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렬 (독립운동가)
김동렬 金棟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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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6년 3월 15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산청 신등면 평지리 714번지 |
사망 | 2008년 5월 3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 | (82세)
국적 | 대한민국 |
거주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 |
본관 | 밀양(密陽) |
학력 | 1939년 산청소학교 졸업 1941년 동래고등보통학교 3년 중퇴 |
직업 | 독립운동가 |
경력 | 통일민주당 당무위원(1988년) |
형제 | 누나 5명 형 1명 누이동생 1명 남동생 1명 |
배우자 | 서소주 |
자녀 | 1남 3녀 |
정당 | 무소속 |
상훈 | 대통령 표창장(2005년 8월 15일) |
웹사이트 | 대한제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대한제국 독립유공자 金棟列 |
김동렬(金棟列, 1926년 3월 15일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1]
~ 2008년 5월 3일 )은생애[편집]
경상남도 산청 지역의 부농가 대농 집안에서 슬하 3남 6녀(9남매) 중 차남(일곱째)으로 출생한 그는 17세 시절(만16세)이던 1942년 5월 12일, 당시 결혼 18년차였던 첫째 누나(맏누나 부부)의 시척 중 경성부 사는 첫째 누나 시삼촌 댁에서 하숙하던 중 일경에 쫓기는 독립운동가 일행들을 지원하다가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성 동대문 돈암정(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돈암동(敦岩洞))의 첫째 누나 시삼촌 경성 분갓댁에서 하숙을 하던 그는 1942년 당시 대한제국 독립의 실현을 목적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후 탈옥한 정태옥(鄭泰玉)이 일경에 쫓기는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여비 및 의복 등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향후 독립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그 당시 정태옥은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의 집행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그 정태옥이야말로 1930년대 이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 경기도 인천 조직준비위원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낸 책임자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출신이었다. 결국 정태옥은 1937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탈출하는 과정에서 당시 17세 김동렬 그가 피신을 도왔던 것인데, 일경에 발각되어 두 사람 모두 체포되었다. 김동렬은 1942년 12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 및 집행유예 3년 선고를 받기까지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12월 11일, 전격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20세 시절(만19세)이던 1945년 8월 15일, 그 당시 결혼 20년차였던 둘째 누나(작은누나 부부)의 시척 중 경상남도 진주 사는 둘째 누나 시아주버님 댁에서 8·15(광복)를 목도하였으며 또 그로부터 약40여년이 지난 훗날 1988년부터 1989년 탈당(전격 사퇴 선언)할때까지 한 해 동안 통일민주당 당무위원 등을 잠시 지냈다.
서훈[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2005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사후[편집]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국립 대전 현충원(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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