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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序說〕[편집]

유교란 공자(孔子:이름은 丘, BC 551∼BC 479)가 창도(唱道)한 교리를 말한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에 ""나를 닦고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修己以安百姓)은 요(堯)임금 순(舜)임금도 어렵게 여기신 것""이라는 공자의 말이 보인다. 한마디로 표현하여 유교 교리의 근본 이상(根本理想)은 수기 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수기는 자신을 닦는 도덕적인 수양이다. 나를 닦는 것이니 그 학문은 나를 위한 것이다. 곧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다. 위기(爲己)·수기(修己)의 학문으로 도덕적 충실을 기한 뒤에는 남을 다스리고 만물을 이루게 하는 치인(治人)·성물(成物)의 학문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유교는 도덕과 정치 양면을 중요한 골격으로 갖추게 된다. 유교의 정치 사상은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법치주의에 반대하고, 도덕적 감화력에 의한 덕치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형벌로써 백성들의 풍속을 통제하는 것보다는 예(禮)로써 통제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공자에 의해 창도된 유교의 수기 치인의 교리에서 그 교리 체계의 두 기둥을 이루고 있는 것은 덕(德)과 예(禮)이다. 유교의 사상체계에서 예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유교의 종교 여부(宗敎與否) 논쟁에 시사하는 바 크다. 유교는 물론, 기독교적 유형의 종교 개념으로 따져 볼 때 종교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유교의 합리주의는 ""불합리한 까닭에 나는 믿는다""라고 한 테르툴리아누스(Q.S.F.Tertullianus:160∼220)의 유명한 말과는 거리가 멀고 사후세계(死後世界) 문제보다 생(生)의 문제를 그 중심과제로 하고 있는 유교에서 내세관(來世觀) 논의가 거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교의 예(禮), 특히 제례(祭禮)에 대한 중시는 유교의 종교적 성격을 충분히 입증하고도 남는다. 결국 넓은 의미 종교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은 유교의 종교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주 왕조(周王朝)의 권위가 동요되고 각 제후국(諸侯國)에서도 하극상(下剋上)의 정치적 무질서와 분수를 참람하게 넘는 예(禮)의 자행에 의한 제례의식의 파괴가 눈에 띄기 시작한 춘추시대(春秋時代)에 공자는 삶을 누리었다. 공자는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의 회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은자(隱者)들의 야유를 무릅쓰면서 정성껏 구세(救世)하려 하였다. ""성인의 말은 사람에 따라 변화한다(聖人之語·因人而變化)""는 송(宋)의 정자(程子:宋代의 程顥 兄弟)의 말처럼,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말은 그 대부분이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제시된 실제적 교훈이다. 공자에 있어서의 윤리도덕의 이상인 인(仁)에 대한 교설도 마찬가지이다.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안연의 질문에 답한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이란 말의 거의 유일한 개념 규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나의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와 그것을 이행한다는 구체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인(仁)은 인(人)이다. 즉 ""사람다움에 있다""고 해석한다면 인간의 도덕성(禮)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공자에 있어 예는 사회질서의 근본원칙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도 구체적으로는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에 의하여 예를 이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예를 이행케 하여 사회질서를 확립케 하는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이상은 그 모범을 옛 성왕(聖王)에서 볼 수 있고 또 주 왕조 초기의 위대한 정치가 주공(周公)에게서 구할 수 있다. 주초(周初)의 문물제도와 지도원리의 완성자 주공을 ""심하도다 나의 쇠약함이여, 나 이제 꿈에 주공을 보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고 한 것은 유교의 연원적(淵源的) 고찰에 있어서 주공의 비중을 크게 하기에 족하다. 공자 이후로 내려와서는 제자 사이에서도 덕(德), 즉 주관을 중시하는 경향과 예(禮), 즉 객관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갈라졌는데, 이것이 전국시대로 내려와서 인간의 본성, 즉 성(性)의 문제와 결부되어 맹자(孟子:이름은 軻, BC 371∼BC 289)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이름은 況, BC 320∼BC 238)의 성악설(性惡說)로 나타났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선양하고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배격하는 주장을 내걸고 전국시대의 사상계(思想界)에 등장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의 특색은 주(周) 왕조의 위엄과 실력이 너무나도 쇠미한 시대적 여건도 있고 해서 어느 제후라도 도덕적으로 월등한 유덕자(有德者)가 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道)를 밟아나가면 통일천하의 왕자가 될 수 있다는 유덕작왕설(有德作王說)에 있다. 맹자는 또한 유교 경전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전통을 계승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는 왕은 역성혁명(易性革命)에 의한 방벌(放伐)을 당해서 마땅한 것이라는 혁명시인(革命是認)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치자계급(治者階級)을 향한 경고에 의의가 있는 것이며 피(被)치자계급을 향한 혁명 선동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유교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지도원리로 군림하고 있는 동안에 맹자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북송(北宋)의 이구는 주 왕실의 존재를 무시하고 누구든 덕이 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전개한 맹자를 못할 짓을 차마 해내는 인인(忍人)이라고까지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 맹자의 혁명시인 사상은 후세 중국 혁명사상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특히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의 저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재위 BC 247∼BC 210)에 의한 통일천하 이후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끔찍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것은 질서의 원리로서의 예(禮)가 성악설의 순자(荀子)를 거쳐, 사회적 신분 규정과 법에 의한 제재의 이론으로 발전된 것을 옛 성왕의 덕치(德治) 이론을 들어 유자(儒子)들이 비판한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분서갱유의 제안자인 진의 이사(李斯:?∼BC 208)는 순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송의 소동파(蘇東坡:이름은 軾, 1036∼1101)는 그의 <순경론(荀卿論)>에서 이런 점을 들어 순자를 비난하고 있다. 진대(秦代)의 억압으로 수난의 역사를 거친 유교가 활로를 발견한 것은 한(漢)의 무제(武帝:재위 BC 159∼BC 87) 때의 일이다. 한 무제는 동중서(董仲舒, BC 179∼BC 104)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였으니, 이때부터 2천년 동안 후세에까지 길이 긍정될 원리와 부정 극복되어야 할 부정점(否定點)을 다 함께 포괄한 유교가 동양 사상계에 군림하게 된 것이다. 한 무제 때는 진말 한초(秦末漢初)의 난(亂)도 가라앉아 평온을 되찾았고, 이러한 토대 위에 밖으로 그 세력이 팽창하려는 시기였다. 안정된 통일천하가 밖으로 그 세력의 확장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전통사상에 근거하여 대일통(大一統)의 이상을 내건 당시 유교의 이상주의는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충분한 것이 되었다. 유교가 국교로 정해진 관계로 유교의 경전인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춘추(春秋) 등 경서의 학습은 사대부계급에 있어 필수학문이 되었다. 관리가 되기 위하여는 유교적 교양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했다. 이 전통은 청말(淸末)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의한 가치관의 근원적인 변동이 요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대(漢代) 유학의 주류적인 관심사는 경서의 장구(章句) 해석에 관한 학문이었다. 그것도 후한(後漢)의 반고(班固:32∼92)가 그의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경문(經文) 5자(字)의 해석에 2∼3만자가 동원되는 정도로 일경 전문(一經專門)의 장구의 학이 성행하였다. 후한 말기로부터 진(晉)에 걸쳐서의 사회 불안은 사대부계급 사이에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유행케 하였으며, 유교에 대한 반발적인 풍조가 보였다. 역경(易經)이나 논어의 주석에 노장사상을 띠고 있는 주(注)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육조(六朝)로부터 수·당(隋·唐)에 걸쳐서는 주(注)와 소(疏)가 유행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오래 계속된 훈고학에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또한 사상계에서 유교의 지위가 불교와 도교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한 데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서는 그 속에 담겨진 교리를 생활에 실제로 살리는 점에서 중시되고, 그 교리는 불교적·도덕적 이론을 원용하면서 하나의 형이상학으로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송대의 유학을 일컬어 송학(宋學)·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이라 하고 또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부른다. 신유학의 중심 인물인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이름은 熹, 1120∼1200)에 의하여, 예기(禮記) 속의 대학(大學)편과 중용(中庸)편이 특히 중시되었는데, 이 <대학>과 <중용>에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합하여 <사서(四書)>라 일컫게 되었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속에, 고주(古注)에 비하여 형이상학적 해석이 많이 보이는 것도 송대 신유학의 한 특색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理)와 기(氣)로 우주 만물을 설명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이 유교철학의 중요한 부분이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주자의 객관주의와 육상산(陸象山:이름은 九淵, 1139∼1192)의 주관주의 논쟁도 그 근거는 경서(經書)에 있었다. 명(明)에서는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정하였는데, 이러한 주자학의 고정화를 타파하고 새로운 분야를 연 것이 왕양명(王陽明:이름은 守仁, 1472∼1528)의 양명학(陽明學)이다. 왕양명의 학설은 송의 육상산의 학설에서 받은 바 크다. 명대(明代)에는 또한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이 우위(理優位)의 이기설(理氣說)에 반대하는 나흠순(羅欽順, 1465∼1547)>·왕정상(王廷相, 1474∼1544) 등 일련의 기(氣)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기 철학은 물론 철저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청대(淸代)의 대진(戴震, 1723∼1777)에 이르러 철학이 완성되는 길을 열었다. 청대(淸代)에 이르러서는, 고염무(顧炎武, 1613∼1682) 등의 이른바 명(明)의 유로(遺老)들에 의하여 실학(實學)이 제창되었다. 청학(淸學)의 성립에는 기의 철학이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 청대의 유학은 공자의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서 명말(明末)의 관념적인 학문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유교 경전 이외에 전국시대 제자(諸子)의 학문에 대한 연구도 새로이 활발해지는 한편, 유교의 경서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풍조가 굳어졌다. 마침 청조(淸朝)의 정책에 의한 뒷받침도 있고 해서 청대의 고증학(考證學)은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가 한 무제 이후 역대에 걸쳐 여러 형태로 그 경향이 변질되면서도 국교의 지위를 지킨 것은, 유교가 중국민족의 전통을 잘 지니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또 유교 성립의 변화가 완만한 데 또 한 가지 요인이 있었다고 보겠다. <安 炳 周>"

원시유교[편집]

원시유교[편집]

原始儒敎 유교는 공자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기원전 5세기경의 일로 중국사에서 말하면 춘추시대(BC 771∼BC 403)의 말기가 된다. 춘추시대는 다음의 전국시대(BC 403∼BC 221)와 일괄하여 춘추전국시대로 불린다. 이 시대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로 이어온 중국 고대의 봉건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이며,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한 통일제국의 형성(BC 221)으로 종지부가 찍히기까지의 중국 역사상 일대 전환기였다. 그 현실은 주왕조(周王朝)의 권위가 쇠퇴하여 이윽고 땅에 떨어졌으며 무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제후(諸侯)들의 할거, 강대국의 실력에 의한 약소국 병합, 나아가서는 배신(陪臣)에 의한 국군(國君)의 추방·살해와 같은 하극상(下剋上)이 여러 번씩 있었던 전국난세(戰國亂世)였다. 문화적으로 보면 주왕조(周王朝)는 선행하는 두 왕조인 하(夏)·은(殷)의 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상당히 진보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왕조 창시 후 수백년이 지난 이 시대에 이르자 그 정치지배 제도인 봉건제도를 포함하여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는 사회나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는 과제 아래 재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이 된 것이 공자에 의한 유교의 창시이다. 공자에 이어 그 계보를 계승하는 유가(儒家)뿐만 아니라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여러 사상가가 배출되어 전국시대에 피비린내나는 난세를 배경으로 백가쟁명(百家爭鳴)·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대가 전개된다. 공자를 비롯하여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사상가들은 제각기 사상을 영위하는 출발점에서 유구한 태고부터 그 시대까지 형성되고 축적된 두 문화적 유산을 공유재산으로 지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상제(上帝)' 내지는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情念)이다. 이것은 자연이나 인간, 요컨대 우주의 근원 내지 근본원리라고 하는 두 종류의 직관에서 오는 것이나 모두가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에 관한 사색이 포함되어 있다. 그 두 가지는 현실적으로 전통 내지 습속(習俗)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의례나 제도 등의 문화에 대한 신뢰, 나아가서는 그 문화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성왕(聖王)들에 대한 존경의 정념이다. 이 두 가지가 난세에 살았기 때문에 종래에는 없었던 '인간'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응시(凝視)'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전국(戰國) 사상가들에게 받아들여져 오랜 뒤의 중국인의 종교정조(宗敎情操) 기둥이 되는 온갖 사상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저자들 계통의 도가(道家) 및 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자(孟子)·순자(荀子) 들을 배출한 유가(儒家)였다. 도가(道家)는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로 향하는 사색을 전개시켜 그 참된 실재를 '도(道)'라 부르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인간행동의 기본적인 본연의 자세로 했다. 한편 전통문화에 대한 신뢰의 정조(情操)를 받아들인 것은 공자 및 유가(儒家)들이었다(다만 유교에서도 맹자 및 그 계통의 사상가는 '천(天)'의 사상까지 다루고 있다). 공자는 전통적인 제도·의례·습속 ― 공자가 '예'(禮)로서 일괄하는 것 ― 가운데에서 인간행동의 규범을 발견하고 이 '예와의 관련으로 '인(仁)'을 파악했다. 공자는 만년에 "나도 무척 늙었도다. 그토록 존경했던 주공(周公)을 오랫동안 꿈에 볼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의 노쇠를 탄식하였다. 주공이란 주왕조(周王朝)의 창시자 무왕(武王)의 아우이며 조카인 성왕(成王)을 도와 창시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주왕조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다. 공자가 주공을 그토록 숭앙했던 것은, 주공이 주에 선행하는 하(夏)나라·은나라의 두 왕조 문화를 모델로 하여 풍성한 문화를 이룩하고 그럼으로써 문치주의적(文治主義的)인 주의 지배체제를 굳힌 사람이라고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사상의 출발점이 된 '예(禮)'는 공자에게 있어서는 주공이 창시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무게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전통주의자이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이미 전국난세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춘추시대의 말기였다. 주공에 의해서 수백 년 전에 정해졌던 '예'도 사회적으로 적합할 수 없게 된 면도 있었고, 본래 지녔던 의미가 상실되었거나 다른 의미로 바뀌거나 한 경우도 생겨났던 것이다. 공자는 이러한 시대의 양상에서 예가 흐트러짐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를 재검토하여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재건하려고 꾀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공자는 보수주의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예를 재검토함에 있어서 그가 택한 방법에 공자의 새로움이 있었다. 공자는 예, 즉 전통적인 의례나 제도, 습속의 의미를 인간의 측면에서 탐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와 인간의 주체성을 결부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형태로 인간의 주체성을 확립시키고 그와 같은 인간 본연의 자세를 인(仁), 즉 인간다움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인간 연구에는 전제(前提) 내지 한계가 있었다. 하나는 공자가 주체성을 확립한 인간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던 '예'는 주나라의 봉건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분질서까지 포함시켰다는 점, 또 하나는 '인(仁)'이란 글자가 암시하듯이('仁'은 '人'이 둘 겹친 글자이다) 인간의 인륜(人倫), 즉 특정한 인간관계에 따라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인간이 사회의 신분관계를 떠나서는, 또는 '개인'으로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공자가 생각한 인간은 예컨대 얼마 후 맹자에 의해서 수립되는 '오륜(五倫)'이라는 범주에서 넘어서지 못한다. 프랑스 근대사상의 선구자 몽테뉴가 파악했던,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조건(人間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오늘날 예컨대 <기대되는 인간상>을 읽고 느끼는 도덕주의적 인간상의 건조함과 동질의 것이 유교의 발단부터 인간상 안에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공자 뒤의 전국시대에 이르러 맹자·순자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서 발전했다. 인간 연구의 면에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주장되나 예를 실천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공자의 기본


국가유교[편집]

國家儒敎 전한(前漢)의 중기에서 청조(淸朝)의 붕괴에 의한 통일제국의 소멸까지 약 2000년 동안 중국 정치체제의 사상적 지주가 되어 발전해 온 유교를 그 이전의 유교, 즉 원시유교와 구별하여 국가유교라고 부른다.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보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된 것이 유교측에서 보면 그 이상으로 하는 덕치주의를 실현시키는 현실적 기반을 획득한 셈이 되며, 실제로 유교는 중국 정치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셈이 된다. 유교는 예교(禮敎)라고도 한다. 예란 예로부터 시행되어 온 종교의례나 제도·습속 등을 총괄하는 말로서 왕이나 제후의 궁정에서 촌락공동체·가족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사회에서 실제로 시행되어온 온갖 관행(慣行)을 그 내용으로 한다. 유교는 주나라 봉건체제의 붕괴가 시작된 상황 아래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여 그것들이 붕괴하거나 소멸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관점에서 출발했다. 창시자인 공자는 예를 성왕 주공이 창시, 적어도 주공이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하여 사회의 규범·인간형성의 훌륭한 범례로 삼았다. 통일제국 출현 전야의 순자는 '성왕'의 창시라는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으나 그 성왕을 생각하는 시점(視點)을 '선왕(先王)', 즉 고대의 왕에서 '후왕(後王)', 즉 후세의 왕으로 옮겨 후왕에 의한 새로운 예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또한 공자는 후왕을 위해 예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상(春秋公羊學)도 통일제국 성립 전후에는 성립되어 있었다. 유교를 국가적 지위에 올려놓은 동중서(董仲舒)는 봉건체제로부터 제국의 독재지배 체제로 정치에 변혁이 있었다 해도 유교를 별로 왜곡시키지 않은 채 그 체제의 교학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隋)나라 시대에 이르자 관리 등용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바로 과거제도의 기원이다. 이 제도는 당나라 시대에 정비되고 다시 문벌귀족층이 붕괴한 송나라 시대 이후는 민간인의 실력에 의한 출세의 관문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시험 범위인 유교경전(儒敎經典)의 민간보급도 활발해졌다. 유교는 원래 민간의 관습까지 이해한 것인만큼 민간에 더욱 깊이 뿌리를 박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교의 체제교학이었던 실제이다.청조 말기에 이질적인 문화토양에서 자란 서양 근대문명의 충격을 받아 왕조체제가 변혁을 강요당하자 체제교학이었던 유교는 새로운 시대에의 적응을 외면할 수 없었다. 캉유웨이(康有爲)의 사상이 그 일례로, 그의 공양학(公羊學)에 경도된 수많은 저서 내용은 마침내 국가유교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교가 2000년 동안이나 체제교학일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중국인의 사상 소재(素材)를 모두 통합하여 독특하고 훌륭한 사상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우주의 제1원리·궁극적인 실재에 관해서 중국인은 '하늘(天)'과 '도(道)'의 두 가지로 파악한다. 맹자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의 신앙, <노자(老子)>의 도(道)의 직관 혹은 <장자(莊子)>의 신비주의적 직관에 의한 도의 파악 방법이 대표적이다. 또한 현실세계의 인간이나 사물(事物) 및 여러 현상에 관해서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를 원리로 하여 파악하려는 음양가(陰陽家)의 사상이 있다. 또한 인간을 소우주, 천지를 대우주로 하고 양자를 대응시켜 생각하는 인간소우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있다. 유교는 그러한 것을 종합하여 대우주 속에 인간의 위치를 정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의미인세계의 법칙과 자연현상의 법칙을 구별하지 않았던 중국인의 사고(思考) 습성까지 포함되어 당시의 중국인이나 중국 문화권 내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송학(宋學)의 대성자 주자(朱子)의 사상이며 그것을 보충하는 왕양명(王陽明)의 심학(心學)이었다. 유교가 체제교학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는 유교경전이 오래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은 일부 예외를 제하고는 자기들 운명의 황금시대를 태고(太古)에 상정(想定)한다. 바로 상고(尙古)의 심정인 것이다. 그것은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값어치가 있다는 감각이다. 유교는 요·순이라고 하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도교(道敎)는 요·순보다도 오랜 황제(黃帝)를 조상으로 받들어 그 오래 됨을 겨룬다. 그러나 경전이 오래 되었다는 점에서는 유교가 다른 학파를 압도했다. <춘추(春秋)>를 공자의 저작으로 하는 외에도 <시경(詩經)>·<서경(書經)>·<역경(易經)>·<예기(禮記)>도 공자가 편집한 것이라 하며, 고대 황금시대로부터의 전통문화를 전하는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신성성(神聖性)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소의(所依)로 하는 유교의 정통성도 그것에 의해 승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가 발달하고 그것이 오래 되었다는 점에 의문이 생겼을 때는 이미 유교의 국교적 지위가 흔들릴 때이기도 했다. 이것이 곧 청조(淸朝) 고증학(考證學)의 결과이다.

국가유교는 그 역사의 처음과 끝을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으로 장식한다. 유교를 체제교학·국가유교의 지위로 올려놓은 동중서(董仲舒)는 춘추공양학의 공자개제(孔子改制) 사상(孔子가 後世를 위한 制度를 준비했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근본으로 했다. 캉유웨이가 서양문명의 충격으로 개변(改變)을 강요당한 절대주의 체제를 입헌군주 체제로 변혁시키려 할 때 그 사상적 근거로 삼은 것도 이 공자개제 사상이었다. 또 캉유웨이는 이 '변혁의 유교'라고 할 수 있는 춘추공양학의 대선배로서 동중서에게 경의를 표하고 공양학을 배우려면 동중서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양학은 역사관에서 서로 달랐다. 동중서는 '삼통설(三統說)'이라고 하는 순환사관(循環史觀)에 의거하여 한왕조의 체제확립을 정당화했으나, 캉유웨이는 세상은 난세(亂世)의 세상 → 소강(小康)의 세상 → 대동(大同)의 세상 등 3단계로 진화한다는 진화사관에 입각하고 있다. 영원히 올바르고 시간을 초월하며 타당한 원칙을 변경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는 입장과 체제변혁, 즉 원칙에까지 변화를 가해야 한다는 입장 차이가 그들의 사상에 반영된 것이다. 캉유웨이의 유교사상의 특색은 주자나 왕양명을 그대로 지나쳐 유교의 창시자 공자의 사상을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춘추공양학은 공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침반 구실을 했다고 하겠다. 캉유웨이의 공자 이해의 특징적인 점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자는 단순한 고대문화의 조술자(祖述者)가 아니라 바로 유교의 창시자라는 점으로, 공자는 백세(百世)를 구제하는 제법(制法)의 왕, 백세의 교주이며 <춘추>뿐만 아니라 6경(六經:易·書·詩·樂의 各經과 <禮記>·<春秋>)도 공자의 저술이라고 하는 점, 둘째 태고(太古)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태고의 요·순이 만들었다고 하는 문명이 찬양됨은 주대(周代) 말기의 공자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각각 자기 교설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 옛시대에 가탁(假託)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태고때부터 있었던 것을 계승·발전시키는 자세를 취했다고 하는 점, 셋째 공자가 <춘추>를 저술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직접 보고 알 수 있었던 시대, 들어서 알 수 있었던 조부(祖父) 시대, 전해 듣고(傳承) 알 수 있었던 증조부나 고조부 시대의 셋으로 시대 구분을 하고 그 시대에 따라 쓰는 방법을 바꾸었으나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 <춘추>의 필법으로 사회가 난세→승평(升平:泰平)의 세상 → 태평(太平)의 세상으로 발전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승평(升平)의 세상은 <예운(禮運)>(禮記의 1편)에서 볼 수 있는 소강(小康)의 세상이며, 태평의 세상이란 대동(大同)의 세상, 곧 이상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상사회 출현의 필연성을 제시했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예운(禮運)>의 소강·대동의 기술(記述)을 힌트로 하여 캉유웨이는 글로벌(global)한 규모로 대동(大同)의 세상, 곧 이상사회가 지니는 본연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고뇌가 없는 사회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경·계급·인종차별도 없는 사회, 남녀동권이며 가족제도는 전폐되고 생산분배 기구는 공영(公營)으로 된 사회를 말한다. 즉 그것은 선인(仙人)·부처(佛)·보살(菩薩)의 극락세계로서 유교도 이미 소용없게 된 천유(天遊)의 사회라는 것이다. 캉유웨이의 사상에서 (1) 공자를 지나치게 존숭(尊崇)하는 나머지 공자의 유교 창시를 노자나 그 밖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경우와 같은 동기, 같은 목적, 같은 방법으로 했다는 것, (2) 그럼으로써 태고의 문명을 전하는 것이라 하여 절대적인 가치가 주어져 있었던 유교경전의 신성성(神聖性)을 감소시켰다는 것, 그리고 특히 (3) 대동의 이상 사회에서는 유교가 주장하는 예교(禮敎) 질서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 등은 2000년을 두고 체제교학이었던 국가유교의 자기붕괴 내지 자기소멸을 나타내는 것이다. 캉유웨이는 생전에 대동사상(大同思想)을 공표하지 않았다. 자기의 시대를 난세→소강(小康) 사회의 전환기로 보고 거기에 대동의 이상사회의 비전을 제시함은 혼란을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강 사회에서의 중국은 영국이나 근대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에 의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꾀하고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존할 것, 또한 구미(歐美) 열강이 강자가 된 정신적 원동력은 그리스도교이며 중국에서 이 그리스도교 구실을 하는 것은 '공자교'이므로 이를 입헌군주제로 변혁한 중국의 국교로 삼을 것 등이 당면과제라고 캉유웨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근대화의 격동은 신해혁명(辛亥革命), 5·4운동(五四運動)으로 나타났으며, 이 정세를 어디까지나 혼란으로 보았던 캉유웨


동중서[편집]

董仲舒(BC 178?∼BC 104?) 전한시대(前漢時代)의 대표적인 유교 사상가.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이라는 새로운 유교사상을 형성했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景帝, 재위 BC 157∼BC 147)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의 현인(贅人) 등용시험에 응시, 발탁되었다. 무제의 형인 강도왕(江道王)이나 교서왕(膠西王) 밑에서 대신을 지냈으며 은퇴 후는 집에서 수학(修學)과 저술에 힘썼다. 무제는 그 후에도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그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저작 <춘추번로(春秋繁露)>나 <사기(史記)> <태사공 자서(太史公 自序)>에 인용되고 있는 그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유교가 이상적인 군주로 평가하는 '성왕(聖王)'의 기준을 '선왕(先王)', 즉 과거의 왕에서 '후왕(後王)', 즉 후세의 왕으로 전환시켜 이상적 정치인 덕치주의에 현실적인 법치주의의 요소를 부가함을 시인한 사람은 순자였다. 동중서는 순자의 이 현대주의를 이해하여 현실적으로 통일지배 체제를 굳힌 시기를 맞은 한왕조를 후왕으로 보고 무제에 의한 체제 확립에 사상적 지주를 부여했다. <춘추공양전>의 학자였던 그는 우선 공자가 <춘추>를 집필함에 있어서 후왕을 위해 은밀히 시사한 정치이상인 '대일통(大一統), 天子에 의한 제후의 통제, 즉 一統을 존중한다는 뜻)이 한제국(漢帝國)을 위한 정치목표라 했으며, 그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합리화했다. 또한 왕조의 교체는 천명(天命)에 의하며 천명은 흑통(黑統) →백통(白統) → 적통(赤統) → 흑통(黑統) → … 으로 순환하고 하왕조(夏王朝)는 흑통, 은(殷)은 백통, 주(周)는 흑통이었으며, 공자는 이 흑통의 왕조인 한(漢)을 위한 제도의 이상을 <춘추>에 담았다고 한다. 이것이 <삼통설(三統說)>이라고 불리는 순환사관(循環史觀)으로서 그는 이 관점에서 무제의 신제도 제정에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했다. 동중서가 진왕조(秦王朝)를 삼통설에서 제외한 것은, 진나라가 유교에서 말하는 덕치주의를 채택하지 않고 법률편중주의를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천명은 진나라를 쓰러뜨린 한나라에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덕치주의가 천명을 받는 조건으로 되어 있다. 절대군주체제에서의 덕치주의라는 조건은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 내지 '재이설(災異說)'이라는 그의 사상으로 이론화되었다. 이것은 '인간소우주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 바탕이 된 것으로 인간(人間:小宇宙)과 천지(天地:大宇宙)는 같은 구조를 지니며 모두 음·양의 두 '기(氣)'에서 이루어진다. 양자는 그 음·양의 기의 매개에 의해서 밀접하게 반응하는 것이며, 인간계가 음·양의 기의 조화를 문란케 할 때는 곧 하늘의 음·양의 조화가 혼란스러워지고 그것이 '재이(災異)', 즉 자연계의 이변현상(異變現像)이 되어 나타나며, 인간계의 음·양의 조화를 혼란케 하는 것은 제왕의 실정(失政)이다. 그러므로 재이(災異)는 제왕의 실정에 대한 경도라는 것이 대강의 취지라고 하겠다. 동중서는 제왕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객관화하고 자기가 정당화한 절대군주에 있어서의 자의(恣意)를 검토하려고 했다. 동중서는 천인감응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서 예로부터 있었던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채택하여 자기 사상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음·양이란 인간이나 사물, 요컨대 우주에 존재하는 전부를 구성하는 두 '기(氣)' 즉 원소(元素)이다. 그리고 오행(五行)이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등 5원소의 작용이란 뜻으로 인간을 포함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원리이다. 음양사상과 오행사상은 원래 별개의 것이었으나 기원전 3세기경의 사상가 추연(騶衍:陰陽家의 始祖)에 의해서 정리되어 음양오행사상이라는 것이 되었다. 이 음양오행사상은 동중서에 의해 유교에 채택되었으며 훗날의 유교사상을 우주론의 규모로까지 체계화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우주의 설명은 우주의 자연현상이라는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행동하는 인간이란 의미의 세계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동중서는 '하늘은 곧 인(仁)'이라 하여 자기 사상이 단순한 자연현상의 설명으로 끝나는 것을 막고 인간행동의 의미의 근원을 인(仁)인 하늘, 곧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에서 추구한다. 음양오행설에 의한 우주인식의 방법에는, 특히 음양에 의할 경우에는 인식하는 인간의 가치관 내지 취향이 인식되는 것이 반영되기 쉽다. 중국인에게는 '양존음비(陽尊陰卑)'라는 가치판단이 있다. 양은 양지(陽地), 음은 음지(陰地)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근거이다. 동중서는 난(暖)-한(寒), 여(與)-탈(奪), 인(仁)-배(背), 관(寬)-급(急), 애(愛)-오(惡), 생(生)-살(殺)이라는 인간심리나 행동에 관한 것, 선-악이나 군-신, 부-자, 부-부(君臣·父子·夫婦는 '三綱'이라는 倫理의 根本이 된다), 성(本性)-정(情念)이라는 도덕가치 자체에 관한 것 또한 덕(德, 덕치주의)-형(刑, 법률 편중의 형벌주의)과 같은 정치에 관한 것까지나 음(→後項)·양(→前項)으로 나누어 후항의 양을 플러스 가치를 지닌 것, 전항의 음을 마이너스 가치를 지닌 것, 혹은 전항(前項)보다 못한 것으로 하고 있다. 오행은 단순한 항목 분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목·화·토·금·수에는 상하가 없으며 이 배열은 1·2·3·4·5의 식으로 순서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는 '4단(四端)'에 '신(信)'을 더한 '5상(五常)'이 있다. 인(→ 목)·의(→ 금)·예(→ 수)·지(→ 화)·신(→ 토)이나 여기에는 거의 뜻이 없다. 정부의 5관(五官)인 경우도 사농(司農)을 목, 사마(司馬)를 화, 사영(司營)을 토, 사도(司徒)를 금, 사구(司寇)를 수로 배열한다. 동중서는 한제국의 절대군주에 의한 통일지배 체제를 공자가 난세에 즈음하여 장래에 위탁할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를 실현하는 제도라고 했으며, 그것으로써 유교를 국교, 즉 체제교학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그는 원시유교로부터의 전통을 근거로 하고 새로이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중국인의 정통적인 우주인식의 카

주자[편집]

朱子(1130∼1200) 이름은 희(熹). 자(子)라는 것은 선생이라는 뜻의 경칭. 남송시대(南宋時代)의 유교 사상가, 송학(宋學)의 대성자(大成者), 주자학의 시조이다.

주자의 생애에서 사상 형성이라는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교의 소양 외에 불교나 도가(道家), 즉 노자나 장자의 사상 등에 관한 교양도 깊었으며, 특히 선(禪)의 소양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것, 또한 19세에 과거(進士)에 합격하여 22세부터 죽기 전년의 70세까지, 중간에 긴 공백기가 있기는 했으나 지방관(地方官)으로서 정치의 실제를 경험했다는 것, 또한 관리로 있을 때 벼농사의 기술지도를 하는 등 천문학 지식은 당시로도 일류였듯이 자연과학적인 지식이 많았다는 것 등이다.

그의 저작은 <태극도해설(太極圖解說)>·<사서집주(四書集注)>·<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주자가례(朱子家禮)> 등 그 밖에 막대한 수를 헤아리나 위에 든 것 외에도 주자와 문하생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 등은 그의 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된다.

주자에게는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라는 직관이 있었다. 이 직관이 그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된다. 주자는 이 대조화 세계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고 설명한다. 태극이란 궁극의 근원이란 뜻으로 우주의 정연한 법칙이나 실천의 주체인 인간에 있어서의 의미의 세계도 이 궁극의 근원인 '이(理)'에 근거를 지닌다고 한다. 무극이란 인간의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이(理)'는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사물·현상의 배후에 있는 우주의 눈의 실재라고 하는 설명이다.

도가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곳에 우주의 참된 실재를 직관하고 그것을 '도(道)'라고 불렀다. 주자도 기본적으로는 도가의 도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도가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담겨진 의미를, 결국은 인간 사상의 소산인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추출(抽出)하여 합리화함을 거부했다. 도는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주자의 '이(理)'는 그의 대조화(大調和)의 세계라고 하는 직관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계의 법칙, 인간의 의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이 양자를 통일하는 원리로서 논리적으로 요청된 '이어야만 하는'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조화의 세계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자가 직관한 있어야 할 세계, 다시 말해서 이상(理想) 혹은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주자가 생각한 이(理)는 있어야 할 이상 세계의 원리라는 것이며 유교사상의 관념론적 내지 이상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주자는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나 자연을 음·양 혹은 목·화·토·금·수 오행(五行)의 기(氣)가 작용하는 자리로 본다. 동중서 이후의 현실인식 방법의 답습이다. 그리고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나 자연은 동시에 그것들이 본래 지녀야 할 성질이 안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인간의 '성(性:本性)', 자연의 '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성'이 '이'라 하여 '성즉이(性卽理)'를 주장하고 있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덕의 싹이 깃들이고 있다고 하여 그것을 하늘의 의지 내지 하늘의 목적을 담당한 법칙성이라 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했다.

주자는 맹자의 소박한 인간 덕성(德性)의 인식을 근거로 하고 그것을 자연계의 사물에까지 확대시켰다. 주자는 '이(理)'를 대조화 세계의 비인격적인 근본원리로 하여 우주의 주재자였던 '하늘'에서 인격성을 제거했으나 인간의 의미 세계의 근원임은 그대로 두어 범신론(萬物에 神이 깃들인다고 하는 사상)의 구도(構圖)로 '이(理)'를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에 보편적으로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주자에게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이 없다. 인간과 자연을 같은 구도(構圖)로 생각한다. 예컨대 인간의 '성'을 '마음의 덕'이라 하고 이를 '인'이라 하며, 다시 그것을 분석하여 인·의·예·지(맹자의 四德의 사고방식)로 하나 이 구도를 자연계에도 적용하여 자연의 '성(性)'을 '천지의 심덕'이라 하고 이를 '인'과 대응시켜 '원(元)'이라 하며, 원을 분석하여 원(→ 仁)·향(享:→禮)·이(利:→ 義)·정(貞:→ 信)의 4덕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미발(未發:靜止의 狀態)'에서 '이발(已發:活動의 상태)의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포착하나 그것은 자연계가 '음정(陰靜:靜止한 陰의 상태)'에서 '양동(陽動:活動하는 陽의 상태)'으로 변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미발·이발과 자연계의 음정·양동이 모두 태극인 이(理)에 의해 근거가 주어져 있다고 했다. 주자는 일시동인(一視同仁), 인간을 포함하여 만물에는 안에 대조화 세계의 근본원리인 '이'가 구비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만물은 모두 같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로는 만물에는 인간과 사물, 인간에도 성(聖)-불초(不肖), 현(贅)-우(愚), 귀(貴)-천(賤) 등의 차이가 있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종류의 차이는 인간 만물을 구성하는 음양오행의 '기(氣)'에 청(淸)-탁(濁), 정(正)-편(偏), 순수-조잡 등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기가 청·정·순수라면 성(性), 즉 이(理)는 선명하게 발현되나 탁·편·조잡이면 그 발현은 방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거해서 주자는 인간의 실천을 생각했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인간에 있어서의 성 즉 이, 다시 말해서 본성을 실현하느냐의 문제이다. 주자는 이 문제의 초점을 인간의 '마음'에 두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의 현실, 희·로·애·락, 거기에 욕망과 지성이 마음을 구성하는 기(氣)의 기능이라 하여 이를 '정(情)'이라 부르고 마음에 깃들인 본래의 성(性)과 구별했다. 여기에서 정을 규제하여 성으로 하는 수양법(修養法)·실천법이 궁리되었다. 그런데 주자의 수양법은 2단(二段)으로 나뉜다. 제1단은 '거경(居敬)', 즉 마음의 미발(未發) 상태에서의 수양법이며 안에 구비된 성을 기르고 그것을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비록 의미는 다르나 선(禪)이나 도

캉유웨이[편집]

19세기말 청조(淸朝)의 혁신에 노력한 국가유교 말기의 사상가이며 손문(孫文) 또는 홍수전(洪秀全:太平天國의 영도자)의 출신지에 가까운 광동성 남해현(廣東省南海縣)의 지주 출신 증국번(曾國藩)이나 이홍장(李鴻章) 등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本體는 中國이나 西洋近代文明을 섭취하여 實用한다는 사고방식)에 의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노선을 더욱 추진시켜 정치제도 자체까지도 전통적인 황제와 관료에 의한 절대주의적 지배체제로부터 입헌군주정치 체제로 변혁시켜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한 변법자강(變法自疆) 운동을 지도했다.

이 운동은 한때 성공하여 젊은 황제 광서제(光緖帝)를 중심으로 여러 제도의 개혁이 착수되고 입헌정치의 시행이 기도됐으나 보수파의 반격으로 실패(戊戍政變, 1898),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캉유웨이는 그후에 일본·동남아시아·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을 계속했다. 중국에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공교운동(孔敎運動) 및 제정(帝政) 복귀 운동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 뜻을 이루지 못한 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상활동은 자기의 생애를 건 변법운동을 유교에 바탕을 두려고 한 것이었다. 저작으로는 <예운주(禮運注)>·<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춘추동씨학(春秋董氏學)>·<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대동서(大同書)> 등이 있다.


사 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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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 중국인이 직관 내지 신앙이나 혹은 관념조작으로 파악한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 머리 위에 퍼져 있는 천(天:하늘)의 인상에 자연현상의 주재자라고 하는 직관이 결합되고 또한 인간의 도덕적 반성이 투영(投影)되어 천(天)의 신앙은 형성되었다. 의지나 목적을 지닌 인격신(人格神), 자손에게 은혜를 베푸는 조상, 우주의 근원 내지 창조자, 인간이나 만물 속에도 그 본성(本性)으로서 깃들이는 신 내지 법칙, 비인격적인 참된 실재, 운명,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 등 그 이미지는 다양하나, 우주의 궁극적 실재이며 인간의 의미 세계의 근원, 곧 윤리도덕의 원천이라고 하는 점은 일관되고 있다. 천(天)은 '상제(上帝)'·'천제(天帝)'라고도 부른다. 도가(道家)의 '도(道)'나 주자가 파악한 '이(理)'도 이 전통적인 천(天)의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