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두석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두석무(杜碩茂)

[편집]

'''두석무'''(杜碩茂, [[1676년 (숙종, 병진생(丙辰生))]]∼[[1751년]][1월 26일]], 전라도 옥구현)출신의 [[조선중기]] 숙종조에 삼효자로 형 두기무(杜起茂) 동생 두윤무(杜允茂)와같이 복호(復戶)를 하사받았다. 본관은 [[두릉(杜陵)]]이고, [[군산시( 옛 옥구현)]]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


가계

[편집]

두석무(杜碩茂)은 두릉 두씨 시조 두경령(杜慶寧)의 19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유학자로 명성을 날린 두인휘(杜仁輝)이다. 아버지는 두시정(杜時禎)이며, 어머니는 열부(烈婦)로 조정에서 복호(復戶)를 하사받은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다.

두석무(杜碩茂)가계는 송나라 진종(眞宗) 함평연간(咸平年間) 병부상서 휘(諱) 경령(景寧)공은 충직하게 직언극간(直言極諫) 하여 진종의 의사에 거스리게 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 지건(之建) 우습유(右拾遺) 지방(之逄) 거느리고 고려국 궁지현(宮池縣) 현금(現今) 만경현(萬頃縣)에 도착하여 고려 조정(朝廷)에서 특별히 만경현을 식읍지로 사패(賜牌)하고 또한 두릉군(杜陵君)에 봉하였다. 그분이 우리나라 두씨 시조(始祖)이시다.

두방(杜邦) 공은 문하시랑(門下侍郞)벼슬 하였고, 평장사(平章事) 및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신 두경승(杜景升) 공은 서경(西京,평양)을 평정하여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여졌다. 근세조선(近世朝鮮)에 와서는 두승손(杜承孫) 공이 병마우후(兵馬虞候)을 역임하셨으며, 만경(萬頃)에서 옥구현 옥산(玉山)으로 이주하여 세거(世居)하였다.

두세준(杜世준) 공은 효성이 지극해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 세우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두헌(杜憲) 공은 공훈(功勳)있어 선무랑(宣務郎:문관 종6품 관직)에 임명되었고, 장수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에 올랐다. 두사순(杜思順) 공은 현감을 역임하셨다. 두정란(杜廷蘭)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 지킴에 충정을 다하였으며,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가하여 순절함으로써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하여졌으며 금곡사 및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1][2]


활동상황

[편집]

두석무는 휘(諱)는 석무, 자는 무중(茂中), 본관은 두릉(杜陵)이다. 1676년 (숙종, 병진생(丙辰生))태어났고, 1751년 신미(辛未) 별세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삼형제가 부모님 섬기기를 극진히하고 하고, 음식을 올릴 때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고, 집에서 나가거나 들어올 때 마다부모님을 몸소 뵙고 알렸고, 아침인사 올리고, 저년에 잠자리가 따뜻하고 꺠끗한지 항상 살피지 않을때가 없었다. 부친이 편찮으시면 매일 변을 낫보고 증험하여 보았으며, 돌아가시려 하니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내어 입에 떨어뜨려 넣어주기를 3일 동안 지속하였으나 돌아 가셨다. 장례 때 처음부터 끝까지 예절을 다하고 장례가 끝난후 3형제는 3년동안 초막을 지어 여막살이하며 한번도 집에가서 자는 날이 없었고, 훗날 모치 상을 당해서도 초종장사 예를 부친이 돌아가신때와 같이 하니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효자라고 하였고, 사람들은 여막이 있는곳을 가리키며 효자막이라고 하였으니 지극하고 정성스런 효도아니면 어찌 사람들을 진심으로 감동 시킬수 있겠는가? 배(配)는 전주최씨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조의 따님이며, 무인(戊寅) 7월15일 사망했다. 두석무 3형제의의 아름다운 행실이 조정(朝廷)에 알려지자 당시 임금인 숙종은 1717년(숙종43)에 복호(復戶) 명령하였고, 두석무등 3형제의 효자비가 지금도 회현면 금당리 원당 마을에 있다.[3][4]


삼효자각(三孝子閣)의 유래

[편집]

'''두릉두씨 삼효자각(三孝子閭)'''는 [[전라북도]] [[군산시]] [옛 옥구현] 회현면 금광리 원당마을에 있다. 효자 두기무⦁두석무⦁ 두윤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과 비각(碑閣)이다. 삼효자각(三孝子閣)은 두릉두씨(杜陵杜氏) 집안의 3명의 효자를 기리기위해서 1969년 8월에 세워졌다. 고려 명종조 김보당난과 조위총난을 평정후 삼한후벽상공신에 봉해진, 문하시중 두경승장군의 13세손이며 임진왜란 선무원종공신인 두정란장군의 증손(曾孫)인 두시정(杜時禎)공의 아들인두기무(杜起茂) 두석무(杜碩茂) 두윤무(杜允茂)가 그들이다. 두기무, 두석무, 두윤무는 효심이 깊어 하늘을 감동시켰다 하여 조정에서는 복호(復戶)의 특전을 1717년(숙종43년, 丁酉)에 내렸고, 그후 1969년 옥구(沃溝) 유림 장보(章甫)의 심의로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비각 내부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孝子杜公起茂 孝子杜公碩茂 孝子杜公允茂의 碑)라고 각서 되어 있으며 비문도 같은 내용이다.

두씨(杜氏)의 본관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이고 덕망과 신망이 높은 집안이다. 병마우후(兵馬虞候,무관직 종3품) 옥구에 많이 살고 있는 큰 집안이다. 선조때 「용사난」에 향교가 불탔을 때 여랑(汝良)이 새로 건축한일이 있어 유림에서 널리 알려진 병마우후 5세조 후손들인 증손(曾孫) 세명이 장성하고 있었다.

두기무(杜起茂)는 숙종(肅宗) 갑인생(甲寅生,1674)이고, 둘째 두석무(杜碩茂)는 숙종 병진생(丙辰生,1676년)이며, 막내 두윤무(杜允茂)는 숙종 신유생(辛酉生,1681년)이다. 모두 효성이 지극하고 출중한 인물로 부모님에게 효성을 다 했고, 부모님 병환시에는 병자의 옆을 떠나지 않고 쉬지않고 돌보았으며, 매일 변을 낫보고 증험하여 보았으며, 돌아가시려 하니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내어 입에 떨어뜨려 넣어주기를 3일 동안 지속하였다. 잠도 자지 않고 제반사를 받들어 항시 형제간에 상의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드렸다. 1713년에 아버지 시정은 5월에 죽었는데 그해 12월에 어머니 진주강씨는 뛰따라 죽었다. 두분은 합장하였는데 형제는 서로 번갈아가며 하루도 상복을 벗지 않고 묘 앞에 예절을 지키며 애통하게 통곡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또한 두석무등의 3효자는 가정에서의 소행도 남들과 달랐다. 공부도 열심히 하여 그 배움과 행동은 후세 까지 빛났다. 7세조 선조인 세준의 효행이 돌아가신후 세상에 알려져 세종 때 증직(贈職)을내렸고, 그후 정려를 하사 받았다. 의병장 두정란공은 임진왜란당시 조헌 선생의 문인으로 순절하였다. 삼효자가 충효가문의 후손으로 행동(行動)이 특출하여 1969년 옥구(沃溝) 유림 장보(章甫)의 심의로 비석과 비각를 세웠다.[5][6]


평가

[편집]

두석무등 3형제을 입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효자라고 하였고, 사람들은 여막이 있는곳을 가리키며 효자막이라고 하였다.[7]


추모 및 배향

[편집]

두석무등 3형제의의 아름다운 행실이 조정(朝廷)에 알려지자 당시 임금인 숙종은 1717년(숙종43)에 복호(復戶) 혜택을 주었고, 그후 1969년(乙酉) 옥구(沃溝) 유림 장보(章甫)의 심의로 원당마을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8]


묘소 및 배향

[편집]

* 회현 죽동 쌍분 2005년 5월 파묘 원당 두릉두씨 납골당

* 배향은 매년 음력3월 첫째주에 고향인 군산시 회현면 원당 재각에서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편집]

『고려사』 13권 두경승편

* 『신증동국여지승람』

*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 『옥구 군지』(옥구 군지 편찬 위원회, 1963)

* 『옥구 군지』(옥구 군지 편찬 위원회, 1990)

* 『옥구인물지』(옥구 문화원, 1991)

*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 『두릉 두씨 세보』(1898)

* 『두릉 두씨 세보』(1925)

* 『두릉 두씨 세보』(1986)

*『청백 교직자 청담 두진열 선생』( 청담 두진열 선생 추모문집발간위원회, 대학서림, 2019)



각주

[편집]
  1.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2. 『옥구인물지』(옥구 문화원, 1991)
  3.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4. 『옥구인물지』(옥구 문화원, 1991)
  5.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6. 『두릉 두씨 세보』(1898)
  7. 『두릉 두씨 세보』(1925)
  8.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