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학교 급식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급식을 시행하고 있다. 학교 급식은 조선 시대의 성균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근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시행되기도 하였으나 일시적이었고, 대부분은 기부금으로 시행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전쟁 직후의 결식 방지에서 어린이의 체력 향상으로, 최근에는 가정에서의 부담 경감 등으로 그 목적이 바뀌어 시행되고 있다.
목적[편집]
대한민국 학교에서의 급식은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시행되었다.[1][2]
- 식습관 개선
- 국민 영양 관리의 기초 마련
- 체력 및 정신 건강 향상
- 취약 계층 아동 구제
- 사회 통합
- 평등 실현
- 필수 영양 섭취
이 외에도 농산물 수급 조절, 학부모의 부담 경감 등의 이유가 제시되기도 한다.
역사[편집]
조선 시대[편집]
조선 초 사부학당의 학생들에 매일 밥을 주고 공부를 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3]
議政府據禮曹呈啓,“四部學堂生徒, 常給一時之食, 使之終日講讀”
의정부에서 예조의 공문을 근거로 말하기를, “사부학당의 학생들에 한 끼니 식사를 항상 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론하며 책을 읽게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편집]
1932년에는 각지에 아이들의 점심을 주는 소학교가 있으며, 집에서 도시락을 싸 주면 밥이 차가워지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밥을 못 싸오기도 하므로 구미각국에서는 학교에서 무료로 점심을 먹여주기 시작했다고 보도되었다.[4]
1933년 경성부 회의에서는 결식 아동에 대한 급식이 필요하면 부에서 부비를 사용하더라도 계속 실시하도록 결정하였고,[5] 경성부에서는 기부를 받아 부내 18개 공립보통학교에서 수백 명의 결식 아동에 대해 점심을 주었으나, 기부금이 떨어지자 1년 만에 중단하였다.[6]
1939년에 가뭄 피해를 입자 조선 총독부에서 해당 지역의 소학생들에 춘궁기에 해당하는 4개월간 급식을 주었다.[7]
1940년 경성부에서는 허약 아동을 방지하기 위해 매월 희망하는 학부모로부터 식대를 받아 급식을 주는 급식제도를 발표하였다.[8]
대한민국[편집]
- 1940년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시에서는 72개 공립·사립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에 식대를 받고 점심을 주는 급식을 실시하였다.[9]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에는 유엔 산하 국제아동구호재단의 지원으로 보건국에서 국민학교를 통하여 분유와 콩, 우유 등을 급식할 것을 계획하였다.[10]
- 1950년대
한국 전쟁 중인 1952년 11월 문교부에서는 전국의 결식 아동 수를 61만 7천여 명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들 결식 아동 1인당 1일 1홉(=약 180ml)씩 100일 간을 급식하도록 국무회의에 제출하였다고 취재에 답변하였다.[11] 1953년 문교부에서 10월에 발표한 새로운 교육 6개년 계획에 빈곤하여 취학이 곤란한 학령 아동에 대해서는 교과서를 무상 지급하고 식량 결핍 기간에 급식을 실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12]
1950년대의 급식은 주로 외국으로부터의 구호 식량에 의존하였다. 유엔 아동 기금의 발표에 의하면, 미국 정부로부터 4천만 파운드(약 1,800톤)의 탈지분유가 지원되어 아동들에게 매일 150만 컵의 분유가 급식으로 제공되었다.[13] 종교 단체에서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고 결식 아동을 대상으로 급식을 제공하기도 했다.[14]
- 1960년대
1961년에는 결식 아동을 위한 쌀모으기 운동을 벌였고,[15] 1962년에는 농림부 주관으로 아동의 체력 향상을 위해 우유를 무상으로 제공, 서울 시내 일부 국민학교의 1학년 학생들에 급식하기도 했다.[16]
1963년에는 국제 원조 구호 기구와 보사부가 1년간 193만 명의 국민학교 아동의 급식으로 5,800여만 파운드의 곡물을 지원하는 급식공동구호사업에 대한 협정을 맺었고,[17] 1964년 초부터 원조된 곡물로 만든 식빵을 각 국민학교에 배급했다.[18] 1966년부터는 아동의 체력 향상을 위해 140만 명이었던 배급 대상을 전체 국민학교 학생의 반수 이상인 280만 명으로 확대하였다. 이는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지원받은 것으로, 지역에 따라 빵이나 수제비·국수가 격일제로 배급되었다.[19][20]
1967년, 아동의 급식용으로 원조받은 양곡이 시장에 유출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곡물 지원을 담당하는 유솜(United States Operating Mission, USOM)은 아동 급식을 중지시키고 재고량 조사에 들어갔고,[21][22] 대한민국 정부의 약정된 재정 부담이 지켜지지 않아 원활한 양곡 지원이 어려워졌다.[23][24] 결국 1968년 2학기부터 급식용 빵은 유료로 전환되었다.[25] 이후로 수급이 불안하여 무료 급식과 중단이 되풀이되었고, 급식비를 징수하기도 했다.[26]
- 1970년대
문교부는 물자 감축으로 대도시 국민학교에 무료 급식을 중단하고 유료로 실시할 것을 결정,[27] 1970년 9월 말부터 '26원에 140g의 빵과 180ml의 우유'가 제공되는 유료 급식이 시작되었으나, 급식을 신청하지 못하는 학생에 열등감을 조성하며 도시락에 비해 영양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28][1] 농어촌 학교의 급식도 1972년부터는 자립급식으로 바꾸기로 하였다.[29] 같은 해 농림부는 학교에서 우유를 시중의 절반 값에 판매할 방침임을 밝혔다.[30]
1977년 문교부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학교 급식은 전체의 23%인 약 130만 명에 실시되었고, 그중 약 50만 명이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받았다. 무상 급식은 도서벽지의 학생이나 타 지역의 극빈 학생을 대상으로 하였다.[31]
1977년 9월, 학교 급식을 먹은 서울 시내 국민학교 아동 7,862명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키는 사고가 일어났다.[32] 이틀 전에 만들어 공급한 슈크림빵이 원인이었는데, 해당 식품에서는 포도상구균이 검출되었다.[33] 이 사고로 학생 1명이 사망하였고,[34] 그 여파로 급식은 전면 중단되고 유상급식은 폐지되었다.[35][36]
1978년 초 문교부는 도서벽지 무상급식 대상자를 43만 명에서 12만 명으로 줄이는 대신 1인당 1끼 급식비를 90원에서 140원으로 올린다고 발표하였다.[37] 1980년부터는 이를 28만 명에 1인당 200원 정도로 인상한다고 보도되었다.[38]
- 1980년대
1980년에는 우유 재고가 늘어 9월부터 시중보다 35% 싼 가격에 전국의 국민학교에 공급하기도 하였으나,[39] 이듬해 아이스크림 판매 등으로 우유 소비가 늘어나고 학교에 냉장 시설을 갖출 것을 요청받자 업체들이 우유 공급을 중단하였다.[40] 1984년부터는 과잉 생산된 우유가 국민학교 급식으로 싼 값에 공급되었고, 1987년에는 전체 국민학생의 64%가 급식으로 우유를 먹었다.[41] 우유의 급식은 1987년 9월부터 중·고등학교에까지 확대, 시중보다 싼 가격에 판매되었다.[42]
1981년에는 문교부가 제출한 〈학교급식법안〉이 국가보위체제의 입법회의에서 통과되었으나, 정의만 내렸을 뿐 아무런 내용이 없다고 비판받기도 했다.[43] 문교부는 8월, 정부의 도서벽지와 농어촌의 국민학교의 급식 지원, 급식 시설, 직원, 교원 연수 등을 포함하는 〈학교급식법 시행령〉을 의결하였다.[44]
1988년에는 전국의 국민학교에서 8,155명이 점심을 굶는 것으로 파악되어 긴급 예산을 배정하여 급식을 실시하였다.[45]1998년에는 8,500여 명이 밥을 굶고 있으며, 지방별로는 서울이 가장 많다고 파악되었다.[46] 1990년 문교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국민학교 교육의 역점 사업으로서 도서벽지와 농어촌을 중심으로 시행되는 급식을 대도시로 확대할 것임을 밝혔다.[2] 1991년 2학기부터는 특수학교의 급식이 무상으로 제공되었다.[47]
- 1990년대
1991년 교육부는 5개년 계획을 세워 1997년에는 국민학교 학생 모두에 급식을 제공하는 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도서 지역은 무상으로, 농촌은 전체 급식비의 2/3, 도시는 식품 원료비를 학부모가 부담하도록 되어 있었다.[48] 이로부터 제주도는 1995년 봄부터 모든 국민학교 학생들에 학교 급식을 실시하게 되었고,[49] 1997년에는 전국의 5,700여개 초등학교에서 전면 학교 급식이 실시되었다.[50]
1998년 교육부는 1999년 상반기부터 전국의 고등학교에 급식을 제공할 것을 발표하였다.[51] 2001년 교육부는 2002년 말까지 중학교에서도 전면 급식을 실시한다고 밝혔다.[52]
- 2000년대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조사에서 급식비를 지원받는 학생은 전체의 2.08%에 해당되는 16만 4천 명으로 파악되었다.[53] 2005년부터 저소득층 학생의 급식 지원은 지방자치단체로 이양되었다.[54]
2006년에는 전국 37개교 3천여 명이 식중독을 일으켜 장기간 급식이 중단되기도 하였다.[55]
급식이 확대되면서 식품 오염 문제, 급식 업체와 교직원의 비리, 원산지 허위 표기와 국내외 농산물의 경쟁, 학부모의 급식 당번 동원, 학생 비만 등이 문제점으로 표출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8년의 광우병 파동으로, 오염된 식품에 대한 급식을 두려워하여 등교를 거부하는 경우가 보도되기도 했다.
- 2010년대
2010년대에는 무상 급식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각주[편집]
- ↑ 가 나 改善돼야할 學校給食, 《동아일보》, 1970.10.20
- ↑ 가 나 國校生 학교給食 확대, 《동아일보》, 1990.4.20
- ↑ 《세종실록》 117권, 29년(1447년) 9월 8일 1번째 기사 참고
- ↑ 少國民保護訓練 世界各國의 본보기 (五), 《동아일보》, 1932.1.8
- ↑ 『普校授業料减下 入學難緩和策等, 《동아일보》, 1933.1.26
- ↑ 闕食兒童給食制度 實施一年만에廢止, 《동아일보》, 1934.1.13
- ↑ 旱害地學童에 給食을實施, 《동아일보》, 1939.9.8
- ↑ 虛弱兒防止코저 給食制度를新設, 《동아일보》, 1940.5.17
- ↑ 點心한끼에三圓也, 《동아일보》, 1946.6.16
- ↑ 어린이保健에朗報 四億餘의援助金으로, 《동아일보》, 1949.5.4
- ↑ 缺食學童61萬 一人當一合式百日分을確保, 《동아일보》, 1952.11.23
- ↑ 義務敎育 六個年計劃樹立, 《동아일보》, 1953.10.10
- ↑ 美國밀크補給 好調, 《경향신문》, 1956.9.23
- ↑ 缺食兒童·細民에救護의손, 《경향신문》, 1957.3.1
- ↑ 七百 缺食學童에分配「한줌의 쌀運動」마감, 《경향신문》, 1961.2.12
- ↑ 『牛乳』無償配給市內一部國民校, 《동아일보》, 1962.1.30
- ↑ 保社部와「케어」給食協定, 《동아일보》, 1963.6.21
- ↑ 國民校缺食兒童에 點心『빵』配給키로, 《동아일보》, 1964.2.29
- ↑ 学校給食 拡大결정, 《경향신문》, 1965.2.6
- ↑ 給食大幅늘려, 《경향신문》, 1966.4.4
- ↑ 給食用 援助糧糓의 橫流를 根絕케 하라, 《경향신문》, 1967.10.31
- ↑ 兒童給食 중지, 《경향신문》, 1967.11.10
- ↑ 缺食兒급식中斷위기, 《동아일보》, 1968.4.9
- ↑ 美給食用 援助줄어 管理소홀·流用등으로, 《경향신문》, 1968.5.20
- ↑ 국민교 給食빵 有料로, 《경향신문》, 1968.7.31
- ↑ 援助穀줄어 7大市 國民校 給食費를 징수, 《동아일보》, 1970.1.16
- ↑ 大都市國校生給食 自費負擔으로轉換, 《동아일보》, 1970.3.17
- ↑ 有料給食 우울해진 점심시간, 《경향신문》, 1970.10.8
- ↑ 兒童給食制 一部實費로 來年부터, 《매일경제》, 1971.5.7
- ↑ 牛乳의시즌-割引판매, 《매일경제》, 1972.3.6
- ↑ 國校生23%에 學校給食실시, 《동아일보》, 1977.9.17
- ↑ 衝擊的인集團食中毒事件, 《동아일보》, 1977.9.19
- ↑ 서울地檢 "슈크림빵에 葡萄狀球菌 國校급식빵 집단食中毒, 《경향신문》, 1977.9.19
- ↑ 給食빵中毒어린이 끝내1名숨져, 《매일경제》, 1977.9.20
- ↑ 給食전면 中斷으로 無料학생 점심굶어, 《경향신문》, 1977.9.21
- ↑ 文敎部 국민교 有償給食 폐지, 《경향신문》, 1977.9.22
- ↑ 대상學生 크게줄여 국민교 無償給食費인상, 《경향신문》, 1978.1.27
- ↑ 學校給食확대 내년 28萬명에 실시, 《동아일보》, 1979.7.23
- ↑ 오늘부터 이렇게 달라진다, 《경향신문》, 1980.9.1
- ↑ 장삿속에 주었다뺏었다 給食우유, 《경향신문》, 1981.6.12
- ↑ "우유 한집 1봉지씩 더먹자", 《동아일보》, 1987.8.19
- ↑ 학교 牛乳급식 中·高까지확대, 《경향신문》, 1987.9.1
- ↑ 「超능률」立法會議 156일, 《동아일보》, 1981.3.30
- ↑ 도서벽지學校 給食 國家·市道에서부담, 《동아일보》, 1981.8.22
- ↑ 점심 굶는 학생 의외로 많다, 《동아일보》, 1988.11.2
- ↑ 도시락 못싸오는 國校生 全國에 8千5百명, 《동아일보》, 1989.11.20
- ↑ 특수학교 무상급식 교육부,2학기부터, 《한겨레》, 1991.3.12
- ↑ 國校 도시락 사라진다, 《경향신문》, 1991.3.15
- ↑ 濟州도내 모든 國校 3월부터 학교 급식, 《동아일보》, 1995.2.3
- ↑ 전국 초등校 전면 급식, 《경향신문》, 1997.1.18
- ↑ 고교 내년상반기 전면 급식, 《경향신문》, 1998.5.28
- ↑ 중학교 내년까지 ‘급식률 100%’, 《서울신문》, 2001.1.4
- ↑ 점심지원 학생 선정방식 고심, 《서울신문》, 2001.4.12
- ↑ 〈사설〉 또 점심 굶는 학생을 지켜봐야 하나, 《경향신문》, 2005.4.14
- ↑ 식중독 환자 3000여명 서울 4개교 추가발생 뒤늦게 밝혀져, 《국민일보》, 200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