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두릉두씨 (杜陵杜氏)의 연원 및 개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杜陵杜氏)의 연원 및 개요


두릉두씨(杜陵杜氏)는 중국 요(堯)나라 임금 후예(後裔)로 원조(遠祖)는 3000년 전 중국 상고시대에 서주(西周) 12대 선왕(宣王 BC 800년)이 제후국(諸候國)으로 봉(封)한 두백(杜伯) 공(公)을 원조(遠祖)로 하였다.

 두릉(杜陵)은 오늘날 중국 장안(長安) 남쪽의 산서성(山西省)에 속하며 서안부(西安府) 호현(戶縣) 일대에 역대(歷代) 왕조(王朝) 능(陵)이 많이 있고 그 중에 선제(宣帝) (BC 827~782) 능(陵)이 있는 호현(戶縣)의 두(杜) 마을에 두씨(杜氏)가 살아 주(周) 정부에서 중국의 5대 지위인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 중 두씨(杜氏)에게 백(伯) 지위를 하사(下賜)하여 두백(杜伯)이 되었고 두릉 두씨(杜陵 杜氏)라 하였다. 
 두씨는 요순(堯舜) 시대부터 득성(得姓)하여 삼국시대 위나라 정치가 두예(杜預)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杜甫), 두목지(杜牧之)등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높으며 한(漢) 당(唐) 송(宋) 시대 문장(文章) 재덕(才德) 충효(忠孝) 무술(武術) 전략(戰略) 등 뛰어난 명문화족(名門華族)이었다.
 두백(杜伯)공의 후손이며 시조(始祖) 두경녕(杜慶寧) 공은 중국 두릉(杜陵) 사람으로 송(宋) 태종(太宗) 함평연간(997∼1003) 예부상서를 역임하고 병부상서로써 진종(眞宗)의 왕위계승이 두태후(杜太后) 유언과 달라 상소(上訴)하고 직언간청(直言諫請)하여 진종(眞宗)의 뜻에 거슬려 소주자사(蘇州刺史; 道知事)로 좌천(左遷)되어 아들 중서사인 지건(之建)공과 우습유 지방(之逄)공 등 정처 없이 가다가 풍랑으로 궁지(宮池;萬頃縣, 현 古群山島)에 도착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서는 송조(宋朝)에 통보하니 후대(厚待)하라는 통보로 고려국에 정착(定着)하게 되었다.
 시조(始祖) 두경녕(杜慶寧)공의 시거(始居)지가 당시 만경현(萬頃縣)에 속하여 고려 조정(朝廷)에서 공에게 군(君)과 좌사간(左司諫)으로 봉(封)하고 식읍(食邑)으로 사패(賜牌)하여 만경현을 두릉(杜陵)이라 하였으며 두씨의 본(杜氏 本)이 되었고 두릉 남쪽의 연못도 능지(陵池)라 하였다.

2세조 두지건(之建)公의 아들 두수총(遂寵)공은 고려조 대호군(大護軍), 증손 두방(邦)공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명종(明宗)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용맹을 떨친 6세조 두경승(景升)공은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의 폐왕음모(廢王陰謀)를 막으려다 영종도로 유배당하여 울분으로 피 토하고 사망하였고 장남 7세조 두영(瑛)공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차남 두현(玹)공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유명했다.

9세조 두무지(茂枝)공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두을지(乙枝)공은 울산병사(蔚山兵使)로 형제 모두 유명하였고 조선조 태종(太宗) 때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역임한 11세조 두승손(承孫)공과 중종(中宗) 때 효행으로 정려(旌閭) 세운 12세조 두세준(世俊)공 부자도 유명하였다. 13세조 두헌(憲)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아들 14세조 두사순(思順)공은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통훈대부로 비인현감과 강령현감 역임하였고 동생 두사근(思謹)공은 첨절제사(僉節制使)로 형제 모두 유명하였다.

 두사순(思順)공의 아들 15세조 두정란(廷蘭)공은 마도만호(馬島萬戶), 어모장군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정담 백광언 변응정 고경명 조헌과 웅치(곰티재)에서 2만 여명, 이치(배재)에서 2천명을 사살하고 스승인 조헌과 훈련원봉사인 동생 두정협(廷莢) 공 등 700여명이 금산성을 공략하다가 순절하였고 이 전투가 임진왜란 최초 승전이며 전라도가 무사하였다. 

두양필(良弼)공은 임진왜란 때 공 세우고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워 도총관(都摠管;참모총장)에 임명되고 진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종질 두기문(起文) 공은 병사(兵使), 동생 두경문(慶文) 공은 만호, 판관으로 형제가 종숙 두양필공을 도와 공 세웠고, 숙종(肅宗)때 효행으로 복호(復戶)하사 정려(旌閭) 세워진 18세 祖母 진주강씨와 19세조 두기무(起茂), 두석무(碩茂), 두윤무(允茂), 삼효자(三孝子)도 충효 삼효각 旌閭세워 유명하고 두만형(萬馨)공은 문필로 유명하여 정조(正朝)께서 칭찬을 많이 했다.

집성촌은 군산 회현 일대, 옥산 당북리, 금성리, 옥구 오곡리, 임실 운암 지천리, 익산 왕궁 삼계, 김제 금구, 완주 용진, 진안과 김포 등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