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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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地誌"

대한지지(大韓地誌)[1][2][3]대한제국 개화기에 현채(玄采)가 번역 편집한 지리 교과서이다. 대한지지 자료의 저본 저자 및 연대는 미상이나 주로 고마쓰 스스무(小松運)의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1887)[4]와 마쓰모토 니키치(松本仁吉)의 『조선지지요략(朝鮮地誌要略)』(1894)[5]이며, 그들의 기술체제를 따랐다고 평가된다고 한다.[6][7][8] 현채의 자서에 일본인들의 여러 조선지지류를 기본으로 삼아 조선의 동국여지승람 연혁조 등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고 밝혔으며,[9][10] 1899년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1901년에 재판이, 그리고 1906년에 3판이 발행되었다. 19세기 말 한반도의 지리를 간략히 설명한 책으로, 한국의 학교 교육에서도 사용되었으나 1909년 일본 통감부의 교과용 도서 검정 규정에 의하여 금지 처분을 받고[11] 다시 1910년 7월 1일 내부 교과서용도로 불인가 도서로 지정되었다가,[12] 1910년 11월 19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제69호 고시제72호로 금서처분을 당하였다[13].

현채 대한지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보면 우선 국내에서 출간된 최초의 근대적 지리학 교과서로서 당시에 혁신적 문체였던 국한문 혼용체를 씀으로써 대중에게 쉽게 읽히는 가독성 제고, 지리 용어를 범례에서 해설하여 지리 관념의 소통에 기여, 산천의 자연지리적 경관 특징으로 지명을 분석하였고 인문지리적 특징과 사건을 열거하여 이해에 기여, 연해 지구와 도서에 대하여 수심, 해저지형의 기복 등 자연지리적 특징이 항구 발달에 미치는 인문지리적 영향을 기술하는 등, 자연지리적 과학 지식을 도입, 전통적 자연관이 극복되고 합리적 자연관 인식의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 등이다.[14] 대한지지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는 근대적 사고와 방법론을 이해하여 생산한 자생적 근대 지리학 저술이 아니라 일본인 저술의 장점과 단점을 평가와 비판 없이 수용, 전통 지리 지식을 덧붙이는 번역 편집 접근법의 한계로 인하여 일본인의 관점 하에서 생산된 누락, 오류, 내지 왜곡된 지식 혹은 정보를 국내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15][16][17][18]


목차

고종 기에 간행된 지지류 문헌의 하나인 대한지지[편집]

대한지지는 1800년대 후반 고종 대에 편찬된 3 종 관찬 지리서들 중 1871년부터 편찬된 여러 지방읍지류와 1895년의 조선지지(朝鮮地誌; 1895년, 1책),[19] 그리고 1899년의 현채 대한지지 등 3종 지리서 중의 하나이다[20][21]. 1895년의 조선지지(朝鮮地誌)에서는 울릉도를 주회 200리로 기록하면서 우산도는 울릉도와 별도 항목으로 울릉도와 함께 울진현 소속으로 병기되어 울릉도 주회 200리의 범위 밖에 있다는 조선정부의 인식을 보여주었는데, 현채 대한지지에서는 우산도 고지명이 안 보이며, 단지 울릉도가 고우산국이란 문구가 보일 뿐이다(1899년 황성신문 울릉도 기사에 인용되어 널리 알려진). 현채의 대한지지는 1901년 재판, 다시 1906년에 3판이 나왔지만, 대한지지의 지리 기술이 소략하며 오류를 보완해야 한다고 보는 지식인들에 의해 『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 (장지연, 1907), 『초등대한지지(初等大韓地誌)』 (안종화, 1907), 『초등대한지지(初等大韓地誌)』 (안종화, 류연. 1908) 등이 출현하여 우산도를 울릉도 동남방으로 기술하였고, 1908년에는 1592년-1598년의 임진왜란 이래 1904년까지 갱신된 지리정보를 담은 『동국문헌비고』의 2차 개정판인 『증보문헌비고』가 출판되어 전통시대의 우산도가 울도군 소속이 되었음을 밝혔다. 이로 볼 때 현채의 대한지지는 고종 기에 편찬된 지리서 중에서 특이하게 우산도 문구를 누락한 예외로 보이며, 이는 근대적 지리교과서의 전범으로 일본의 지리서를 위주로 번역하고 조선 본국의 자료인 여지승람 연혁조로 보충하였다는 현채 후서의 편집원칙에 못 미치는 단순 오류이며 이로부터 조선정부의 영토 주권에 대한 구속력 있는 해석을 유추하는 사고법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호사카 유지는 책의 내용 중에 "일본해"가 나타났다는 사실과 저자의 후기를(발문을) 인용하여,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했다"고 정보의 출처 국가를 밝혔으므로 대한지지 속의 정보를 조선인의 생각을 평가하는 근거로서 동원하는 판단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였다.[22]

독도 고유영토의식의 존부에 대한 의혹 제기[편집]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쌍방이 전통시대 이래의 고유 영토 주권을 주장하는 독도에 관한 고유영토 의식의 존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주제로, 대한지지에 기재된 다음의 영역 기술이 증거로 제시되었다[23][24][25][26][27][28][29].


  • 남지: 북위 33도 15분
  • 북지: 북위 42도 25분
  • 서지: 동경 124도 30분
  • 동지: 동경 130도 35분


이상의 문증을 근거로 일본 외무성이 1954년 2월 10일 자 외교문서에서, 현채가 대한지지를 편찬하던 1899년 당시 조선정부가 현 독도에 대한 영유의식이 없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 듯하다. 왜냐하면 독도의 경도는 약 동경 131도 52분이며, 이 경도는 대한지지가 말한 한반도의 영토가 동경 130도 35분까지 미친다는 언급과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외무성이 제기한 이와 같은 시사에 관하여 한국의 학자들은 현채 대한지지의 이른바 조선의 사극지경위도 세트가 일본 해군성이 제작한 1883년의 환영수로지에서 기원하였으며, 환영수로지 내지 환영수로지의 경위도 정보를 수용한 동일 계통의 지리서에서 유래한 것임을 지적하였다.[30][31][32]

대한지지 소재 경위도 정보의 유래와 소위 사극지점의 실체[편집]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리교과서로 평가되는 대한지지이지만, 대한지지가 일본인 저작물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적인 자세로 번역 편집되었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33] 대한지지는 이들 일본인 저작물의 총론, 목차, 내용을 크게 인용 내지 모방하였으며, 경위도는 이들 책자의 기록을 그대로 따른 것이지 대한제국 정부의 독자적 측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34]. 당시 조선 정부가 근대적 의미의 측량을 위한 지식, 기술, 훈련된 인력, 측량 장비 및 근대적 해상 교통 수단을 갖추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는 반면, 일본은 1868년 경의 개항기를 거치면서 이미 해양측량에 요구되는 모든 요소를 갖추었고,[35] 1876년 2월 27일 조인된 강화도조약 즉 조일수호조규를 협상하면서 조선의 해양을 측량할 권리를 인정받아 해군 측량선 아마기함으로 울릉도를 측량하였다.[36] 특히 울릉도에 대해서 1878년과 1880년 양차에 걸쳐 울릉도와 인근 해역을 탐사하고 측량하여 조선의 해양에 대하여 근대적 의미의 실측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를 보고서로 출판하였다.[37][38][39] 그러나 울릉도에 대한 경위도를 포함한 외국의 수로 정보를 이미 검증한 1878년 측량과 자국이 수행한 경위도 측량을 1880년에 이미 완료한 일본 해군이 3년 후인 1883년 환영수로지에서 울릉도를 조선의 경위도 범위로부터 탈락시킨 사실은 환영수로지의 영토 구획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신뢰할 수 없음을 뜻한다.[40][41]


아마기함의 울릉도 제1차-제2차 탐사의 늦어진 보고서 출판[편집]

  • 1878년 6월 29일 아마기함(天城艦)의 1차 울릉도 측량: 수로잡지 16호 (1879년 편찬; 1883년 7월 간행). pp. 24-25.[42]
  • 1880년 6월 5일[43] 아마기함(天城艦)의 2차 울릉도 측량: 수로잡지 41호 (1880년 편찬; 1883년 7월 간행). pp. 124.[44]


문제의 발단이 된 1899년 대한지지의 이른바 조선의 동극지 동경 130도 35분을 포함한 사극지 경위도를 동일하게 기술한 선행 저작물로서 일본 해군성 수로부나 기타 저자들이 편찬한 다음이 있음이 지적되었다.[45][46] 이들은 크게 두 개의 하위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 조선수로의 사극지 경위도 계열과 둘, 수로에 한정된 것이 아닌 조선국 영토의 사극지 계열이 그것이다. 이 둘은 수치만 보면 같지만, 주제어가 조선의 연안 수로 측정 지점의 한계인지 조선 영토 모두의 한계인지로 크게 다른 관념인데, 어디에선가부터 이 둘을 슬며시 혼동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를 적극 동원하여 독도의 조선 영토에서의 배제 및 일본인의 신발견 및 일본영토 편입으로 전용한 사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선 본토연안수로 사극지의 경위도인 지리서[편집]

압록강 하구의 본토 용천군의 돌출한 곶에서 제주도 남단 모슬포를 거쳐 두만강 하구의 북쪽 끝 녹둔도까지 측량한 경위도 측량값들이다.

  • 환영수로지제1판(寰瀛水路誌; 海軍水路部 嘉納謙作, 1883.04)[47][48]
  • 환영수로지제2판(寰瀛水路誌; 海軍水路部 嘉納謙作, 1886.12)[49][50]
  • 조선수로지제1판(朝鮮水路誌, 水路部 肝付兼行 序[51], 1894.11)[52][53]
  • 조선수로지제1개판(朝鮮水路誌, 水路部, 1899.02)[54]


조선 영토 사극지의 경위도로 왜곡한 지리서[편집]

압록강 하구의 본토 용천군의 돌출한 곶에서 제주도 남단 모슬포를 거쳐 두만강 하구의 북쪽 끝 녹둔도까지 측량한 값을 마치도 조선 영토의 사극지 경위도인 듯 오해하였거나 왜곡한 지리서들이다.

  •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 小松運, 1887)[55]
  • 조선지리도(朝鮮地理圖, 鈴木留吉, 1894.06)[56]
  • 신찬조선국지도(新撰朝鮮国地図, 林正, 1894.7)[57]
  • 신찬조선지리지(新撰朝鮮地理誌, 大田才次郎, 1894)[58]


이 때, 울릉도를 조선 사극지 경위도 범위에서 배제한 환영수로지 제1판을 1883년 4월에 먼저 간행하고, 울릉도를 측량한 제1-2차 보고서를 7월로 뒤늦게 발간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외무성과 해군성 내 관련자들 외에는 울릉도 탐사 결과를 일본인들조차 알 수 없게 하여 조선 영토에서 울릉도를 제외한 사실이 탐지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알 수 있다. 1883,1886년 간 환경수로지까지는 조선국을 조선 반도와 소도서 군도로 정의하였기 때문에 소위 조선사극지 경위도 기술이 조선 연안 수로의 사극지로서 조선 반도와 제주도 연안 본토 지점의 경위도 측정으로 한정하였다고 볼 여지가 남지만, 1887년 간 조선팔도지를 비롯한 일반 지리서의 경우 연안수로라는 단서 없이 같은 조선사극지 경위도 값만을 제시하면 도서가 빠지므로 조선의 영토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같은 괴리 내지 오해될 수 있는 조선 연안수로 사극지 정보를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 교정하려는 민간인 저술의 지리서로는 아래가 있다.

환영수로지의 애매한 왜곡과 조선팔도지의 노골적 왜곡을 교정하는 일본인들의 조선지리서[편집]

  • 나가타 겐수케(永田健助)의 신체지리전지(新体地理全誌. 1893)[59]
  • 야즈 쇼에이(矢津昌永)의 한국지리(韓國地理 1904.09)[60][61]
  • 오카베 후쿠죠(罔部福藏)의 만한노령지지(滿韓露領地誌: 日本民族の新發展場 1905.08)[62]
  • 다부치 도모히코(田淵友彦)의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 博文館 1905.09)[63][64]


이들의 저술이 교정한 이른바 조선사극지 지명과 경위도 수치에도 여전히 오류가 남았으나, 야즈 쇼에이(矢津昌永)와 다부치 모도히코(田淵友彦)의 경우 대등한 경(위)도의 일본 지명을 남겨 이를 교정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의 동극지 동경도와 대등한 일본 지명으로 규슈(九州) 동단이 제시되었는데, 규슈의 동단은 동경 132도 05분 07초에 소재한 쓰루미사키(鶴御岬)[65]로서 동경 131도 52분에 위치한 독도보다 약 13분 동쪽에 있어 당시 일본의 지도적인 지리학자와 지식인들이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환영수로지 계통의 경위도가 유래한 한반도 지점을 알기 위하여 1907년 발간 도쿠나가 이사미조(德永勲美)의 간코쿠쇼란(韓國總覽; 한국총람)[66]의 보고치와 비교한 결과 현채의 경위도와 일치하였다[67].


  • 한반도 남단: 북위 33도 15분의 제주도 모슬포
  • 한반도 북단: 북위 42도 25분의 녹둔도[68]
  • 한반도 서단: 동경 124도 30분의 소유독각(小乳纛角) 혹운 황해도 장산곶[69]
  • 한반도 동단: 동경 130도 35분의 두만강 하구


어떤 이는 독도의 경도가 약 동경 131도 52분이며, 대한지지의 한반도 사극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들어 현채가 1899년에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당시 울릉도 정점의 경도가 일본 해군에 따르면 동경 130도 57분[70], 영국 해군에 따르면 동경 130도 53분[71]으로 울릉도 역시 대한지지의 한반도 범위 기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살필 때 이같은 주장이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72][73].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 제주도 모슬포보다 남쪽에 있는 가파도와 마라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 비단섬 등 현 한국 영토의 네 극지점이 모두 누락되었음도 참고가 된다.

위의 사료를 살펴본 결과 일본 해군이 울릉도를 측량한 후 보고서의 편찬을 완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내 결과를 발표하지 않으면서,[74] 울릉도를 누락시킨 조선사극지 정보를 환영수로지로 먼저 발간한 사실은 매우 이상하며, 조선령인 울릉도의 경위도를 일본 육군 참모국 발간의 1875년 조선전도,[75] 영국 해군 발간 중국수로안내(China Sea Directory[76][77]), 영국의 해도 2347호[78][79][80], 러시아의 해도, 1857년 발간의 조선동해안도,[81], 이상을 참고하여 일본 해군이 제작한 1875년 조선동해안도,[82] 및 자국 해군의 2 차례 측량 기록과 보고서 등을 통해 정확히 알았으면서도 조선의 강역 범위에서 누락시켰다는 사실은 일본 해군이 자의적으로 조선의 강역을 정했다는 뜻이다.[83] 환영수로지의 이른바 조선 사극지 기술은 조선연안지의 사극지인데 환영수로지 저자는 이 점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애매하게 기술한 반면, 고마쓰 스스무(小松運)의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1887)에서는 조선연안의 수로라는 문맥에서 이탈하여 선명하게 조선의 영토를 왜곡 기술한 결과 일본의 해군 자료를 접할 수 없었던 일반인으로서 전후 사정을 몰랐던 현채 대한지지의 이른바 조선사극지라는 오해를 낳았던 것이다.

환영수로지 이래 한국총람까지 경위도 범위에서 누락된 한국의 영토[편집]

  • 한반도 남극 부근 누락지: 가파도[84], 33°09′34″N[85]; 마라도[86], 33°06′40″N[87]
  • 한반도 북극 부근 누락지: 풍서리 유원진, 43°00'36″N 외에 온성군, 경원군, 구 종성군, 경흥군(구 아오지읍), 회령시[88]의 일부 내지 전부
  • 한반도 서극 부근 누락지: 비단섬 진흥로동자구(구 마안도(馬鞍島)[89], 124°10'47″E 외), 신도군, 용천군, 신의주시[90] 등의 행정소재지와 부속 소도서 등
  • 압록강의 사이섬 (하중도):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구 마안도(馬鞍島), 신도(薪島), 장도, 말도, 무명평), 황금평, 류초도, 신도, 임도, 위화도, 다지도[91]
  • 황해 연해 소도서: 평안북도 신도군 조룡섬, 서호앞섬, 서호섬, 철산군 반성열도[92]
  • 한반도 동극 부근 누락지: 함경북도 동단과 강원-경상도 소속 동해의 동단 도서들
  • 한반도 북부 지역: 함경북도 라선특급시 선봉군 우암리(구 경흥군 로서면 토리동(土里洞)[93]), 130°41'32″E 외 조산리, 큰섬[94]
  • 한반도 남부 지역: 울릉도(무릉도)[95], 130°54'E; 관음도(섬목, 깍새섬), 130°55'E; 죽도(竹島; 댓섬)[96], 130°56'E; 독도(于山島; 芋山島; 石島; 獨島; 독섬; 돌섬)[97], 131°52'E

현재 한반도의 사극지와 환영수로지 사극지 간의 편차[편집]


환영수로지-조선팔도지가 유발한 한국 사극지의 경위도 편차[편집]

동서남북 사방으로 모두 축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동단 편차가 가장 커서 120 km 내외의 조선 동쪽 영토 한계를 축소시켰다.

  • 한국 최남단 편차: 북위 33°06'37″- 북위 33°15″= 약 - 9'
  • 한국 최북단 편차: 북위 43°00'36″- 북위 42°25″= 약 + 36'
  • 한국 최서단 편차: 동경 124°10'47″- 동경 124°30″= 약 - 19'
  • 한국 최동단 편차: 동경 131°52'10″- 동경 130°35″= 약 + 1°28'


편차를 설명하는 합리적인 이유 중에는 납득할 만한 것도 있겠다. 가령 하절기 범람 중에 하천을 따라 떠내려온 침전물의 퇴적으로 인한 신생 하구 사주의 연륙 현상과[98] 동절기 사구발달로 신생성 토지로도 일부 설명될 수 있다. 또 최북단지의 위도 차이는 원래 보고된 북극지가 육지의 사극지가 아니라 연안 수로의 사극지였으므로 이 역시 합리적 해명이 가능하다. 연안 수로의 사극지 동극지 값이 현재 한국의 동극지 동경도와 다른 것 역시 연안수로와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도서의 차이로 쉽게 해명된다. 문제가 아닌 것이 문제인 듯 제기되는 원인은 이 두 관념 간의 차이를 없는 듯 왜곡한 조선팔도지와 이를 무비판적으로 계승한 일반 지리서들이 도입한 오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1875년-1890년대 일본인 저자들의 울릉도 독도 서술의 추이[편집]

이 시기에 일본에서 저술된 조선을 주제로 다룬 지리서의 서술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생략하는 경향이 지적되었다[99]. 근대적 조선지리학의 탄생기에 일본인 저자들이 한국을 다루는 지리 서술의 사극경위도 범위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조선의 여러 영토 지역을 제외하면서 본문 기술 중에서도 역시 생략하거나, 혹은 분리 기술하여 조선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비거주, 비주권 지역인 듯 서술하는 경향이 지적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의 지리를 다룬 대표적인 지리서 3 개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1876년 외무성 영사 세와키 히사토(瀨脇壽人)의 『계림사략(鷄林事略)』사극경위도[100]가 누락한 조선영토[편집]

  • 남지: 34°17′N - 완도(莞島) 서남방의 해남 달릉각갑(達陵角岬) 남단[101] 지점의 당시 북위도 값 이남에 위치한 조선의 제 도서, 마라도, 가파도, 제주도, 비양도, 우도, 추자군도, 여서리, 거문도, 초도, 손죽도, 소거문도, 보길도, 가거도, 병풍도, 맹골도, 서거차도, 동거차도, 관매도, 독거도 기타 소도서 등 수 십 여 개 소가 일괄 누락되었다.
  • 북지: 43°02′N
  • 서지: 124°30′E - 평안북도 신도군, 용천군, 신의주시[102] 등이 누락되었다.
  • 압록강의 사이섬 (하중도):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구 마안도(馬鞍島), 신도(薪島), 장도, 말도, 무명평), 황금평, 류초도, 신도, 임도, 위화도, 다지도[103] 등이 누락되었다.
  • 황해 연해 소도서: 신도군 조룡섬, 서호앞섬, 서호섬, 철산군 반성열도[104] 등이 누락되었다.
  • 동지: 130°35′E - 함경북도 동단과 강원-경상도 소속 동해의 동단 도서들이 누락되었다.
  • 한반도 북부 지역: 함경북도 선봉군 우암리, 조산리, 큰섬[105] 등이 누락되었다.
  • 한반도 남부 지역: 울릉도, 관음도, 죽도, 독도가 누락되었다.

1877년 외무성 해군경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의 『조선사정(朝鮮事情)』사극경위도[106]가 누락한 조선영토[편집]

  • 남지: 33°15′N - 마라도, 가파도가 누락되었다.
  • 북지: 42°25′N - 함경북도 온성군 외에 경원군, 구 종성군, 경흥군(구 아오지읍), 회령시[107] 등이 누락되었다.
  • 서지: 124°35′E - 평안북도 신도군, 염주군의 서반, 용천군, 신의주시, 의주군[108] 등이 누락되었다.
  • 압록강의 사이섬 (하중도):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구 마안도(馬鞍島), 신도(薪島), 장도, 말도, 무명평), 황금평, 류초도, 신도, 임도, 위화도, 다지도, 어적도, 구리도[109] 등이 누락되었다.
  • 황해 연해 소도서: 신도군 조룡섬, 서호앞섬, 서호섬, 철산군 반성열도, 대계도, 어영도, 솔도[110] 등이 누락되었다.
  • 동지: 130°50′E - 울릉도의 서안 극서지(약 130°47′)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 관음도, 죽도, 독도가 누락되었다.

1883년, 1886년 해군성 수로국 가노켄사쿠(嘉納謙作)의 제1-제2판『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사극경위도[111]가 누락한 조선영토[편집]

  • 남지: 33°15′N - 마라도, 가파도가 누락되었다.
  • 북지: 42°25′N - 함경북도 온성군 외에 경원군, 구 종성군, 경흥군(구 아오지읍), 회령시[112] 등이 누락되었다.
  • 서지: 124°30′E - 평안북도 신도군, 용천군, 신의주시[113] 등이 누락되었다.
  • 압록강의 사이섬 (하중도): 압록강 하구의 비단섬(구 마안도(馬鞍島), 신도(薪島), 장도, 말도, 무명평), 황금평, 류초도, 신도, 임도, 위화도, 다지도[114] 등이 누락되었다.
  • 황해 연해 소도서: 신도군 조룡섬, 서호앞섬, 서호섬, 철산군 반성열도[115] 등이 누락되었다.
  • 동지: 130°35′E - 함경북도 동단과 강원-경상도 소속 동해의 동단 도서들이 누락되었다.
  • 한반도 북부 지역: 함경북도 선봉군 우암리, 조산리, 큰섬[116] 등이 누락되었다.
  • 한반도 남부 지역: 울릉도, 관음도, 죽도, 독도가 누락되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정한론자에 의해 조성되었거나 정한론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조선 정벌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117] 번역물이나 자료의 선정, 편집 등에서 자의적 판단을 동원하였으며,[118] 조선 지리지 편찬 과정에 일본 정부와 군부가 개입하였음이 지적되었다[119]. 대표적 사례로서 프랑스 카톨릭 교회의 선교사 샤를 달레가 조선 카톨릭 교회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를 기초로 편찬한 조선교회사(1874)를 발췌, 번역한 외무성 고위관료였던 해군경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조선사정(1876 서)이다. 당시 에노모토는 울릉도를 일본제국에 편입하여 개발하려는 계획을 여러 사람들과 상의 구상 중이었다[120][121]. 번역의 저본인 달레의 조선교회사(1874)에서 조선의 사극 경위도가 언급되었는데, 저자가 제시한 부정확한 지도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그릇된 위치에 나타날 뿐, 저서 본문에 이들 섬에 대한 문장 기술이 안 나온다. 교정되지 않은 낡은 지도로 인해 울릉도 독도마저 두만강 하구의 경도 안쪽에 있는 섬으로 오인되어 조선 동극지를 두만강 하구로 기술하였기에 당시 울릉도 점령을 계획하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가[122][123] 자신의 정한론적 목적에 부합하는 서양인 저술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예는 고마쓰 스스무(小松運)의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이다. 그는 육군 군의관으로서 조선에 근무한 자이고 제자를 해준 전직 외무성 기록국장 와타나베 고키(히로모토)(渡邊洪基)[124]는 제국대학 총장, 글을 써준 하나부타 요시모토는 특명전권공사이었다.[125]. 현채가 대한지지를 편찬할 때 주요 저본의 하나로 삼은 고마쓰 스스무(小松運)의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에는[126][127] 독도와 울릉도 관련 내용이 없고, 첨부 지도인 조선전국략도(朝鮮全國略圖)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다.[128]

조선의 이른바 변두리 섬을 누락하는 경향은 우연한 일치의 연속이거나 무지에 의한 일시적 오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인방 국가의 영토 정의에 혼란을 가함으로써 침탈하려는 탐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었다. 상기한 몇 가지 시도 중에서 일본 해군성 수로부 환영수로지의 조선사극지 경위도 세트가 1880년대에서 1904년까지 일본의 대표적 조선 영토 정의를 규정하였다. 일본해군성은 1878년 6월 29일과 1880년 6월 5일[129]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동해안을 조사한 결과 동해상에 위치한 울릉도를 조선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이름마저 송도(松島=마쓰시마)로 바꾸었다.[130]

1870년대 울릉도의 재발견과 1880년 3차 울릉도 점령 사건[편집]

1875년-1876년 사이에 외국선박에 승선하여 나가사키와 블라디보스톡을 오가는 가운데 일본 외무성 관료 및 해군 장교들에 의해 울릉도가 재발견되었다[131][132][133]. 그들은 이 섬이 조선의 영토 울릉도임을 알았는데, 조선 태종 이래의 공도정책으로 인하여 계절적 밀어렵인들이 방문하여 어렵과 배짓기를 할 뿐이며 조선인 정착민이 없다는 사실을 영국 해군이 발간한 중국 수로지류(China Pilot, China Sea Directory[134])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During the spring and summer months some Koreans reside on the island, and build junks which they take across to the mainland; they also collect and dry large quantities of shell-fish. Except a few iron clamps, their boats are all wood-fastened, and they do not appear to appreciate the value of seasoned timber, as they invariably use quite green wood." -- MATU SIMA, or Dagelet island, 1st edition of China Sea Directory Vol 4., 1873. p. 76

이들은 무주지 선점 방식을 동원, 울릉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일본정부에 죽도 도해원, 송도 개척지원 등을 연달아 제출하며 정부를 압박하는 한편[135], 다른 한편으로는 민간인과 군수기업(도쿄 오쿠라구미) 그리고 해군과 외무성 인사들을 동원,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울릉도 점령을 실행에 옮겼다.[136][137][138][139][140][141][142][143] 한편 1876년에서 1877년 사이에 빗발치던 울릉도에 대한 도해 허가원, 개척원 등을 검토하던 관료들에게는 도해허가원, 개척원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고려 사항들이 있었다. 죽도 고증은 각 관료들 개인의 다양한 이해 방식을 A, B, C 세 군으로 다소 복잡하게 열거하였는데, 대체로 죽도와 송도가 일도이명이냐 이도이명이냐로 압축될 수 있다고 한다. 울릉도 개척지원이 접수되기 전에 일본정부가 수행했던 두 가지 과제를 보면 당시 울릉도 개척에 기탄없이 동의하지 못한 사정이 드러난다. 또 소수자 의견으로서 태정관 지령을 단순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한 사정도 다소간 드러난다.


1868년~1870년 외무성: 조선령인 두 섬 죽도와 송도에 대한 탐문보고, "조선국제교제시말내탐서 관련 문서철" 요약[편집]

과제 : "조선이 죽도(다케시마)와 송도(마쓰시마)를 소유하게 된 시말을 알아오십시오."

첩보 보고 : "죽도는 겐로쿠 연간 이래로 조선령이 된 문서가 있으며, 송도에 대해서는 문서철에 별도로 게재된 서류가 없습니다."


1876년~1877년 시마네현-내무성-태정관의 죽도와 송도에 대한 지적편찬 질의응답, "태정관 지령 관련 문서철" 요약[편집]

질의 : "지적 편찬과 관련하여, 죽도와 송도를 지적에 올릴까요?"

결정 : "울릉도 쟁계 (다케시마 잇켄) 문서들을 검토한 결과, 죽도와 그밖의 한 섬은 일본과 무관하다고 알아 두십시오."


울릉도 쟁계와(일본명 다케시마 잇켄과) 관련한 모든 사료를 누구라도 쉽게 일별할 수 있는 현재에는 1876년-1877년 당시 태정관이 이해하였듯 1690년대의 죽도(다케시마)=울릉도, 송도(마쓰시마)=독도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외무성이 수집한 첩보는 태정관이 봤던 자료보다 폭이 좁아서 쓰시마와 조선의 왜관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첩보에 한하였기 때문에 송도에 대해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는 해석이 있다. 그 결과 만약 태정관의 판단이 옳았다면 울릉도를 개척하면 문제가 될 것이겠지만, 만약 외무성의 첩보가 근거가 있고, 또 울릉도 쟁계 문건과는 별도의 근거 서류가 남지 않았다고 보고받은 송도가 본래 일본령이었다면 혹시 신발견 섬이라는 소위 송도를 편입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소수 시각이 있었던 듯 보인다. 조선의 강원도와 일본의 오키 사이에 두 개의 섬이 아니라 3 개 내지 4 개의 섬을 그린 국제해도가 옳다면, 본래 조선령이라고 알려진 두 개의 섬을 제외하고, 일본이 나머지 1 개 내지 2 개가 본래 자국령이었음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릉도 개척원 문건에 태정관 지령문 문서철이 첨부되었음을 볼 때(죽도고증), 이를 읽어본 외무성 직원이 단순 명료한 전통 지리기술과 지도를 불신하고 오류가 선명하게 밝혀진 국제해도를 신뢰했기 때문에 울릉도를 점령해도 좋다고 생각했다는 설정은 그다지 조리가 없는 해석이다. 중복해서 그려진 두 개의 울릉도와 한 개의 독도, 내지 두 개의 울릉도와 두 개의 독도가 오류로 판명난 순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남은 동해의 섬은 두 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외무성은 울릉도를 점령할 명분을 국제 해도 상의 지명 혼란에 전가하기 위하여[144] 해군을 압박, 1868년 6월 29일에 1차 울릉도 측량을, 다시 1880년 6월 5일에 2차 울릉도 측량을 수행하게 하였다.[145][146] 이 과정에서 이른바 그릇 죽도로 비정된 아르고노트의 오류를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국제 해도 상에서 그릇 송도로 비정되었던 울릉도와 그 동북방에서 조선의 죽도(일본명 죽서)를 재발견함으로써 1869년을 전후하여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를 내탐한 조선국국제교제시말내탐 문건에서 말한 '죽도(다케시마)와 송도(마쓰시마)' 및 1877년에 태정관이 일본과 무관한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했던 소위 '죽도(다케시마) 외 일도(송도, 즉 마쓰시마)'의 에도기 이래 국제적 공인 등식 조선의 울릉도 즉 일본명 기죽도(이소다케시마), 조선의 우산도 즉 일본명 송도(마쓰시마)라는 전통시대에 조선 정부와 일본 정부 간에 합의되어온 아이덴티티를 부정하면서 일본명 죽도와 송도가 바로 조선의 울릉도와 죽서도였다는 비약적 주장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했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울릉도 점령은 1875년 경 러시아와 가라후토-치시마 영토교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을 오가는 가운데 전권대사 해군 부제독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에 의해 구상되었고, 에노모토는 인척과 업자 그리고 면식 있는 해군 함장 등을 동원하여 1879년에 시험적 울릉도 답사를 거쳐 1880년부터 해군 군함으로 벌목업자와 전복채취를 담당할 해녀들을 실어나르기 시작했다[147]. 그러나 1881년과[148] 1882년[149] 두 차례에 걸쳐 울릉도를 검찰하는 조선 관리에게 발각되어 일본 외무성으로 항의 문서가 전달되었고, 울릉도 점령은 난관에 부딛쳤으며, 일본 외무성은 외교적 봉착을 타개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조선정부에게 쇄환을 약속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간의 울릉도 점령 활동을 정당화할 이론적 정리를 기타자와 마사나리에게 위탁, 이른바 죽도고증과 죽도판도소속고를 편찬하게 하였다. 1883년 9월 일본 정부는 울릉도 상에 잔류했던 울릉도 점령 인력 255명 전원을[150] 기선 에치코마루(越後丸)로 쇄환하여 전원 기소함으로써 외교적 불명예를 수용하여 3차 울릉도 점령 사건을 일단 수습하였다.[151][152][153]

울릉도 점령 사건의 여파[편집]

일본 외무성과 해군은 울릉도 점령 사건을 통하여 일련의 문건과 전략을 확보하여 이를 추후 울릉도 독도 점령에 다시 이용할 태세를 완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물이 해군 측량선 아마기함의 일지와 이를 선별적으로 요약 보고한 수로잡지16호(1883), 수로잡지41호(1883), 각종 관찬 사찬 지리서 등에 인용되어 실린 보고 문건, 그리고 이것에 총체적인 이론적 틀을 제공한 죽도고증, 죽도판도소속고 등이었다. 이후로 1904년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편찬되는 조선지리서들이 거의 한결같이 독도는 물론이고 울릉도까지 경위도 범위 밖으로 기술하였으며,[154]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개별 기술을 생략했던가 비록 등재했더라도 조선국의 경위도 범위를 수정하지 않는 "분리서술방식"을 따랐다. 또 울릉도 측량이 실제로는 1차로 1878년에, 2차로 1880년에 시행되었으나,[155][156] 측량 결과의 출간을 위한 준비가 일찌감치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출간을 1883년까지 미룬 것은 3차 울릉도 점령의 결말이 나지 않아 좀더 사태를 관망하면서 추가 개선하거나 누락시킬 만한 요소가 없는지 확인하자는 목적에서 출간을 늦췄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대한지지 소위 사극지 경위도가 울릉도와 독도를 누락한 의미[편집]

이상을 볼 때, 당시 일본인 저자들에 의해 생산된 조선지리서들은 한결같이 정한론에 따른 울릉도 3차 점령 사건과 이에 따른 경험, 문건, 이론, 및 전략 등이 생산된 이후에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지지의 경위도 정보를 갖춘 첫 문헌으로 보이는 1883년의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海軍水路部 嘉納謙作,1883)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며 현채가 대한지지의 편찬에 집중적으로 활용한 일본의 두 지리서 고마쓰 스스무(小松運)의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1887)와 마쓰모토 니키치(松本仁吉)의 『조선지지요략(朝鮮地誌要略)』(1894)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현채가 대한지지를 번역 편찬할 당시에 그가 활용한 일본 지리서들의 이른바 조선사극지 경위도가 조선의 영토를 규정함으로써 조선의 영토를 침탈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알았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울릉도가 누락된 사실을 이상히 여겨 동국여지승람 이래의 재래식 기술을 첨기함으로써 사극지 경위도 범위에서 울릉도가 누락된 결함을 보완하려 했던 흔적이 보일 뿐이며 (1899년 황성신문 기사), 1907년-1908년에 대한지지를 대신하기 위하여 편찬된 장지연, 안종화, 류연 등의 조선 지리서에서는 이를 더욱 보완하여 울릉도 외에도 현채가 미처 싣지 않아 누락된 우산도까지 보완하여 "우산도는 울릉도 동남에 있다"고 기술하기를 잊지 않았다. 비록 현채의 대한지지가 환영수로지 이래 일본 정부에 의한 조선사극지 경위도의 왜곡적, 침탈적, 축소적 영토 규정을 정면으로 교정하지는 못하였으나, 발문(후서)에서 지리정보의 유래를 일본의 지리서로 밝혀 일본의 조선지리 왜곡상을 분석하는 데 형식적으로 참이며 결과적으로 건전한 추론을 위한 논리적 연결점을 남겼다.[157]

대한지지 사극지 경위도 정보를 독도 고유영토의식의 부재 증거로 제출하는 주장의 평가[편집]

결론과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마치도 객관적 새 증거인 듯 결론을 입증하려는 비형식적 오류를 순환론법(循環論法; circular reasoning)[158][159]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만약 결론이 독립적으로 입증되지 아니한 명제라면, 순환론이 추론의 모든 규칙을 지킨 타당한 추론일지라도 순환론으로부터 새로 입증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순환론으로써 어떤 명제가 참임을 입증하였다고 주장하는 명제의 진리값은 거짓이다. 동원한 추론의 형식은 타당하나, 끌어온 전제가 참이라는 주장이 불건전한 주장으로서 거짓이기 때문이다. 일본 외무성의 1954년 2월 10일 자 외교문서의 주장은 결국 제국기의 메이지 일본이 군관민 합세하여 1870년대에서 1890년대에 걸쳐 울릉도와 독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생산하여 유포한 자국 유래 자료를 동원하여 자국의 본래 목적을 입증했다고 주장하는 순환론의 오류이다. 간결히 요약한다면 일본의 해군성이 일본의 외무성과 협력 하에 해군 군함으로 울릉도 점령을 목적으로 1-2차 울릉도 조사, 일본인들의 울릉도 점령, 벌목한 목재의 밀반출 등에 해군 측량선 아마기함, 해군 전투포함 반조호(이와키호), 해군 용선 회조환(가이소마루) 등을 동원하였으며,[160][161] 다시 일본 해군성 수로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배제한 소위 조선 사극지 경위도 정보를 생산하여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세계에 널리 유포한 광범위한 행적을 볼 때 대한지지의 소위 조선 사극지 경위도 정보는 1899년 당시 현채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독립적 근거로 동원하겠다는 기도가 순환론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학부가 대한제국의 지리교과서를 편찬함에 있어 일본 해군성이 영토 침탈을 목적으로 생산하여 유포한 소위 조선사극지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교과서로 활용했다는 사실이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에 당한다는 시사는 이론이 제기될 수 있는 비약적 발상으로서, 순환론적 사고에 따른 주장은 일종의 오류이므로 1969년 5월 23일 조인된 비엔나 협정 제 48조 오류 조항에 의거 국제법적 구속력을 상실한다고 하였음이 지적되었다[162].

대한지지의 소위 '일본해' 명명법 논란[편집]

한편 일본해 호칭 문제에 있어서 대한지지에서는 일본해라고 기재하였다. 이 사실 역시 일본의 지리서를 번역한 데서 원인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163][164]

각주[편집]

  1. 호사카 유지 (2010) <대한민국 독도>. BM성안당 (Book Media 책문). ISBN 978-89-315-7483-8 (04900). 117-223 쪽; 본래 서지학적 주제인 본 글이 다루는 대한지지를 자료로 1954년 2월 10일 일본 외무성이 논란을 제기한 이래 이 주장을 객관적으로 균형 있게 조망한 자료로 이 책이 주로 참조되었다.
  2. Н.В. 뀨네르(Кюнер Н.В.) 저 (1912).『한국개관(Очерк Кореи)』1부.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김종헌 번역 (2012). 동북아역사재단; 또한 한국의 지리를 다룬 1912년 러시아 관찬 지리서 한국개관이 참조되었다.
  3. 홍정원 (2012). 근대 문헌에 보이는 독도(우산도, 석도) 연구. in 근대 이행기의 한일 경계와 인식에 대한 연구 - 독섬(石島)과 Liancourt Rocks를 중심으로. 정영미 외. 동북아역사재단. 2012. ISBN 978-89-6187-274-4
  4. 朝鮮八道誌 小松運 http://db.mkstudy.com/mksdb/e/korean-geography/book/9836/
  5. (新編) 朝鮮地誌要略. 松本仁吉(松本謙堂) 1894. http://db.mkstudy.com/mksdb/e/korean-geography/book/9892/
  6. 강철성(2006), 「현채의 대한지지 내용분석 - 자연지리를 중심으로 -」,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지』 14(2),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117~118.
  7. 홍정원 (2012), 136
  8. 윤소영(2013). 근대 일본 관찬 사찬 지리서에 나타난 독도 인식.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월례발표회 292. p. 19
  9. 광무 3년 12월 25일 자 대한지지 발문(후서) 전문: 大韓地誌跋 余所編地誌 本 諸日人所記, 叅 諸輿地勝覽旁 及部府掌 故而其所敍述 略倣, 古山水記, 簡嚴之意少而悠揚之詞多蓋變體也. 舍正體而爲變體 者奈何 余以爲今便 小學童子課習地誌, 而其文簡湥(淚?)一如禹貢水經之 爲則其不便有四, 難讀一也, 難記一也, 難欽動一也, 難開發一也, 以此四 難望其成功不亦迂乎! 故余之爲此也. 要使難易適得相半難不至太蕀 而不至太俚渙然冰釋怡然理順俱其名勝. 敍述本出於日人一時遊歷 之際其於山脈水脈或不能無失之病 而顧以敎課事急不能磨歲月 博考腒此 其所愧也. 世之君子其或蹋而輯之匡余過誤而歸于至當則 斯厚幸云 光武三年十二月二十五日 白堂 玄采跋
  10. 호사카 유지 (2010) 117쪽; 1954년 2월 10일 자 일본 외무성의 독도는 조선의 영외 언급과 관련하여 현채 후서를 언급, 일본인 저술에 의존하여 번역했음을 처음 지적한 연구자는 호사카 유지로 보인다.
  11. 대한지지, 내용 조,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dataType=0201&contents_id=E0015197
  12. [신편] 한국사. 근대편. 45권. 신문화 운동Ⅰ. (5) 교과서의 실태. 라. 학부불인가 교과용도서 (1910년 7월 1일 현재)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nh/view.do?levelId=nh_045_0020_0050_0030_0050
  13. 조선총독부관보제69호고시제72호(官報:1910년 11월 19일), http://pds11.egloos.com/pds/200812/27/11/b0016211_495594980fcd7.jpg
  14. 강철성(2006), 118.
  15. 호사카 유지 (2010). 117
  16. 홍정원 (2012), 136
  17. 윤소영(2013). p. 19; 그러나 윤소영의 평가에 부기된 문구 중 오류가 있다. 대한지지에 이른바 "조선 동극지 경도는 울릉도까지"는 대한지지의 소위 조선사극지 경위도 문구의 옳은 해독이 아니다. 울릉도 역시 누락되었음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호사카 유지 (2010) 122쪽을 보시오.
  18. 이와 같은 문제점은 유독 현채의 대한지지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봉희의 다음 언급을 보시오. "당시 번역되었던 번역서의 일부는 외국 서적의 잘못된 내용을 고증 없이 그대로 옮기는 데 그쳐 많은 폐단이 야기되었다. ... 교과서 본연의 성격을 잃고 말았다." 김봉희 (1999). 한국개화기서적문화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ISBN: ISBN 897300364X. 129-130.
  19. 조선지지(朝鮮地誌 1895)는 고종 32년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한국지지 교과서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2224
  20. 19세기 후반의 고종 시대 지리지는 크게 1871년, 1895년, 그리고 1899년 세 차례에 걸쳐 편찬되었다. http://e-kyujanggak.snu.ac.kr/geo/contents/con_story_view.jsp?sType=&sWord=&listcnt=50&pageno=1&seq=5
  21. 오상학. 한국전통지리학사. 2016.
  22. 호사카 유지 (2010). 117
  23. 외교부(外交部)(1977), 「일본정부견해 2」(1954. 2. 10), 『독도관계자료집1(獨島關係資料集1)-왕복외교문서(往復外交文書)(1952~1976) -』, 57쪽
  24. 시모조마사오(下條正男) (1998. 8), 「죽도문제의 문제점」, 『한국논단(韓國論壇)』 108, 132~152쪽;
  25. 시모조마사오(下條正男) (2004), “다케시마(한국명ㆍ독도)는 일한 어느 쪽의 것인가” 문예춘추, 115쪽.
  26. 박유하 (2005).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PURIWA IPARI. ISBN 8964620593, 9788964620595. 146-175; 대한지지에 이른바 "조선 동극지 경도"를 가리키는 듯한 다음 지적 "1899년에 나온 자료에도 동경 130도의 울릉도를 조선 동쪽의 극한'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대한지지의 소위 조선사극지 경위도 문구의 옳은 해독이 아니다. 울릉도 역시 누락되었음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호사카 유지 (2010) 122쪽을 보시오.
  27. 시모조마사오(下條正男) (2007. 9), 「일본의 영토 「다케시마」의 역사를 개찬한 자들이여(日本の領土「竹島」の歷史を改竄せし者たちよ)」, 『쇼쿤!(諸君!)』, 분게이슌주샤(文藝春秋社);
  28. 후나스기 리키노부(舩杉力修) (2007.10). 【回答】於 【質問2】. http://www.pref.shimane.lg.jp/admin/pref/takeshima/web-takeshima/takeshima08/iken-B.html
  29.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 (2012) "1899 년 발행 한국 교과서에 ‘독도는 한국 영토에 없다’는 증거 발견" 보도 (일본어) http://www.news-postseven.com/archives/20121015_149188.html
  30. 호사카 유지 (2010). 대한민국 독도. BM성안당 (Book Media 책문). ISBN 978-89-315-7483-8 (04900). 117쪽. 호사카 유지의 저술은 일본 외무성 등이 제기하여 온 대한지지 조선 사극지 경위도 문제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응답한 첫 사례로 보인다. 그러나 2 번 4극지 경위도를 인용하는 가운데 안타깝게도 북극지 북위도가 1회, 서극지 동경도가 2회 모두 수치를 오인용하는 판식 오류가 나타났다. 다행히 원문의 해당 페이지를 119쪽에 영인하여 실었기 때문에 한문 식자 능력을 가진 독자가 확인하려 한다면 얼마든지 교정해독이 가능하고, 또 논란의 중심에 선 동극지 동경도 130도 35분에는 오식이 없다. 타국의 의도적 경위도 왜곡을 비판하는 진지한 학술 논저에서 비의도적 경위도 오식이 나타나 학술적으로 수준 높은 지적의 효과를 반감시켰다. 이같은 오류는 기실 국제적 웃음거리로서 출판사 BM 성인당이 국제사회의 관심사인 독도 이슈를 빙자하여 책 매출에 열중하면서도 책의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호사카 유지 씨는 다음 출간 때 이 출판사를 피하여 타 출판사와 계약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한지지 경위도 관련 오식의 유포는 광범위하여 일본에서도 흔히 발생하는 듯하다.
  31. 홍정원 (2012), 136
  32. 김수희(2015). 19세기 일본 산음지방의 울릉도·독도 기록과 ‘송도개척론(松島開拓論)’. 독도연구19, 2015.12, 54.
  33. 윤소영(2013). p. 19
  34. 윤소영(2013). p. 19
  35. 송휘영(2011)에 따르면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메이지 시대 일본 해군의 조직의 하나로서, 해군성의 외국와 내국을 오갔으며, 수로의 측량, 해도의 제작, 해양측량, 해상기상 및 천체관측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 일본의 수로사업은 영국의 측량기술을 배우고 도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3 (243)
  36. 호사카 유지 (2010). 116
  37.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12 (252)
  38. 정영미(2012).『죽도고증』의 「마쓰시마 개척원」과 아마기함의 울릉도 조사 - 메이지 시대 새로운 마쓰시마 = 독도 창출 일(一) 과정. 한일관계사연구 43. 476-477
  39.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7-47.
  40. 송휘영 (2011). pp. 247 (표 2), 251 (각주 24).
  41. 호사카 유지 (2010). 117.
  42.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p. 7, 10-11 (247, 250-251)
  43. 종래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기타자와 마사나리(北澤正誠)의 죽도고증 pp. 494-495 에 인용된 메이지 13년(1880년) 9월의 아마기함 승무원 미우라 시게사토(三浦重鄕)) 해군소위의 회항 보고 일지와 1880년 9월 13일 자의 해군성 수로국장 야나기 나라요시(柳楢悅)의 수로보고 제33호를 2차 울릉도 탐사 일지 내지 보고서로 착각하여 아마기함(天城艦)의 제2차 울릉도 측량을 1880년 9월 13일로 오해하여 왔으나, 한철호(2015)는 해군성 공문류찬의 여러 기록을 근거로 이것이 오류이며, 2차 측량의 일자가 1880년 6월 5일이었음을 입증하였다.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p. 10 및 같은쪽 각주 5.
  44.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p. 7, 10-11 (247, 250-251)
  45. 호사카 유지 (2010). 116, 123-124.
  46. 홍정원(2012). p. 136.
  47.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Kan’ei Suiroshi, 海軍水路部 嘉納謙作; Kanō Kensaku, Japanese Navy’s Hydrographic Office, 1883), http://mblogthumb2.phinf.naver.net/20140421_157/kskimpak_1398081500975MX4UE_JPEG/%C8%AF%BF%B5%BC%F6%B7%CE%C1%F6.jpg?type=w2
  48.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7 (247)
  49.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Kan’ei Suiroshi, 海軍水路部 嘉納謙作; Kanō Kensaku, Japanese Navy’s Hydrographic Office, 1886), http://dl.ndl.go.jp/info:ndljp/pid/1084068/17
  50.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7 (247)
  51. 1905년 해군 수로부장이 된 기모쓰키 가네유키(肝付兼行)는 1878년 6월 29일 울릉도 측량 때부터 아마기함에 승선하였었는데, 조선수로지의 편찬과 발간을 지휘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독도가(리양코섬이) 조선 영토임을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역시 독도를 조선 영토로 생각했던 나카이 요자부로를 해군성으로 불러들여 '리양코섬은(독도는) 소속이 불분명하여 "무주지"인 것 같으며, "일한 두 본국에서 거리를 측정하면 일본 쪽이 10리 더 가깝다"고 하여, 일본 정부 측에 영토편입 및 대하원을 제출하도록 사주한 인물이었다.'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19 (259)
  52.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 Chōsen Suiroshi, 海軍水路寮; Japanese Navy’s Hydrographic Office, 1894.11) http://dl.ndl.go.jp/info:ndljp/pid/847159/27
  53. 송휘영에 따르면 환영수로지가 1899년에 폐간되었고, 조선수로지는 환영수로지 제 2권 중에서 제1-4편 즉 조선전안에 관한 기사를 분리 개판하여 별개의 조선 수로지로 간행한 저작이다. 조선수로지(1894.11)의 제1개판은 조선수로지(1899.02)이며, 제2개판은 조선수로지(1907.03)로서 이를 끝으로 조선수로지는 발간을 중단하고, 1911년 12월부터는 재차 일본수로지(1911.12)의 일부 제6권으로 통합 개판, 간행되었다. 송휘영(2011). 근대 수로지에 나타난 일본의 울릉도ㆍ독도 인식. 한국일본학연합회 제9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집(韓國日本學聯合會 第9回 國際學術大會 發表論文集). 510-511. p. 7 (247)
  54. 호사카 유지 (2010). 124.
  55. 조선팔도지(朝鮮八道誌; Chōsenhachidō-shi, 小松運; Gomatsu Susumu, 1887), http://dl.ndl.go.jp/info:ndljp/pid/766919/10
  56. 조선지리도(朝鮮地理圖; Chōsen Chiri-zu, 鈴木留吉; Suzuki Tomekichi, 1894.06), http://dl.ndl.go.jp/info:ndljp/pid/767652/4
  57. 신찬조선국지도(新撰朝鮮国地図; Shinsen Chōsenkoku Chizu, 林正; Hayashi Tadashi, 1894.7) http://dl.ndl.go.jp/info:ndljp/pid/767582/7
  58. 신찬조선지리지(新撰朝鮮地理誌; Shinsen Chōsen Chiri-shi, 大田才次郎; Ota Saijiro, 1894), http://www.tanaka-kunitaka.net/takeshima/chosenchirishi-1894/08.jpg
  59. (新体地理全誌. 永田健助, 1893) http://dl.ndl.go.jp/info:ndljp/pid/761206/154
  60. 한국지리(韓國地理 矢津昌永 1904.09) http://dl.ndl.go.jp/info:ndljp/pid/766846/6
  61. 서지정보 출처: 조선문 해제집 - 古典의 숲속으로: 한국지리. in 월간 오늘의 도서관 제23권 제7호, 통권 215호. 2013. 9. 국립중앙도서관. p. 10
  62. 만한노령지지(滿韓露領地誌: 日本民族の新發展場, 岡部福藏, 1905.08) http://dl.ndl.go.jp/info:ndljp/pid/767140/12
  63. 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 田淵友彦 博文館 1905.09) http://dl.ndl.go.jp/info:ndljp/pid/766843/11
  64. 서지정보 출처: 조선문 해제집 - 古典의 숲속으로: 한국지리. in 월간 오늘의 도서관 제23권 제7호, 통권 215호. 2013. 9. 국립중앙도서관. p. 12
  65. 鶴御岬 https://ja.wikipedia.org/wiki/%E9%B6%B4%E5%BE%A1%E5%B4%8E
  66. 1907 韓國總覽① 德永勳美 http://db.mkstudy.com/mksdb/e/korean-geography/book/9881/
  67. 1907년 간코쿠쇼란(한국총람)(韓國總覽)의 이른바 조선 사극지 정보는 다음에 요약되어 나온다. 한국개관해제.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in 『한국개관(Очерк Кореи)』1부. Н.В. 뀨네르(Кюнер Н.В.). 러시아 동방학연구소., 1912. 번역 김종헌. 동북아역사재단. 2012. pp. 24-25
  68. 녹둔도를 한반도 북단 북위 42도 25분의 근거로 본 것은 착각 내지 오해가 아닌가 의심된다. 경위도가 표시된 당시의 흔한 조선의 고지도(달레 1874) 상의 녹둔도는 북위 약 41도 30분에 위치하며, 동경 약 130도 50분이므로 두만강 하구 끝에 나왔어야 했을 지명이 모종의 과정으로 다른 지명이 나왔던 자리에 오사되었을 수 있다. https://www.flickr.com/photos/21594572@N08/2456150075/
  69. 1912 큐네르의 한국개관 번역본에서는 한국총람을 인용하여 소유현각(小乳縣角)이라고 했으나, 오카베 후쿠죠(罔部福藏)의 (1905.08) 滿韓露領地誌: 日本民族の新發展場에는 압록강 하구의 소유독각(小乳纛角)으로 나온다. 현(縣)을 독(纛)의 오전사로 보고 고친다. http://dl.ndl.go.jp/info:ndljp/pid/767140/12;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포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황해도 장산곶이라고 서로 모순된 기술이 산견되나, 일본 해양정보부 소장 구판해도(海洋情報部 所藏 「舊版海圖」) 번호 343호에 수집되어있는 다음 두 건의 해도가 동일 경위도 범위를 다룬 점으로 보아 소유독각이 바로 장산곶이고,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포의 지명은 아닌 듯하다. 1906.03. 小乳纛角至鴨綠江口 朝鮮西岸. 海軍省水路部. (37°55'N, 124°00'E/39°57'N, 125°45'E); 1922.04. 長山串至鴨綠江口 (37°55'N, 124°00'E/39°57'N, 125°45'E), 海洋の歴史的資料の保存及び公開. 調査研究資料150. 日本水路協会. 平成24年3月; 또 다음의 청일전쟁, 러일전쟁 지명 대응 자료에도 마찬가지이다. チョッペキ崎(長山串 小乳トウ崎) http://www9.plala.or.jp/chietaku/shinkan.htm;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포는 조선 서북계이고 바로 앞바다 압록강 하구의 신도와 신도보다 서쪽에 자리한 마도가 서극지이나, 한때 장산곶이 조선연안 수로의 서극지라는 이설이 득세하여 발생한 혼란으로 보인다.
  70. "鬱陵島(一名松島); 該島は我隠岐を距る北西四分の三、西約一百四十里、朝鮮江原道海岸を距る約八十里、洋中に孤立し全島嵯峨たる円錐形の丘陵集合して、樹木之を蔽う。而して其中心北緯三十七度二十二分、東経一百三十度五十七分、露測に據る。" 水路雑誌第41号(1883)
  71. Hydrographic Office (1873). The China Sea Directory, London: Hydrographic Office, Admiralty, Great Britain, Vol. IV. pp. 75, 367; 후자에는 측량선 보고 책임자를 Ward 라고 했다. "Matu-sima at Peak at 37°30'00″N 130°53'00″E by Ward 1859"
  72. 호사카 유지 (2010). 117.
  73. 김수희(2015). 19세기 일본 산음지방의 울릉도·독도 기록과 ‘송도개척론(松島開拓論)’. 독도연구19, 2015.12, 54.
  74. 송휘영 (2011). pp. 247 (표 2), 251 (각주 24).
  75. 한철호 (2015). 27.
  76. Hydrographic Office (1873). The China Sea Directory, London: Hydrographic Office, Admiralty, Great Britain, Vol. IV. pp. 75, 367
  77. 한철호 (2015). 29.
  78. 해도의 이름: Chart of Japan, Japan islands, and part of Korea, No. 2,347.
  79. 해도가 언급된 전거: Hydrographic Office (1873). The China Sea Directory, London: Hydrographic Office, Admiralty, Great Britain, Vol. IV. p. 75.
  80. 한철호 (2015). 28-29.에 따르면 1827년 초간본을 몇 차례 수정한 1855년판이 널리 활용되었고, 다시 1857년까지 러시아가 누적한 조선 동해안 측량 성과를 반영한 1861년 개정판이 특기할 만하고, 1859년 영국 액티온 호의 선장 존 와드(John Ward)가 측량한 자료까지 반영된 1863년판 내지 이를 이은 1864년판~1865년판 가운데 하나가 참고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1859년 액티온호의 탐사로 가공의 섬 아르고노트가 점선으로 그려지면서 확인 요망 (Tako sima or Argonaut P. D.) 문구가 첨기되었고, 1876년판부터 아르고노트가 삭제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해군의 한 관심사항은 소위 아르고노트가 정말 영국 해군의 중국수로지와 영국 해도대로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 이같은 추론이 타당하다고 한다.
  81. 한철호 (2015). 30.
  82. 한철호 (2015). 30.
  83. 호사카 유지 (2010). 117.
  84. 가파도는 1530년에 성립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으며, 1751년 영조 27년에 제주목사 정언유이 검은 소를 키우는 목장을 설치했다. 출처: 위키백과 가파도
  85. 김태호(2002). 가파도 해안의 지형경관. “최북단은 상동 해안으로 33°10′16″N이며, 최남단은 자장코지 해안으로 33°09′34″N 이다. 최동단은 볼락코지 해안으로 126°16′52″E이며, 최서단은 큰악근녀 해안으로 126°15′56″E이다.”
  86. 마라도는 1530년에 성립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으며, 본래는 울창한 원시림이 덮여 있는 무인도였으나, 1883년(고종 20년)에 모슬포에 거주하던 김(金)·나(羅)·한(韓)씨 등 영세 농어민 4~5세대가 당시 제주목사 심현택으로부터 개간 허가를 얻어 화전을 시작하여 삼림이 전부 불에 타서 사라졌다. 출처 위키백과 마라도
  87. 김주한 et al.(2003) GIS 객체 위치표시 방안(국가영역식별자 : National Area Identifier)에 관한 연구. A Study of Indicating GIS Object with NAID. 2003년도 대한토목학회 정기 학술대회, 2003.10, 4387-4390.
  88.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89. 구지명은 2015 조선중앙년감을 참조하시오.
  90.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91. 박선영 (2005),「북중비밀국경조약」, 『중국사연구』34, 조중변계조약의 섬과 사주 귀속 일람표 중 다음을 참조. 391-392
  92.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93. 구지명은 2015 조선중앙년감을 참조하시오.
  94.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95. 그밖에 우릉도, 우르친토, 무루구세무라고도 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광해군 때 왜인이 기죽도(이소다케시마) 혹은 죽도(다케시마)라고도 했다고 기록했다.
  96. 떠난섬이란 표기도 있었다.
  97. 그밖에 부룬세미, 덕섬이란 표기도 있었다. 신경준은 강계고(강계지라고도 한다), 여지편람,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등에서 왜인의 이른바 송도(松島; Matsushima)라고 한다고 밝혔다.
  98. 서울대학교 이기석 명예교수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녹둔도의 이른바 연륙현상이 항구적인 현상이 아니라 계절적인 순환이며, 심지어 녹둔도의 연륙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완료되었다는 러시아 학계의 자료도 있었다 하므로 개별 사례마다 다를 것이다.
  99. 유미림(2011). 근대기 조선지리지에 보이는 일본의 독도 울릉도 인식 - 호칭의 혼란을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2호, 2011.12, 106
  100. 세와키 히사토(瀬脇寿人), 林深造 編(1876.04). 계림사략(鷄林事略). 7쪽. http://dl.ndl.go.jp/info:ndljp/pid/766862/7
  101. 땅끝마을; 전통시대의 지명은 갈두(葛頭)로서 칡머리 혹은 덩쿨머리의 표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오창명 (2014). 18세기 초 제주도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낸 탐라순력도 탐색.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총서 14. p.159.
  102.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03. 박선영 (2005),「북중비밀국경조약」, 『중국사연구』34, 조중변계조약의 섬과 사주 귀속 일람표 중 다음을 참조. 391-392
  104.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05.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06. Claude-Charles Dallet 원저,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중역(重譯: 1876). 조선사정(朝鮮事情 역서의 원제: 고려사략(原題 高麗史略) 원제 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 (1874, 2책)) http://dl.ndl.go.jp/info:ndljp/pid/766899/5
  107.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08.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09. 박선영 (2005),「북중비밀국경조약」, 『중국사연구』34, 조중변계조약의 섬과 사주 귀속 일람표 중 다음을 참조. 391-392
  110.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11. 해군성 수로국 (1886) 환영수로지(寰瀛水路誌). 제2권(第2卷). 제2판(第2版). http://dl.ndl.go.jp/info:ndljp/pid/1084068/17
  112.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13.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14. 박선영 (2005),「북중비밀국경조약」, 『중국사연구』34, 조중변계조약의 섬과 사주 귀속 일람표 중 다음을 참조. 391-392
  115.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16. 북한지역 정보넷 참조. http://www.cybernk.net/introduction/index_pt1.aspx?mc=IC0101
  117. 유미림(2011). 근대기 조선지리지에 보이는 일본의 독도 울릉도 인식 - 호칭의 혼란을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2호, 2011.12, 106-107
  118. 호사카 유지 (2010). 117.
  119. 유미림(2011). 근대기 조선지리지에 보이는 일본의 독도 울릉도 인식 - 호칭의 혼란을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2호, 2011.12, 106-107
  120.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21. 김수희(2015). Ⅲ 장. 해군경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울릉도 선점 계획 in 동해상에서의 무주지 선점 법리를 이용한 섬 ‘발견’과 ‘명칭 변경’. 영토해양연구 제10호, 72-75.
  122. 박병섭(2010). 2장 해군경 에노모토의 울릉도 침입. in 일본인의 제3차 울릉도 침입.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201-211.
  123.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24. 와타나베는 1876년-1877년 간 무토 헤이가쿠와 고타마 사다야스 등의 '송도개척원' 즉 울릉도 개척 청원서가 열띈 논의를 거치던 시기에 외무성 기록국장(공신국장)으로서 이도이명설을 알고 있었고 본래의 송도란 호넷-록스(독도)임을 알고 있었으나, 죽도(울릉도)가 조선령인 반면, 만약 죽도 외에 송도가 있다면 일본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개척원의 '송도'는 고래의 죽도(울릉도)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에 함선을 보내 조사한 후 그에 대한 방책을 정하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16.
  125. 유미림(2011). 근대기 조선지리지에 보이는 일본의 독도 울릉도 인식 - 호칭의 혼란을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2호, 2011.12, 107
  126. 강철성(2006), 「현채의 대한지지 내용분석」,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지』 14(2), 한국지리환경교육학회, 117~118쪽
  127. 윤소영(2013). p. 19
  128. 유미림(2011). 근대기 조선지리지에 보이는 일본의 독도 울릉도 인식 - 호칭의 혼란을 중심으로. 영토해양연구 제2호, 2011.12, 107
  129. 김수희(2015-1)에서는 9월 13일로 기술하였으나, 한철호(2015) 10쪽을 근거로 교정한다.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p. 10, 각주 5.
  130. 김수희(2015). 19세기 일본 산음지방의 울릉도·독도 기록과 ‘송도개척론(松島開拓論)’. 독도연구19, 2015.12, 54.
  131. 박병섭(2010). 2장 해군경 에노모토의 울릉도 침입. in 일본인의 제3차 울릉도 침입.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201-211.
  132. 정영미(2012).『죽도고증』의 「마쓰시마 개척원」과 아마기함의 울릉도 조사 - 메이지 시대 새로운 마쓰시마 = 독도 창출 일(一) 과정. 한일관계사연구 43. 479.
  133.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34. Hydrographic Office (1873). The China Sea Directory, London: Hydrographic Office, Admiralty, Great Britain, Vol. IV. pp. 75-76.
  135. 정영미(2012).『죽도고증』의 「마쓰시마 개척원」과 아마기함의 울릉도 조사 - 메이지 시대 새로운 마쓰시마 = 독도 창출 일(一) 과정. 한일관계사연구 43. 476-477에 요약된 9 건의 울릉도 개척 청원서 표를 참조하시오.
  136. 山本修身(야마모토 오사미) (1883), 「復命書(복명서)」, 明治十七年蔚陵島一件錄 (메이지17년 웃쓰료토 잇켄로쿠) , 山口縣文書館所藏(야마구치현 문서관 소장) (行政文書戰前A 土木 25)
  137. 木京 睦人 (기쿄 무쓰토) (2002), 「明治16年『蔚陵島一件』 (메이지16년 『웃쓰료토 잇켄』) 」, 山口県地方史研究 (88), 山口県地方史学会, 66-85, 2002-10. p.75. http://ci.nii.ac.jp/naid/40005905637
  138. 朴炳涉(박병섭), 「山陰地方民の欝陵島侵入の始まり」. 北東アジア文化硏究 30, 2009, pp.33-49. http://ci.nii.ac.jp/naid/40016990111
  139. 박병섭(2010). 2장 해군경 에노모토의 울릉도 침입. in 일본인의 제3차 울릉도 침입.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201-211.
  140. 박병섭(2010). 한말의 울릉도 어업과 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연구 8. 153-232.
  141.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42. 김수희(2015). 19세기 일본 산음지방의 울릉도·독도 기록과 ‘송도개척론(松島開拓論)’. 독도연구19, pp. 74, 76.
  143. 김수희(2015). Ⅲ 장. 해군경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울릉도 선점 계획 in 동해상에서의 무주지 선점 법리를 이용한 섬 ‘발견’과 ‘명칭 변경’. 영토해양연구 제10호, 72-75.
  144. 김수희(2015). II 장. '송도개척원'과 일본 외무성의 송도비정 논란. in 동해상에서의 무주지 선점 법리를 이용한 섬 ‘발견’과 ‘명칭 변경’. 영토해양연구 제10호, 66-72.
  145. 정영미(2012).『죽도고증』의 「마쓰시마 개척원」과 아마기함의 울릉도 조사 - 메이지 시대 새로운 마쓰시마 = 독도 창출 일(一) 과정. 한일관계사연구 43. 476-477
  146.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7-47.
  147.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48. 송병기 (2010).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ISBN 987-89-90848-49-5 93900. 147.
  149. 송병기 (2010). 151-152.
  150. 송병기는 255 명 외에 후쿠오카 출신의 80 여 명이 별도로 쇄환되어, 1883년 9월에 쇄환된 일본인은 모두 330여 명이라고 추산하였다. 송병기(2010) p. 174
  151. 송병기(2010). 170-175.
  152. 박병섭(2010). 일본인의 제3차 울릉도 침입. 한일관계사연구 제35집. 217.
  153. 박병섭(2010). 한말의 울릉도 어업과 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연구 8. 153-232.
  154. "거의 한결같이"라는 획일적 평가에서 벗어나는, 현재까지 발견된 예외가 두 건 있다. 추후에 보충함.
  155. 정영미(2012).『죽도고증』의 「마쓰시마 개척원」과 아마기함의 울릉도 조사 - 메이지 시대 새로운 마쓰시마 = 독도 창출 일(一) 과정. 한일관계사연구 43. 476-477
  156. 한철호(2015). 일본 수로국 아마기함[天城艦]의 울릉도 최초 측량과 독도인식. 동북아역사논총 50. 7-47.
  157. 호사카 유지 (2010)에서 처음으로 현채의 발문에 남은 현채의 언급을 지적한 성과는 대한지지의 사극지 경위도 왜곡이 제기하는 괴리를 해명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사료의 재발굴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158. 循環論法 https://ja.wikipedia.org/wiki/%E5%BE%AA%E7%92%B0%E8%AB%96%E6%B3%95)
  159. Circular reasoning; https://en.wikipedia.org/wiki/Circular_reasoning
  160. 박병섭(2010). 204-205.에서는 기쿄 무쓰토 (2002) 75를 인용하여, "해군의 군선을 개인의 사업에 이용하는 등 현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논평한 것을 인용하면서 현재 뿐 아니라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던 사실을 적시하였다.
  161. 송휘영(2015). 개항기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울릉도도항금지령」. 독도연구 19, 90-91.
  162. VIENNA CONVENTION ON THE LAW OF TREATIES SIGNED AT VIENNA 23 May 1969, ENTRY INTO FORCE: 27 January 1980: "Article 48, Error, 1. A State may invoke an error in a treaty as invalidating its consent to be bound by the treaty if the error relates to a fact or situation which was assumed by that State to exist at the time when the treaty was concluded and formed an essential basis of its consent to be bound by the treaty.; 2. Paragraph 1 shall not apply if the State in question contributed by its own conduct to the error or if the circumstances were such as to put that State on notice of a possible error.; 3. An error relating only to the wording of the text of a treaty does not affect its validity; article 79 then applies."
  163. 호사카 유지 (2010). 11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대한지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동해가 '일본해'로 잘못 표기되어 있고"라 지적한 후 이를 번역서의 번역체로 인한 영향으로 보았다.
  164. 독도는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독도 분쟁 문서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