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최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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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도 서울 명동에서 가족과 함께
최상두 (1929년 9월29일 생, 배우자 이수형, 자손 최익렬, 최용진)
최상두 (1929년 9월29일 ~ 1990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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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경기도 여주
학력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과 졸업, UC Berkeley 최고 경영자 단기과정 수료 경력 전 충남방적 (주) 청화상사 대표이사 (CEO) 전 (주) 충방 대표이사 (CEO) 전 (주) 충남방적 상무 전 (주) 대성모방 전무 전 한국상업은행 (현 우리은행) 본점 국제부 차장 |
최상두는 신라말기의 문신인 최치원의 29대 손으로 부친 최양옥과 모친 김학수와의 9남매중 장손으로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최상두는 홀로되신 어머님과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해 서울로 상경하여 성공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인천상고에 입학하게 된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어머님의 농사일을 틈나는대로 도우며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한다.
서울대학교 재학중인 1950년도 6월25일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육군 소위로 자원하여 전쟁에 약 3년여간 참전하였으며, 참전중에 종아리 및 관자놀이부근에 총탄이 스쳐가서 상처를 입는 등 구사일생으로 전쟁에서 살아남아 같은시기에 서울대학교 동기생이면서 육군소위로 입대했던 장교 9명중 몇명 안되는 생존자가 되었다. 정전이후 육군 대위로 제대한 최상두는 다시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 복학을 하였으나 3년여간의 공백기간으로 인하여 뒤쳐졌던 학업을 회복하느라 남다른 노력으로 학업에 임한다. 그 결과 졸업후 그 당시 가장 유망한 직장으로 알려져 있었던 한국상업은행에 수석입사하게 되었으며 일부 잡지사의 취재 및 보도로 인하여 유망한 젊은 은행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서울 중구의 상업은행 본점 국제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최상두 차장은 미국에 한국상업은행 브랜치를 개척하기 위하여 미국 출장을 자주 다니게 된다.
그러던중,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불미스러운 일 (대기업과 은행간에 이루어지는 관행)로 인해 상사 및 부하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혼자 감당하고 회사를 사퇴하는 결정을 내린다. 이후 충남방적의 임원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으면서 은행가와는 다른 분야인 섬유산업의 경영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충남방적의 전무와 상무를 거쳐 자회사로 청화상사라는 회사를 부산에 설립하여 대표이사(CEO)로서 일본, 동남아, 미국 등 해외시장 개척과 상품개발로 모회사인 충남방적뿐만 아닌 대한민국의 수출실적에 크게 기여하여 대통령으로부터 받는 수출탑등 영예로운 산업훈장을 받게된다. 회사의 성장분위기에 맞추어, 서울에도 (주)충방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한 이후부터는 (주)청화상사 및 (주)충방의 두 회사의 CEO 의 역할을 서울과 부산을 매주 왕복하며 회사성장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등으로 인해 60세라는 젊은 나이에 식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당시에는 식도암에 가장 권위가 있다는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이 성공하지 못하고 재수술을 시도하지만 결국 8개월이라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서울대학병원에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뜨게 된다.
가족관계: 아내로서는 흥일상사 창업자이자 사상의학회 설립자인 이현재 및 박복성의 장녀인 이수형 (경기여고 및 이화여자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과 혼인하였으며 그 사이에 2남 (최익렬, 최용진)을 두었고, 3남인 최귀열은 1세를 넘기지 못하고 알수없는 병환으로 일찍 삶을 마감하였다. 아내인 이수형은 2011년도에 혈액암으로 원주기독병원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