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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맥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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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향교를 중수하여 관동유림의 맥을 이어준 이맹상(李孟常)


1376~? 조선 초기 문신으로 각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는데 특히 강원도와 인연이 많다.

호는 이수(㶊叟), 본관은 양성, 통정대부 판사복시사 이한(李澣)과 한양 한씨(한산군 한방언의 따님)의 장남으로 송도에서 태어남, 관리(官吏)로서의 재능과 詩文이 뛰어났다.

公이 역사에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411년(태종 11년) 강릉 판관(江陵判官)에 임명되었을 때인데 공이 부임하기전 강릉엔 향교가 불이 나 소실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공이 강릉 유림의 건의를 받아 조정에 상고를 올려 1413년 강릉향교를 다시 중수했다.

공은 1424년(세종 6년)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외국인 사신을 접대하는 관반(館伴)이 되었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하고 법을 앞세웠다는 이유로 일본사신으로부터 기피를 당해 교체되기도 한다.

일본사자 배환(裵桓)이 돌아와 아뢰기를,

“부관인(副管人)이 편지를 보내어 관반(館伴) 이맹상(李孟常)을 바꿔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매, 즉시 정부와 허조·신상 등에게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외국의 사객을 감호(監護)하는 임무는 성의로써 그들을 접대하여 후의(厚意)를 보이면서 엄격하게 법을 지켜서 참람되고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하는 것인데, 지금 맹상의 무리가 법만을 고집하여 손[客]에게 기피(忌避)를 당하였으니 비록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마땅히 곧 고쳐 임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선공감정(繕工監正) 안구(安玖)를 대신 임명하였다. 세종실록(세종 14년, 1432년 6월 13일)

1437년(세종 19년) 지사간 원사로 있을 때 부인상을 당했는데 호군으로 있던 아들 순지(純之)가 어머님 시묘 때문에 벼슬을 내놓자 세종이 공에게 “아들로 하여금 벼슬에 나아가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438년(세종 20년) 지사간 겸 지형조사(兼 知刑曹事)를 명받고 이듬해 6월 형조참의가 된다. 1440년(세종 22년)1월 원주목사로 제수되는데 큰 아들 전지(全之)가 연로함을 이유로 임금께 상고하여 쉬게 한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공을 전라도관찰사로 임명한다.

전 참의 이맹상(李孟常)의 아들 부사직 이전지(李全之) 등이 상언하기를,

“신의 아비가 이제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제수되었사옵니다. 《속이전(續吏典)》에 이르기를, ‘자기 몸이 나이가 60이 지나서 고만(考滿)할 때에 이르러, 70에 가까운 자는 외임에 보직할 수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신의 아비가 이제 65세이오니, 고만(考滿)할 때에 이르면 나이가 70이 넘게 됩니다. 허척(許倜)·정자수(鄭子壽)의 예에 의하여 고쳐 임명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세종 22년, 1440년 1월 21일)

1440년(세종 22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옮겼는데 그 이듬해 봄, 피부병을 앓던 세종임금이 온양온천에서 목욕하고 병을 낳아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켰다.

임금이 병이 나았으므로 특별히 온수현(溫水縣)을 승격하여 온양군(溫陽郡)으로 삼고, 인하여 노비(奴婢)를 관호(官號)에 따라 채워 주도록 하였다. 또 관찰사 이맹상(李孟常), 도사 송취(宋翠)에게 각각 옷 한 벌씩을 내려 주었다. 세종실록(세종 23년, 1441년 4월 17일)

그리고 그 해 7월 공조참의로 옮겨 내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1443년(세종 25년) 12월, 71세의 나이에 다시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는데 그 곳은 30여년전 공이 강릉판관으로 있을 때 향교를 중수하여 인연이 깊은 곳이다. 누구보다 관동지역을 잘 아는 공에게 조정에서는 각 포구의 문제점을 살펴보라는 유시를 내린다.


강원도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의정부에서 전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의 장계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가 수륙 첨절제사(水陸僉節制使)를 예전대로 겸임함이 좋은가 나쁜가의 여부와 월송포(越松浦)의 모래로 막힌 곳의 장단(長短) 광협(廣狹)과, 공사해야 할 일거리의 많고 적음과, 뱃길을 개통한 뒤에 곧 또 메워져 막혀 버릴 염려의 유무(有無)를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친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옵소서.’라고 하기에, 내가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데, 또 어떤 이가 헌의(獻議)하기를, ‘강원도에 왜구(倭寇)의 소문이 끊어진 지가 거의 백 년이나 되어 이 도(道) 각 포(浦)의 포구(浦口)는 모래로 막혀진 것이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왜구가 온다 할지라도 병선(兵船)이 바다로 나갈 길이 없을 뿐더러 여러 해 동안에 각안(閣岸)은 썩고 파괴되었으므로, 그것을 즉시 고쳐 만들려면 선군(船軍)의 고통이 더 할 수 없이 극심할 것이오니, 마땅히 선군을 폐지하여 영진(營鎭)에 소속시키고 계속하여 첨절제사로 하여금 고찰(考察)하게 하여 무궁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한다. 그러나 선군(船軍)을 경솔하게 갑자기 폐지할 수는 없으니, 월송포(越松浦)의 모래로 막혀진 곳을 개통(開通)하는 일의 어렵고 쉬운 것과, 배의 왕래의 편부(便否)와 개통한 뒤에 다시 메워 막혀질 염려의 유무(有無)와 월송포와 구미포(仇未浦)와의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관찰사가 순행할 때에 친히 살펴서 장계하라. 또 그 도의 방어가 중요하지 않음이나 조선(造船)의 폐단이 과연 헌의(獻議)하는 사람의 말과 같다면, 각 포구의 병선을 적당히 줄이어 민폐를 덜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듣건대, 포구가 좁아서 선체(船體)가 큰 배는 드나들기가 어렵다고 하니, 그 도(道)의 병선은 선체를 작게 만들어 드나들기에 편리하게 하여 적변(賊變)에 대응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모름지기 여러 옛 늙은이들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세종실록(세종 26년, 1444년 7월 20일)


강릉일대는 1372년(공민왕 21년) 公의 백부 이옥(李沃)이 당시 관노(官奴)의 몸으로 강릉, 영덕, 덕원 등 동해안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강궁(强弓)으로 섬멸한 뒤 조정으로부터 안마(鞍馬)를 하사받고 강릉도절제사(江陵都節制使)로 오랜 기간 근무한 곳이기 때문에 그 후에도 왜구는 이 일대를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각 포구는 모래가 쌓이고 해안도 병선이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이를 염려한 듯 하다.

또한 안전지대로 있다보니 조정에서도 책임자를 따로 두지 않고 겸임하는 사례가 많아 이에 대한 건의서도 보인다.


앞서 강원도 관찰사 이맹상(李孟常)이 아뢰기를,


“지평해군사(知平海郡事)는 월송포 만호(樾松浦萬戶)를 관례로 겸하고 있으나, 만약 적변(賊變)이 있으면 사실상 두 가지로 일하기가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만호는 따로 임명하여 그 임무를 전담하게 하소서.”

하니, 의정부에서 내려 이를 의논하게 하니, 여럿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강원도는 왜적의 길목이 아니니 종전대로 겸임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는지라, 맹상이 다시 아뢰기를,

“평해군은 원래 읍의 성이 없어서 실어 들인 미곡을 다 땅에다 노적하여 두오니, 만약 왜적이 가만히 들어와서 도둑질해 내가게 되면 쌓아 두었던 양곡은 다 우리 것이 아니 되고 맙니다. 평해 군수가 한 몸으로 실상 두 일을 하기 어렵사오니 만호를 따로 보내 주심이 편리하옵니다. 만약 상임(常任)으로 둘 수가 없사오면 조전(漕轉)과 성 쌓는 데에 곡식 실어 들이는 동안에 임시로라도 두는 것이 좋겠삽고, 만약 관원을 너무 늘이는 것이 된다면 수산포 천호(水山浦千戶)를 월송포로 옮겨 임명하시고, 수산포는 울진 현령(蔚珍縣令)으로 하여금 수산포를 겸임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한즉, 병조에서 의정부에 보고하기를,

“월송포 만호는 종전대로 겸임하도록 의논이 결정되었으므로 다시 고칠 수도 없고, 또 멀리서 요량해 하기도 어려우니, 청하건대, 대신을 보내서 실정을 살핀 뒤에 다시 의논하소서.”

하니, 의정부에서 아뢰기를,“관찰사의 아뢴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세종 26년, 1444년 9월 2일)


1444년(세종 26년) 10월, 강원도관찰사로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친 공은 중추원부사를 제수받게 되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안타깝게도 없다. 후에 막내아들 정평공 純之에 의해서인지 장손 문질공 芮에 의해서인지 후손의 추은(推恩)으로 병조판서에 증직된다.

실(室)은 문화 류씨로 水軍節制使를 역임한 류자(柳滋)의 따님이시다.

아들 다섯중 넷이 四子登科(4자등과)하였는데 큰아들 전지는 예문관직제학 증병조판서, 둘째 겸지는 한림사간원 우헌납, 셋째 효지는 승문원 교리, 넷째 돈지는 녹사, 다섯째 순지는 그 유명한 천문학자 정평공이다.


공은 빼어난 시(詩)와 문장(文章) 실력으로 각 지역 관찰사로 있을 때 여러 시문을 남겨 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서거정이 엮은 동문선 제22권에 실려 있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차 사간원 운정요장(次司諫院韻呈僚丈)이다.


차 사간원 운정요장(次司諫院韻呈僚丈)

이맹상(李孟常)

자고새가 늘어선 곳에 어로의 연기는 꼿꼿이 오르고 / 御爐煙矗鷓鴣班

맑은 날에 헌에 다달으시매 성안을 뵈옵겠네 / 白日臨軒覩聖顔

신하들이 석연에 젖었다고 아뢴 뒤에 / 奏罷群臣霑鍚宴

금천교 다리 위에서 취해 돌아오노라 / 禁川橋上醉同還

[주]자고새 : 신하들이 어전(御前)에 반열을 지어 늘어서는 것이 자고와 같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에 충청도 여러 고을에 대한 시문을 남겨 놓았는데 아마 충청도관찰사로 근무했던 1440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충청도(忠淸道) 석성현(石城縣-현 부여시와 논산시 경계)을 상자연심작일촌(桑柘煙深作一村)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짜며 아침 저녁을 보내니, 뽕나무 숲 연기 깊은 속에 한 마을을 이루었네.”라 하였다.

그리고 온양군(溫陽郡)을 가리켜 행궁비수령(行宮非繡嶺) “이 행궁이 수령궁이 아니거니, 대가(大駕) 임행하신 곳 어찌 저 곤명(昆明) 땅이랴.” 하였고

대흥현(大興縣-현 예산시)에서는 관어지북인한천(觀魚池北引寒泉) “포정정(布政亭) 동쪽에선 흰 달을 맞이하고, 관어지 북쪽에는 찬 샘물 끌어왔다.” 라고 하였다

한편 공은 원주목사와 강릉판관, 강원도관찰사 등 유독 강원도에 많이 근무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관한 기행시가 많을 것으로 추정되나 불행이도 아직은 한편밖에 보이질 않는다.

강원도(江原道) 홍천현(洪川縣)에 관한 것인데 홍천을 公은 “산과 물은 한 쌍의 족자를 이루었는데, 연기와 산안개는 옛 이웃이라네.” 하였다.


* 문묘성전과 강릉향교

강릉역 뒤쪽에 있는 명륜고등학교의 교정에 강릉향교와 대성전이 있다. 강릉향교는 화부산자락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는 낮은 구릉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에는 강릉시가 한눈에 보이며, 멀리 남대천이 보이는 시원한 장소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1127년(인종 5)에 향교의 역사가 시작되어 1313년(충선왕 5)에 강릉도 존무사 김승인(存無使 金承印)이 화부산 밑에 문묘를 갖춘 향교를 건립하여 비로소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1411년(태종 11) 화재를 당하여 그 2년 뒤 강릉도호부 판관 이맹상(判官 李孟常)의 발의로 중건되었고, 수차 중수가 있었다. 1909년(순종 융희3)에는 화산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던 중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되고 양잠전습소를 설치한 적도 있었다.

향교는 지방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문묘건축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도호부에 90명, 도호부에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두었다고 한다.

강릉향교는 이 지역 교육의 중추적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유학 실천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하며 오늘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