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탕롱 벽돌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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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탕롱 벽돌 가마
中都唐榮磚窯廠
구 탕롱 벽돌 가마의 전경
장소대만 가오슝시 싼민구 아이허 중화횡로 220번지
완공일1899년

구 탕롱 벽돌 가마(中都唐榮磚窯廠), 이전 명칭 대만연와회사 다거우 공장(台灣煉瓦會社打狗工場)는 대만 가오슝시 싼민구 아이허에 있던 건물로 2003년 4월 16일에 가오슝시 기념물로,[1] 2005년 3월 11일에 대만의 국정고적으로[2] 지정된 건물이다. 또한 본사 건물 동북쪽에 있던 탕롱가마는 2004년 2월 25일 중화민국 역사건축으로 지정되었다.[3]

역사[편집]

대만일치시기[편집]

일본 제국대만을 통치하던 1899년, 일본의 사메시마 모리는 15,000엔의 자본금으로 산데슈에 "사메시마 기와공장"을 건설했다.[1] 이 공장은 가오슝에 지어진 최초의 벽돌가마공장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무짜이 가마'를 3기 가지고 있었다.[1] 기와공장은 아이강에서 나오는 점토로 벽돌을 생산했으며 벽돌을 굽는데 필요한 목재는 서우산에서 얻어왔다.[1] 벽돌공장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펑후 제도와 현재의 타이난시 베이먼구 지역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와 공장 주변 지역이 번성했다.[1]

1913년경에 우시로쿠 신타로는 타이베이에 대만연화 주식회사를 세우고 대만 전역의 벽돌 가마 공장을 통합하기 시작해 사메시마 공장도 대만연화 소속 다거우 공장으로 편입되었다.[1] 7년 후인 1920년에는 다거우라는 도시 이름이 '가오슝'으로 바뀌면서 공장 이름도 가오슝 공장으로 바뀌었다.[1] 이후 수요가 크게 늘어나 호프먼식 가마라고 불리는 근대식 벽돌 가마 공장이 세워지고 1호 가마를 시작으로 총 6개 가마가 건설되었다.[1] 1935년 무렵에는 가오슝에서 가장 큰 벽돌공장이 되었으며 대만 남부에서 건설되는 주요 건물의 벽돌은 전부 이 공장에서 공급되었다.[1]

전후 시기[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벽돌 공장 부지는 대만성 정부건설국(구 산업광업국)이 인수하여 섬유, 유리, 벽돌 산업 등 총 12개 단위 산업으로 분리되었고 1947년에는 분할되었던 산업단위가 종압적인 공광업공사로 통합되면서 공장 이름도 "공광공사 가오슝 가마"(工礦公司高雄磚廠)로 이름이 바뀌었다.[1] 1957년 탕엥철공창이 벽돌 가마 공장을 매입하여 '탕엥철 가오슝 벽돌 가마 공장'을 설립했으나 3년 후 탕엥철공창에 자금 위기가 발생했고 중화민국 경제부는 위기 여파에 대처하기 위해 1962년 탕엥철공창을 국유화했다.[1] 1965년부터는 탕엥철공창이 빠르게 발전하는 가오슝 지역의 철강산업을 위해 일치 시기에 남겨진 구 가마를 통해 내화재를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했다.[1] 하지만 원가 상승과 치열한 경쟁으로 탕엥철공창은 제1, 제2, 제6가마를 해체했고 외국 기술자를 초청해 3개의 저류식 가마(Down-draft kiln)를 건설했다.[1] 신 가마 건설 이후 생산된 내화재는 탕엥철공창 자체 외에도 대만설탕공사와 같은 타 기업에 판매되어 많은 수입을 올렸다.[1] 이후 공장은 1969년 "탕룽 내화재 공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4년 후에는 탕엥철공창의 효율화 작업으로 스테인리스 공장과 합병되었지만 여전히 내화재를 생산했다.[1]

하지만 벽돌 수요 감소, 환경 문제 인식 증가, 임금 상승 등의 요인으로 벽돌 가마 공장은 1985년 생산을 중단했고, 사무실은 영업을 계속했으나 2002년 8월 모두 철수했다.[1] 2007년에는 탕룽 벽돌 가마 공장이 영화 《천장인》의 촬영지로 쓰이기도 했다.[4]

건물 구성[편집]

탕룽 벽돌 가마 공장은 여러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시대별로 달랐다. 일치 시기에는 공장 부지에 총 6개의 호프먼식 가마가 있었다. 또한 싼콰이춰역에서 연장되어 당시 탕엥철공창 가마로 이어지는 산업철도 노선과 싼콰이춰역에서 가오슝 중부대교까지 연장되어 이어진 산업용 특수철도 노선인 벽돌회사선(煉瓦會社線)이 있었다.[5]:91 또한 그 아래쪽으로도 벽돌을 만드는 원료를 운반하는 소달구지용 소노선이 있었다.[5]:20 벽돌 가마 북쪽에는 벽돌 틀을 생산하는 벽돌제조기계실이, 공장 동쪽에는 사무실과 소장 기숙사가 있었고 선로 남쪽에는 직원 기숙사가 있었다.[5]:25

일치시기가 끝나고 중화민국 시기로 넘어온 직후에는 전쟁 피해로 인해 벽돌 가마 중 2호, 3호, 6호만 생산이 가능했다가 나머지 가마는 전후 차레로 복구되었다.[5]:27 이후 1호, 2호, 6호 가마가 해체되어 저류식 가마로 변경되었으며 터널형 가마도 추가되었다. 현재는 3호 호프먼식 가마, 저류식 가마, 터널형 가마가 남아 있으며, 일치 시기 지어진 사무실도 남아 있다.[1]

일치 시기 건설된 붉은 벽돌제 사무실 건물은 2층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모양은 정육면체에 입구에 바로 현관이 있고 그 위에 바로 발코니가 있다. 전면에 4개, 동쪽과 서쪽에 각각 6개의 창문이 나 있었고 뒤쪽인 북쪽에는 창문이 없다.[5]:47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1. 《《史蹟高雄》》. 高雄市政府教育局. 2004년 12월. 43-46、101-104頁쪽. ISBN 957-01-9853-2. 
  2. 台灣煉瓦會社打狗工場〈中都唐榮磚窯廠〉 Archived 2019년 5월 2일 - 웨이백 머신.文化部文化資產局
  3. 台灣煉瓦會社打狗工場﹝中都唐榮磚窯廠﹞--東北角倒焰窯 Archived 2019년 5월 1일 - 웨이백 머신.文化部文化資產局
  4. “《穿牆人》導演鴻鴻專訪” (중국어). 2019년 1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11월 30일에 확인함. 
  5. 《《磚仔窯的故事》》. 高雄市政府文化局. 2003년 12월 31일. ISBN 957-01-6519-7.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