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1권 > 1. 계품(界品) > 1 - 10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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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아비담심론 제1권
법승(法勝) 지음
승가제바(僧伽提婆)ㆍ혜원(惠遠) 공역
김 재천 번역
1. 계품(界品)
먼저 가장 뛰어나시며 번뇌를 여의신
자애로운 얼굴에 예를 올리고
또한 경순(敬順)하는 여러 가르침과
집착 없는 응진승(應眞僧)1)에게 예를 올린다.
해설하기를, 법상(法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한다. 어째서 법상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항상 정해진 모습을 항상 일정하게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선정과 지혜[定智]에 선정과 지혜의 모습이 있으면 곧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법상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문] 세간도 역시 법상을 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딱딱한 모습은 땅이요, 축축한 모습은 물이요, 뜨거운 모습은 불이요, 움직이는 모습은 바람이요, 걸림이 없는 모습은 허공이요, 물질이 아닌 모습[非色相]은 앎[識]이라고 알고 있다. 이처럼 일체를 아는 것이지 다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미 아는데 다시 알아야 한다고 하면 이는 곧 끝이 없으며, 끝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이 법상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인가?
[답] 세간은 법상을 알지 못한다. 만약 세간이 법상을 안다면 모든 세간도
1) 아라한(阿羅漢, Arhat)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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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정되어 있지 않다. 법상은 항상 일정하여 법상을 알면서도 결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결정되지 않은 것도 마땅히 결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은 법상을 알지 못한다.
또 딱딱한 모습인 땅은 항상하지 않은 모습이요 괴로운 모습이며 내가 아닌 모습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딱딱한 모습이란 마땅히 항상함이 있는 모습이요 즐거운 모습이요 내가 있는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딱딱한 모습은 곧 덧없음[無常]의 모습이요 괴로움의 모습이요 무아(無我)의 모습이다. 만약 세간이 땅에 대하여 딱딱한 모습임을 안다면 무상의 모습과 괴로움의 모습과 무아의 모습도 마땅히 알아야 하겠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간은 땅의 딱딱한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문] 앞에서 법상을 알아야만 한다고 했는데, 이 법이란 무엇인가?
[답] 만약 모든 법상을 알면
바른 깨달음으로 지혜의 눈을 열고
또한 다른 이를 위해 드러내나니
이것을 지금 나는 설명하겠다.
[문] 부처님께서는 무슨 법을 아셨는가?
[답] 상(常)ㆍ아(我)ㆍ낙(樂)ㆍ정(淨)이 있으니,
모든 유루(有漏)의 행을 여읜다.
모든 유루행은 모양을 바꾸어 생겨나고 자재하지 못하기에 나를 여읜 것이고, 부서지고 무너지므로 즐거움을 여읜 것이며, 지혜 있는 이[慧]가 싫어하기에 깨끗함을 여읜 것이다.
[문] 만약 상ㆍ아ㆍ낙ㆍ정이 있어 모든 유루법을 여읜다면, 어째서 중생은 그 사이에서 상ㆍ아ㆍ낙ㆍ정이 있다고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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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항상함[常]에 계착함을 첫째로 하여
유루 속에서 망령되이 보는 것이다.
중생은 유루법에 대해 모습을 알지 못하고 상ㆍ아ㆍ낙ㆍ정이 있다고 느낀다. 마치 사람이 밤길을 가다가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도적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과 같으니, 그 역시 이와 같다.
[문] 무엇이 유루법인가?
[답] 만약 모든 번뇌를 일으키면
이것을 성인께서는 유루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법에 있어서 신견(身見) 등의 여러 번뇌, 즉 「사품(使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일으킨다면 이 법을 일컬어 유루라고 한다.
[문] 어째서인가?
[답] 이른바 번뇌와 누(漏)는
지혜의 임시의 이름이다.
번뇌를 누라고 한다. 모든 입(入)2)으로부터 새어 나가기 때문이요 마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가기 때문이며, 생사에 머물기 때문이요 마치 비인(非人)이 지니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유루라고 한다.
[문] 이것에 대하여 달리 이름이 있는가?
[답] 이를 일컬어 수음(受陰)이라고도 하고
또한 번뇌ㆍ쟁(諍)이라고도 하며
이 법을 성음(盛陰)이라고도 하고
노(勞) 또는 쟁이라고도 한다.
2) 범어로는 praveśa 혹은 āyatana. 감관으로서의 근(根, indrya)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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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째서인가?
[답] 번뇌[煩]ㆍ수(受)ㆍ쟁(諍)이 일어나기 때문이니,
그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신견(身見) 등의 모든 번뇌는 중생을 괴롭히므로 번뇌라고 말하고, 번뇌로써 몸[身]을 받으므로 수라고 말하고, 분노하는 마음이므로 쟁이라고 말한다. 신견 등을 따라 모든 유루법을 일으킨다. 이렇게 괴로움을 일으키므로 노(勞)라고 하고, 느낌을 일으키므로 수라고 하며, 다툼을 일으키므로 쟁이라고 한다.
이미 성음(盛陰)을 설명했으니 이제는 음상(陰相)을 설명하겠다.
번뇌를 멀리 여읜 것과
무루(無漏)와 모든 유위(有爲)와
일체의 뒤섞인 수음(受陰)이
바로 성인이 설하신 음이다.
말하자면 법으로서 신견 등의 모든 번뇌를 여읜 것과 또한 모든 누를 해탈한 것과 유위는 원인에 따라 생기므로 이 일체와 그리고 앞에서 설한 성음을 통틀어서 음이라고 한다. 이것이 5음(陰)인 색(色)ㆍ통(通)[각(覺)이라 불러 야 한다]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문] 색음이란 무엇인가?
[답] 열 가지를 색입(色入)3)이라 하고
또한 무교(無敎)4)의 가색(假色)이기도 하다.
이렇게 색음을 분별하는 것이
모니(牟尼, muni)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3) 범어로는 rūpa-āyatana. ‘물질의 영역’을 의미한다.
4) 범어로는 avijñāpti. 무표(無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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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를 색입이라고 한다’고 함은 안(眼)ㆍ색(色)ㆍ이(耳)ㆍ성(聲)ㆍ비(鼻)ㆍ향(香)ㆍ설(舌)ㆍ미(味)ㆍ신(身)ㆍ세활(細滑)5)을 말한다.
‘또한 무교의 가색이기도 하다’고 함은 「업품」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색이 바로 색음이다. 색음을 분별할 때에 이것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식음(識陰)이라 함은
곧 의입(意入)을 말하니,
18계(界) 중에서는
다시 일곱 가지를 말한다.
말하자면 식음은 곧 의입이다. 또 계6) 중에서는 일곱 가지를 분별하니, 안식과 이ㆍ비ㆍ설ㆍ신ㆍ의식 및 의(意)이다.
나머지는 세 가지 음(陰)이 있고
무교(無敎)와 세 가지 무위가 있으니,
이를 소위 법입(法入)이라고 하고
또한 법계(法界)라고도 한다.
‘나머지는 세 가지 음이 있다’고 함은 통음(痛陰)7)과 상음(想陰)과 행음(行陰)이다.
‘무교와 세 가지 무위가 있다’고 함에서 [세 가지 무위란] 허공과 수연멸(數緣滅)과 비수연멸(非數緣滅)8)을 말한다.
이를 통틀어 법입이라고 하고, 또한 법계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이 법을 일컬어 음(陰)ㆍ계(界)ㆍ입(入)이라고 한다. 다만 음은
5) 감관에 의한 접촉을 의미한다.
6) 곧, 18계를 말한다.
7) 수음(受陰)이라고도 한다.
8) 범어로는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이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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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유위이고, 계와 입은 유위와 무위가 있다.
이미 음ㆍ계ㆍ입을 설명했으니, 이제 하나하나 그 모습을 설명하겠다.
계 중에서 하나는 볼 수 있는 것이고
열은 곧 유대(有對)라고 하며,
무기(無記)는 여덟 가지를 말하고
나머지는 선(善)과 불선(不善)이다.
‘계 중에서 하나는 볼 수 있는 것’이란 색계를 말한다. 이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도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가견(可見)이다. 나머지 열일곱 가지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열은 곧 유대라고 한다’고 함은 열 가지 계(界)는 유대라는 말이다. 안ㆍ색ㆍ이ㆍ성ㆍ비ㆍ향ㆍ설ㆍ미ㆍ신ㆍ세활이다. 이것은 각각 서로 대하고 각각 서로 장애한다. 처소에 만약 하나가 있으면 곧 둘은 없으므로 유대라고 한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무대(無對)라고 알아야 한다.
‘무기는 여덟 가지를 말한다’고 함은, 안ㆍ이ㆍ비ㆍ향ㆍ설ㆍ미ㆍ신ㆍ세활은 즐거운 것이라고 판별할 수 없고 또한 나쁜 과보라고 판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기(無記)9)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선과 불선이다’란 색ㆍ성ㆍ의ㆍ법과 6식(識)을 말한다. 선한 몸의 움직임[身動]은 선색(善色)이고, 악한 몸의 움직임은 불선색(不善色)이며, 나머지 색은 무기이다. 소리와 입의 움직임[聲口動]도 이와 같다. 깨끗한 마음의 7식계(識界)는 선이고, 불선한 번뇌가 상응하는 것은 불선이며, 나머지는 무기이다. 법계란 이른바10) 마음이 상응하는 것은 마음을 설명하는 것과 같으며, 상응하지 않는 것은「잡품」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유루는 열다섯 가지가 있다.
나머지는 둘이며, 셋은 셋에 있다.
9) 범어로는 avyākṛta. 아직 선(善)이나 악(惡)이 발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10) 원문의 식(識)을 위(謂)로 고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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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유(欲有) 중에 넷이 있고
열하나는 두 가지 유(有)에 있다.
‘유루는 열다섯 가지가 있다’고 함은, 내계(內界)의 다섯과 외계의 다섯 및 식계(識界)의 다섯을 말한다. 누(漏)가 그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둘이다’고 함은 의계와 의식계와 법계는 유루이거나 무루라는 것이다. 만약 누(漏)가 그쳐 머물면 이것이 유루이고, 달라지면 곧 무루이다.
‘셋은 셋에 있다’고 함은 의ㆍ법ㆍ식계는 세 가지 유(有), 곧 욕유ㆍ색유ㆍ무색유 중에서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욕유 중에 넷이 있다’고 함은 향ㆍ미ㆍ비식 및 설식을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욕유 중에 포섭될 뿐이다. 색ㆍ무색유에 있는 것은 아니니, 췌식(揣食)11)을 원하는 일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일체의 향ㆍ미는 그 성질의 췌식이다.
‘열하나는 두 가지 유에 있다’고 함은 욕유와 색유에는 11계(界)가 있다는 것으로, 안의 다섯과 색ㆍ성ㆍ세활 및 이들을 경계로 하는 식(識)이다. 이는 무색 중에는 없으니, 색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유각(有覺)과 유관(有觀)은 다섯이며
삼행(三行)은 셋이고 나머지는 없다.
유연(有緣)은 일곱이라고 알아야 하고
법입(法入)은 소소입(少所入)이다.
‘유각과 유관은 다섯’이라 함은 5식계(識界)는 각(覺)ㆍ관(觀)12)과 함께 하고 거칠기[麤] 때문에 각ㆍ관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11) 범어로는 kavaḍi(혹은 kavalī)-kārāhāra. 단식(段食)이라고도 한다.
12) 범어로는 각각 Vitarka, Vicāra. 각과 관은 선정 중에 나타나는 일종의 사유작용으로 선정이 깊어감과 더불어 소멸된다. 각은 어떤 대상이 문득 떠오르고 다시 이를 분별하는 일종의 ‘거친 사유’이며, 관은 이 각이 점점 미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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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은 셋’이라 함은 의ㆍ법ㆍ식계의 삼행이 만약 욕계나 초선(初禪)이라면 유각ㆍ유관이고, 만약 중간선(中間禪)13)이라면 무각(無覺)ㆍ소관(小觀)이며, 그 위라면 무각ㆍ무관이라는 말이다.
‘나머지는 없다’고 함은, 나머지 계는 각과 함께 하지도 않고 또한 관과 함께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니, 서로 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연은 일곱이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일곱 계는 유연이라는 것이다. 이 연(緣)이 있기 때문에 유연이라고 말한다. 마치 사람에게 자식이 있으면 이를 유자(有子)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그와 같다. 안식은 색을 연하고, 이식은 성을 연하고, 비식은 향을 연하고, 설식은 미를 연하고, 신식은 세활을 연하고, 의식은 모든 법을 연한다.
‘법입은 소소입이다’고 함은, 만약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이라면 이는 유연이고 나머지는 곧 무연이라는 것이다.
아홉은 불수(不受)이고 나머지는 둘이다.
위(爲)ㆍ무위가 함께하는 것은 하나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界)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홉은 불수’란, 수(受)는 색근에 속하는 것과 또한 근을 떠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이는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 가운데서 행함이 그쳐 머물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곧 불수이니, 그 중에서 9계(界)가 불수이다. 성ㆍ심(心)ㆍ법계는 그 가운데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둘이다’고 함은, 다섯 내계(內界)가 현재이면 이것은 수이고 그 중에서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물며, 과거ㆍ미래는 불수이니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그쳐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색ㆍ향ㆍ미ㆍ세활이 만약 근을 떠나지 않고 또한 현재이면 이것은 수이다. 마음과 마음에 속하는 법이 근 중에 그쳐 머무는 것과 같이 그 중에도 또한 그러하니 근을 떠
13) 초선과 제2선 사이에 있는 선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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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곧 불수이다.
‘위ㆍ무위에 함께하는 것은 하나이다’고 함은 하나의 법계가 유위와 무위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 세 가지14)는 유상(有常)이기 때문에 유위일 수가 없고, 나머지 법계는 무상이기 때문에 유위이다. 유위ㆍ무위를 합해서 시설(施設)하는 까닭에 이로써 위ㆍ무위가 함께 하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오로지 유위인 것은 열일곱 계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열일곱 가지의 계는 무상한 까닭에 일체가 유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로지 유위이다.
[문] 그와 같이 법상을 분별한다면, 법을 포섭하는 것이 자성(自性)인가, 타성(他性)인가?
[답] 자성이다.
[문] 어째서인가?
[답] 모든 법은 타성을 떠나
각자가 자기의 본성[性]에 머문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타성을 떠난다’고 함은,이른바 눈은 귀를 떠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일체법도 만약 여의면 이를 포섭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타성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기의 본성에 머문다’고 함은 눈은 스스로 눈의 본성에 머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법도 만약 머물러 있으면 이를 포섭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는 것을 시설하였다. 그 중에서 가견법(可見法)은 1계(界)ㆍ1음(飮)ㆍ1입(入)에 포섭된다. 일체의 법이 이와 같으니, 다시 다음에 이 뜻을 「계경품(契經品)」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14) 허공ㆍ수연멸ㆍ비수연멸의 셋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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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품(行品)
이미 모든 법의 자상(自相)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이제 법생(法生)에 대해 설명하겠다.
[문] 만약 모든 법이 자성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또한 마땅히 자력(自力)으로 생기는 것인가?
[답] 궁극에 이르러서는 능히 생하는 것이 없으니,
등려(等侶)15)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일체법은 스스로 생겨날 수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행(行)의 본성은 열등하여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병든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것과 같다.
[문] 만약 자력으로 일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일어나는가?
[답] 일체는 여러 연(緣)의 힘으로
모든 법이 마침내 생겨날 수 있다.
병든 사람이 다른 이의 도움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그것도 역시 이와 같다. 마음[心]과 동반해서 생기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다면, 이 마음에는 반드시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마음에 속한 법 등의 부류 및 서로 호응하지 않는 행이다.
마음[心]이란 의(意)이고 의란 식(識)이다. 실은 같은 것인데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 마음이 혹은 의(依) 혹은 연(緣) 혹은 시간으로 해서 일어나면, 그 마음은 마음에 속한 법 등의 취와 함께 생한다.
[문] 무엇이 마음에 속한 법 등의 취인가?
15) 범어로는 sahāya, 같은 부류를 말한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1권 > 2. 행품(行品) > 11 - 20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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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상(想)과 욕(欲)과 갱락(更樂)과 혜(慧)와
염(念)과 사(思)와 해탈과
경계에 있어서의 작의(作意)와
삼마제(三摩提)와 통(痛)이다.
‘상’이란 일이 일어날 때에 그 모습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요, ‘욕’이란 받아들일 연(緣)이 있을 때, 받아들이려고 욕구하는 것이다. ‘갱락(更樂)16)’이란 심(心)과 의(依)와 대상[緣]이 화합하여 서로 떠나지 않는 것이요, ‘혜’란 대상에 대하여 결정하고 살피는 것이다. ‘염’이란 대상에 대하여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요, ‘사’란 공덕과 악 및 함께 다른 것을 마음에서 조작하는 것이다. ‘해탈(解脫)’이란 대상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할 때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요, ‘작의’란 대상에 대하여 용맹 발동하는 것이다. ‘정(定)’이란 대상을 받아들일 때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은 것이요, ‘통(痛)17)’이란 낙(樂)과 불락(不樂) 및 이 두 가지와는 서로 다른 것[不苦不樂]으로서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이 생겨남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똑같이 함께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행하고
또한 항상 서로 응한다.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이것이 생겨남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다’고 함은 이 열 가지 법이 일체의 마음이 생길 때 함께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라고 하는 것이다.
‘똑같이 함께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행한다’고 함은 일체의 마음과 함께 동일한 연에 대해서 행하여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항상 서로 응한다’고 함은 각각 함께 갖추고 또 마음과 함께 항상 서로 응하여 함께 행한다는 것이다. 증감을 여의므로 ‘서로 응한다’고 한다.
16) 감관[入]이 대상을 접하는 것을 가리킨다.
17) 감수작용[受, vedan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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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마음에 속한 법이 소위 일체의 마음속에서 통하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이제는 통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겠다.
모든 근(根)과 각(覺)과 관(觀)과
신(信)과 의(猗)와 불방일(不放逸)과
진(進)과 호(護)와 뭇 번뇌는
혹은 때로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모든 근’이란 선근(善根)이니, 말하자면 무탐(無貪)ㆍ무에(無恚)ㆍ무우치(無愚癡)이다. 각(覺)이란 마음에 있어서의 거친 상속(相續)이요, 관(觀)이란 마음에 있어서의 미세한 상속이다. ‘신’이란 진실한 청정을 이루는 것이요, ‘의(猗)18)’란 착한 마음일 때 몸과 마음에서 악을 여의므로 경쾌하고 즐거운 것이다. ‘불방일’이란 선을 지을 때에 방편으로서 버리지 않는 것이요, ‘진(進)’이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호(護)19)’란 일을 하는데 있어서 행하지 않는 것으로써 행하고 구하지 않는 것으로써 구하는 것이니, 스스로 조작하지 않는 것[無爲]이다. ‘뭇 번뇌’란 마치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들 법은 일체의 마음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때로 서로 응하기도 하고 혹은 때로 서로 응하지 않기도 한다.
[문] 어째서 ‘마음에 속한 것’이라 하는가?
[답] 의(意)란 그것을 심(心)이라고 부르는데, 그 권속이므로 ‘마음에 속한 것’이라 한다.
이미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의 법상(法相)에 대하여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생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불선(不善)의 심품(心品) 중에는
마음에 속한 것이 스물하나이다.
예오(穢汚) 가운데 둘을 뺀 것은
18) 범어로는 praśrabdhi. 경안(輕安)이라고도 한다.
19) 범어로는 upekṣa. 사(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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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의 비불선(非不善)이다.
‘불선의 심품 중에는 마음에 속한 것이 스물하나이다’고 함에서 불선이란 마음에 욕계의 모든 번뇌가 생기는 것으로, 욕계의 신견(身見)ㆍ변견(邊見)은 제외된다. 이는 불애(不愛)의 과(果)를 움직여 만들기 때문에 불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심품 가운데에는 스물한 가지의 마음에 속한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이른바 10대지(大地)와 각(覺)ㆍ관(觀)ㆍ두 가지 번뇌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수(睡)ㆍ조(調)ㆍ불신(不信)ㆍ방일(放逸)ㆍ해태(懈怠)이다.
‘예오(穢汚) 가운데 둘을 뺀 것은 욕계의 비불선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심품은 곧 욕계의 더러움이지만 이것은 불선은 아니라는 것이고, 신견ㆍ변견이 서로 응하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들 품 중에서는 열아홉 가지 마음에 속한 법이 있음을 알아야 하니, 무참과 무괴를 빼면 오로지 불선이기 때문이다.
선(善)과 불공(不共)은 스물이고
무기(無記)에는 열둘이 있다.
회(悔)와 면(眠)에서 마음은
이것을 능히 더한다.
‘선과 불공은 스물이다’고 함에서 ‘불공’이란 마음에 오로지 하나의 무명번뇌가 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것은 스무 가지 심수이다. 하나의 번뇌를 빼고 나머지는 앞에서와 같이 설명한다. ‘선’이란 깨끗한 마음이 능히 애과(愛果)를 움직여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마음과 함께하는 것이 스무 가지임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10대지ㆍ각ㆍ관ㆍ신ㆍ의ㆍ불방일ㆍ선근ㆍ호ㆍ참ㆍ괴이다.
‘무기에는 열둘이 있다’고 함은 더럽지 않은 심품 중에는 열두 가지 마음에 속한 법이 있다는 것이니, 즉 10대지와 각과 관이다.
‘회와 면에서 마음은 이것을 능히 더한다’고 했는데, ‘회(悔)’란 일이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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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지 않는 것을 한(恨)하는 것이니, 이것은 선ㆍ불선으로서 그들이 서로 응하는 심품 중에서 회를 증가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면(眠)’이란 멸심(滅心)과 오로지 합하여 자재(自在)하지 못하므로 일컬어 면이라고 한다. 이것은 일체의 다섯 품20) 가운데서 그것이 생겨나서 모두 증익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회와 면이 작용하지 않는 세 품21) 가운데서는 이 둘을 증가시킨다.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이는 욕계의 심상속(心相續)을 설명한 것이다. 색계는 어떠한가?
[답] 초선(初禪)은 불선(不善)을 여의고
나머지는 욕유(欲有)와 같다.
선(禪)의 중간은 각(覺)이 제외되나니
위에서의 관(觀)도 역시 그러하다.
‘초선은 불선을 여의고 나머지는 욕유와 같다’고 했는데, 초선에서는 불선이 없고 그 중에는 네 가지 품이 있으니, 선(善)ㆍ더러움ㆍ불공ㆍ무기이다. 이는 욕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선은 스무 가지, 무기는 열두 가지, 더러움[穢汚]22)은 열아홉 가지이며, 이미 불선은 여의었다. 또한 무참과 무괴를 여의고 오로지 불선이기 때문에 불공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선의 중간은 각이 제외된다’고 함은 중간선(中間禪)23)에서는 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각이 제외된 것이고 나머지는 초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위에서의 관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제2ㆍ제3ㆍ제4선에서는 다시 관이 없고 나아가 무색계 역시 그 안에서는 일체의 관이 제외된다는 것이다. 각은
20) 불선ㆍ신견 등의 불선이 아닌 더러움ㆍ선ㆍ불공무명ㆍ무기의 다섯을 말한다.
21) 선ㆍ불선ㆍ무기의 셋을 말한다.
22) 탐ㆍ만ㆍ의(疑)의 셋을 말한다.
23) 초선의 유각유관과 제2선의 무각무관 사이에 있는 무각유관의 경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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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미 제거된다.
이미 마음에 속한 법이 동반해서 생하는 것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색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극미(極微)는 네 근(根)에 있어서
열 가지라고 알아야 하니,
신근(身根)에는 아홉이 있고
나머지에는 여덟이 있으니 소위 향이다.
‘극미는 4근에 있어서 열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이른바 극미가 눈에 있어서는 곧 열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종(地種)ㆍ수종(水種)ㆍ화종(火種)ㆍ풍종(風種)ㆍ색종(色種)ㆍ향종(香種)ㆍ미종(味種)ㆍ세활종(細滑種)ㆍ안근종(眼根種)ㆍ신근종(身根種)이다. 이ㆍ비ㆍ설의 극미도 역시 이와 같다.
‘신근에는 아홉이 있다’고 함은 이른바 나머지 신근의 극미는 아홉 가지24)라는 것이다. 그것에는 하나의 근종이 있으며, 나머지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에는 여덟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나머지 근이 아닌 색 중에는 극미로서 여덟 가지25)가 있다는 것이다.
[문] 이러한 극미는 어느 계(界)를 말하는가?
[답] 향계를 말한다. 욕계에서는 냄새가 있지만 색계에서는 냄새를 여읜다. 그들 일체는 향ㆍ미의 요소가 제외되며, 나머지 종은 욕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앞에서 이미 만약 마음이 생하면 그 중에 반드시 마음에 속한 법이 생하고 나아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도 생한다고 말했으며, 거기에서 이미 마음에 속한 법은 설명했다. [그렇다면] 심불상응행은 무엇인가?
24) 지ㆍ수ㆍ화ㆍ풍ㆍ색ㆍ향ㆍ미ㆍ촉ㆍ신근종의 아홉을 말한다.
25) 지ㆍ수ㆍ화ㆍ풍ㆍ색ㆍ향ㆍ미ㆍ촉의 여덟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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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일체의 유위법은
생(生)ㆍ주(住)ㆍ변이(變異)ㆍ괴(壞)이다.
일체의 유위법에는 각각 네 가지 상(相)이 있으니, 생ㆍ주ㆍ이ㆍ괴이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므로 ‘생’이요, 이미 일어나 스스로 일을 세우므로 ‘주’이다. 이미 머물러 세력이 쇠퇴하므로 ‘이’이고, 이미 달라져서 사라지므로 ‘괴’이다. 이러한 모습을 심불상응행이라고 한다.
[문] 만약 일체의 유위법에 각각 네 가지 모습이 있다면, 이것이 모습이 되거늘 다시 모습이 있어야 하는가?
[답] 이것에도 역시 네 가지 모습이 있다. 그 모습 중에 나머지 네 가지 모습이 함께 생하니, 생은 생이 되고 주는 주가 되며, 이는 이가 되고 괴는 괴가 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끝이 없어야 할 것이다.
[답] 전전(展轉)하여 서로 상(相)이 된다.
이 상은 각각의 상이 된다. 생생(生生)은 각각의 상이 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주(住住)는 각각의 상이 머무는 것이고, 이이(異異)는 각각의 상이 달라지는 것이고, 괴괴(壞壞)는 각각의 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뒤의 네 가지 상은 각각 하나의 법을 행하고, 앞의 네 가지 상은 각각 여덟 법을 행한다. ‘생’이란 여덟 법을 행함이니, 앞의 셋과 뒤의 넷과 그리고 그 자신의 법이다. 나머지도 역시 이와 같다.
이미 모든 행(行)의 동반을 설명했다. 동반을 말미암아 생하는 것을 이제 설명하겠다.
소작(所作)과 공(共)과 자연과
보편과 상응과 보(報)
이들 여섯 가지의 인(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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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어 유위법을 낳는다.
일체의 인은 모두 여섯 가지 원인 중에 존재하며, 이들 인은 모든 유위법을 낳는다.
여기에서 ‘소작인(所作因)26)’이란 법이 생할 때에 장애(障礙)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 이것에 연유하므로 서로 비슷하지 않은 법을 낳으니, 마치 땅에 연유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것과 같다.
‘공인(共因)27)’이란 모든 행에 각각의 상(相)이 동반하여, 이것에 연유하므로 생기는 것으로, 마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과 심불상응행 및 극미의 요소와 같다.
‘자연인(自然因)28)’이란 그 스스로 이미 서로 비슷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선을 닦으면 선이 생하고, 불선을 닦으면 불선이 생하고, 무기를 닦으면 무기가 생하는 것과 같다. 마치 물(物)의 요소가 그 종류의 상인(相因)을 따르는 것과도 같다.
‘일체변인(一切遍因)29)’이란 이른바 모든 번뇌가 변하여 상속하면서 생하는 것으로, 마치 견아(見我)로써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견에 연유하므로 아(我)에 대해 유상ㆍ무상이라고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며, 음상(陰相)을 비방하여 살펴 들어가고 헤아려 집착하며, 음상에 대해 의심[猶豫]하여 상(常)ㆍ낙(樂)ㆍ정(淨) 등이 있다고 받아들인다. 모든 번뇌를 생하는 것도 이와 같다. 모든 일체변(一切遍)에 대한 설명은 「사품(使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상응인(相應因)30)’이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각각의 힘으로 하나의 대상(緣) 가운데서 일시에 행상(行相)하는 것이니, 떠나면 곧 생하지 않는다.
‘보인(報因)31)’이란 이른바 행(行)이 생(生) 가운데 생하여 과(果)를 변천
26) 범어로는 kāraṇa-hetu. 능작인(能作因)이라고도 한다.
27) 범어로는 sahabhū-hetu. 구유인(俱有因)이라고도 한다.
28) 범어로는 sabhāga-hetu. 동류인(同類因)이라고도 한다.
29) 범어로는 sarvatraga-hetu. 변행인(遍行因)이라고도 한다.
30) 범어로는 saṃprayukta-hetu. 양자가 서로 조력하는 관계에 있어서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그 결과가 되는 것을 사용과(士用果)라고 한다.
31) 범어로는 vipāka-hetu. 이숙인(異熟因)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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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만든 것이다. 선에 애과(愛果)가 있고 불선에 불애과가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에 연유하여 생한다.
이미 모든 인을 설명했으니, 이제 모든 법이 인을 따라서 그 가운데서 생하는 것임을 설명하겠다.
마음이 보(報)로 인해서 생하는 것과
마음에 속한 것과 번뇌는
다섯 가지 인으로부터
흥기한다고 알아야 한다.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보로 인해서 생기는 것과 모든 번뇌는 이들 다섯 가지 인을 따라서 생긴다’고 했는데, 보인(報因)이 생기는 것은 소작인에 따라 생긴다. 그것이 생겨날 때에는 서로 비슷하고 서로 비슷하지 않은 사물이 장애하지 않으므로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공인(共因)에 따라 생하니, 힘을 수반하므로 생하는 것이다. 그들 각각의 상이 동반하고 또한 심불상응행이 함께 동반한다. 그리고 자연인(自然因)을 따라 생한다. 그것은 서로 비슷하며, 앞에 생한 것은 무기법(無記法)이다. 그리고 상응인에 따라 생하니, 함께 일시에 하나의 대상 가운데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인에 따라 생한다. 그것은 선ㆍ불선이니, 말하자면 이것의 결과는 더러움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으로서 보인을 제외한 것이고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체변인(一切遍因)에 따라 생한다. 이것에서 연유하므로 생하는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인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과 저것 불상응과
모든 나머지 상응법과
그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은
네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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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 그것의 불상응’이란 색에 있어서 보(報)에 따라 생하는 것과 심불상응행을 말한다. 이것은 네 가지 인에 따라 생하니, 소작인과 공인과 보인과 자연인이다.
더러움의 색과 심불상응행도 역시 네 가지 인에 따라 생하니, 소작인과 공인과 자연인과 일체변인이다.
‘모든 나머지 상응법과 그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은 네 가지 인에 따라서 생한다’고 함은 나머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 및 최초의 무루를 제외한 것도 또한 네 가지 인, 곧 소작인ㆍ공인ㆍ자연인ㆍ상응인을 따라 생함을 말한다.
나머지 불상응은
같이 생하는 것이 셋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나머지 상응으로서
처음 생기는 무루법도 [마찬가지이다].
불상응의 앞에서 설한바 나머지에서 자연인이 있는 것은 초무루를 제외한다. 이것은 세 가지 인에 따라서 생하니, 소작인과 자연인과 공인이다.
초무루의 상응도 역시 세 가지 인을 따라 생하나니, 소작인과 공인과 상응인이다. 이것들에는 앞의 자연인이 없다.
그 중에서 상응하지 않는 것은
응당 두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하니,
하나의 인 가운데에서
생하는 것은 결코 없다.
‘그 중에 불상응인 것은 응당 두 가지 인을 따라서 생한다’고 함은 「초무루품」 중에서 색과 심불상응행은 두 가지 인, 곧 소작인과 공인을 따라서 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일체의 유위를 설명했다. 그 중에서 하나의 인만을 따라 생하는 것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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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인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인에 대하여 여래께서는 모든 법상을 결정코 알고 깨달음의 힘으로 교화하여 설명하셨다. 이제부터는 연(緣)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차제(次第)와 또한 연연(緣緣)과
증상(增上)과 그리고 인(因)
법은 네 가지 연을 따라 생하나니
밝은 지혜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 것이다.
‘차제연(次第緣)32)’이란 하나하나의 마음마다 생기고 상속하여 끊임이 없는 것이다. ‘연연(緣緣)33)’이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의 경계이다. 그것을 연하여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생긴다. ‘증상연(增上緣)34)’이란 곧 소작인으로서 일체의 만물이다. 만물이 생길 때 장애를 만들지 않는다. 단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니, 이것을 증상연이라고 말한다. ‘인연’이란 공인ㆍ상응인ㆍ자연인ㆍ보인ㆍ일체변인이다.
이미 모든 연을 설명했다. 이제 모든 법이 연을 따라 생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마음과 그리고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겨난다).
두 가지 정수(正受)35)는 세 가지에 대하여 생기고
나머지는 두 가지에 대하여 생긴다.
32) 범어로는 samanantarana-pratyaya. 앞의 찰라심이 뒤의 찰라심의 원인이 된다고 간주되는 연을 말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도 한다.
33) 범어로는 ālambana-pratyaya. 가깝거나 먼 대상이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소연연(所緣緣)이라고도 한다.
34) 범어로는 adhipati-pratyaya. 일체의 간접적인 연을 말한다.
35) 범어로는 samādhi 혹은 samāpatti. 삼매(三昧)를 말한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1권 > 2. 행품(行品) > 21 - 30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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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그리고 모든 마음에 속한 것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고 함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네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는 것이다. 앞에서 열고 인도하므로 생겨나니, 이것은 그 차제연(次第緣)이고 경계는 곧 연연(緣緣)이 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체의 법은 증상연이다.
‘두 가지 정수는 세 가지 연을 따라 (생겨난다)’고 함은 무상정(無想定)36)ㆍ멸진정(滅盡定)37)은 세 가지 연에 대하여 생긴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정에 드는 마음은 곧 차제연이다. 그 가운데 자기 경지[地]의 전생 공덕은 그 인연이다. 그리고 나머지 함께 생하는 생ㆍ주ㆍ이ㆍ괴도 역시 그 인연이다. 그 증상연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머지는 두 가지 연에 대하여 생긴다’고 함은 그것들을 여읜 나머지 심불상응행과 색은 인연과 증상연의 두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긴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모든 법은 그것을 행한다고 말하는가?
[답] 많은 법이 하나의 법을 생하고
한 법도 또한 능히 많은 법을 생한다.
연행(緣行)ㆍ소작행이니,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많은 법이 하나의 법을 생하고, 한 법도 역시 능히 많은 법을 생한다’고 함은 어느 한 법도 자력으로 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법은 많은 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많은 법도 역시 하나의 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연행ㆍ소작행이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36) 범어로는 asaṃjñi-samāpatti. 일체의 심작용이 모두 그치는 선정의 경지를 말한다.
37) 범어로는 nirodha-samāpatti. 6식의 심작용이 그친 경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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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업품(業品)
이미 모든 행이 자기의 본성[性]과 모든 인연을 말미암아 생한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제 여기에 인이 있으면 능히 과의 종류를 장엄하게 꾸미고, 여러 가지의 차별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이것을 설명하겠다.
업이 능히 세간을 장엄하니,
취(趣)에 나아가고 처처(處處)에 존재한다.
이로써 마땅히 업을 생각하고,
세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
‘업은 능히 세간을 장엄하니, 취에 나아가고 처처에 존재한다’고 함은 3세(世)에는 5취(趣)38) 가운데에서 갖가지 몸을 차별하는 꾸밈이 있으나, 이 세간을 꾸미는 일은 오직 업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마땅히 업을 생각하고, 세간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을 구해야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ㆍ의업[意]은
존재마다 생겨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행 생겨나서
여러 가지 몸을 장식한다.
‘신업과 구업ㆍ의업은 존재마다 생겨나서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함은 신ㆍ구ㆍ의업이 생겨나고 생겨나서[生生] 조작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모든 행 생겨나서 여러 가지 몸을 장식한다’는 이러한 업의 모습[相]을 이제 간단히 설명하겠다.
신업에는 교(敎)와 무교(無敎)가 있으니
둘이 함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38) 범어로는 pañca-gati. 하늘ㆍ인간ㆍ축생ㆍ아귀ㆍ지옥의 다섯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 아수라를 더해 6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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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업도 역시 이와 같으나
의업은 오직 무교뿐이다.
‘신업에는 교와 무교가 있으니, 둘이 함께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신업의 본성[性]은 두 가지, 즉 유교성과 무교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유교(有敎)39)는 몸의 움직임이니, 이것은 선ㆍ불선ㆍ무기이다. 선은 선한 마음[善心]에 따라 생기고, 불선은 불선한 마음에 따라 생하며, 무기는 무기심에 따라 생한다. 무교(無敎)40)는 업을 짓는 일이 견고함으로 해서 다른 마음속으로 옮겨 이 종자가 생하는 것이다. 선한 수계인(受戒人)의 불선과 무기의 마음 중에도 그것은 오히려 서로 따르고, 악업인에게는 악계(惡戒)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구업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함은 구업의 본성도 역시 두 가지라는 것이다.
‘의업은 오직 무교뿐이다’고 함은 의업의 본성은 오로지 무교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며 생각[思]이 미세하게 상속하기 때문이다.
[문] 이들 다섯 가지 업은 몇 가지가 선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
[답] 교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
의(意)의 무교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에서는 무기를 말하지 않는다.
‘교는 마땅히 세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선과 불선과 무기이다’고 함은 신ㆍ구의 교에는 선ㆍ불선ㆍ무기의 세 가지가 있음을 말한다. 그 중에서 선의 신교(身敎)란 보시를 실천하고 계를 지니는 등의 선한 마음으로 만든
39) 범어로는 vijñāpti.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40) 범어로는 avijñāpti. 행위로 드러나지 않고 습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무표(無表)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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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움직임이다. 불선의 신교란 살생ㆍ불여취ㆍ비범행 등 불선한 마음으로 만든 몸의 움직임이다. 무기의 신교란 무기의 마음으로 만드는 몸의 움직임으로, 마치 위의(威儀)ㆍ공교(工巧)ㆍ기술(技術)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로 하는 선이란 헛되지 않은 말ㆍ요익상응(饒益相應)의 시기에 맞추어 하는 말 등과 같이 선한 마음에 따라 생기는 구업이다. 불선이란 망언ㆍ양설ㆍ악구ㆍ기어 등과 같이 선하지 않은 마음에서 생기는 구업이며, 무기란 무기의 마음을 따라 생기는 구업이다.
‘의(意)의 무교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의업의 무교도 역시 세 가지이니, 선ㆍ불선ㆍ무기라는 것이다. 선한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곧 선이요, 불선한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불선이며, 무기의 마음에 상응하는 생각은 무기이다.
‘나머지에서는 무기를 설하지 않는다’고 함에서 나머지는 두 가지가 있으니, 신무교(身無敎)와 구무교(口無敎)이다. 저 두 가지는 선과 불선이고 무기는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기심이 약하므로 그것은 강력한 업을 생겨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변하여 달라진 마음 가운데 저것과 서로 비슷하고 서로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신무교와 구무교에는 무기가 없다.
[문] 무기업은 어떠한 성품이고 어느 곳에 얽매이는가?
[답] 색유(色有)의 무기는 두 가지이니
은몰(隱沒)과 불은몰(不隱沒)이다.
은몰은 색에 묶여 존재하고
나머지는 두 가지 계(界)에 존재한다.
‘색유의 무기는 두 가지이니 은몰과 불은몰이다’고 함은 신(身)ㆍ구(口)의 업은 색의 성질이니, 업으로써 색의 성질을 삼기 때문에 두 가지 은몰과 불은몰이 된다. 은몰이란 말하자면 번뇌에 덮이고 또한 모든 번뇌를 따라 생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불은몰이다.
‘은몰은 색에 묶여 존재한다’고 함은 은몰과 같은 것은 오로지 색계만을 얽어맨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유로써 끊는 번뇌는 능히 신ㆍ구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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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욕계 사유단(思惟斷)의 번뇌는 오로지 불선이니, 불선 번뇌로서는 무기업을 일으키지 못한다.
‘나머지는 두 가지 계에 존재한다’고 함은 불은몰 무기업도 또한 욕계에 묶여 존재하고 또한 색계에 묶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업(意業)은 마음[心]을 설명한 것과 같으니, 다른 곳에서 분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신ㆍ구업의 무교는
선과 불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상(相)이 있으니 선(禪)과 무루(無漏)와
조어위의계(調御威儀戒)이다.
‘신ㆍ구업의 무교는 선과 불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업이 만약 그 중에서 색의 성품이거나 무교의 성품이라면 그것은 선과 불선이라는 것이다.
‘3상이 있으니 선과 무루와 조어위의계이다’고 함은 무교계(無敎戒)에 3상이 있으니 무루와 선생(禪生)과 조어위의라는 것이다. 무루란 계(戒)의 도(道)와 함께 갖추어 행하는 것으로, 이른바 정어ㆍ정업ㆍ정명이다. 선생이란 이른바 선과 함께 행하여 악을 여읜 것이며, 조어위의계란 욕계의 계를 말한다.
무교로서 욕계에 있는 것과
교로서 두 가지 유(有)에 의지하는 것은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며
나머지는 마음과 함께 한다고 설명한다.
욕계의 무교는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왜냐 하면 계를 받으면 계는 비록 선심ㆍ불선심ㆍ무기심에 따라서 행한다고 해도 선ㆍ불선ㆍ무기와는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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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는 또한 욕계에 있고 또한 색계에도 있으나, 다만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색계의 무교와 무루는 마음과 함께 한다. 그것은 왜냐 하면 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이것은 그 밖의 마음에서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업을 분별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업을 성취하는 것을 설명하겠다.
무루의 계와 율의(律儀)는
견제(見諦)로써 성취하는 것이다.
선생(禪生)으로써 선(禪)을 얻으며
지계(持戒)는 욕계에 생하기 때문이다.
‘무루의 계와 율의는 견제로서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견제란 이른바 무루견(無漏見)으로 성제(聖諦)를 보는 것을 말하며, 처음 무루견이 생할 때에 욕계의 고제(苦諦)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은 무루계를 성취한다.
‘선생으로써 선을 얻는다’고 함은 선을 얻으면 선계(禪界)를 성취한다는 것이요, ‘지계는 욕계에 생하기 때문이다’고 함은 만약 계를 받는다면 그 때문에 욕계의 계(戒)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미 간략하게 성취를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얻을 수 있는 것을 설명하겠다.
이른바 위의계(威儀戒)에 머물고
무교가 현재에 존재하면
항상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혹은 다시 다해도 과거이다.
‘이른바 위의계에 머물고 무교가 현재에 존재하면 항상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만약 위의에 머물면 언제라도 무교계를 성취하며,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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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끝까지 여의지 않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연관된다는 것이다.
‘혹은 다시 다해도 과거이다’고 함은 혹은 성취된 과거의 무교계는 다 지난 것이라 해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른바 처음이 이미 다하면 이것은 과거를 성취하는 것이다. 과거란 그것을 임시로 부르기를 다한 것[盡]이라고 한다.
만약 교를 만드는 것이 있으면
즉시 중세(中世)를 세운다.
과거를 이루는 것은
이미 다해도 버리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교를 만드는 것이 있으면 즉시 중세를 세운다’고 함은 만약 신(身)ㆍ구(口)의 교를 만들면 그때 곧 현재의 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임시로 중세라고 이름한다.
‘과거를 이루는 것은 이미 다해도 버리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만약 그 교가 이미 다해도 잃지 않고 그때 곧 과거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소위 선무교(禪無敎)를 얻으면
멸(滅)과 미지(未至)를 성취한다.
중간에 만약 정수(正受)에 들어가면
교도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소위 선무교를 얻으면 멸과 미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만약 선을 얻으면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과 같이 계를 성취해도 역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만약 정수에 들어가면’이라고 했는데, 현재를 임시로 중간이라고 부르니, 그가 만약 입정(入定)하면 그때 현재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정[定]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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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 역시 전에 말한 것과 같다’고 함은 위의계에 머물러 만약 교를 만들면 그때 현재의 교를 성취하고, 만약 교를 만들지 않으면 그때 교를 성취하지 못하며, 만약 다해도 잃지 않으면 그때 과거를 성취하고, 만약 다하지 않거나 다해도 곧 잃으면 그때 성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계(禪戒)에 머물러도 이와 같다.
모든 성취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도를 얻으면 미생(未生)과 같다.
중간은 도심(道心)에 있고
다해도 전세(前世)를 버리지 않는다.
‘모든 성취를 마땅히 알아야 하니 도를 얻으면 미생도 있다’고 함은 모든 득도(得道)는 미래 무루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루심과 같이 계를 성취함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중간은 도심에 있다’고 함은 이미 도(道)와 합하여 만약 정(定)에 들어가면 그때 곧 현재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다해도 전세를 버리지 않는다’고 함에서 전세라는 것은 곧 과거인데, 그는 이 무교에서 만약 다해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과보를 얻고 물러나는 자가 과거의 무교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만약 악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지으면
계(戒)에 서서 두 가지를 성취한다.
그 번뇌에 묶여지는 바가 되나니
이미 다하면 다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악하고 선하지 못한 것을 지으면 계에 서서 두 가지를 성취한다’고 함은 이와 같이 위의계에 머물고 혹은 선계에 머물고 혹은 무루계에 머물고 혹은 불선탁중(不善濁重)에 얽매이면 그때 불선 중에서 무교를 일으키고 곧 교와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만약 탁중에 얽매이지 아니하면 무교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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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키지 않는다.
[문] 어느 때에 무교를 성취하는가?
[답] 그 번뇌에 얽매이게 될 때이다. 번뇌에 얽매임에 따라 성취할 수 있다.
‘다하면 이미 다했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번뇌가 만약 다하면 교와 무교도 역시 따라서 다한다는 것이다.
불위의계(不威儀戒)에 처하여
무교가 성취된 가운데에
악으로 해서 불애(不愛)의 과(果)가 있으니
또한 과거가 다하게 된다.
‘불위의계에 처하여 무교가 성취된 가운데에 악으로 해서 불애의 과가 있다’고 함은 만약 불위의계에 머물면 그때 불선의 무교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불선은 불애의 과라고 이름한다.
‘또한 과거가 다하게 된다’고 함은 멸하여 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교(有敎)가 나타날 때에
그 가운데서 성취한다고 말한다.
또한 과거도 다하여
선(善)은 위의 경우와 다르다.
‘유교가 나타날 때에 그 가운데서 성취한다고 말한다. 또한 과거도 다한다’고 함은 교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선은 위에서와 다르다’고 함은 위의계에 머무는 것과 같이 불선을 설명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불위의에 머물면 선은 저 선심(善心)에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처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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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중세(中世)를 성취한다.
또한 과거는 다하여
혹은 둘 혹은 하나라고 말한다.
‘처중’이라는 것은 위의도 아니고 또한 불위의도 아니니, 이 거중용(居中容)에 머무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 선에 머물면 선이라고 한다. 혹은 또 둘이니, 유교와 무교이다. 혹은 오로지 교요 혹은 선과 불선이며 혹은 하나이다.
[문] 무엇이 색계의 계(戒)를 얻고, 무엇이 버리는가? 근본선(根本禪)41)이 얻는다고 하는가, 아니면 나머지 방편이라고 하는가?
[답] 오로지 근본선만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색계 중의 선한 마음[善心]은
선정[定]의 위의계를 얻는다.
이것을 잃으면 그것도 잃는다.
무루에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다.
‘색계 중의 선한 마음은 선정의 위의계를 얻는다’고 함은 만약 색계의 선한 마음을 얻으면 혹은 욕망을 여의거나 혹은 욕망을 여의지 않았거나 그 모두는 색계의 계를 얻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색계의 선한 마음 중에는 계(戒)가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다.
[문] 어떻게 하여야 잃는가?
[답] 이것을 잃으면 저것도 잃는다.
[문] 무루란 무엇인가?
[답] 무루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다. 무루계는 무루의 여섯 가지 지(地)의 마음으로 함께 얻는다.
[문] 어떻게 하여야 잃는가?
[답] 이것을 잃으면 저것도 잃는다. 6지(地)는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4선(禪)이다.
41) 4선(禪)을 가리킨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1권 > 3. 업품(業品) > 31 - 40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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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 계는 어느 때에 버리는가?
[답] 위의계로써 조어(調御)하고
다섯 시기[五時]에 이것을 버려야 한다.
선정에서 생기는 무루는
두 때[二時]라는 것이 깨달으신 분의 말씀이다.
‘위의계로써 조어하고 다섯 시기에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함은 위의계는 다섯 가지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다섯 가지 때란 도를 파할 때, 계를 범할 때, 죽을 때, 사견(邪見)을 더할 때, 법을 다 없애 버릴 때이다.
‘선정에서 생기는 무루는 두 때라는 것은 깨달으신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선계(禪戒)는 두 가지 때에 버리나니 물러날 때와 위의 경지에 태어날 때이고, 무루계도 역시 두 가지 때에 버리나니 물러날 때와 과보를 얻을 때이다.
[문] 나머지 업은 어떻게 하여 버려야 하는가?
[답] 불선계(不善戒)에 둘이 있으니
선(善)한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
더러워질 때는 오직 한 번
업이 마음[意]에 머무를 때이다.
‘불선계에 둘이 있다’고 함은 방편을 짓지 않을 때와 죽을 때이다.
‘선한 무색계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선한 무색계의 업도 두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선근을 끊을 때와 위에 생겨날 때이다.
‘더러워질 때는 오직 한 번 업이 마음에 머무를 때이다’고 함은 더러운 의업(意業)은 한 때에 버린다는 것이니, 욕심을 여읠 때이다.
이미 모든 업의 본성과 성취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와 같은 업을 세존께서 여러 가지로 분별하셨으니 지금부터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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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업이 고통스러운 결과[苦果]를 준다면
그것은 악행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 악행[意惡行]을 지어 불려 나가는 것으로는
탐과 진에와 사견이 있다.
‘만약 업이 고통의 과보를 준다면 이는 악행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지은 업이 선하지 못한 것을 말하나니 이것을 모두 악행이라고 말한다. 선하지 못하면 고의 과보를 받는다.
‘뜻으로 악행을 지어 불려 나가는 것으로는 탐과 진에와 사견이 있다’고 했는데, 선하지 못한 사원(思願)이 곧 뜻으로 짓는 악행이고, 또 위의 세 가지를 뜻으로 짓는 악행이라고 말하나니 탐과 진에와 사견이 그것이다.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은 묘행(妙行)이니
가장 뛰어나신 분의 말씀이다.
그 중에 최상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10도(道)라고 한다.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은 묘행이니 가장 뛰어나신 분의 말씀이다’고 했는데, ‘이것과 서로 다른 것’이란 모든 선업과 무탐과 무에(無恚)와 정견이다.
‘그 중에서 최상이 있으니, 이를 이름하여 10도라고 한다’고 함은 불선업 중에서 최상의 업이라면 이를 업도라고 설하나니, 살생ㆍ불여취(不與取)ㆍ사행(邪行)ㆍ망언(妄言)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기어(綺語)ㆍ탐(綺語)ㆍ에(恚)ㆍ사견(邪見)이다.
그 중에서 살생은 중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중생을 버리는 마음으로 다른 목숨을 끊는 방편을 구하여 업을 이루는 것이다. 불여취(不與取)는 물건이 다른 자의 소유여서 다른 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어지지 않는 것을 홀연히 취하는 것이다. 사행(邪行)은 부녀자가 타인의 소유인 줄 알면서도 길에서 범하거나 또는 자신의 소유이지만 때때로 비도(非道)를 범하는 것이다. 망언(妄言)은 다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기만하여 말하는 것이다. 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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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舌)은 다른 이를 미워하여 친한 모양을 버린 채 하는 수단의 말이다. 악구(惡口)는 화가 나서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스럽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기어(綺語)는 선하지 않은 마음에서 의미 없이 하는 말이다. 탐(貪)은 욕계의 욕심이고, 에(恚)는 분노이며, 사견(邪見)이란 인과를 비방하는 것이다.
이 역시 업도(業道)이다. 나머지는 업도가 아니니, 이른바 이러한 행(行)의 수단을 구하는 것과 음주 등이다. 바르지 못한 업을 생각하고 원함은 곧 근본업이다. 이로써 그 열 가지를 도라고 한다.
업은 현법(現法)의 보(報)가 되고
다음 생에서 받는 과보이다.
뒤의 과보도 또한 그러하니
나머지는 곧 부정(不定)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업이 능히 현법의 과보를 이룰 때[時]는 곧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문]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 가지 업인 낙보ㆍ고보ㆍ불고불락보가 있으니 그것은 무엇인가?
[답] 욕계 중의 선(善)과
그리고 색계의 세 가지 경지[地]는
마땅히 낙보(樂報)가 되고
받는 것은 정(定)과 부정(不定)이 된다.
‘욕계 중의 선과 색계의 세 가지 경지는 마땅히 낙보가 된다’고 함은 욕계의 선업은 과보를 생하는 데 낙과 함께 하고, 색계의 초선ㆍ제2선ㆍ제3선도 역시 과보를 생하는 데 낙과 함께 한다. 이것을 통틀어 낙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이것도 역시 정해진 것인가?
[답] 받는 것은 정해진 것도 있고 정해지지 않은 것도 있다. 혹은 정해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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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혹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 네 가지 지(地) 중의 선(善)한 모든 것은 낙보를 지닌다.
불고불락을 생하는 것은
최상의 선한 경지이다.
고보(苦報)를 받는다면
이는 불선업이라고 말한다.
‘불고불락을 일으키는 것은 최상의 선한 경지이다’고 함은 제4선의 경지로서 선업과 무색 중에 있는 불고불락의 과보를 말한다. 이것은 과보를 일으키되 불고불락과 함께 하지만 그 중에서 즐거운 느낌[樂痛]은 없다.
‘고보를 받는다면 이는 불선업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불선업은 고의 과보이니 반드시 괴로운 느낌[苦痛]과 함께 한다. 과보를 받는 것은 역시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위에서와 같다.
[문] 세존께서는 네 가지 업을 말씀하시어 흑흑보ㆍ백백보ㆍ흑백흑백보ㆍ불흑불백무보(不黑不白無報)라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답] 색계 중에 선업이 있으니
백업과 백보가 있다.
흑백은 욕계에 있으니
흑보는 부정(不淨)이라고 한다.
‘색계 중에 선업이 있으니 백업과 백보가 있다’고 함은 색계의 선업은 곧 백보이다. 오로지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불선(不善)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극묘(極妙)의 과보이니, 이를 백업이요 백보라고 한다.
‘흑백은 욕계에 있다’고 함은 욕계의 선업은 흑백업과 흑백의 과보가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는 불선에 파괴되고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흑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섞여서 애ㆍ불애(不愛)를 그 과보로 받으므로 흑백의 과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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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보는 부정이라고 한다’고 함은 불선을 깨끗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이를 흑이라고 한다. 악을 더하고 비천하기 때문에 이를 흑보라고 말한다.
만약 생각해서 이를 능히 버릴 수 있으면
이것은 다하여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무애도(無礙道)에 있게 되나니
소위 이것이 네 번째 업이다.
말하기를 도가 능히 이 세 가지 업을 멸하는 것이 무애도이다. 만약 의도가 있으면 이 의도는 곧 제4업이다. 그 중에서 네 가지 의도[思]는 사유도(思惟道)로서 두 번째의 업42)을 멸한다. 열셋에는 두 가지 도(道)가 있으니, 견제도(見諦道)의 넷과 사유도의 아홉이다. 이는 무루의 생각으로서 악을 더하지 않으므로 불흑이고, 업을 더하지 않으므로 불백이며, 끝없이 서로 다르므로 과보도 없다.
[문] 세존께서는 신ㆍ구ㆍ의의 곡(曲)ㆍ예(穢)ㆍ탁(濁)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답] 곡은 아첨과 거짓에서 생기고
예는 성냄을 따라 생기며
욕심이 생하는 것을 소위 탁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곡은 아첨과 거짓에서 생기고’라고 함은, 업이 거짓을 따라 생기는 것을 곡이라 하나니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러움은 성냄을 따라 생긴다’고 함은, 업이 성냄을 따라 생기는 것이 더러움이니 오로지 다투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하는 것을 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세존의 말씀이다’라고 함은,
42) 백백보업(白白報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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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 욕심을 따라 생하는 것이 탁이 되나니 오로지 먼지와 때이기 때문이다.
[문] 세존께서는 세 가지 깨끗한 신ㆍ구ㆍ의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답] 청정[淨]은 일체의 묘행이요
만(滿)은 곧 몸과 입이다.
무학(無學)의 의만(意滿)을
곧 무학의 마음[心]이라 한다.
‘청정은 일체의 묘행이다’라고 함은 묘한 행이 있으면 이는 일체가 깨끗하니 번뇌와 깨끗하지 않은 것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 만이란 무엇인가?
[답] ‘만은 곧 몸과 입이다.’ 무학의 마음[意] 가운데 몸과 입의 묘한 행이니, 이를 만이라고 하나니 선하여 일체의 거리끼는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무학의 의만을 곧 무학의 마음이라 한다’고 함은 무학의 의만이 곧 무학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학의 마음은 이미 문니(文尼, muni)의 모습[相]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업의 가명(假名)을 설명했으니 이제부터는 과보를 설명하겠다.
선한 업과 악불선의 업은
함께 두 가지 과보가 있다.
선한 업은 혹은 세 가지 과를 이루나니
하나의 과보는 나머지를 말한다.
‘선한 업과 악불선의 업은 함께 두 가지 과보가 있다’고 함은, 선업은 두 가지 과보를 이루나니 소의과(所依果)와 보과(報果)이고, 무루업도 두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해탈과이고, 불선업도 두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보과(報果)이다.
‘선한 업은 혹은 세 가지 과보를 이룬다’고 함은 말하자면 선한 유루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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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세 가지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와 보과와 해탈과이다.
‘하나의 과보는 나머지를 말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나머지인 무기업은 하나의 과보가 있으니 소의과이고 다른 것은 없다.
자신의 경지에 대(大)가 있으니
신업ㆍ구업에 의지하는 것이다.
무루는 그 힘에 따라 얻으니
그것을 일컬어 과(果)라고 한다.
‘자신의 경지에 대가 있으니 신업ㆍ구업에 의지하는 것이다’고 함은 욕계의 모든 업은 곧 욕계의 대(大)43)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색계의 업도 이와 같다.
[문] 무루의 모든 업은 무엇인가?
[답] ‘무루는 그 힘에 따라 얻으니 그것을 일컬어 과라고 한다’고 함은 무루의 색은 만약 4대(大)에 의해 얻으면 곧 그 지(地)에 의하고, 만약 욕계에 머물러 도를 얻으면 그 신업ㆍ구업은 욕계의 4대가 만드는 것이니, 일체의 지(地)도 이와 같다. 말하자면 힘으로 색계의 욕(欲)과 무색계의 것을 제거하여, 그것이 만약 목숨이 끝나면 무색계 중에 생하고, 만약 얻지 못하고 신업ㆍ구업을 얻으면 이 신업ㆍ구업은 곧 그 지(地)의 4대가 만드는 것이 된다.
[문] 세존께서는 세 가지 장애[障]를 말씀하셨으니, 업장과 번뇌장과 보장(報障)이다.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답] 무간무구업(無間無救業)과
널리 능히 번뇌를 생하는 것과
악도(惡道)에 악보(惡報)를 받는 것은
장애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43)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大, catur-mahābhūta)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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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 가지 법의 장애는 반드시 성스러운 법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장애라고 말한다.
[문] 이들 업에서 어떤 것이 최대의 악인가?
[답] 만약 업이 승단을 파괴하면
이것을 극악이라고 말한다.
업이 승단을 파괴하면 이러한 업이 가장 악하다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아비대지옥에서 겁이 지나도록 머물게 된다.
[문] 어떤 것을 최대의 묘라고 하는가?
[답] 제1유(第一有)44) 중의 사(思)이니
그것이 최대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유(有)에서는 제일이다. 그 경지에 포섭되는 사(思)는 크게 묘한 것이자 지극히 큰 과보로서, 그것은 8만 겁 수명의 과보이다.
44) 범어로는 bhava-agra. 유정(有頂)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