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유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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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태 [劉以泰.劉爾泰]

〈이칭별칭〉 자 : 백원(伯源), 호 :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성격〉 의학자
〈성별〉 남
〈관직〉 숭록대부 안산군수
〈저서〉 마진편, 실험단방, 인서문견록

목차
〈정의〉
1652(효종3년 임진년)~1715년(숙종41년 을미년). 조선 후기 의관(醫官)

〈개설〉
본관 거창, 자 백원(伯源), 호 신연당(新淵堂), 원학산인(猿鶴山人), 인서(麟西)

〈가계〉

1) 친가
본관은 거창유씨이다.
고조부 유명개(劉名盖)는 정유재란(1597년) 경남 안의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병장(義兵將)으로 감찰(監察)로 추증되었다.
조부 유유도(劉有道)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효자로서 나라에서 복호를 받았고, 아버지 유윤기는 호군(護軍)을 지냈다.
2) 외가
강양이씨로 외증조부 이의립(李義立)은 초계현감과 경상좌수사를 지냈고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외조부 이광훈은 봉상시 판관을 지냈다.
3) 처가
창령조씨로 처조부는 단양군수 조곤수이고 처부는 찰방을 지낸 조익휘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거창 위천(원학 猿鶴)에서 아버지 유윤기와 모친 강양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이태는 10세 전후에 외가(外家)가 있는 산청 생초 신연(新淵)으로 부모와 함께 이거하였다. 어릴 때 미진(美疢)을 앓고 난 후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의학에 입문하여 3년만에 의술에 통달하였고 30세에 유의(儒醫)로서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불리던 강강술래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 유이태는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 명의설화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명의(名醫)이다. 거창유씨 가문, 향리, 왕실기록, 사우들은 劉以泰로 불렀고, 그가 저술한 醫書에는 劉爾泰로 자기(自記)하였다.

〈효행 행적〉
행실이 어려서부터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낯빛을 편안히 하고 양지(養志)로서 봉양하여 겨울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며 저녁엔 잠자리를 정해드리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며 자기의 본분을 극진히 하였다.
10여세 : 일찌기 10여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주야로 애통해하고 삼년간의 제사 의례를 예절에 맞추었으니 나물과 과실도 먹지 않고 여막(廬幕)을 떠나지 않은 것은 나이든 선비나 학식 있는 유자(儒者)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정도였다. 향리 사람들이 탄복치 아니한 사람이 없었으며 그 타고난 효심을 칭송하였다.
1683년 : 유이태와 할아버지와 아버지 등 삼대가 모두 역질을 앓지 않아서 집을 떠나 피해있었는데 지난 계해년(1683)에 그의 할아버지 유도(有道)가 갑자기 역질에 걸렸다. 아버지 윤기(潤祺)가 곁에서 탕약을 시중하였는데 유이태가 병에 걸릴까 염려하여 절친한 향리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곁에 오지 못하도록 만류해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부가 불행히 세상을 떠나자 분주히 달려 들어가 상을 모시었다. 겨우 초종이 지났을 때 아버지가 이어 병에 걸리자 이태가 곁에서 더욱 정성으로 탕약을 시중하였고 천지신명께 기도하여 자기가 대신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아버지도 완전히 병이 나았고 유이태 또한 병에 전염되지 않았으니 유이태의 지극한 효성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1697년 : 정축년(1697)에 큰 도적들이 집안에 쳐들어와 아버지가 불행히도 칼에 맞았는데 유이태가 그때 타지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였다. 도중에 그 소식을 듣고 놀라고 기가 막혀 주야로 눈물을 흘리며 불효자로 자처하였다. (아버지의) 상처가 위중하였으니 여러 가지로 약을 써보고 고름을 빨아내어 신속하게 병을 낫게 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유이태의 시종일관한 효성 때문이었다. 계모 섬기기를 생모와 같이하였고 배 다른 형제들도 친형제들과 다를 바 없이 대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부모・형제 사이를 이간질 할 수 없었다.

〈선행 행적〉
을병년(1685 ~1686)에 경상남도 산청군에 가뭄에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이태[劉以(爾)泰]는 경상좌우도의 사우들에게 백미를 빌려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종척들을 구하였다. 유이태가 출타 중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종척들에게 주고 남은 백미를 부인 창령조씨가 백미를 팔아서 연경답 수두락을 구입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백미를 확인하였더니 창령조씨가 “지독하게 가난한 선비의 집이므로 이 논을 사서 장차 연명해 갈 자본으로 삼으려 한 것이니 안된다고 하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유이태가 말하기를 “이렇게 기근이 든 때에 전토(田土)를 사들이고 족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서서보기만 한다면 이게 차마 할 노릇이오?”라 하고는 전토의 값을 돌려받아 궁핍한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왕실 기록〉
1710년(숙종 36년, 경인년) 1월 유의(儒醫)로서 숙종의 환후로 숙종의 부름을 받고 한양을 방문하였다.
1710년(숙종 36년, 경인년) 2월 儒醫로서 한양에 도착했을 때 숙종의 환후가 쾌차하여 입진하지 못하고 향리 산청으로 돌아왔다.
1713년(숙종 39년, 계사년) 12월 숙종실록에는 전주에서 칭병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의약동참에 참가하여 병조 종9품 부사용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14년(숙종 40년) 4월 숙종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御醫로서 입진 하였다.
1714년 6월 도수환 처방으로 숙종의 병환을 고친 공로로 兒馬 한 필을 하사 받았다.
1714년 8월 숙종이 숭록대부 안산군수를 제수했으나 고사하고 향리 산청으로 돌아왔다.
1725년 5월 영조 어지러움증에 유이태 경험방이 사용되었다.

〈저서〉
조선왕조에서 가장 두려워했던 무서운 전염병 마진(痲疹 : 홍역)이 1680년과 1692년에 전국적으로 창궐하였을 때 마진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구한 경험과 집안에 전해오던 여러 종류 의서와 ≪마진경험방 麻疹經驗方≫들을 바탕으로 1696년 우리나라 최초의 홍역 전문의서 ≪마진편(痲疹篇)≫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오랫동안 필사본으로 전해져 왔으나 유이태 후손이 진주의 회춘헌 약방 박주헌(朴周憲)에 전하여 1931년 진주에서 목활자본으로 출간되었으나 박주헌이 전사(轉寫)하는 과정에서 병오년으로 표기하였기에 1786년으로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진편≫은 1680년과 1692년 조선 전역을 휩쓸었던 마진에 대한 실증적인 관찰기록을 담고 있고 마진에 대한 독창적인 醫學觀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두창(痘瘡)과 마진의 증세는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창은 속으로부터 나오고 오장(五臟)에 일어난다. 오장은 음(陰)에 속하고 피(血)를 주관하므로 형체가 있고 물기가 있으며, 한(寒)도 있고 열(熱)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진은 육부(六腑)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육부는 양(陽)에 속하고 기(氣)를 주관하므로 형체는 있데 물기는 없고 열은 있되 한은 없다고 하였다. 陰陽은 열증(熱症)이냐 아니냐를 나타낸 것이고, 오장육부(五臟六腑)는 질병이 생기는 근원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마진(痲疹)이 두창(痘瘡)과는 달리 熱症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며 절대로 한(寒)증으로 알고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마진의 기본서라고 칭하는 중국의 여러 마진서에도 충증(蟲證)에 대해서 논한바가 없다. 그러나 유이태는 홍역 환자들에게 처음으로 충(蟲)을 치료하였고 조선 최초의 마진 전문치료서 마진편에 치충(治蟲) 처방을 처음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의 마진학 문을 연 태두(泰斗)이다.

유이태는 의원을 찾아가기 어려운 가난하고 병든 환자들을 위하여 집 주변에 있는 향약을 처방 할 수 있는 ≪실험단방(實驗單方)≫과 ≪인서문견록(麟西聞見錄)≫을 남겼다. ≪실험단방≫과 ≪인서문견록≫은 경험방으로 민간의학 경험과 전문적인 의학 의론을 바탕으로 성립한 의학지식이 결합하여 실용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의학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의서이다. 이 책은 각종 문헌의 정리나 재인용이 아니라 그가 실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사실적인 치료 방법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본문 중에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여러 가지 치료 경험 사례와 자세한 치료법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기존 향약방이나 경험방에 보이지 않는 독특한 방법들이 많이 실려 있다. 유이태는 이론을 떠나 보다 실증적인 의학을 추구한 것으로 사우들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인서문견록≫은 일본 행우서옥, 남원의 박병숙 그리고 개인이 소장되어 있다. ≪실험단방≫과 ≪인서문견록≫은 오늘날 의학사 연구에 있어서 당시의 생생한 치료 현장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1709년에 저술되었다.

1975년 드라마 집녑이 방영 중일 때 대학교수라 칭한 두분이 산청군 생초면 신연리 송정의 유이태 후손 집에서 가져간 잃어버린 의서 ≪000≫ 2권, 1940년대 초 종가집 아래채의 화재로 소실된 ≪침구방≫ 및 ≪부인과≫ 의서와 전해지고 있는 3종류의 저서 ≪마진편≫, ≪실험단방≫, ≪인서문견록≫ 등 7종류의 저서를 남겼다.

〈유품〉
신연당 유이태 유고, 유이태 효행장과 정영장 등을 가문에 남겼다.

〈유이태 유적지〉
유이태는 「소설 동의보감」, 드라마 ‘집념(1975년)’, ‘동의보감(1980년)’, ‘허준(1999년)’, ‘구암 허준(2013년)’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柳義泰)의 모델 인물이다.
유이태 유적지는 경남 산청군과 거창군에 산재해 있다.
산청군 생초면에는 의술활동을 하였던 집, 서실, 묘소, 말년에 낚시를 하였던 낚시터, 저서 마진편에 나오는 샘으로 금서면 화계리 왕산에 소재하고 있는 장군수 약수터(왕산약수터)와 오부면 오전리 황새봉 목 밑의 마음병 치료 약수터(찬샘이) - 등이 있다.
거창군 위천면에는 태어난 생가, 7대조, 고조부, 조부,..등의 선대 묘소가 있는 선영,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던 구주서당, 유이태가 여우처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사랑바위(척수대), 침대롱 바위(뱀이 목숨을 살려준 보은으로 9개 침을 전해준 바위), 조부를 뵙기 위하여 넘어 다녔던 다름재 고개가 있다.

〈명의설화〉
유이태는 유이태탕, 순산비방 등 수많은 명의설화를 한국구비문학대계 및 여러 설화집에 남겼다.

〈강강술래〉
경남0109 / 거제군 장목면 시방리 / 강강술래노래
(1984, 10, 3 / 앞: 양또순, 여, 1906)

강강 술래
우리나 동네 우리 동무
잘도 한다 잘도나 한다
뵈기도 좋다 우리 동무
딛기도 좋다 강강술래
달 떠 온다 달 떠 온다
우리 문전 사랑 앞에
임 오는 것 뵈기가 좋고
옥추난간 일만 봉에
달 뜨는 것도 뵈기가 좋다
단 팔십을 살고아 보니
이렇든 경사가 어데가 있노
강강은 돌고 술래나 술래
임아 종종 날 셈기 도고
내야 어이 안 셈길까
우러 님은 어디로 가고
이런 세월 저런 세월 뭘 해 놨더노
춘초는 연년이요1)
왕소인들 귀불귈까2)
하태3) 펜작4) 유이태도5)
지병 날명을 몰라여서
서산 행처6) 저문 날에
실픈 혼백이 되어 있고
우리가 살면 을매나 살까
죽음에 들어 노소가 있나
장안 청춘 소년들아
청춘세월로 허송을 마소
백발이 장차 미기 온다
우리도 엊그지 소년일러니
백발 되기 잠시드라
서산에 지는 해는
그기 누라 금지하며
창해 유수 흐리는 물
다시나 오기 어렵더라
얼싸 절싸 내 동무야
강강술래로 잘도나 한다
노류장화8) 꺾어 들고
청풍명월을 놀로 가세
노자노자 생년에 노자
죽고 벵들면 못 노더라
공산 낙모9) 일모퉁에
진도배기나 젖을 담아
깊이 파고 묻어 놓으면
움도 싹도나 아니나 난다
세월이 여루하야
뻬는 삭아서 진토가 되고
살은 녹아 녹수가 된다
우리 자석이 있다 한들
어느 누가 하세월에
우리 도랑을10)살피나 볼꼬

1) 춘초는 연년이요 : 춘초연년록(春草年年綠).
2) 왕손인들 귀불귈까 : 왕손(王孫) 귀불귀(歸不歸). 왕손은 가고 돌아오지 않음.
3) 하태 : 화타(華陀). 중국 후한 때의 유명한 의원.
4) 펜작 : 편작(扁鵲). 중국 전국시대의 명의.
5) 유이태(劉爾泰) : 조선 숙종 때의 명의.
6) 서산 행처 : ?
8)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
9) 공산낙모 : 공산낙목(空山落木)인 듯.
10) 도랑 : 무덤의 둘레.

유이태는 조선왕조에서 최고의 선(善)이었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접고 의학(醫學)에 입문하여 유의(儒醫)로서 일생 동안 효행(孝行)과 선행(善行)을 하였다. 자신보다는 가족, 가족보다는 종척(宗戚), 종척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을 영위(營爲)하였다. 반상(班常)과 남녀노소가 엄격한 시대에 귀천(貴賤), 친소(親疎), 빈부(貧富), 민관(民官),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애민정신(愛民情神)을 펼치며 오직 병든 환자(患者)를 치료하다가 1715년 2월 27일 6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 후기의 페스탈로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