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박션/연습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난징 안전지대를 만든 것은 욘 라베 뿐이 아니었다. 윌헬미나 보트린(Wilhelmina Vautrin)또는 미니 보트린은 진링 여자예술과학대학의 교육학부 학장이자 연구 책임자이다. 난징대학살 당시 51세였던 그녀는 학살이 시작되자 1937년 12월 둘째 주, 진링 여자예술과학대학을 피난처로 만들었다. 초기에 그녀는 피난처에 여자들과 부상자들만을 수용하려 했지만 매일 약 천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12월 15일에는 3천명 정도, 결과적으로는 약 1만명의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이 학교에 들어와 중국인들을 끌고 가려고 할 때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힘썼다.[1] 더 많은 희생자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혹은 참상을 목격한 후유증으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지 1년만인 1940년 자살하기에 이른다.[1]

로버트 윌슨(Robert O. Wilson)은 난징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의사다.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떠났지만 끝까지 남아 난징의 유일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학살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했으며 갈 곳 없는 환자들을 모두 수용하여 대학병원은 또 다른 피난처가 되었다.[2]


유니세프 한국 위원회는 대한민국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유엔아동기금(United Nations Children's Fund)의 한국 사무소이다.

역사[편집]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8년부터 유니세프의 구호를 받았으며 1950년 3월 25일에는 유니세프와 기본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에서의 구호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유니세프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 1962년까지 담요, 식량, 의류 등을 지원했으며 1976년까지는 한국인의 건강 상태와 건강 설비 개선, 수도 설비기사에 대한 훈련 사업 등을 지원한다. 1986년까지는 교육자료 제작, 탁아사업 등 조기 아동교육에 힘썼으며 1993년부터는 모금 사업과 세계교육 사업을 시작하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기초를 다졌다. 또한 1993년에는 사단법인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법인이 설립되며 12월 말에는 주한 유니세프 대표부가 한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4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생겨나 한국은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된다. [3]

활동[편집]

유니세프 한국 위원회는 유니세프 본부를 통해 민간부문을 대상으로 한 기금모금사업으로 모인 기부금을 개발도상국에 보낸다. 또한 유니세프의 글로벌 활동, 현재의 세계 어린이 상황을 한국에 홍보하며 어린이 권리를 신장하는 활동을 한다.[4]

  1. 장, 아이리스 (2001).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다스 북스. 197~207쪽. 
  2. 장, 아이리스 (2001).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미다스 북스. 187~197쪽. 
  3. https://www.unicef.or.kr/intro/history_korea.asp》.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웹사이트=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4.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웹사이트”. 《https://www.unicef.or.kr/intro/kor/organization_korea01.asp》.  |웹사이트=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