조금씩 다르게 제시되는 세계의 모습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지만 ‘큰’ 세계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장은 독립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큰 세계의 조각인 셈이다. 그렇다면 희곡 전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비록 세계의 다른 면을 제시하고 있지만 각 장은 그것이 큰 세계를 구성하는 각각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유기성을 가진다. 그러한 점에서 1, 2장에서는 세계의 모습이 제시되고 7, 8장에서는 이러한 세계 안에서 재생산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제프리] 그것은 그 아이가 로봇이었기 때문.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거짓말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클림트] 저 아이는 살해당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옳았기 때문.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생이었기 때문. 그것은 이웃마을을 습격하기에 좋지 않았기 때문. 그것은 누가 보느냐와 보는 법을 누가 가르쳤냐의 차이.


위의 인용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 군중 속의 아이가 살해당한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 재생산 되는 것은 인간의 ‘거짓말’이다. 그런데 이때 ‘거짓말’은 어떤 역설을 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이가 로봇”이라는 말에 먼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둘러싼 ‘거짓말 하는 군중’이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그 안에서 ‘거짓말 하지 않는 아이’는 낯선 존재이자 배척되어야 할 존재이다. 아이가 사실(fact)를 그대로 말한다는 차원에서 로봇 혹은 컴퓨터(이 장에서 등장하는 ‘제프리’가 슈퍼 컴퓨터이며 그가 발화하는 장에서 이와 같은 대사가 들어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와 같은 기계성을 띤다. 이러한 발화가 비록 “로봇”이기에 가능하다고 제시되기는 하나 아이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며 이 맥락에서는 ‘진실’에 가깝다. 그렇다면 “로봇(아이)”의 발언이 진실된 ‘인간’의 발언에 가깝다는 점은 충분히 역설적이다>. 또한 사회에서 재생산되는 “거짓말”은 다수의 대중이 ‘임금님이 옷을 입고 있다’고 말해야하는 그들 세계의 ‘참말’이다. 이렇듯 “거짓말”은 임금님의 세계에서 ‘다수’가 모른 체 해야 하는 진실로서의 ‘참말’이라는 역설적 지점 또한 보여준다.

이 희곡이 폭로하는 역설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포커틀’의 처지를 보자. 바위 틈새에서 사는 문어 ‘포커틀’에게 ‘어둠’은 ‘삶’으로, ‘빛’은 ‘죽음’으로 연결된다. 문어가 빛의 유혹을 받고 바위 밖으로 나서는 것은 곧 인간들에게 잡혀 문어로서의 삶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일면 ‘빛’이나 ‘어둠’에 대한 ‘보편적’ 인식, 즉 보편이라는 거대한 이름 하에 자동적으로 연결되어왔던 이미지를 흩뜨리는 지점이다. 사실 특정 단어에 부여되는 ‘일반적’인 이미지라는 말은 충분히 폭력적이다. 단어의 비유적인 의미나 이미지에 ‘보편’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문학 안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특정 맥락 안에서 그 의미가 재구성된다. 어떤 단어는 매번 특수한 맥락 안에서 일정한 ‘비유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보편적 의미에 폭력적 혐의가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포커틀’의 대사는 보편의 역설적 지점을 포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편의 의미’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 문어의 삶은 ‘어둠’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3. 불가사의한, 다시 연극적인 것의 시작 그들은 폭력과 소외로 점철된 세계 안에서 그 역설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한다. 이 발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각각의 영역 안에서 발화되는 ‘개인(소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들의 발화는 그 자체로 “불가사의”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긴, 긴, 혼잣말”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가.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백과 대화와, 흉내내는 말과 긴 혼잣말일지라도 끊임없이 말한다. 핵심은 너무나 개별적이고 사소해 보이는 그 모든 말들이 이 희곡의 전체라는 점이다. ‘사소한 말’은 각각의 종의 삶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구성한다. 작은 말들이 큰 삶을 구성하고 있다. 이 희곡은 제목 그대로 ‘빅 라이프’를 말하는 ‘프로젝트’이다. 그들의 끊임없는 말은 이제 “하나의 길로 시작해 그 다음 다음 길을 계속해서 만드는 미로”같은 말이다. 미로의 처음과 끝을 통과하는 개인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길’로서의 말이자, 개인마다 다른 말의 길이며, 출구로 가는 여러 개의 길이다. 이제 로봇, 슈퍼컴퓨터, 인간, 유인원, 도롱뇽, 벌새, 넓적다리 불가사리, 야광충, 문어, 박각시나방의 말은 출구에서 모인다.

[잔나비] (문을 열고 나와 계속 걸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길을 우회하는 것. 그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길을 잃는 것. (...) [버로스] 불가사의해. [포커틀] 불가사리해. [버로스] 불가사의 하다고. [포커틀] 그래, 우리는, 불가사리야. [버로스] 그래, 우리는, 불가사의해. (...) [벌새들] 우리의 고향은 아우슈비츠. 우리의 고향은 관동군산하 비밀연구소. 우리의 고향은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 [모두들] 우리의 이름은 해질녘 황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오. 우리의 싸움은 오로지 문을 열고 나가는 것. (...) 스마트, 정적 속에서 장대를 바짝 세우고 가슴이 턱턱 막혀오는 듯 숨을 몰아쉰다. 그 순간 장벽이 된 문들 열리면서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무대 암전. 벽화가 몰려 있는 아주 넓은 방. 여러 종류의 동물들, 인간들의 발바닥, 손바닥들이 무수히 찍혀있다. [클림트] (...) 지금, 내 불완전한 얼굴은……, 기계에 불과한 나를 비극적으로 인식하는…달리 말하면, 인간적인, |#14#|너무나 인간적인…모든 의지.


빙글빙글 돌아 미로를 헤매다가 마침내 얼기설기 얽힌 말들의 미로에서 각자의 말을 통해 출구에서 만난 이들은 또다시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오로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라고. 우리를 가두는 거대한 미궁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가장 작고 개인적인 말을 함으로써, 그 말을 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그런 “의지”를 가짐으로써 우리는 그 벽을 끝내 넘어설 수 있다. 어쩌면 해답은 아주 간단한 곳에 있다. “벽”을 부수는 대신 그 장벽의 “문”을 열어 출구를 만들 수 있다. 각자의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점철된 이 갇힌 세계에서 각각의 생은 ‘전체’로 불리기 이전에 ‘개별’적인 가치를 갖는다.

우리는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런 말들을 받아 적어 희곡을 쓰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혹은 연극을 본다. 특수한 ‘개인’의 ‘작은 서사’를 보는 한 사람의 인간이 모여 폭력적인 ‘전체’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전체’ 세계의 ‘밖’이 열린다면 그건 정말로 연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연극적인 것은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선우은실(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