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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세월탐구/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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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6일 11:20 국가안보실,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10:49분 세월호선체 전복사진 첨부' 

       < 박대통령 ‘뒤집힌 세월호 사진’보고 받고도 4시간 ‘관저에'>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에 뒤집힌 세월호 사진이 담긴 보고서를 받고서도 관저 근무를 고집한 배경에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대리인이 10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세월호 7시간 행적 답변서에는 참사 당일 대통령이 받은 보고서 3장이 첨부돼 있다. 박 대통령이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 10시40분, 11시20분에 국가안보실에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진도 인근 여객선 침수, 승선원 474명 구조작업 중’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들이다. 오전 10시 보고서에는 ‘세월호가 오늘 8:58분경 “침수 중” 조난신고’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56명이 구조됐고 해군함과 항공기 등이 구조 중이라고 적혀있었다. 오전 10시40분 보고서에는 ‘현재까지 106명 구조’라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등이 가동됐다는 조치 현황이 담겨있다. 또 이 보고서에는 처음으로 세월호 현재 상태를 촬영한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그런데 오전 11시20분 보고서에는 처음으로 세월호가 전복됐다는 보고와 사진이 등장한다. ‘10:49분 선체 전복’이라고 적힌 이 보고서에는 선체가 전복된 세월호 사진도 첨부돼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 “구조 상황에 대한 관계기관의 잘못된 보고와 언론의 오보가 겹쳐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선체가 전복됐고 474명 중 161명만 구조됐다는 11시20분 보고를 제대로 살폈다면, 박 대통령이 관저에서 전화나 문서 보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상황이 심각하다고 인식하고 중대본 방문이라는 ‘행동’을 지시한 건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난 오후 3시였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 쪽은 “대통령으로서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며 세월호 참사 때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 헌법에 보장된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배했다는 탄핵 소추 사유를 정면으로 반박했다.(한겨레, 김민경기자)

■ 4월16일 11:23 '315명의 미구조 인원들이 실종 또는 선체잔류 가능성이 높다' 

                  국가안보실 김장수 실장, 박 대통령에게 서면보고

-11:28 사회안전비서관,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477명 탑승, 161명 구조'

-12:00 미용사 정씨, 청와대 방문요청 받음

      “대통령의 머리를 손질해야 하니 급히 들어오라”

-12:05 사회안전비서관,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162명구조,1명 사망'

-12:05 박대통령, 관저에서 점심 때 TV 통해 사고현장영상 확인      

       <박대통령, '세월호참사' 점심 때 TV로 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 점심 즈음에야 TV를 통해 사고 현장 영상을 확인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사고 발생을 인지한 지 약 2시간이 지난 시점이다. 박 대통령의 탄핵심판 대리인단이 10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세월호 7시간' 행적 자료에는 빠져있던 내용이다.

박 대통령 측 관계자는 11일 머니투데이 '더300'(the300)과 전화 통화에서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에는 서류를 검토하느라 바빠 TV를 보지 못했지만 점심 무렵 TV를 통해 사고 영상을 봤다고 측근들에게 밝혔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관저 집무실에는 TV가 없지만 개인식당에는 TV가 설치돼 있는 만큼 박 대통령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TV를 시청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 이상배기자)

-12:33 사회안전비서관,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179명구조, 1명사망'

-12:54 행정자치비서관실,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178명구조, 1명사망'

        '해군 특수구조대 및 해경 특공대 투입 및 선체생존자 확인중'

-13:00 정씨, 청와대 도착 90분동안 관저에서 박대통령 '올림머리' 손질

<한겨레>가 청와대와 미용업계의 관계자를 복수로 만나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ㅌ미용실을 운영하는 정아무개(55) 원장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2014년 4월16일 낮 12시께 청와대로부터 “대통령의 머리를 손질해야 하니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날 오후에는 예약 손님이 많았으나 예정에 없던 청와대 호출로 인해 미용실 직원들은 오후 예약을 모두 취소해야 했다. 정 원장은 승용차로 한 시간쯤 걸려 청와대 관저에 들어간 뒤 박 대통령 특유의 ‘올림머리’를 했다. 올림머리는 어머니 고 육영수씨를 연상시키는 머리 형태로 수십개의 머리핀이 들어가며 위쪽으로 올려붙여 둥근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화장까지 포함해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상황을 아는 한 관계자는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머리를 손질하는 데 90분가량이 걸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한겨레, 하어영송경화기자)

-13:07 사회안전비서관,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370명구조 2명사망'

-13:13 국가안보실장, 관저 박대통령에게 유선보고

       '190명 추가구조하여 현재까지 총 370명 구조했다(2명사망)'

-14:25 국가안보실 김규현, 190명 추가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

-14:50 국가안보실 김장수실장, 관저 박대통령에게 서면보고

     “당일 오후 2시50분 ‘190명을 추가 구조했다는 보고에 오류가 있다’

-14:57 관저 박대통령, 국가안보실장에게 전화

김 전 실장은 또 “당일 오후 2시50분 ‘190명을 추가 구조했다는 보고에 오류가 있다’고 보고했고, 2시57분 이를 질책하는 대통령의 전화가 왔을 때 중앙재해대책본부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청문위원들이 이를 근거로 “건의 뒤 2시간이 넘은 5시15분에야 중대본을 방문한 이유가 ‘올림머리’ 때문 아니냐”고 지적하자, 김 전 실장은 “머리 손질로 (늦게) 중대본에 갔다고 제가 생각하기 싫다.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고 답변했다.(한겨레,석진환 정유경기자)

-15:00 관저 박대통령,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 준비 지시

-16:10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세월호 참사의 중대성을 뒤늦게 파악한 청와대는 오후 4시10분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주재했다.(한겨레,성연철기자)      

-17:15 관저 박대통령, 참사 당일 처음으로 관저를 나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지시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18:00 관저 박대통령, 저녁식사

       (대통령은) 식사는 평소처럼 했다. 사고 당일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한 후 관저로 돌아와 식사를 했다. (여성동아,김민경기자 정희순 객원기자)  

                     <퇴근해버린 대통령>

그리고 오후 5시15분이 되어서야 박근혜 대통령은 중대본에 등장한다. 배는 이미 완전히 가라앉았고, 추가 구조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지시는 “가능한 인력과 장비를 모두 동원해서 생존자 구조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오전 10시30분의 지시 내용과 같다.

그렇다면 중대본 방문 이후 대통령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참사 당일 내내 그랬던 것처럼, 중대본 방문 뒤에도 청와대 참모진 가운데 그 누구도 박 대통령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점이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이던 유민봉 새누리당 의원은 <한겨레21>과의 통화에서 “(대통령이) 중대본을 다녀온 뒤 청와대는 비상 상황에 들어갔다”며 “(대통령이) 진도 팽목항에 내려갈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새벽까지 했다. 주재는 김기춘 실장이 했고, 대통령은 이정현 홍보수석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파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대본 방문 이후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에 유 의원은 “그건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 민경욱 새누리당 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민 의원은 “중대본에 갔다와서 청와대는 회의한다고 밤을 새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회의는 “우리(참모진)끼리만 한 회의”였다. 중대본 방문 이후 대통령을 봤느냐고 묻자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본관에도, 관저에도 (대통령은) 항상 혼자 있었다. (보고는) 전화로 많이 하니까.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배에서 내린 시점은 4월16일 오전 9시46분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많은 사람이 그 배에 선장이 없었음이 치명적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결정권자가 없으면 조직은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없다. 법원은 그 죄를 무겁게 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날 세월호에 선장이 없었던 것처럼, 청와대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사실상’ 없었다. 참사 당일 수석들의 회의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동안 대통령은 누군가의 전화기 속에서만 등장했다. 비서들은 대통령 없이 대통령의 동선과 의전 그리고 경호를 논했다.

당시 이정현 홍보수석 등 여론 동향을 살피는 비서들은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기춘 비서실장과 정호성 부속비서관 등은 “경호 등의 문제를 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고 말한다. 그 논쟁이 길어지자 김기춘 비서실장은 수석실별로 회의해서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한다. 대통령이 가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심기를 헤아릴 수 없으니 공허한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그 회의에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이런 재난은 안보실 소관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는 진술도 있다. 민경욱 의원은 “(김장수 실장이) ‘북한이 움직이거나 하면 벙커에 갈 텐데,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논리를 폈다”고 말했다.

새벽 1시까지 단 한 명의 추가 구조자가 없던 상황에서 청와대 비서진은 대통령이 ‘팽목항을 갈지, 진도체육관을 갈지’를 골몰하고, 만약 간다면 언제 가고 어떻게 경호할지 계획 수립에 혈안이 된다. 정보를 종합하던 국가안보실은 ‘우리 소관 업무가 아님’을 강변했다. 그동안 구조 활동에 대한 대통령의 지시는 없었다.(한겨레,김완기자)

      【대통령 “315명 배에 갇혀있다” 보고 받고도 미용사 불러 】

세월호 침몰 당일 ‘시간대별 재구성’

오전 10시 김장수 실장 세월호 첫 보고

10시30분 해경청장에 “구조 최선” 지시

11시23분 김장수 “315명 갇혀” 재보고

12시 박 대통령 머리손질 미용사 호출

오후 1~3시 올림머리 하느라 1시간여 걸려

3시 중대본 방문 준비 지시

5시15분 중대본 방문 엉뚱 질문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지금까지 행적이 드러난 바는 없었다.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조차 그날 박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알 수 없다”로 일관했다. 문고리 3인방 중 핵심인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또한 “박 대통령이 관저에 있었다”는 말을 제외하면 침묵했다.

강남 청담동 미용실 원장인 정아무개씨는 그 ‘7시간’ 중 1시간30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것이 확인된 ‘유일한’ 사람이다. 5시간30분은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지만, ‘올림머리’는 그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다. 90분의 머리 손질은 나머지 330분을 해석하고 추론할 가능성을 열었다.

오전 11시23분: 김장수 “315명 갇혀”

박 대통령의 4월16일 오전 시간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 있다. 알려진 바로는 2014년 3월부터 2014년 6월까지 해외순방 일정을 제외하고 매주 수요일 공식 일정을 잡지 않았다. 당일 일정 또한 비운 상태였다. 문제는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관저를 벗어나 청와대 집무실로 가거나 청와대 밖으로 나가는 공식 일정을 오전 내내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전 10시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첫 보고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받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외부 접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전 10시 반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해경 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인원 구조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직접 지시를 내렸다지만, 이 또한 지시를 직접 한 것인지조차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상황인식은 올림머리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박 대통령에게 올림머리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어머니 고 육영수씨를 떠올리는 듯한 모양을 박 대통령은 늘 고집해왔다. 최근 10여년 동안 박 대통령이 올림머리를 하지 않고 공식석상에 등장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날인 4월17일 하루뿐이라고 알려졌을 정도다. 그런데도 미용사 정씨를 호출한 시간이 12시라는 건 오전 내내 박 대통령이 ‘무방비 상태’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이 그 시각 그렇게 경계를 풀고 있었던 것을 놓고는 미용시술부터 늦잠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답해야 할 부분이다.

12시: 박 대통령 미용사 호출

‘올림머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는 신호이다. 하지만 절박함이나 긴급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 대통령의 머리 손질을 위해 청와대가 미용사 정씨에게 연락한 것은 정오가 다 돼서다. 박 대통령은 11시23분께 김장수 실장으로부터 “미구조된 인원들은 실종 또는 선체 잔류 가능성이 많다”는 유선보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보고에는 315명이 구조를 받지 못하고 배 안에 갇혀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미용사 정씨를 청와대로 불러 올림머리 손질을 받으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의 위기의식 수준을 보여준다. 정씨가 청담동 미용실에서 종로구에 위치한 청와대까지 이동하는 시간만 40분 내외다. 정씨는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미용실을 통해 자신에게 예약된 업무를 취소한 뒤 필요한 물품을 챙겨 청와대로 향했다.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말하자면 박 대통령은 300여명의 구조가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한 시간 반짜리 올림머리를 위해 강남의 10년 단골 미용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올림머리를 만드는 데 들었던 90분 동안에도 박 대통령의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는 계속됐다. 정씨는 별다른 지시가 없자 평소와 다름없이 올림머리를 완성해갔다. ‘서두르라’거나 ‘간단하게 하라’는 재촉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박 대통령이 입을 민방위복에 맞춰 머리 형태를 조금 변형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오전 11시께의 전원 구조를 알린 오보 때문에 혼란을 겪었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청와대 보고보다 언론보도를 믿었다는 어불성설에 다름아니다.

흘러간 골든타임 90분

박 대통령이 올림머리를 한 오후, 이른바 골든타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는 해경이 선체에 남아 있는 생존자들을 찾기 위해 수중수색 작업에 나선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경은 오후 내내 선체 진입도 하지 못한 채 구조 실패를 거듭했다. 재난·구조 전문가들은 국가재난의 상황에서 일상적인 초동대처를 할 수 있는 인원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군·경의 합동작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합동작전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실제로 세월호 선체에 접근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설치된 것은 해경이 아닌 해군(SSU) 대원에 의해서였다.

이 와중에 박 대통령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방문 ‘준비’를 지시한 시각은 오후 3시였다. 방문이 아닌 방문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미루어 3시까지도 박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올림머리를 완성한 상태로 5시15분이 돼서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했다. 중대본 방문 뒤 에어포켓 등 생존자 수색과 관련한 요구는 계속됐지만 대통령의 지시는 이뤄지지 않았다.(한겨레, 하어영 기자) 

          【역대 청와대 근무자들 , "관저집무실이라는 개념은 없다" 】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대통령이 ‘관저 집무실’에 있었다고 했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근무자들은 ‘관저 집무실’이라는 개념은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출근을 안 한 것이라는 의미다.

“청와대에는 관저 집무실, 본관 집무실, 비서동 집무실이 있으며 이날은 주로 관저 집무실을 이용.”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있었던 구체적 위치를 밝혔다. 참사 2년7개월 만에 처음이다. 그간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있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 위치는 경호상 이유를 들어 밝히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사 당일 ‘관저 집무실’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사IN>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때의 청와대 근무 경험자, 대통령 가족 등 청와대와 관저 구조를 잘 아는 이들을 접촉했다.

일단 ‘관저 집무실’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선 개념이라는 이야기를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근무 인사 모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관저 집무실이란 말을 이번에 처음 들었다”(국민의 정부), “우리 때는 그런 표현 자체를 안 썼다”(참여정부), “관저면 관저지 관저 집무실은 모른다”(이명박 정부).

청와대 내 대통령 집무실은 크게 두 곳이다. 본관 2층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이 보통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곳이다. 참모진이 머무는 비서동 내 위민1관에도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비서동에서 본관은 500m가량 떨어져 있다. 도보로는 10분이 걸린다. 이에 미국 백악관 웨스트윙처럼 참모들이 바로바로 대통령과 소통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참여정부 때 만든 게 비서동 집무실이다.

관저는 대통령 내외가 머무는 공간이다. 기역자 모양으로 내실과 외실로 구분된다. 외실에는 대통령이 손님을 초대해 오찬·만찬을 할 수 있는 대식당이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는 8~10명이 앉을 수 있는 회의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이곳에서 매일 아침 8시10~20분에 가까운 참모들을 불러 ‘관저 회의’를 했다. 이 대식당과 접견실이 관저 내에서 비교적 공적인 공간이다.

외실과 구분되는 내실 안에는 침실과 거실이 있다. 침실 옆 거실에 속한 공간에 작은 서재가 있다. 대통령이 보고서나 책을 읽으며 사무를 보는 공간이다. 참여정부 때 제1부속실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한 이창우 동작구청장은 “벽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통령 책상이 있고 컴퓨터, 프린터가 놓여 있었다. 3~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서재에는 내외분과 부속실만 들어갔고, 침실은 대통령 내외만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밝힌 ‘관저 집무실’은 침실 옆 서재를 지칭할 것으로 유추하는 이들이 많았다. 관저에서 ‘집무실’이라 표현할 만한 공간은 서재 아니면 회의실 정도인데,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당일 관저에 참모를 불러 모아 회의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본관이나 비서동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 있었던 게 논란이 될 것을 의식한 듯, 청와대는 “대통령은 출퇴근의 개념이 아닌 모든 시간이 근무시간”이라고 해명했다. 여기서 청와대는 ‘대통령은 모든 시간 근무한다’는 것과 ‘출퇴근 개념이 없다’는 명제를 뒤섞는다. 전자는 맞는 이야기지만, 후자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 모두 일정이 있는 날은 아침 8~9시에 관저에서 본관 집무실로 출근했고, 퇴근 뒤 관저로 돌아갔다. 공식 일정이 없으면 관저에서 머물기도 했지만 드문 일이었다. 세 대통령 모두 필요할 때는 관저에 참모를 불러 회의 및 대면 보고를 받았지만 출퇴근 개념은 존재했다. 주집무실은 본관 2층이며, 관저는 대통령이 출근 전이나 퇴근 뒤, 또는 공식 일정이 없을 때 머무르는 공간이란 뜻이다. 김기만 전 국민의정부 춘추관장은 “김대중 대통령은 몸이 아픈 경우 등 특수 상황이 아니면 늘 본관 집무실로 출근했다”라고 말했다. 참여정부 연설기획비서관으로 근무한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일정이 없는 날은 관저에 있을 수 있고, 급한 보고라면 관저에서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이 생겼는데도 대통령이 계속 관저에 있으면서 출근을 안 했다면 문제가 된다”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공식 일정이 없던 박근혜 대통령이 처음 보고를 받은 시각은 오전 10시, 사고 발생 1시간12분 뒤다. 서면 보고였다. 첫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아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오전 10시15분과 22분, 30분에 유선으로만 지시했다. 10시31분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됐다.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당시에 해경과 군 중에 어디가 구조작업을 주도하며 맡을지 우왕좌왕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자원을 동원할지 정리해주는 게 청와대다. 청와대가 역할을 안 하니 현장에서 혼란이 생긴다. 비서실장, 안보실장, 위기관리 담당자들과 신속하게 회의해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줬어야 하는데 그런 대응이 없었다는 게 제일 큰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오전 10시30분 지시를 끝으로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방문 때까지 박근혜 대통령은 관저에 머무르며 서면·유선 보고만 받았다. 대부분 서면 보고였다. 관저에 상주하는 인원은 요리·청소 등 수행 담당이다. 공적 사안을 논의할 참모들은 관저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비서동에 머무른다.

오후 1시7분 대통령에게 ‘370명 구조, 2명 사망’이라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시50분 뒤늦게 대형 참사임을 인지하고도 박 대통령은 이로부터 2시간25분이 지난 오후 5시15분에야 중대본을 방문했다. 오후 3시30분 수석비서관 회의를 소집하고 4시10분 이를 주재한 것도 박 대통령이 아닌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처음 공적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박 대통령은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말했다. 상황 보고를 제대로 받았나 의심이 가는 발언이었다.

청와대가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2시24분 이후에도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은 관저라는 공간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용화 전 이명박 정부 연설기록비서관은 “남자 대통령도 관저에 있다고 하면 가기가 어렵다. 업무 공간이 아니고 쉬는 사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본관 집무실에 100번 가면 관저에 한 번 갈까 말까다. 8·15 경축사 연설문 때문에 밤에 간 적이 있는데 대통령이 불러서였다. 더구나 여성 대통령이 관저에 있다고 하면 더 접근하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씨는 “세월호는 사람의 생명이 걸린 긴박한 상황이다. 평소에도 대면 보고가 어려운 박근혜 대통령이 관저에 있었다면 긴밀하게 협의하고 보고하는 데 큰 제약이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본인이 공적 공간으로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청와대가 이제라도 진솔한 해명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중 정부 때 제1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통령이 24시간 집무한다는 말은 맞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한국 시각으로 자정 즈음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취침 직전 시간이었지만 당연히 바로 보고해 지침을 받았다. 그러나 관저 집무실이란 말은 써본 적 없다. 대통령이 집무하지 않은 정황이 뚜렷한데도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게 문제다. 청와대가 국민을 두 번 속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인, 전혜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