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봉기(逢紀, ? ~ 202년 9월)는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원도(元圖)[1] 이며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사람이다.[2]

생애[편집]

이름 봉기(逢紀)
시대 후한
생몰  ? ~ 건안 7년(202) 9월
원도(元圖)[1]
본관 · 출신 형주 남양군[2]
관직 호군(護軍)〔원소〕
작위
소속 하진원소원담

원소(袁紹)를 섬겼다.

원소가 낙양(洛陽)에서 당인(黨人)들과 교류하며 환관들의 전횡을 비판하던 시기부터 그와 친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원소가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과 십상시(十常侍)를 주살할 계획을 꾸밀 때, 원소의 추천으로 하옹(何顒) · 순유(荀攸) 등과 함께 대장군부(大將軍府)에 징소되었다. 훗날 허유(許攸)와 더불어 원소의 휘하에 들어가 그를 도우며 참모로써 일하게 되었다. 초평(初平) 2년(191년)에 기주(冀州)를 한복(韓馥)에게서 빼앗을 것을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며, 이후 심배(審配)와 함께 군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봉기는 총명하고 지모가 뛰어났으며 원소와의 친교도 깊고 가장 오랫동안 원소를 따랐기 때문에 참모들 중에서 가장 중용받았지만, 동료 참모들인 심배 · 전풍(田豊)과는 사이가 나빠 항상 대립하였다. 특히 전풍과의 불화는 매우 심각하여 원소와 전풍이 항상 불화했던 원인은 봉기의 참언도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건안(建安) 5년(200년)의 관도대전(官渡大戰) 패전 후, 원소에게 참언을 하여 전풍을 처형시킨 것도 봉기였다.

한편으로는 참언으로 인해 궁지에 빠진 심배를 [사사로운 감정과 국사는 별개의 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열심히 변호해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건안 7년(202년) 5월, 원소가 죽었다. 원소의 후계를 노리는 원소의 조카 원담(袁譚)과 그를 지지하는 곽도(郭圖) · 신평(辛評) 등의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봉기는 심배와 함께 원소의 적자 원상(袁尙)을 옹립하였으나, 원담이 이에 불복하고 여양(黎陽)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사태는 심각하게 돌아갔다.

같은해 9월, 원소의 부재와 내분을 틈타 조조(曹操)가 침공해 왔다. 원담은 증원을 요청했으나 원담이 군사를 빼앗을 것을 두려워했던 원상은 심배와 상의한 끝에 원담에게 군대를 보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원담은 원상이 자신의 감시역으로 보냈던 봉기를 살해하고 만다.

봉기가 살해당한 직후 원담과 원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마침내 원상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격파하지만, 조조가 퇴각하자 원담이 거듭 반기를 들고 원상을 공격하여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봉기는 원소의 오랜 중신으로 그 위치상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수수께끼와도 같다.

원상에게 패한 원담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심배는 원담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모든 문제의 원흉인 곽도를 주살한 뒤 화해하자는 신서(信書)를 보냈는데, 이 신서의 내용중에는 봉기를 가리켜 흉신(凶臣)이라고 규탄하고 원담이 봉기를 처형한 일을 칭찬하는 말이 있다. 또한 원상도 봉기가 죽은 뒤 봉기의 일족을 처형했다고 한다. 원상에게도 처단을 받은 원인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신서의 내용으로 살펴봤을 경우 경우 봉기는 원상에게서 중재역으로 파견되었으면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고 오히려 원담을 부추기는 등 원담, 원상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자신의 이익만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심배의 주장만을 전적으로 긍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 신서의 내용은 《후한서(後漢書)》와 《한진춘추(漢晉春秋)》의 내용이 다소 다르기 때문에 혹자는 심배가 봉기를 비난한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심배가 봉기의 죽음을 조장하거나 최소한 방임한 것으로 보이는 정황과, 봉기가 죽은 직후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비로소 원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미심쩍은 부분이다. 어쩌면 심배와 봉기가 다시 사이가 나빠진것이 그를 이런 궁지에 빠뜨린 것일 수도 있다.

순욱전에 의하면 공융(孔融)은 심배와 봉기를 나란히 원소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 평가했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주석을 달았던 역사가 호삼성(胡三省)은 원소의 구신들 중 끝까지(후계자인 원상에게까지) 충성을 바친 인물은 오직 심배뿐이었다고 평했다. 이에 의하면 동기야 어쨌든 봉기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호삼성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원소, 조조와 동시대인이었던 왕찬이 저술했으며 봉기에 대한 인물상도 비교적 소상히 나와 있던 《영웅기(英雄記)》등 여러 사료가 유실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고, 호삼성은 당연히 이를 모두 읽어보고 평가를 내렸을 것이다.

순욱(荀彧) 역시 원소 진영의 간부들을 평가할 때, 봉기에 대해선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지만 자신의 판단에만 의지한다." 라고 평가했다. 과연 이때 순욱이 평가한 인물들은 모두 그에게서 지적받은 점으로 인해 말로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봉기 역시 순욱에게서 지적받은 대로 독선적인 점이 최후를 불러온 원인이 아니었을까.

《삼국지연의》 속 봉기[편집]

사실(史實)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원담의 곁에 있을 때부터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곽도가 원상에게 구원을 요구하는 사자로써 방문할 때 곽도는 원담의 참모로써 심배나 봉기 둘 중 한 명을 파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원상은 두 사람에게 제비를 뽑게 하였고, 봉기가 가게 되었다. 물론 곽도의 목적은 단순히 인질을 얻기 위해서였다.

각주[편집]

  1. 왕찬(王粲), 《영웅기(英雄記)》
  2.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 권60

참고문헌[편집]

  • 范曄『後漢書』列伝第六十四「袁紹伝」
  • 陳寿『三国志』魏書第六「袁紹伝」(和訳:今鷹真・井波律子『三国志 正史 1』ちくま学芸文庫、1992年)
  • 同上,魏書第十「荀彧伝」(和訳:井波律子・今鷹真『三国志 正史 2』ちくま学芸文庫、1993年)
  • 『三国演義』(和訳:立間祥介『三国志演義 上』平凡社、1972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