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김시웅/연습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전쟁 참전국 중 콜롬비아군은 1950년 벌어진 6.25전쟁에서 UN 연합군의 일부로 파견되어 대한민국을 지원한 군을 말한다.

콜롬비아 국기
Map


참전배경[1][편집]

1952년 1월 16일 대한민국 한강 하구에서 콜롬비아 선박을 포함한 4개국의 선박

한국전쟁 당시 콜롬비아만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콜롬비아 국내 사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 동맹국으로서 자유우방을 지원하겠다는 인도주의적 측면과 세계평화와 자유를 수호할 목적으로 설립된 유엔의 기본원칙에 충실하겠다는 대외명분을 강조하면서 참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콜롬비아 정부는 정치적 폭력상태로  확산된  사회적 불안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1948년 보수세력의 존립을 위협하던 급진자유주의 지도자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의 암살을 계기로 정치적 갈등은 폭력사태로 비화되었다. 이처럼 불안정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보수정권은 연립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정치적 대립과 불안 해소에 실패하였다. 그러자 집권보수당은 폭력적 방법을 통해 권력기반 강화를 시도하였고, 동부 평원지대에서는 보수 독재체제에 반발한 지식인들의 지원으로 조직적인 게릴라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장기간의 국내 폭력사태로 인해 콜롬비아 군은 무력감, 사기저하, 실전경혐 부족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어 심기일전의 전환이 필요했고 콜롬비아군은 한국전쟁 참전을 군 현대화를 위한 기회로 인식했다. 또한 콜롬비아군의 한국전쟁 참전은 당시 대내적 위기상황 속에서 보수정부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콜롬비아 해군[편집]

해군의 참전 및 전개[편집]

콜롬비아 정부는 먼저 해군함정 파딜라호(Almirante Padilla) 파견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주미 콜롬비아대사를 통해 미 합동참모본부와 함정 파견을 위한 세부절차와 협조사항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콜롬비아 정부는 190명의 승무원과 함께 프리깃함 1척을 가능한 한 신속히 유엔 해군작전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진주만에서 미 해군과 합동훈련을 실시한 후 1951년 5월 8일 일본 사세보항에 도착하여 제95기동부대에 배속되었다.

콜롬비아 해군의 주요 활동[편집]

제 95기동부대에 배속되고 3일 후 파딜라호는 다시 서해안 봉쇄전대에 편입되어 5월 14일 숙도와 석도간 항로 순찰을 시작으로 보급선단 호위, 해안순찰, 함포사격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후에도 콜롬비아 해군은 토노(Capitan Tono)호와 브리온(Almirante Brion)호가 1953년 9월 본국으로 복귀할 때까지 한반도의 동,서해안에서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며 유엔해군 작전에 기여하였다.

파딜라호(Almirante Padilla)
콜롬비아 해군 잠전 함정 및 지휘관
함정명 참전기간 계급 지휘관
Almirante Padilla 1951. 5.~1952. 2. 소령 Julio Ceasar Reyes Canal
Capiran Tono 1952. 4.~1953. 1. 소령 Hernado Beron Victoria
Almirante Brion 1953. 6.~1954. 4. 소령 Carlos Prieto Silva
파딜라호(Almirante Padilla)의 주요 활동(1951. 5. 8~1952. 1. 19)[2]
기간 주요 활동
1951.5.8 일본 사세보항 도착, 미 극동해군에 배속
1951.5.14 초도-석도 간 해상초계작전으로 한국해역에서의 첫 작전 임무 개시
1951.5.20 일본 사세보항에 작전기지를 두고 동해안에서 활동 개시
1951.6.8~14 원산-성진간 해안순찰, 유엔함정들과 연합하여 함포사격 가담
1951.7.24~27 원산봉쇄분대(TE 95-21)에 파견되어 유엔 함정들과 원산포격작전에 참가
1951.8.10~9.9 원산 포격작전 참가, 중형함정 호위 임무 수행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정비 완료, 원산-청진간 해안초계활동

1951.10.12~30 청진부근의 적 해안포대 포격
1952.1.19 한국해역에서의 제1차 근무를 공식적으로 마침
토노호(Capiran Tono)
토노호(Capitan Tono)의 주요 활동(1952. 2. 12~11.12)
기간 주요 활동
1952.2.12 파딜라호로부터 임무 인수
1952.5.1 보급선단의 엄호와 동해안 초계임무로 한국해역에서의 작전 개시
1952.5.23~6.3 원산항과 성진항 부근에서 소해작전 중인 유엔 소해함들의 엄호

동해안철로를 운행하는 적 보급열차 함포사격, 수송 선단의 호위

1952.6.3~22 일본 사세보항에서 정비 및 승무원 휴식
1952.7.22~8.7 성진과 원산봉쇄분대에 각각 보급품을 수송하는 선단 호위
1952.8.22~9.17 보급수송선단 호위, 원산포격작전 참가
1952.9.17~25 동해안으로 수송되는 탄약수송함(미 Mount Katmai호)의 호위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
1952.10.9~12 일본 사세보항 근해에서 대잠수함 경계임무 수행
1952.11.4 부산에 입항하여 그 동안 해상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해군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승무원들은 유엔군 묘지를 참배

1952.11.12 일본 요코스키항에서 수리중, 교대차 새로 도착한 브리온(Almirante Brion)호에 임무 인계
브리온호(Almirante Brion)
브리온호(Almirante Brion)의 주요 활동(1952. 11. 12~1954. 4. 17)
기간 주요 활동
1952.11.12 토노호로부터 임무 인수
1953.6.29~9.6 제77기동전대를 포함한 동해안 각 부대로 가는 보급품

수송선단의 호위를 맡음

1953.9.11~24 일본 요코스카 근해에서 유엔 해군 함정들과 기동훈련
1953.10.22~11.25 보급품 수송선단 호위, 일본 사세보항 근해에서 실시된

각종 훈련에 참가해 전술 경험 축적

1953.11.27 일본 요코스카항에서 장비 정비
1954.4.6 부산에 입항하여 유엔군 묘지 참배
1954.4.17 일본 요코스카항에 입항, 제2차 근무를 위해 3월 26일

도착한 토노호(Capitan Tono)에 임무 인수인계


콜롬비아 육군[편집]

육군의 참전 및 전개[3][편집]

바따욘 콜롬비아(Batallon Colombia) 보병대대 휘장

콜롬비아 육군은 본격적인 참전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11월 하순 보고타 인근에 임시훈련소를 설치하고 창설부대 기간요원과 신병모집에 주력하였다. 12월 29일 고메스(Laureano Gomez) 대통령은 한국 파병을 목적으로 한 '바따욘 콜롬비아(Batallon Colombia)'라 불리는 보병대대를 창설하였다. 콜롬비아대대는 수도경비대장인 뿌요(Jaime Polania Puyo) 중령을 대대장으로 3개 소총중대와 1개 중화기 중대, 본부중대 등으로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1089명이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중 마지막 참전군이었던 콜롬비아대대는 동해의 유엔군수용대로 이동하여 6주간에 걸친 현지적응 및 전술훈련을 실시하였다. 7월 30일 강원도 화천군 산양리로 이동하여 미 제24사단 제 21연대에 배속되었고 8월 6일 흑운토령 전투를 시작으로 한국에서 전투를 본격화 하였다. 10월에 접어들어 미 제9군단의 금성진격작전에 참여한 대대는 이후 미주리선 및 제임스타운선 작전 등에서 회고개 전투, 초서리 전투, 400고지 전투, 180고지 전투, 불모고지 전투 등을 수행하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콜롬비아 지상군 참전부대 및 지휘관
구분 참전기간 계급 성명
콜롬비아대대(제1차) 1951. 6. 15. ~ 1952. 7. 4. 중령 Jaime Polania Puyo
콜롬비아대대(제2차) 1952. 7. 4. ~ 1953. 6. 25. 중령 Alberto Ruiz Novoa
콜롬비아대대(제3차) 1953. 6. 25. ~ 1954. 10. 29. 중령 Carios Ortiz Torres
콜롬비아군 주요 전투

콜롬비아 육군의 주요 전투 활동[편집]

김화 400고지 전투(1952. 6. 21. ~ 8. 17.)[4][편집]

김화 400고지 전투 인명피해 현황
사망/전사 부상 실종 포로
콜롬비아대대 2명 15명 X X 113명
중공군 28명 X X 2명 30명
김화 400고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2년 6월 21일 - 8월 17일
장소
38° 25' 2" N / 127° 34' 60" E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콜롬비아의 기 콜롬비아
중국의 기 중국
피해 규모
2명 28명

400고지 전투 상황도

미 제24사단 제21연대에 배속되어 금성진격전에 참여한 콜롬비아대대는 회고개 전투를 수행하며 적 8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대대장이 중상을 입는 등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비록 전투경험도 부족하고 수적으로 열세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중공군을 물리치고 회고개를 확보하여 미 제9군단이 금성 남방으로 진출하는데 기여하였다.

콜롬비아대대는 미 제24사단이 일본으로 복귀함에 따라 1952년 1월 28일 미 제7사단 제31연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대대는 1952년 5월 10일에 김화 북쪽 탑동 부근 미 제31연대 제1대대 주진지를 인수하여 미주리(Missouri)선상의 진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대대는 미주리선 방어와 전초진지인 325고지, 400고지, 454고지 일대에 대한 정찰활동에 주력하였다. 콜롬비아대대는 3개 소총중대가 돌아가며 매일 1개 소대의 정찰대를 출동시켜 연대 정면의 적정을 파악하고 적의 전진진지를 기습 공격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은 이들 고지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하고 대대 정찰대가 진출하면 각종 구경의 곡사포로 집중포격을 가해왔다. 특히 400고지는 1개 소대규모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견고한 방어시설이 구축된 강력한 방어거점이었다. 이로 인해 대대 정찰활동이 제한됨은 물론 적지 않은 인명손실까지 주고 있어 대대로서는 400고지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소대규모 이상의 야간정찰과 기습공격은 예비대가 전담한다는 방침에 따라 콜롬비아대대는 6월 21일 04시 방어정면 적의 전진진지인 400고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04시 A중대 제3소대는 제31연대 제1대대의 주저항선 진지를 통과하여 가파른 고지를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소대는 한 달 전에 이곳을 방어한 바 있어 지형에 익숙한 이점을 십분 발휘하여 25분 만에 적진 50m 전방까지 접근하였다.

베르날(Mario Bernal) 소위가 이끄는 제3소대는 진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자 적 벙커를 향해 일제히 수류탄과 자동화기사격을 집중하여 돌격을 개시하였다. 기습공격에 허를 찔린 중공군은 뒤늦게 교통호 밖으로 나왔지만 기선을 장악한 소대 돌격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지 속에서 저항하던 적의 일부도 진지가 폭파되면서 함께 폭사하였다. 콜롬비아 병사들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중공군 벙커는 모조리 폭파되었고, 목표고지를 점령한 제3소대원들은 그곳에 콜롬비아 국기를 게양하였다.

05시 30분 기습공격 성공을 확인한 소대장은 적의 역습을 방지하기 위해 400고지 후방 432고지에 대한 전차 및 포병의 지원 포격을 요청한 후 대대 전진진지로 복귀하였다. 콜롬비아군은 이 기습공격에서 중공군 벙커 11개를 모두 파괴하는 한편 적 28명을 사살하고 2명을 포로로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에서 2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을 입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콜롬비아대대가 김화 부근 미주리 선상에서 실시한 가장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되었다.

이후 콜롬비아대대는 새로 부임한 루이즈(Alberto Ruiz Novoa) 중령의 직접 지휘 하에 정면 400고지와 서북쪽 324고지에 대한 정찰에 나섰다. 8월 17일 저녁 무렵 대대는 포로를 생포할 목적으로 사전 계획에 따라 소대규모로 편성된 2개 정찰대를 325고지와 400고지로 파견하였다. 각 정찰대는 기도비닉을 유지하며 목표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적은 콜롬비아군 정찰대가 목표지점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은 대대 정찰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듯 포위대형으로 매복하였고, 박격포과 중기관총으로 화망을 구성한 채 집중사격을 실시하였다. 기습을 당한 정찰대는 속수무책으로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고, 장교 2명과 사병 94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충격적인 상황에 빠져있던 콜롬비아대대는 8월 20일 와수리로 철수하여 부대 재정비와 교육훈련에 주력하면서 차기작전에 대비하였다.

180고지 전투(1953. 3. 10.)[5][편집]

180고지 전투 인명피해 현황
사망/전사 부상 실종
콜롬비아대대 19명 44명 8명 71명
중공군 150여명 X X 150여명
180고지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3년 3월 10일
장소
37° 5′ 27″N, 127° 1′ 47″E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콜롬비아의 기 콜롬비아
중국의 기 중국
피해 규모
19명 150여명

180고지 전투 상황도


콜롬비아대대는 1953년 2월 27일 사단 명령에 따라 미 제7사단 제31연대 예비가 되어 연천 서북방 대광리 서쪽의 마거리로 이동한 다음 에티오피아대대와 진지를 교대하였다. 이때 연대 정면에는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41사단과 제23군 예하 제67사단이 위치하고 있어 피아간 정찰대가 빈번하게 격돌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포크찹과 불모고지 지역에서는 적의 활동이 증가되고 있었다.

콜롬비아대대는 불모고지와 포크찹에 대한 역습계획을 수립하고 사전 연습을 실시하면서 적의 거점을 기습하는 등 적의 움직임에 대처하였다. 대대는 이 과정에서 'Barbula'라 명명된 기습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은 제31연대와 좌인접 제32연대 전투지경선 부근에 있는 무명고지(180고지)에 강력한 전초진지를 구축하고 정찰활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Barbula 작전'은 연대 주저항선을 감제관측하고 있는 눈앞의 걸림돌 같은 180고지를 기습 공격하여 적의 벙커와 화기진지를 파괴하고 적을 역곡천 서쪽으로 격퇴하는 것이었다.

미 제31연대장은 콜롬비아대대에게 이 임무를 부여하였다. 명령을 받은 대대장은 C중대를 공격중대로 선정한 후 수립된 기습계획에 따라 수차에 걸쳐 예행연습을 실시하였다. 3월 9일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있는 제31연대 제1대대 후방으로 C중대를 이동시켰고 C중대는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 3월 10일 06시에 공격준비사격 없이 2개 제대로 이동하여 25분 만에 덕현동 북쪽 180고지 돌격지점까지 접근하였다.

06시 25분 돌격준비가 완료된 것을 확인한 중대장 로페즈(Hernando A. Lopez)대위가 공격개시를 알리는 3발의 조명탄을 쏘아 올리자 돌격소대인 제1소대와 제2소대는 각각 돌격목표인 A봉우리와 B봉우리를 향해 돌진하여 수류탄과 기관총사격을 집중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중공군 일부는 엄체호 밖으로 뛰쳐나왔으나 오히려 피해만 입게 되자 엄체호와 교통호 속으로 다시 숨어들었다.

중대가 기습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점점 시간이 경과하면서 중공군도 진지 속에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로써 무명고지 일대는 순식간에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30여 분간 혈전 끝에 중공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중대장은 적의 역습을 우려하여 대기하고 있던 구호소대를 긴급히 출동시켜 부상자를 후송시키고 돌격소대도 철수 시켰다.

이 무렵 고지에서 물러난 중공군은 후방 220고지 일대에서 재편성을 한 후 역습을 개시하였다. 이에 중대는 포병화력으로 적의 진출을 강력히 저지 하였으나, 적의 일부가 아군의 치열한 탄막사격을 뚫고 180고지로 진출하여 철수를 준비하던 중대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고지 정상에서는 일시 혼란이 있었으나, 돌격중대는 적을 격퇴하고 부상자를 후송하는 구호소대를 엄호하면서 주저항선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선제기습공격으로 180고지에 구축된 적의 엄체호와 화기진지를 모두 파괴하고 150여 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대대도 전사 19명과 부상 44명, 실종 8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하였다.

볼모고지 전투(Battle of Old Baldy)(1953. 3. 22. ~ 3. 25.)[6][편집]

볼모고지 전투 인명피해 현황
사망/전사 부상 실종
콜롬비아대대 95명 97명 30명 222명
중공군 600여명 X X 600여명
볼모고지 전투(Battle of Old Baldy)
한국 전쟁의 일부
날짜1953년 3월 22일 - 3월 25일
장소
38°13'43N 127°0'13E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미국의 기 미국

콜롬비아의 기 콜롬비아
중국의 기 중국
병력
38,000명 20,000명
피해 규모
95명 600여명

볼모고지 지역 지도
볼모고지 지역에서 벙커를 짓기 위해 통나무를 내리고 있는 콜롬비아군
포탄 파편에 의해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을 운반하는 콜롬비아군

볼모고지 전투는 연천 북방 천덕산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미 제7사단 제31연대와 배속된 콜롬비아대대가 1953년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 중 하나인 불모고지에서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41사단 제423연대의 역습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콜롬비아대대는 C중대 기습작전인 'Barbula작전'을 실시한지 이틀 만인 1953년 3월 12일 불모(Old Baldy)고지 전초가 포함된 미 제31연대 중앙 지역을 인수하였다. 이때 콜롬비아대대가 인수한 불모고지는 연곡천 남쪽에 위치한 275m 높이의 감제고지로 주변 일대를 감제 관측할 수 있어 1952년 6월부터 피아간에 치열한 각축이 전개되고 있었다.

대대 맞은편과 그 서쪽에는 중공군 제47군 예하의 제141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콜롬비아대대가 진지를 교대하는 틈을 타 박격포와 야포 사격을 가해왔다. 연일 계속된 중공군 포격은 사격량과 횟수가 점점 증가되었다. 적의 포격으로 진지가 파괴되자 전초에 배치된 A중대 50여 명의 노무자를 동원하여 진지보수에 매진하였으나 파괴된 진지를 복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미 제31연대장은 적의 포격이 날로 증강되고 전방지역에서 적의 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불모고지와 포크찹고지에 대한 특별경계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콜롬비아 대대장은 불모고지 방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A중대를 B중대와 교대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는 전초를 방어중인 A중대가 Barbula작전을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불모고지에서도 계속된 적의 포격을 받아 몹시 지쳐 있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콜롬비아대대는 중공군의 부대교대간 취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어 3월 23일 저녁 무렵부터 부대교대를 시작하였다.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교대를 시작한 콜롬비아대대는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21시경부터 중공군의 포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중공군의 통상적인 사격으로 간주하였으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각종 구경의 곡사포와 박격포탄이 불모고지에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불모고지는 삽시간에 포연과 화염에 휩싸였고, 전초와 대대 간에는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교대중인 A중대와 미 제31연대 B중대가 수시간에 뒤섞여 지휘체계마저 마비되는 혼란상황에 빠져들었다. 이때는 미 제31연대장이 콜롬비아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B중대가 중대장 패트슨(Jack M. Patteson) 중위의 인솔 하에 고지에 접근한 시점이었다.

이와 같은 혼란을 틈타 중공군은 1개 대대규모 병력으로 파상공격을 가해왔다. 이들은 중공군 제47군 예하 제141사단 제423연대의 1개 혼성대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허를 찔린 A중대와 미 제31연대 B중대는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하였고, 오직 참호와 벙커에 갇힌 채 마지막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위기상황에 직면하였다.

잠시 후 전의를 잃었던 콜롬비아 장병들은 사생결단을 각오한 듯 벙커 밖으로 나와 수류탄과 청검으로 중공군을 몰아붙이며 전초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사기가 오른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부득이 전초중대는 불모고지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동남쪽 능선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날 밤 미 제31연대장은 연대 B중대와 불모고지에서 철수한 콜롬비아 장병들을 수습하여 역습을 시도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였다.

3월 24일 아침에 미 제7사단은 예비연대인 미 제32연대 제1대대를 투입하여 제73전자대대 지원 아래 탈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전개된 탈환작전마저도 실패하였다. 사단이 재공격을 위해 유사한 지형에서 예행훈련을 실시하는 등 준비하고 있던 3월 30일 제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휴전을 앞두고 인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불모고지를 탈환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이로써 불모고지에 대한 탈환작전은 중단되었고, 고지는 중공군 수중에 남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콜롬비아대대는 미군과 함께 3일간 전투에서 6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대대도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참전의 결과와 의의[7][편집]

참전기간동안 콜롬비아군의 병력파견은 약 1000명 선을 유지하는 가운데 1951년 6월 30일에는 1050명을 그리고 1년 후인 1952년 6월 30일엔 1007명을 기록하였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7월 31일의 병력현황은 1068명이었다. 1개 보병대대와 1척의 프리깃함을 파견한 콜롬비아는 기간 중 연인원 5100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였다.

콜롬비아군 참전 현황
참전연인원 지상군 해군
4000~5000명 보병대대 : 1

병력 : 1068명

프리깃함 1척

콜롬비아군은 불모고지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 및 적전을 수해하는 과정에서 213명이 전사 또는 사망하고 44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8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래가 발생하였다.

콜롬비아군 인명피해 현황
전사/사망 부상 포로
160~210명 448명 28명 630~680명

대대는 미국대통력 부대표창 1회를 비롯하여 총 54건의 각종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대한민국 을지무공훈장과 콜롬비아 무공훈장 등 462건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상훈[8]
구분 훈장명 수령자
한국 훈장 을지무공훈장 Ruiz Novoa 중령
콜롬비아 훈장 Honor al Deber Cumplido con 'v'

Honor al Deber Cumplido

Cruz de Hierro

114명

231명

117명

미국 훈장 은성훈장

'V' 동성훈장

동성훈장

리죤 오부 메리쓰

대통령 부대표창

18명

25명

9명

2명

대대

콜롬비아는 남미 유엔회원국 중 유일하게 6·25전쟁에 병력을 파견하여 유엔의 집단안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유엔창설 회원국인 콜롬비아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국민 모두가 유엔안보리의 북한응징 결의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미국의 협조와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 한편 콜롬비아와의 한국에 대한 병력 파견은 콜롬비아군의 현대화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실전 경험을 토대로 습득된 지식은 콜롬비아군의 전략 강화에 기초가 되었다.

기념 사업[편집]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9][편집]

콜롬비아군 참전 기념비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현충시설이자 기념비로 1975년 9월 24일에 준공되었다. 원래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 1-412에 위치한 콜롬비아공원에 있었지만 2018년 7월 25일에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 213-7번지 일대에 새로이 조성한 경명공원으로 이전되었다.

콜롬비아군 참전기념비는 콜롬비아와의 영원한 우의를 기념하고 전쟁기간 중 산화한 콜롬비아 군 장병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기념비에는 "카리브 바다의 정기를 타고난 콜롬비아 용사들! 국제 연합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611명의 고귀한 생명이 피를 흘렸다. 우리는 그들을 길이 기념하고자 여기에 비를 세운다"라고 새겨져 있다.

콜롬비아가 1-3[편집]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콜롬비아 군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 옆에 있어 그 이름이 붙여졌다.

기념 행사[10][편집]

2005년 6월 23일에는 콜롬비아의 참전용사 추모행사가 인천 서구 가정동 콜롬비아 참전기념비 앞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콜롬비아 대사와 안상수 인천시장, 이학재 서구청장, 103여단장 등 지역내 기관장 및 참전 유공자회원, 콜롬비아 교민, 서구 주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해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었다. 지난 6·25전쟁 당시 파견 병력 중 700여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우방국 콜롬비아 독립기념일(7월 20일)을 맞아 매년 갖는 행사로 한국과 콜롬비아간의 우호관계 증진은 물론 전후세대들이 우방국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서구청과 103여단이 매년 추모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국정감사 반장인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이 국정 감사위원 전원과 함께 2005년 10월 5일 콜롬비아 보고타 시내의 콜롬비아 지휘참모대학 안에 건립된 콜롬비아 한국전참전비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2007년 6월 25일 6·25전쟁 제 57주년 중앙기념행사가 서울 장출체육관에서 열렸다. 대한민국재항군인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6·25 참전용사, 정부 관계자 등 많은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특히 미국, 콜롬비아, 그리스, 네덜란드 등 4개국 85명의 참전용사 등도 참석했다. 국가보훈처와 재한국인회 초청으로 방한한 이들 참전 용사와 가족들은 전쟁기념관 6·25전쟁 조형물인 '호국군상'등을 방문하였다.

6.25전쟁 70주년 행사(2020.6.25.)[11][편집]

참전용사에게는 전후 70년에 걸친 희생과 헌신에 합당한 예우와 존경을, 국민에게는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미래 비전을 제시.

  • ‘175,801, 꺼지지 않는 불꽃’, 호국영웅 다시 부르기
  • ‘국군전사자 70년 만의 귀환’, 미 DPAA 보관 중인 국군 유해 봉환 행사
  • 보훈관서·지자체·군부대가 함께하는 지방기념식 및 위로연

22개국 참전용사를 기억하는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2020.7.27.)

턴투워드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2020.11.11.)

감사메달 수여식(2020.6.)

민간인 희생자 전국합동추모제(2020.10.)

콜롬비아 참전단체 현황[편집]

콜롬비아 참전단체 현황
명침 창설연도 회원 비고
참전용사회 (ASCOVE) 1958년 255명 전국에 참전용사 2,000여명 생존 추산
한국전 참전장교회(ASOVECOR) 1989년 67명 국방장관 2명, 육군총장 2명, 해군총장 3명,

장군 15명 배출

참전용사 보훈혜택[편집]

2001. 12월 참전용사 보훈법 제정으로 불우 참전용사 600여명이 정부의 보훈혜택을 받게 됨.

참전용사 가족 지원[편집]

6·25전쟁 참전용사 지원 장학재단(Foundation Colombo Coreana Samsung) 설립(1977.10)

일부 생활이 곤란한 차먼용사 가족에게는 최근부터 콜롬비아 정부에서 매월 70만 페소(32만원)씩 지급. 그들의 참전이 한국 군민을 공산주의 치하에서 구했다는 의미와 함께 콜롬비아 국민에게도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것으로 선양되고 있음.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박동찬. 《통계로 본 6·25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383쪽. 
  2. 양영조. 《6·25전쟁 콜롬비아군 참전사》. 국가보훈처. 113-115쪽. 
  3.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52쪽. 
  4.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54쪽. 
  5.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57쪽. 
  6.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59쪽. 
  7. 손규석·조성훈·김상원. 《6·25전쟁과 UN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63쪽. 
  8. 양영조. 《625전쟁 콜롬비아군 참전사》. 국가보훈처. 123쪽. 
  9.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UN군 참전국별 참전기념비 현황》. 
  10. 양영조. 《6·25전쟁 콜롬비아군 참전사》. 국가보훈처. 129쪽. 
  11.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