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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 콩코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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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 콩코드
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
미국 독립 전쟁의 일부

19세기 렉싱턴 전투 그림
날짜1775년 4월 19일
장소
결과 식민지군의 승리, 미국독립전쟁의 시작
교전국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지휘관
존 파커
제임스 배렛
존 버트릭
윌리엄 히이스
조셉 워렌
아이작 데이비스 
프랜시스 스미스
존 핏캐언
휴 퍼시
병력
렉싱턴 77
콩코드 400명
전투 말기 3,800명
보스턴 출발 700명
렉싱턴 400명
콩코드 100명
전투 말기 1,500명
피해 규모
49명 전사
39명 부상
5명 실종
73명 전사
174명 부상
53명 실종

렉싱턴 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는 1775년 4월 19일에 일어난 ‘미국 독립 전쟁’의 포문을 연 영미 간의 전투이다. 영국군이 보스턴 북서쪽에 위치한 콩코드에 있던 미국 식민지 민병대 무기고 접수 작전을 실시했다. 그 조치에 반발하여 움직였던 식민지 민병대와 무력으로 충돌,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민병대가 격렬한 전투를 벌여 식민지군이 영국군을 격파했다. 규모는 작지만 미국 독립 전쟁의 서전을 장식한 의미있는 전투가 되었다.

배경

[편집]
토마스 게이지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군 보병을 ‘레드코트’나 ‘악마’ 등으로 불렀다. 그들은 1768년 이후 보스턴을 점령하고 참을 수 없는 법을 강요했으며, 해군과 해병대까지 동원하여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밀어부쳤다. 총독 토머스 게이지는 보스턴을 한 걸음 벗어나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다수의 패이트리트와 소수의 왕당파 사이에 긴장 관계가 그 정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게이지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 패트리어트 민병대로부터 군수 물자를 회수하려고 생각했고, 신속한 소규모의 비밀작전을 시작했다. 이러한 보급품에 대한 갈등은 한번은 영국군의 성공으로 이어졌지만, 이어진 수차례의 무혈 작전은 패이트리트들의 성공으로 돌아갔다. 게이지는 스스로 자유의 벗이라고 생각했고, 식민지 총독과 점령군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을 구분하려 했다. 영국 본국의 하원 의원이며, 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게이지의 매사추세츠 식민지와의 대립관계에 대해 영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영국인이 다른 영국인을 예속하도록 설득시키기란 적합하지 않은 민족이다.”[1]

개척민들은 17세기 이후로 민병대를 조직해 왔으며, 초기에는 주로 인디언들의 습격에 대비한 방어용이었다. 이러한 민병대들은 1750년대와 1760년대 프렌치 인디언 전쟁 때도 소집되었다. 이들은 주로 지방 민병대였으며, 지방 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2] 그러나 매사추세츠 통치법으로 지방 정부가 와해되면서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자, 매사추세츠 의회에 의해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저항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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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프랜시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700여명의 영국 정규군 병사가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콩코드의 창고를 확보하여 파괴하라는 명령을 접수했다. 식민지의 애국자들은 이날 몇 주 전에 영국군이 수색을 시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으며, 군수 물자의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전부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놓았다. 영국군이 들이닥친 그 전날 밤에도 그 작전 계획의 세부 사항을 입수하고 있었으며, 이 소식은 곧바로 민병대들에게 전달되었다.

렉싱턴에서 해가 뜨자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민병대는 이내 철수를 했다. 몇 시간 후 콩코드의 노스 브릿지에 있던 다른 패트리어트 병력이 영국군의 3개 중대와 교전을 벌여 타격을 입혔다. 몇 차례의 야전 전투 후 타격을 입고 수적으로 열세가 된 영국군이 철수했다.

민병대는 그 후에도 계속 추격전을 벌여 보스턴을 향해 철수하는 영국군을 쫓아가며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스미스 원정대는 콩코드에서 렉싱턴으로 가는 길에 휴 퍼시가 지휘하는 증원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총 1,700여명이 된 원정대는 철수 중에도 빗발치는 사격에 노출되었지만, 가까스로 찰스 타운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군사 기밀을 지키지 못했고, 적지에서의 작전 행동에 필요한 신속성도 갖추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무기 압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군 대부분이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 있었지만, 그날 밤부터 매사추세츠 민병대가 주변 지역을 차단했고, 보스턴 포위전을 시작했다.

미국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콩코드 찬가》(Concord Hymn, 1836)에서 “한 발의 총성이 세상을 바꿨다!”(shot heard 'round the world)며 찬사를 보냈다.

각주

[편집]
  1. Fischer, p. 30
  2. Brooks, pp. 30–31
  3. Fischer, p. 51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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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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