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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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문
高泰文
출생일 1929년 1월 3일
출생지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사망일 1952년 11월 11일
국적 대한민국
성별 남자
복무 대한민국 육군
최종계급 대한민국 육군 대위
주요 참전 6·25전쟁
서훈 이달의 호국영웅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고태문(高泰文, 1929년 1월 3일 ~ 1952년 11월 11일)는 대한민국군인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1224에서 출생하였다. 군번은 204432이다. 한국전쟁시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전투 중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요약[편집]

고태문 대위는 1929년 1월 제주도 북제주군에서 태어났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에 입대했다. 1951년 8월 24일 제 11사단 제 9연대 7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할 당시에는 펀치볼 동부의 884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전투상황, 과정[편집]

1952년 11월 제 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351고지를 점령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개 중대 규모의 적에 공격을 받게 되었는데, 제 1차 공격은 다행히 방어하였지만 재차 공격해 온 적의 방어에는 실패하여 곤경에 처하고 만다.

그러나 고태문 대위가 이끄는 중대는 죽고 사는 것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피의 살육전을 벌였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마침내 적을 격퇴시키고 말았다.

이처럼 고태문 대위의 과감한 육탄공격을 계기로 884고지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해 전선에서 적의 위협을 제거함은 물론, 군단이 목표로 한 펀치볼 동쪽에서 적군의 포위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적과 아군이 뒤섞여 있는 상태에서 중대의 철수를 지휘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고태문 대위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부하들의 철수 작전을 지휘하며 지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태문 대위는 '진지를 고수하라'는 마지막 명령만을 남긴 채 끝내 산화하고 말았다.

이후 연대는 작전대로 고지에 포화를 퍼부은 뒤 역습을 감행했고, 351고지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고태문 대위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희생하며 책임을 다했고, 그러한 그의 희생정신이 있었기에 값진 승리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52년 11월 육군 중위에서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을 추서하였다.

명언[편집]

"내가 맨 마지막에 떠나겠다."[2]

이달의 호국영웅[편집]

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1995년 4월에 100인의 호국인물 중에 한 분으로 고태문 대위를 선정하였고, 1999년 11월에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발표하고 현양행사를 거행하였다. 용사는 제주시 충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고태문 대위 흉상[편집]

한동초등학교에 건립된 고태문 대위의 흉상

100인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태문 대위는 2008년 건군 60주년을 맞아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명장 18명 중 한 명으로 추대됐다. 제주출신 가운데 고태문 대위가 유일하게 명장으로 뽑혔다. 전쟁기념관은 그가 숨진 11월마다 '이달의 호국인물'로 두 차례나 선정했다.[3] 그러나 그의 공훈은 고향에선 잊혀져가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동리 주민들은 2001년 6월 한동리 1168번지 한동초등학교 교정에 고태문 대위의 위훈을 기려 흉상을 건립하였다.

고태문로[편집]

호국영웅 故 고태문 대위(1929년 1월 3일 ~ 1952년 11월 11일))가 살았던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엔 해안도로를 따라 ‘고태문로[4]’가 조성돼 있다. 명예도로 "고태문로"는 고태문 대위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고 대위의 출신지역인 구좌읍 한동리 해안도로 2.4km 구간을 명예도로로 지정하고 표지석을 설치한 것이다.[5]

고태문로에 있는 표지석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